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끝은 화려하게 (2) >
[첼시, 구단 역사 7번째 프리미어리그 우승 확정!]
[션 올리버의 시즌 3호골, 제퍼슨 리의 쐐기골! 레스터의 챔피언스리그를 향한 꿈을 짓밟다!]
[런던에 나부끼는 푸른 깃발. 첼시 보드진, 'FA컵,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들고 런던에 돌아오는 순간, 카퍼레이드를 펼치겠다.']
[5년 만에 탈환한 프리미어리그의 왕좌. 첼시 감독, '우리는 아직 만족하지 않았다. 트레블을 차지하기 전까지 우리는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첼시 역사 최초의 트레블을 노리는 필마르크 감독, 현 시점 가장 젊고 능력 있는 야망가!]
[첼시 캡틴 아스필리쿠에타, '우리는 시즌 시작부터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리그 우승은 시작이다.']
[제퍼슨 리, '솔직히 실망했다. 이제 리그 우승 하나인데, 이렇게 기뻐 날뛰면 트레블까지 하고 올 땐 기절이라도 하는 거 아닌가?']
[리버풀 감독, '힘들었지만 즐거운 시즌이었다. 끝까지 싸워 우승을 쟁취한 첼시 구단에 경의를 표한다.']
[첼시의 시선은 더 높은 곳을 향해 있다. 로만 구단주, 역대 최고 이적자금 투입 예정!]
"우리는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와 같은 위치의 드림 클럽이 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슈퍼스타가 간절히 오길 원하는 클럽으로 말이죠."
"그러기 위해선 엄청난 돈을 투자해야 합니다. 야망뿐만 아니라 선수의 가치를 인정하기 위해선 엄청난 급료예산이 필요하죠."
"그 첫 시작은 제퍼슨 리와 재계약이 될 겁니다. 첼시 팬 여러분! 반드시 제퍼슨 리와 재계약을 성사하겠습니다!"
***
리그 우승이 확정됐는데, 우리는 놀랍도록 침착하고 차분했다.
파티를 즐기기는커녕, 레스터전이 끝나고도 훈련장에 찾아와 몸을 가볍게 푸는 선수들이 많았다.
그걸 보고 감독이 웃으면서 농담했다.
"전 선수의 제퍼슨 화(化)라니. 아름다운 일이군."
우스운 얘기지만, 그런 건 아니다.
선수들의 얼굴에 새겨진 건 안타까움이다.
아스필리쿠에타를 비롯한 첼시에 오래 남은 선수들이 그러했다.
"결승전에는 오시려나?"
"어렵겠지."
"아쉬운 일이야."
"그래도 TV로 보고 계시겠지."
아스필리쿠에타와 뤼디거가 서로 물을 마시며 속삭였다.
둘이 대화하는 건 의외로 많이 보지는 못한 것 같은데.
기껏해야 '내가 커버할게!' '거기 막아!' 정도였나.
한데 그런 둘이 슬픈 표정으로 나누는 대화 내용은 좀 심각했다.
우리 선수들이 모두 힘을 내서 훈련에 임하는 이유.
할리 할아버지가 몸이 좋지 않은 건 암묵적인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젯밤이었나.
상황이 좀 심각했었단다. 자칫하면 그대로 하늘로 떠나실 정도로 위독하셨다고.
다행히 고비는 넘겼지만, 이젠 우리는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분도 트레블을 보는 건 처음이시지?"
"제기랄. FA컵 결승이 내일이고,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내일모레면 좋겠군."
"너무 조급해하지 마. 순리대로 잘 될 거야."
선수들이 모두 차분한 얼굴로 훈련에 임하게 된 이유였다.
아스필리쿠에타를 비롯한 노장 선수들이 할리의 건강 소식을 듣고 이를 악물었다.
자연히 그 밑의 선수들은 분위기에 맞춰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
다만 나는 좀 다른 방향이다.
결승전은, 나 혼자 잘해서는 안 된다.
내 동료들도 모두 나만큼은 해 줘야 한다.
"큽!"
"엉덩이를 너무 빼지 마! 아구에로는 툭하면 발재간으로 농락하니까!"
