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184화 (184/258)

< 184. 끝은 화려하게 (3) >

프리미어리그 38라운드는 비교적 김이 빠졌다.

첼시는 리그 우승을 확정 지었고, 상대 팀인 본머스도 15위로 잔류에 성공했다.

경기장 분위기는 한 시즌을 마무리하는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

첼시 홈 팬들은 경기 내용에 상관없이 챔피언 노래를 불렀고, 딱히 첼시에 악감정이 없는 본머스 원정 팬도 축하해줬다.

경기장 카메라에는 양 팀의 팬들이 서로 웃으며 대화하는 장면도 찍힐 정도이니 오죽하랴.

그래서 필마르크는 그간 뛰지 못해 경기력이 하락한 선수들을 중점으로 선발 라인업을 꾸렸다.

경기 내용은 물론 좋지 못했다.

경기 감각이 떨어진 것도 있었을뿐더러······.

"지루는 이제 프리미어리그 클래스가 아닙니다."

수석 코치는 단호한 목소리로 단언했다.

필마르크와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온 그도 스트라이커를 보는 눈이 자못 정확했다.

그의 말에 필마르크는 말없이 가늘게 떠진 눈으로 최전방의 지루를 바라봤다.

뻐엉!

[본머스의 수비진이 침착하게 공을 걷어 냅니다!]

[올리비에 지루는 공중볼 싸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을 따라잡기엔 그의 주력이 너무 낮습니다!]

원래도 주력이 부족한 지루였다.

한데 신체 밸런스가 무너지면서 더욱 발이 느려졌다.

물론 경기 감각을 찾으면서 타겟터 역할은 충분히 잘 해 주고 있긴 하다.

공중볼에서도 어느 정도 경쟁력을 보여 주고 있었고, 버티는 능력도 그간 경기에 뛰지 못한 걸 고려하면 좋았다.

괜히 베테랑 선수가 아니었다.

하나 수석 코치의 눈에 그 정도로 만족스러울 리가 있겠는가.

다음 상대는 바로 맨시티였으니까.

"지루를 톱에 쓰는 건 재고해 주시는 게······."

"타미가 원톱으로 맨시티 수비진을 부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물론 그는 성실하고 활동량도 많지만, 맨시티 수비진을 헤집기엔 역부족이야."

"제프를 쓰면 되지 않습니까."

"저번 리그 경기를 봤잖아."

"······."

"제퍼슨이 볼 터치가 몇 번 없었어. 물론 그건 맨시티가 공격을 포기한 결과물이었지만, 펩은 거기에서 무언가를 더 발전시켜서 가지고 올 감독이야."

수석 코치는 감독의 말에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결승전 맨시티전 계획은 쉬이 이해할 수 없었다.

지루가 유로파 득점왕을 차지했던 작년의 폼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신체 밸런스가 무너진 모습이 아닌가.

하물며 맨시티의 수비진한테는 상대가 될까?

제퍼슨에게 하도 당해 첼시에게 은근히 무시당하는 면모가 있지만, 맨시티는 현재 리그에서 최소 실점 3위 팀이었다.

그런 수비진을 부수기 위해선 제퍼슨이 최전방에서 싸워 줘야 한다.

수석 코치는 결국 완전히 수긍하지 못했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제퍼슨이 보였다.

제퍼슨은 진지한 표정으로 필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최전방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지루에게 시선이 향해 있었다.

"보세요. 제퍼슨도 스트라이커입니다. 지루가 자기 대신 스트라이커로 뛴다고 하니 불만을 가지는 거 아닙니까?"

"불만? 제프가?"

"지루를 뚫어지듯이 노려보고 있잖아요?"

"저게 노려보는 거로 보이나? 불만이 있는 거로 보여?"

"아닐까요?"

필마르크가 황당하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쯧. 그런 게 아니야. 제퍼슨은 관찰하고 있는 거야."

"관찰이요?"

"지루를 완벽하게 만들어 줄 방법을 찾고 있는 거지."

"······."

수석 코치는 멈칫했다.

감독의 말이 의미심장했던 것이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수석 코치는 동그래진 눈으로 제퍼슨과 감독을 번갈아 바라봤다.

"완벽하게 만들어 준다는 방법이······."

필마르크는 피식 웃었다.

제퍼슨이 있기에 지루를 톱으로 쓴다.

사실 마크 우트가 경고 누적이 아니었다면, 지루 카드는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필마르크도 지루의 출전에 대해 회의감이 컸으니까.

하나.

'제퍼슨이 있잖아?'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한다.

그리하여 스트라이커를 제대로만 활용할 수 있다면 무엇이 문제겠는가.

***

[첼시의 2021-22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 일대기. 제퍼슨 리의 51득점.]

[첼시 38라운드 본머스를 1대 0으로 힘겹게 제압하고, 승점 100점 고지에 올라.]

[가장 완벽한 스코어러이자 크랙, 제퍼슨 리. 51득점이란 기록으로 프리미어리그의 역사에 이름을 새기다.]

[프리미어리그 전문가들, '제퍼슨 리의 기록은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깨지지 않을 것.']

