< 185. 끝은 화려하게 (4) >
펩은 전술가다.
그건 그 누구도 이견을 내놓지 않는 대명제다.
물론 그에 대한 비판도 분명 존재한다. 바르셀로나, 바이에른 뮌헨, 맨시티 등 이미 완성된 선수단이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펩은 완성된 선수단만이 소화할 수 있는 전술을 구축하고 만들어 냈다.
그러나 과거의 맨시티가 가진 위상과 지금의 위상은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언제는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노릴 수 있는 팀이며, 프리미어리그의 절대적 양강 체제를 구축한 팀이기도 했다.
그것엔 펩의 공헌도 있으니 맨시티의 라이벌 팬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펩도 한 가지 문제에서는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제퍼슨을 막는 수비 전술?"
얼마 전, 챔피언스리그 4강을 앞두고 시메오네에게 전화가 왔다.
시메오네의 질문에 펩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그딴 건 없어!"
완벽한 수비 전술은 없다.
적어도 펩은, 제퍼슨 상대로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갖다 놔도 실패했다!"
혼자 힘으로 선수 두세 명을 붕괴시킨다. 잘 짜인 조직력을 오로지 압도적인 힘과 고난이도의 테크닉으로 무력화한다.
전술과 체력, 전략을 총동원해 어느 정도 잘 먹힌다고 느껴질 때.
그는 귀신같은 센스로 활로를 찾는다.
맨시티 팬들은 소리쳤다.
"이기기 위해선 라인을 내려!"
하나 그것은 너무나도 아쉬운 일이다.
맨시티의 장점은 폭발적인 공격력.
세르히오 아구에로, 가브리엘 제수스, 라힘 스털링, 베르나르도 실바, 케빈 데 브라이너 등등.
그 모든 선수의 공격력을 죽이기는 너무 아쉽지 않나.
하물며 맨시티가 상대팀에게 기가 죽어 엉덩이를 뒤로 쭉 빼는 건,
팀의 프라이드와 관련된 문제가 아닌가.
'하지만 제퍼슨을 막기가 너무 어려워 첼시를 이기기 힘들다면, 역설적으로 제퍼슨을 막으면 첼시를 이길 수 있다는 얘기다.'
펩은 그렇게 생각하고 리그 한 경기를 통째로 전술적 실험의 용도로 사용했다.
리그 우승?
5점 차이니까 가능하다고?
"흥! 매몰 비용에 휩쓸리는 멍청한 짓."
어차피 리그 3위는 확정이었다.
펩은 그 순간부터 FA컵 결승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관의 치욕.
저번 시즌 그 치욕에 펩 뿐만 아니라 선수단, 보드진, 팬들까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나.
FA컵이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완성된 전술을 가지고 왔다고 생각했다.
"제로톱이다."
아구에로를 빼고, 가브리엘 제수스, 라힘 스털링, 케빈 데 브라이너, 베르나르도 실바로 이뤄지는 제로톱.
수비와 전방에서부터 강한 압박.
상대의 후방 빌드업을 끊어버린다.
'공의 소유권을 최대한 보유. 골을 넣는 건 30초면 충분하다. 그 30초를 계속 찾기 위해 설령 무의미하고도 쓸데없는 패스를 해서라도 점유율을 압도적으로 유지한다.'
그리고 제퍼슨에게 향하는 공을 철저하게 차단.
아니, 첼시가 공을 잡지도 못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결국엔 그들의 체력마저 떨어뜨린다.
앞서 말했듯이 맨시티는 오로지 FA컵 결승만을 바라보고 왔다.
하여 남은 리그 경기 일정은 대부분 백업과 로테이션을 가동하는 과감한 수를 보였다.
지금 주전 선수들의 체력과 컨디션은 완벽함 그 자체!
'이 선수들은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요구하는 대로 뛸 수가 있다!'
프리미어리그 탑 레벨 플레이어.
그들의 체력과 컨디션이 완벽하다면?