FA컵 결승전과 챔피언스리그 결승전까지 선발로 나설 확률이 높은 시셀도에게 어떤 식으로 수비해야 하는지 알려 줬다.
"스털링은 빠르지. 빠르고 크랙 같은 선수야. 뛰는 폼은 좀 귀엽긴 하지만, 어쨌건 발 빠르고 발재간 좋고 이런 드리블에도 능해."
툭, 툭!
"맙소사. 스털링이 덩치가 커진 것 같은데?"
"우습군. 남의 드리블 기술을 그냥 손쉽게 따라하다니."
손쉽게 따라 한 건 아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톱 레벨의 선수들은 제각기 내세울 수 있는 개인기가 하나쯤은 있다.
라힘 스털링도 그중 하나다.
톱 레벨의 선수들에게 배울 건 무궁무진하다. 그의 플레이를 눈여겨보고 흉내를 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다만 내 체격하고는 좀 맞지 않는 스타일이라, 더 깊게 파고들진 않았을 뿐이다.
"제프."
"네?"
"너의 도움이 필요해."
그리고 그때.
날 부른 건, 다소 조급한 기색의 지루였다.
***
'리그앙에서 여러 팀이 접촉해 왔습니다. 첼시 구단에서도 이를 인지했으나, 원한다면 자유계약으로 팀을 떠나는 데 붙잡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지루는 에이전트의 설명에 쓴웃음을 삼켰다.
'프리미어리그를 떠날 때가 됐군.'
첼시는 30살 이상의 선수들에게 1년씩 재계약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구단으로서는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30대가 넘어가는 선수들은 한 번의 부상, 질병으로 인해 갑자기 훅 가는 경우가 많으니까.
'나도 언제든 푸스카스를 받을 줄 알았지.'
하나 축구에선 영원한 건 없다.
데뷔가 있으면 은퇴가 있는 법이다.
전성기가 있으면 쇠퇴기가 오기 마련이다.
지금의 지루는 쇠퇴하고 있다.
자신도 실감했다.
시즌 초, 팬들이 그를 보고 게으르다고 욕했다. 체중이 엄청나게 불어나 프리시즌에 들어갔으니까. 뿐인가. 시즌이 시작하고도 한참 동안 컨디션을 끌어올리지 못했다.
그건 특별히 지루가 게을러서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가벼운 조깅이라도 하면 발목, 무릎에서 미세한 통증이 느껴진다. 식욕은 들쭉날쭉했고, 체중감량은 갈수록 지지부진했다.
그제야 실감했다.
지루는 자신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지루의 나이 35세.
사실 빅클럽에서 이만큼 버티는 스트라이커가 몇이나 있었던가.
'감독이 스트라이커를 너무 좋아해서 이번 시즌도 남았던 거지.'
필마르크는 신기한 양반이었다.
지루는 사실 저번 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계약이 종료되어 팀을 떠날 운명이었다.
그러나 필마르크는 팀에 스트라이커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괴상한 논리를 펼쳐 냈고, 지루를 붙잡았다.
놀라운 건 지루는 그 시즌에서 또 유로파 득점왕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스트라이커에겐 가장 좋은 감독이야.'
지루는 베테랑이었다. 알 수 있었다. 필마르크가 스트라이커를 어찌나 세심하게 잘 다루는지.
그가 저번 시즌 리그와 FA컵에서도 충분한 활약을 하고, 유로파 득점왕을 한 건 분명 감독의 공이 컸다.
그러나 이번 시즌은.
차마 필마르크도 지루를 회복시키고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너무나 급격하게 신체 밸런스가 무너져내렸다.
마치 모래성처럼 와르르.
결국, 지루는 이번 시즌을 끝으로 첼시를 떠나기로 했다.
이번 시즌은 로테이션, 백업 선수로도 활약하지 못했다.
리그 7경기 3선발 4교체, 득점 0.
독일에서 온 마크 우트가 엄청난 활약을 보여 주고 있고, 잉글랜드 차세대 스트라이커인 타미 아브라함 역시 어린 선수지 않은가.
지루는 여기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었다.
