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묻고 더블로 가! (4) >
프리미어리그 36라운드는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경기였다.
여기서 말하는 '세간'이란 단순히 영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전역과.
미국과 한국까지 상당한 시선이 주목됐다.
프리미어리그야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해외축구리그다.
더구나 리버풀과 첼시는 아시아에서도 두꺼운 팬 층을 자랑하는 클럽이다. 그 두 클럽의 사실상 결승전.
기존 영국 유학생뿐만 아니라, 이 경기 하나를 보겠다고 비행기 표를 끊은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다.
"오, 제프!"
"제-프!"
"제훈아!"
특히, 한국계 미국인 선수인 제퍼슨 리는 한국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자랑했다.
물론 몇몇 이들은 그저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고 여겼다. '미국인'이지 '한국계'는 전혀 의미 없다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제퍼슨은 기존의 한국계 미국인 스타들과는 다른 점을 가졌다. 한국어가 무척 유창하고 그를 찾아오는 한국팬들에게 상당히 좋은 팬서비스를 해주는 걸로 유명했다.
한국과는 전혀 접점이 없는 외국 선수가 코앞에서 웃으며 사인을 해 주고, 사진을 찍어 줘도 기쁜 마음이 드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
하물며 본인이 한국계임을 증명하듯, 유창한 한국어로 말하는 모습이 얼마나 좋아 보이겠는가.
전반 3분.
시작하자마자 단독 질주에 이은 호쾌한 슈팅으로 골을 터뜨리고,
제퍼슨은 그를 향해 환호하는 한국팬들에게 다가가 손가락 하트를 보내며 가벼운 인사를 하자, 관중석이 난리가 나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제훈아!"
제퍼슨을 제프라고 부르는 걸, 한국인들이 더 친숙하게 '제훈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새 입에 착착 감긴다고, 제퍼슨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제프! 제프!"
"제훈아! 한국에 친선경기 한번 와라!"
"날강두처럼 벤치에만 앉아 있어도 돼!"
"넌 그래도 돼!"
"그냥 와 주기만 해도 돼!"
어쨌거나.
제퍼슨은 가벼운 미소로 셀레브레이션을 마치고, 이번엔 한쪽에 성조기를 걸어 놓고 걸걸한 목소리로 쳐다보는 미국인들을 바라봤다.
"2번째는 거기로 갑니다!"
그 말에 미국 팬들은 껄껄 웃었다.
선제골을 넣자마자, 두 번째 골을 넣고 와 주겠다고 공언하는 모습을 보라.
한없이 당당했고, 자신의 실력에 대해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그 모습은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 중 하나였다.
괜히 그가 지금 북미대륙에서 가장 섹시한 스포츠 스타 1위로 뽑힌 게 아니리라.
"그래! 제프! 두 번째 골을 넣고 이쪽으로 와!"
"네 엉덩이에 키스를 해 주지!"
"오, 제발 끔찍한 소리 좀 하지 마! 제프가 너 때문에 이쪽이 아니라 저쪽으로 간 거라고!"
제퍼슨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환호에 충분히 보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기 위해선 한 골이 더 필요했다.
하나 제퍼슨은 자신을 향한 한쪽의 시선에 침음성을 내뱉었다.
'으음!'
응원단석.
첼시 팬 중에서도 가장 격렬하고, 90분 내내 서서 방방 뛰며 목이 터져라 외치는 기존의 서포터들이, 다소 서운한 얼굴로 제퍼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트트릭하게 생겼네."
누구 하나 섭섭하지 않게 말이다.
***
축구는 흐름의 스포츠다.
분위기를 어떻게 타냐에 따라 승부의 추가 급격하게 기운다.
특히 부담감, 압박감, 그런 것들로 표현되는 온갖 긴장이 고조되는 이런 경기에서는, 그 흐름을 누가 먼저 타느냐가 중요했다.
"콧대를 눌러 버려! 작년 챔피언을 부숴 버리자고! 우리는 유럽 챔피언을 해야 할 몸이니까!"
감독의 말처럼 기세를 꺾어야 한다.
리버풀은 일찌감치 모든 대회에서 탈락했다.
챔피언스리그는 조별리그에서 탈락했고, 유로파리그는 16강에서 탈락했다.
하물며 FA컵과 리그컵까지 모조리 떨어졌다.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까. 리버풀은 리그에 온전히 집중했다. 승점 8점까지 벌어졌던 점수를 3점차까지 맹추격해왔다.
이런저런 말이 있지만, 최근 몇 년간 유럽에서 가장 강한 클럽 중 하나였고, 프리미어리그를 맨시티와 양분했던 클럽이다.
그런 클럽이 오로지 리그에만 집중해 왔던 터.
오늘 경기까지 무려 11연승이란 엄청난 기록을 세웠던 것이 리버풀이었다.