거기에 펩의 전술이 더해진다면?
하물며 첼시는 지쳐있다.
37라운드까지 풀 주전 스쿼드였고, 38라운드에선 로테이션을 돌렸다고 한들, 한 시즌 누적된 피로와 체력은 어찌할 것인가.
또한, 5일 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있다.
저들은 무조건 체력을 소모하게 강요하는 맨시티의 축구 앞에서 이도 저도 못 하는 딜레마에 빠지리라.
······가 원래의 예상이었다.
그러니까, 제퍼슨이 박투박 미드필더로 출전해 중앙에서 날뛰는 장면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로드리가 패스를 안정적으로 돌립니다!]
차분하고 침착하게.
로드리는 자신에게 오는 공을 주고, 받고, 다시 내주면서 안정적인 플레이란 이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뛰었다.
페르난지뉴의 완벽한 대체자로 시작해, 이제는 맨시티의 가장 중요한 선수가 된 로드리는 압박을 피하고, 때로는 벗어나며 패스를 돌렸다.
"로드리!"
이번에도 마찬가지.
전진을 시도하던 베르나르도 실바는 압박이 쏟아지자, 전진을 포기했다. 그리고 아무런 미련 없이 뒤로 공을 돌렸다.
그때였다.
"---!"
알 수 없는 괴성과.
왼쪽 옆에서 엄습하는 저돌적인 기세.
로드리는 왼쪽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패스를 뒤로 뺐다. 본래대로라면 짧게, 침착하게 내줬겠지만 어쩔 수 없이 일단 공을 빼 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건 극도로 본능적이다.
옆에서 덤프트럭이 돌진해 오면 상황판단이고 뭐고 간에 피하고 보지 않겠는가?
로드리가 그러했다.
그리고 그건, 아주 좋은 판단이었다.
뻐억!
"끄으읍!"
[제퍼슨의 차징 파울입니다! 오, 심판은 구두 경고로 넘어가는군요. 다행입니다!]
"쯧. 엄살은······."
혀를 차며 들려오는 말에 로드리는 순간 울컥했다.
세상에!
누가 이 고통을 엄살이라고 조롱한단 말인가.
그는 눈을 치켜뜨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제퍼슨을 향해 울분에 토했다.
"엄살 아니야! 이 개자식아!"
물론, 제퍼슨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밖에 엠뷸런스 준비되어 있더라. 너무 걱정하지 마. 의사들이 죽지는 않게 할 거야."
"이······ 이 미친!"
"울지도 마."
울고 싶어졌다.
***
어느 정도 예상한 플레이긴 했다.
감독도, 코치들도 마찬가지다.
리그 35라운드에서 맨시티가 보여 줬던, 조금은 좀스러웠던 축구는 확실히 강점을 보여 줬다.
적어도 내게 공이 오는 걸 막았으니까.
하여 우리의 선택은 날 미드필더로 쓰는 거였다.
"제퍼슨에게 공이 안 간다고? 제퍼슨이 가면 되잖아?"
조금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감독의 생각이었지만,
코칭스태프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 생각해 보니,
맞는 말 같더라.
그런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됐지만,
내로라하는 코치진들이 달라붙으니 제법 그럴듯한 전술로 가다듬어졌다.
4-1-2-1-2의 다이아몬드 포메이션.
포백 앞에 캉테가 있고, 그 앞에 나와 조르지뉴. 2선에 카이 하베르츠. 최전방에 지루와 타미의 투톱이다.
이례적으로 날개가 없는 포메이션.
중앙에 힘을 주면서, 상대가 점유율을 끌어올리는 걸 방해하고 오히려 주도권을 쥐겠단 의도.
현재까지의 상황으로 보면,
꽤 좋은 성과를 내고 있었다.
"패스 돌······ 끄흡!"
"이런!"
맨시티는 제로톱을 갖고 왔다.