하나 아쉬움은 있을지언정 섭섭함은 없었다.
즐겁게 뛰었고, 아름다운 마무리가 될 거라고, 좋은 이별이 될 거로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필마르크가 다가와 말했다.
"할리가 아픈 건 들었지?"
"······네."
"그 양반이 저번에 못 전해 준 사진이라고 손녀딸한테 갖다 달라고 줬다."
"사진?"
지루는 씁쓸함을 애써 숨긴 채 사진을 받았다.
지루는 할리를 좋아했다.
아니, 이 구단에 할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푸근하고 자애로웠으며, 지혜로웠다.
언제였던가.
18-19시즌, 유로파리그 득점왕을 했을 때였다. 모라타에게 밀려 리그에서는 정말 많이 뛰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첼시에게 있어 유로파용 스쿼드에 불과하다'라고 공공연히 불만을 품지 않았던가.
그런 그에게 할리가 찾아와 처음으로 크게 화를 냈었다.
'뭐라 했었지? 너는 유로파용 선수가 아니라, 첼시를 위해 유로파 우승을 만들어 준 가장 빛나는 스트라이커라고 했나.'
그 한마디가.
조금은 쑥스럽고 부끄러운 한마디가 지루를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했다.
첼시 코치진에서 할리를 사진사가 아니라 심리치료사로 계약하자고 공공연히 농담한 게 괜히 나온 얘기가 아니었다.
아무튼, 할리는 늘 사진을 찍어 선물했다.
다만 사진들은 보통 경기 당시의 사진들이다. 역동적이고, 감탄이 나오는 사진들.
경기를 뛰지 않으면, 사진이 찍힐 리가 있을까.
전혀 없다. 지루는 오랫동안 경기에 나가지 못했다. 만약 리그컵에서 탈락하지 않았다면, 몇 번 더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제퍼슨 리, 마크 우트, 타미 에이브러햄에게 밀려 4순위인 그가 경기에 나설 일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갑자기 사진이 온 것이다.
그것도 한 장이 아니라 한 뭉치가.
스륵.
"······."
사진을 한 장씩 넘기던 지루는 점점 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경기에서 뛴 사진은 얼마 없었다.
하지만 사진 대부분이 그의 훈련장에서의 일상을 기록하고 있었다.
물 마시는 모습, 동료들하고 웃는 모습, 코치진에게 대드는 모습, 동료와 말싸움을 하는 장면.
그가 구단에서 생활해 온 그간의 사진이 마치 기록처럼, 영화처럼 찍혀 있었다.
그 사진들을 다 감상한 지루는 무언가 허탈하면서도 가슴이 공허해지는 이상한 감상에 빠져들었다.
지켜보던 필마르크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FA컵 결승전에 널 쓸 생각이다."
"······보스? 이 분위기에 농담은 어울리지 않아요."
"농담이라니. 우트는 경고 누적으로 결승전 결장이야."
"타미와 제프가 있잖아요?"
"리그에서 펩이 이상한 방식으로 우릴 괴롭혔지. 우리도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해. 네가 필요하다."
"······."
"할리가 경기장엔 아마 오진 못하겠지. 하지만 TV로는 보고 있을 거야. 가기 전, 보여 줄 수 있지 않겠어?"
'가기 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본인이 팀을 떠나는 것?
아니면 할리가······.
지루는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을 잇지 못했다.
괜히 훈련장에서 눈동자가 빨개질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그는 훈련장에 이를 악물고 나왔다.
빠악!
"끄읍!"
"지루, 괜찮아요?"
팀의 유스이자 4선발, 또는 5선발의 마키요 토모리와 공중볼 경합을 펼친 지루는 미간을 좁힌 채 손을 흔들었다.
"실력 많이 늘었다?"
"하하하, 고마워요. 열심히 했거든요."
하나 지루는 알았다.
토모리의 성장도 눈부시지만, 본인의 기량 저하가 더 크다는 것을.
이 정도도 이겨 내지 못한다면,
맨시티의 수비진은 과연 어찌 이겨 낼까.
한참 고민에 빠져 있던 지루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수비수들과 뚫고 막고, 뺏는 연습을 하는 제퍼슨이 보였다.