한마디로 승리에 대한 맹렬한 기세가 제대로 되어 있는 팀.
그런 팀의 기세를 꺾는 것에는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이른 선제골이다.
그것도,
'충격적인' 골 말이다.
"Bravo!"
"머지사이드에 내가 아는 축구팀은 에버튼 하나지. 너희는 뭐야?"
"머지사이드에 빨간 옷을 입고 잔디나 깎는 동호회가 있다더군!"
"그 동호회 이름이 리버풀이었던가?"
안필드 원정에서 저런 말을 내뱉을 수 있다는 건 배짱이 두둑하단 얘기다. 우리 팬들이 그랬다.
아무튼, 리버풀은 시작부터 계획이 헝클어졌다.
그것도 벼락같은 선제골.
내가 몇 미터를 뛰었는지 모르겠다. 페널티 박스에서 공을 잡았고, 그냥 뛰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골키퍼가 있었고 골대가 보였다.
그 상황에서 내가 뭘 하겠는가.
스트라이커의 선택지는 하나다.
"Run and Kill!"
감독은 가끔 내 컨디션을 제대로 파악하는 게 아닐까 싶다.
드레싱 룸에서 말했던 그 한 문장은,
오늘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제프!"
"뛰어!"
"그냥 뛰어!"
"오늘은 뛰어!"
캉테와 하베르츠는 늘 완벽했고,
2선 섀도 스트라이커 위치로 나온 타미 에이브러햄은 특유의 왕성한 활동량으로 중앙 싸움에 가담했다.
리버풀의 중원은 파비뉴, 조던 헨더슨, 바이날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캉테와 하베르츠, 그리고 왕성한 활동량으로 미드필더나 다름없이 뛰는 타미의 조합이 밀릴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캉테의 커팅 능력과 전진 드리블, 공수를 오가는 박투박 플레이.
카이 하베르츠의 패스와 순간적인 침투까지.
중원 싸움에선 서로 비등했고, 어디 하나가 압도적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초반, 리버풀의 기세를 내가 선제골로 꺾어 버렸고, 우리가 분위기를 제대로 탔다는 것이 주효했다.
지금은 우리의 흐름이었다.
심지어 양측면의 풀리시치와 오도이도 끊임없이 뛰었다.
풀리시치는 중앙으로 파고들면서 중원에 힘을 실어 줬고, 오도이는 우측면에서 주구장창 측면을 공략했다.
뛰고, 또 뛰고.
오도이의 직선 드리블은 단순한 패턴이지만, 단순한 만큼 위력적이다. 빠르고 저돌적이었으며, 타이밍을 앗아가는 크로스는 깔끔하고 정확했으니까.
뻐엉!
본래 크로스의 성공 확률이 높지는 않다.
박스 안 수비수들은 공중볼 경합에 있어 일가견이 있는 친구니까.
그래서 공중볼 싸움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몇몇 팀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크로스로 공격 찬스를 날린다고 불평을 토할 때도 많다.
그냥 의미 없는 뻥 축구라고 말이다.
"오-도-이!"
하나 우리 팀의 팬들은 크로스가 올라올 때마다 소리를 지른다.
우리가 지금까지 넣은 골의 분포를 보면,
크로스에 이은 골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헤더든, 아니면 공을 떨어뜨려서 욱여넣든 간에 말이다.
가장 위력적인 패턴이자, 상대팀이 가장 크게 흔들리기 쉬운 공격 방식.
"막아!"
공간을 찾아 들어갔다.
크로스가 떨어질 방향과 궤적을 예측해서.
그것은 머리를 돌려서 계산하는 게 아니다.
본능적이다.
"흥!"
그러나 리버풀은 다른 팀과는 달랐다.
반 다이크라는 걸출한 수비수가 존재했다.
적어도 그와 경쟁해서 지는 건 이제 상상도 못 하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제압하는 건 어렵다.
"흡!"
뒤에서 짓누르는 묵중한 힘.
그는 적절히 손을 쓸 줄도 알고, 수비 시에 몸의 중심을 이리저리 바꿔가면서 상대를 무너뜨리는데 일가견이 있다.
무리하게 헤더 슈팅을 시도할까?
가능은 하다.
헤더는 따낼 수 있다. 그러나 방향과 궤적은 내가 원치 않게 될 터.
골키퍼 알리송이라면 선방해 낼 것이다.
그렇다면.
뭐,
축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가슴을 활짝 펴고, 반다이크를 힘껏 밀었다.
그리고 최대한 뛰어오르면서, 소리쳤다.
"타아아아아미!"
타미와는 오랜만에 호흡을 맞춘다.
그러나 우리는 둘 다 스트라이커다.
골을 넣어야 하는 상황에서 무지막지한 집중력을 보여 준다.
툭!