[첼시, 리버풀, 맨시티, 토트넘 BIG4 확정, 챔피언스리그 진출!]

[완벽한 첼시, 제퍼슨이 없었던 리버풀, 좋았지만 최고는 아니었던 맨시티, 우승권과는 거리가 먼 토트넘.]

[아스날, 부상으로 인해 결국 리그 5위 확정. 챔피언스리그 진출 무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그 9위의 치욕적인 성적표. 개혁과 혁신이 필요하다.]

[맨유 보드진, 아스톤빌라를 리그 12위로 이끌어 낸 미국 출신 그랜드 감독과 접촉.]

[첼시, 우승 세리머니는 최소한으로. FA컵 결승전 임박.]

<2022 FA컵 결승전>

첼시 VS 맨시티

경기 장소: 웸블리 스타디움

***

"할아버지이이이."

줄리아나는 병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애써 웃었다.

물론 그의 할아버지인 할리는 침대에 누워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있었지만.

줄리아나는 아주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처럼 이런저런 얘기를 꺼냈다.

"우리가 우승했어요, 우승! 리그 우승이요!"

벌써 몇 번째 똑같은 얘기였지만, 줄리아나는 이 얘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할리가 들을 때 가장 즐거워하고 기뻐할 소식이 이것들이니까.

"이제는 FA컵하고 챔피언스리그만 남았어요. 할아버진 역시 챔피언스리그 결승이 중요하겠죠? 리그하고 FA컵은 꽤 많이 보셨으니까."

언제였던가.

10년 전일 거다.

줄리아나가 아직 아주 어렸을 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열렸고.

할리는 고대하던 그 날 경기에 가지 못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줄리아나의 유일한 보호자는 할리였으니까.

한데 공교롭게도 10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있었다.

할리는 병원에 있었고, 결승전은 10년 전과 똑같이 바이에른 뮌헨과, 똑같은 경기장인 일리안츠 아레나에서 열린다.

단지 병실에 누워 있는 게 줄리아나가 아니라 할리라는 사실이 다를 뿐.

결국 할리가 그 결승전을 직접 관람할 수 없다는 사실은 똑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야.'

불쑥 치미는 불길한 생각에 줄리아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몇 번이고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어 이제는 입술이 다 터져 너덜너덜할 정도다.

"결승전 티켓을 캡틴이 구해다 줬어요. VIP석이래요. 제가 검색 좀 해 보니까, 이걸 지금 암표로 팔면 어마어마한 돈이 된대요."

물론 그걸 팔 리가 없다.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주라고 선수들에게 나눠 주는 티켓인데, 아스피는 그중 두 개씩이나 할리와 줄리아나에게 양보했다.

10년 동안 첼시에서 뛴 아스피는, 어쩌면 구단에서 할리를 가장 좋아하는 선수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FA컵은 몰라도 챔피언스리그는 보러 가야죠, 할아버지. 저도 결승전 보러 가고 싶다고요."

줄리아나의 표정은 점점 처연해졌다.

힘이 빠졌다.

솔직히, 지쳐 가고 있었다.

유일한 친지의 병환은 어린 소녀에게는 당연히 무거울 수밖에 없다.

"어?"

혹여 갑자기 할리가 잠에서 깨서 자신의 얼굴을 볼까 봐, 고개를 천천히 돌리던 줄리아나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탁자 한 쪽에 올려져 있는 제퍼슨의 매치 볼.

그리고 그 위로 원래는 없던 행거 세 개가 벽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맨 왼쪽엔.

"메달?"

프리미어리그 메달이 걸려 있었다.

그제야 줄리아나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오기 전 아침에, 제퍼슨 리가 다녀갔다고 하지 않았나.

하면 이건 제퍼슨이 두고 간 메달이리라.

리그 우승을 확정 짓는 날 오지 못한 것에 대한 선물인 것이다.

줄리아나는 이어 떨리는 눈동자로 옆을 바라봤다.

헹거는 세 개가 걸려 있었다.

"트레블······."

줄리아나는 뭔지 모를 감정에 휩싸였다.

그리고 결심했다.

반드시.

할아버지를 모시고 결승전에 가겠다고.

***

프리미어리그의 일정이 공식적으로 끝났다.

첼시는 5년 만의 프리미어리그 우승에 환호했다. 그러나 그들은 종일 파티를 열고 카퍼레이드를 하며 기뻐할 수 없었다. 당장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FA컵 결승전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들, 팬들의 자발적인 퍼레이드를 막을 수는 없었다.

"Blues, Blues! Blues!"

"Real Blues! 오, 런던의 주인이여!"

런던 시내에서 우승을 자축하고 기뻐하는 팬들의 푸른 물결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에 반해 선수들은 모두 기쁨을 최대한 억눌렀다.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한 채 다음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애썼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다.

베테랑들이 중심을 잡아 줬고, 팀 내 영향력이 절대적인 제퍼슨이 자발적으로 휴가와 파티를 미루자, 선수들은 그 분위기에 따라간 것이다.