즉 그들도 중앙에서부터 최전방까지 전방압박이 강력하다는 걸 의미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나 포함 네 명의 미드필더가 중원에서 싸워 주고 있었다.
이렇다 보니.
특히 내가,
퍽!
"큽!"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공을 스틸하고, 뺏고 부딪치면서.
저들의 의도는 한 꺼풀씩 벗겨졌다.
점유율은 아마 55대 45 정도 되지 않을까.
조금 아쉬운 건, 맨시티의 패스 실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것.
아마 이 전술만 몇 주 동안 연습했는지, 흔들리긴 했으나 무너지진 않았다.
내가 박투박으로 미친 듯이 뛰면서 활력을 불어넣고 있으나,
수비적인 면에서 내가 점수가 높다고 자평할 순 없다.
그래도.
"또 온다!"
"아오!"
내가 중앙에서 뛰면서 맨시티의 계획은 분명 흔들리고 있었다.
비록 내가 캉테처럼 깔끔한 태클로 공을 가로채지는 못한다.
하나 이것은 가능하다.
"끕!"
순간적인 스피드, 압박, 바디체크.
패스가 흘러가면, 스피드를 터뜨려 아슬아슬하게 공을 차단하거나 스틸하거나.
설령 실패해도 상관없다.
저들은 패스를 뺏길 수도 있단 생각에, 끊길 수도 있단 조급함에 빠진다.
하면 느릿하게 공을 소유하려고만 하는 패스를 내주고, 보낼 수는 없다.
자연히 패스는 빨라지고, 강도가 세질 것이며 그런 패스가 이어지면 아무리 톱 레벨 선수여도 패스 미스가 분명히 나온다.
"제기랄!"
"빠르게, 빨리!"
패스가 빨라진다는 건, 곧 템포가 빨라진다는 것.
시간을 최대한 보내면서 우리의 체력을 소모하고 안정적으로 경기를 운영하려는 맨시티의 의도를 깨부수는 것이다.
하지만, 맨시티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라도 하는 것처럼 꾸역꾸역 패스를 이어갔다.
그 불안한 줄타기에서 떨어지는 순간,
그 순간을 노려야 한다.
그리고 기회는 왔다.
"What the Fuck!"
틈.
패스가 빨라진 상황. 스털링이 후방까지 내려와 공을 받는 상황에서 미스가 발생했다.
그 순간에 마침 근처에 있던 나와 캉테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엄청난 압박감이 들 거다. 스털링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보니 말이다.
그러나 그의 판단보다 빠른 건 내 움직임이었다.
전면에서 그를 강하게 압박하고,
투욱!
"뛰-어!"
캉테가 볼을 빼내는 것에 성공했다.
동시에 나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전력 질주했다.
투욱!
캉테의 짧은 패스를 3선으로 내려온 하베르츠가 등진 채 받고,
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빙그르르 돌려 오른쪽 대각선으로 길게 찔러줬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촘촘한 압박 사이를 가로지르는 속 시원한 패스.
그리고 그 패스를 향해 타미가 넓게 뛰었다.
"압박해! 압박하라고!"
타미와 우트가 명확히 다른 점이 이거다.
우트는 귀신같은 움직임으로, 선수들이 아무도 모르게 스며든다는 점이 무섭다.
하나 타미는 아니다.
그는 왕성한 활동량으로, 소위 '어그로'능력이 엄청났다.
타미가 오른쪽 터치라인을 타고 패스를 받은 채 질주하자 수비들의 시선이 쏠렸다.
"뛰어!"
중앙을 촘촘하게 지키던 로드리가 타미에게 달라붙었다. 오른쪽 풀백과 순간적인 협력수비를 펼쳤다.
그리고,
중앙으로 달려가는 나에겐 열렸다.
공간이.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가 알고 준비했다는 듯이.
타미가 소리쳤다.
"죽여 버려!"
투욱!
그리고 다시 중앙으로 길게 오는 패스.