지루는 작년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공중볼 경합 시 위치 선정과 헤더 방법을 물어봤을 때.
지루는 나름 자신의 노하우를 알려 줬고, 제퍼슨은 그 노하우를 받아들여, 이제 독보적인 기술을 갈고 닦았다.
지금에 있어서 제퍼슨은 감히 지루가 비교도 할 수 없는 최정상의 위치에 올라 있었다.
하여.
지루는 아무런 질투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것들보다 중요한 게 있지 않나.
FA컵 결승전에서 할리를 위해 경기를 치러야 한다는 간절함.
지루는 그래서 자존심을 꺾고 제퍼슨에게 다가갔다.
"제프, 너의 도움이 필요할 때야."
***
필마르크는 리그 우승을 만끽하지 못했다.
그날 밤에 할리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구단에 전해졌고,
또 FA컵 결승과 챔피언스리그 결승이란 부담감이 엄청나게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35라운드 맨시티전을 떠올리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그건 우리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제퍼슨이 프리킥을 만들어 내고, 직접 득점에 성공했지만.
그날 제퍼슨은 프리킥 골을 넣었음에도 평점 6.9에 불과했다.
그냥 '기본'만 했다는 평가다.
그럴 수밖에.
맨시티는 골을 먹힌 직후에도 그 특유의 점유율 플레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제퍼슨이어도, 공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데 경기에 어떤 영향력을 끼치겠는가.
필마르크는 거기서 펩의 표정을 똑똑히 보고 소름이 돋았다.
담담하고도, 치밀한 표정.
끊임없이 고뇌하고 생각하고 눈동자는 쉼 없이 굴려 가고.
'이 경기 90분을 하나의 전술시험으로 쓰고 있다!'
그 사실을 깨달을 순간, 필마르크는 펩이 정말 미친놈이란 걸 느꼈다. 아직 리그 우승에 대한 조그만 가능성이 남아 있는데도, 그걸 냉정하게 쳐 내면서 FA컵 결승전을 대비한 것이다.
'펩은 우리를 많이 상대했다. 하물며 그는 천재적이지. 리그에서 제퍼슨을 통제하는 걸 어느 정도 확인했다. 그가 결승전에서 어떤 전술을 들고 올지 가늠이 안 돼.'
이런 사실에 부담감을 느낀 필마르크도, 코치진을 다 모아 계속해서 연구하고 분석하고 새로운 판을 짜려고 노력했다.
그의 시선이 제퍼슨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루에게 향했다.
제퍼슨은 지루에게 무언가 얘기를 듣고, 안타까운, 또는 감동적인, 그리고 결연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제퍼슨과 대화를 나눠봐야겠군.'
새로운 방식에는, 팀의 핵심인 제퍼슨의 조력이 절실했다.
그리고 때마침.
그가 제퍼슨을 부르기도 전에 제퍼슨이 찾아왔다.
"감독님."
"제프! 마침 할 말이 있었는데······."
"FA컵에서 절 미드필더로 쓰실 건가요?"
"······어?"
제퍼슨의 표정이 퍽 심각해 보였기 때문에 필마르크는 당황했다.
그는 스트라이커다. 스트라이커를 제 위치가 아닌 다른 포지션에 쓴다고 하면, 선수가 좋아할 리가 있겠는가.
그런 사실을 떠올린 필마르크의 얼굴에 초조함이 드러났다.
그러나 이어지는 제퍼슨의 말에 자신이 오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좋아요.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약속해 주세요."
"약속?"
"감히 제가 감독님의 전술에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게, 정말 나쁜 짓이란 건 압니다. 그렇지만 이건 꼭 들어주셨으면 해요."
"음. 말해 봐."
"지루를 쓰실 거면, 90분 내내 믿음을 주세요."
"······응?"
"아니, 저에게 믿음을 주세요. 절 믿고, 지루를 끝까지 믿어보세요."
필마르크는 어떤 말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퍼슨의 확신에 찬 표정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지루를 완벽하게 만들어 드리죠."
< 183. 끝은 화려하게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