이마로 툭 공을 떨어뜨려 줬고,
중앙에서 미친 듯이 달려오던 타미가 괴성을 내지르며 그대로 발리 슈팅을 욱여넣었다.
뻐어어엉!
달려오는 속도와 관성, 그리고 나를 따라 하체 운동을 하며 튼튼하게 붙은 근육의 폭발력까지.
그 모든 힘이 실려 가죽공이 터질 듯한 소리와 함께 공이 작렬했다.
태애애앵!
"워우우우우우!"
그러나 너무 강했던 것일까.
무지막지한 슈팅은 골포스트 상단을 때렸다.
골대가 부르르 떨리고 공이 크게 튕겼다.
공은 튕겨 잔디 바닥을 때렸고, 다시 한번 굴절되어 페널티 박스 바깥으로 튕겨 나가려고 했다.
그때, 필드에 있던 선수들의 진용이 보였다.
'위험하다!'
머릿속에서 경종이 땡땡땡 울렸다.
우리 선수들은 공격을 위해 일제히 라인을 올렸고, 공이 튕겨 나오면서 진용이 흐트러진 상황.
그에 반해 리버풀은 사디오 마네와 모하메드 살라가 센터서클에 위치해 있었다.
심지어 튕겨 나가는 공의 세컨볼 위치에도 리버풀 선수가 있었다.
'역습 찬스다.'
이대로 내준다면 역습 찬스.
리버풀은 이런 역습을 살릴 힘이 있다.
하면 여기서 막아야 한다.
그러나 세컨볼까지 가기에는 내가 너무 애매했다.
달리면 가능할 것도 같긴 한데,
"어딜!"
그 순간 뒤에서 나를 압박해 오는 반 다이크의 묵직한 힘이 느껴졌다.
공을 향해 뛰어가려는 날 견제하는 움직임.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생각?
그딴 건 필요 없었다.
몸이 먼저 움직였고, 반응했으며 근육이 작동했다.
누군가 뒤에서 날 누르고 있다는 건,
분명 불쾌한 사실이다.
그러나 때로는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바닥을 치고 튕겨졌다가 페널티 박스 바깥쪽을 향해 다시 뚝 떨어지는 볼.
"어엇?"
반 다이크가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린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마치 뒤로 드러눕듯이, 뒤에서 압박하는 반 다이크에게 바짝 기댔으니까.
"제기랄!"
사색이 되는 반 다이크의 얼굴이 상상된다.
무언가 기댈 게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어렵고 난해한 슈팅 자세가 가능하니까.
왼발을 땅에 디디고, 오른발을 크게 높이 치켜올리면서.
뚝 떨어지는 세컨볼이, 발등에 정확히 얹히는 순간.
"----!"
뭐라 해야 할까.
그 짜릿하면서도, 주위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는 감각이.
무언가 홀린 것처럼 근육이 저절로 작동하는 건, 꽤 재미있는 경험이 아닌가.
뻐어엉!
머리 위로,
아크로바틱한 오버헤드 킥.
이게 들어갈지는 모르겠다.
다만.
"------!"
알 수 없는 괴성과.
"제-----프!"
터져 나오는 함성으로 판단하건대.
들어갔다.
***
오늘 안필드를 찾아온 관중들은 분명 세상에 몇 없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76m 단독드리블 골로 시작하는 선제득점부터.
아크로바틱하기 짝이 없는 오버헤드킥이 골문을 가를 때.
허망한 표정의 알리송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잔디를 스터드로 찍을 때.
관중들은 경악했고, 함성을 내질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미친놈!"
"Fucking Lovely! 미치겠어! 오, 맙소사! 원더골 제조기도 아니고!"
"넣다하면 기가 막히는 골이야!"
"온다! 제프가 이리로 온다!"
"캡틴 아메리카를 맞이하라! 미국 시민들이여!"
모든 관중이 미쳐 날뛰었지만,
선제골을 넣고 두 번째 골은 이쪽으로 오겠다고 약속받았던 미국 팬들은 그야말로 광분했다.
"캡틴이 오셨다!"
미국인 단체 관광객을 이끌고 온 걸걸한 목소리의 사내가 가장 크게 소리쳤다.
"전체- 차렷!"
그러더니 장난스럽게 웃던 미국인들이 일제히 자세를 잡았다.
"Captain, Sir!"
척!
셀레브레이션을 위해 달려가던 제퍼슨은 급브레이크를 밟을 수밖에 없었다.
이 장난기 많고 유쾌한 미국팬들이 일제히 거수경례하는 게 아닌가.
제퍼슨은 당황했지만,
이내 웃으면서 답례했다.
담담하고, 절도 있게.
누가 보면 군인 출신이 아니냐고 수군댈 정도로,
각 잡히게.
물론,
그건 제퍼슨이 회귀 전, 4주 군사훈련을 마쳤기 때문에 가능한 경례 자세였다.
< 180. 묻고 더블로 가!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