내 앞으로 뚝 떨어지는 패스를 보면서 많은 판단이 스쳤다.
최전방에서 스톤스와 힘겹게 싸우는 지루에게?
아니,
지금 상황에선 실패다. 하면 왼쪽 터치라인으로 빠진 하베르츠에게?
아니다.
그것도 템포를 죽이는 것에 불과.
그렇다면 선택지는 하나다.
때린다.
왼발을 땅에 박듯이 먼저 필드에 디디고,
오른발을 쭉 뺀다.
그리고 단 한방을, 욱여넣는다.
뻐어어어엉!
얹혔다.
공을 때리는 순간,
그 임팩트가 제대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등에 완벽하게 얹혔다. 달려가는 속도와 관성, 허벅지에서 터져 나오는 힘이 완벽한 지점을 때렸다.
"Yeaaaaaaaaaaaaaa!"
환호하는 절반의 함성.
"워휴우우우우우우!"
아쉬워하는 한탄이 절반.
와.
이걸 막는다고?
***
첼시는 맨시티의 의표를 정확히 찔렀다.
하나, 그것이 완벽하다고만 볼 수는 없었다.
'득점이 터지기가 어렵다.'
딜레마였다.
제퍼슨이 중앙으로 내려가면서, 맨시티의 전체적인 계획은 분명 흔들렸다.
그러나 단지 거기까지였을 뿐이다.
득점 기회는 리그 35라운드에 비해 많이 생겼다.
하나 그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타미는 엄청난 활동량으로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지만, 제퍼슨처럼 완벽한 위치선정과 날카로운 슈팅을 보여 주지 못했다.
지루는 몇 개의 공중볼과 몸싸움에서도 제법 버텨 주고 있지만, 제퍼슨만큼은 아니다.
'결국 제퍼슨이 최전방으로 올라가면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중앙이 빈다.
캉테 혼자 맨시티의 축구를 방해하긴 어렵다. 하베르츠가 역시 도와줘야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하베르츠 역시 저돌적인 드리블과 환상적인 패스에만 집중할 수 없을 터. 조르지뉴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된다면 찬스가 많이 생기지 않으리라.
제퍼슨을 박투박으로 쓰면서 중앙 싸움을 이쪽으로 끌어오는 데 성공했지만, 마무리가 문제였다.
심지어 오늘 맨시티 골키퍼 에데르손의 선방이 심상치 않다.
제퍼슨의 중거리 슈팅을 막아 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 지독한 표정을 보니, 우승에 대한 열망이 보였다.
'하긴, 우리만 우승을 원하는 건 아니지.'
필마르크는 실감했다.
그리고 그 실감이 절실해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베르나르도 실바의 드리블 돌파! 맙소사! 오른쪽으로 빠집니다! 라힘 스털링, 스털링, 스털링! 그대로 때리고! 오 들어갑니다! 맨시티가 웸블리에서, 선제골을 넣습니다!]
"······."
완전히 잘못된 흐름.
맨시티가 끝내 선제골을 넣었다.
끝까지 점유율을 유지하고 소유권을 내주지 않는, 소위 재미없는 안티축구를 유지하던 맨시티가 넣은 선제골.
필마르크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꽉 쥔 손이 떨렸다.
그는 애써 침착함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마저 흔들리면 선수들마저 흔들리지 않겠는가.
몇몇 첼시 선수들의 얼굴엔 명백한 당황스러움이 드러나고 있었다.
한차례 목을 가다듬은 필마르크가 무언가 외치려 할 때.
터치라인 쪽으로 물을 마시려고 오는 제퍼슨이 보였다.
그 순간, 필마르크는 왠지 어이없는 웃음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저 새끼. 또 웃고 있네.'
웃고 있었다.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결승전이 이렇게 쫄리는 맛이 좀 있어야지. 이제야 결승전 같네."
필마르크는 그저 맥이 탁 풀렸다.
왠지.
질 것 같지 않아서였다.
< 185. 끝은 화려하게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