물론, 그 분위기에는 할리가 트레블을 간절히 원한다는 사실과 아주 위독하다는 상황이 컸다.

아무튼.

첼시 선수들이 최대한 조용히 경기를 준비하는 데 비해, 바깥은 소란스러웠다.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제퍼슨 리에 대한 감탄이었다.

44골로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을 갈아치운 지 불과 1년.

제퍼슨 리가 이번 시즌 51골로 또 한 번 그 기록을 스스로 갈아치웠으니까.

거기다가 시즌 초, 80골을 기록하겠다는 그 오만했던 발언이 다시 재조명되었다.

현재 A매치 기록 제외 80골을 터뜨리며 스스로 내뱉은 말을 입증한 것이다.

[시즌 통산 80득점 금자탑, 제퍼슨 리. '아직 시즌은 끝나지 않았다. 볼펜으로 내 이름 옆에 골 수를 기록하지 마라. 숫자는 또 바뀔 테니까.']

ㄴ이젠 저 거만한 발언을 까고 싶지도 않아.

ㄴ나중에 결과 보면 거만한 게 아니라 사실이었거든.

ㄴ너무 찬양하지 마. 제퍼슨은 운이 좋았을 뿐이야.

ㄴ??

ㄴ카이 하베르츠와 풀리시치의 어시스트가 없었다면 저 기록이 세워졌을까?

ㄴ제기랄. 또 병신이 왔어.

ㄴ너 맨유지?

ㄴ닉네임 보니까 맨유 맞아.

ㄴ오, 세상에.

ㄴ제퍼슨은 팀의 조력 없이도 골을 넣을 수 있는 스트라이커야.

ㄴ물론 카이와 풀리식의 조력이 컸다는 것도 부정하진 않아. 그렇다고 제퍼슨의 득점 기록을 폄훼한다? What the fuck are you saying?

ㄴ제프가 동료들의 조력 없이 골을 넣을 수 있는지 증명하려면 맨유에 가면 돼. 제프의 득점력이 맨유의 병신 같은 미드필더를 만나면 빛날 수 있을까?

ㄴ오 시발, 세상에.

ㄴ존나 어려운데.

ㄴ모든 걸 뚫는 창과 모든 걸 막는 방패라니.

ㄴ도박사들이라면 55대 45로 제퍼슨의 손을 들어 줄걸.

ㄴ맙소사. 이제 알겠어. 맨유의 중원을 보고도 제퍼슨의 손을 들어 주다니. 그는 미친 스트라이커야!

어쨌든.

제퍼슨의 신들린 득점력에 감탄하는 목소리가 연이어 튀어나오는 가운데.

펩과 맨시티 선수단은 침착한 얼굴로 웸블리 스타디움에 도착했다.

그리고 첼시에서 제출한 라인업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좁혔다.

침착했던 펩의 입가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제퍼슨 리, 타미 에이브러햄, 올리비에 지루. 쓰리톱?"

쓰리톱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보통 4-3-3을 들고나온다고 한들, 전통적인 센터 포워드 옆에 있는 두 명의 공격진은 윙어나 윙 포워드인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그러나 필마르크는 이전에 몇 번 그랬던 것처럼 센터 포워드로 활약할 선수들로 쓰리톱을 구성했다.

펩은 피식 웃었다.

나쁠 건 없었다.

'오히려 우리에게 더 좋다. 상성상 말이야.'

첼시는 스트라이커를 여러 명 넣는 괴이한 전술을 몇 번 선보였었다.

경기 내용이 어떻든, 그런 변칙 전술은 늘 좋은 결과를 얻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시즌 중반까지였다.

후반부터는 첼시도 안정적으로 승점을 쌓기 위해 원톱을 놓는 전술을 자주 들고 오지 않았던가.

하물며 폼이 다 떨어진 지루를 선발에 세우다니.

이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지도 모르는 수가 아닌가?

'조급해진 건가.'

그랬다.

다시 한번 모험수를 들고나온다는 건 도박을 감행하겠다는 것이고, 결국 기저에 깔린 건 우승에 대한 조급함이리라.

그런 면에 있어서 펩은 베테랑이었고, 관록 있는 감독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흐름대로 잘 풀릴 수도.'

물론 방심은 하지 않는다.

프로 무대에서 그것만큼 치명적인 건 없으니까.

그러나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 건 사실이었다.

약간의 부담감을 던 채.

펩은 살짝 여유가 담긴 미소를 띠고 경기 휘슬이 울리는 걸 지켜봤다.

타앗!

한데 미소 띤 얼굴이 정확히 1분 만에 사정없이 구겨졌다.

과르디올라의 떨리는 시선이 필드를 향했다.

아니, 제퍼슨을 향했다.

그러니까.

최전방이 아닌,

중앙에서 불도저처럼, 불도그처럼, 늑대처럼,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제퍼슨에게.

"이 시이이······ 바알."

시즌 80득점 스트라이커 제퍼슨 리.

그의 오늘 포지션은 전천후(Box to Box) 미드필더였다.

< 184. 끝은 화려하게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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