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 묻고 더블로 가! (3) >
Photo) 제퍼슨 리, 런던 슈퍼마켓에서 목격.
Photo) 훈련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 개인 트레이닝 하는 모습.
Photo) 경기 종료 후 집으로 귀가하는 제퍼슨 리.
ㄴ리얼 근면성실하네
ㄴ인터뷰하는 건 즐라탄스러워서 행동까지 그런 줄 알았는데 정작 직장-집-직장-집-직장-집 무한루틴;;
ㄴ이게 세계 최고 선수의 루틴이냐
ㄴ최고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
ㄴ파파라치가 찍을 게 없어서 그냥 집 가는 거나 찍고 있네
ㄴ인터뷰하는 거하고 너무 다름. 왜 감독이 얠 좋아하는지 알겠다.
파파라치가 날 쫓아다닌 건 오래전부터다.
하지만 딱히 신경쓰이진 않았다.
애당초 신경쓴다고 해서, 파파라치가 사라질리는 없으니까.
또, 현재 내 사생활에 특별할 거라곤 조금도 없다.
여러 신문에 올라오는 사진도, 그냥 훈련장과 경기장 집을 오가는 모습뿐이다.
그나마 특별한 건 슈퍼마켓에 들르거나, 동료들하고 외식하거나, 트레이닝 팀하고 외식하거나.
제크 팀장은 아주 기뻐하는 낯으로 말했다.
"아주 대단합니다, 제프. 철저한 이미지 메이킹입니다. 인터뷰에선 거침없고 시원시원하지만, 실생활에서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모범이 되는 선수라니!"
이미지 메이킹이라.
솔직히 그걸 노린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생활 패턴이, 내 이미지 개선에 도움이 되는 건 확실하다.
그간 내가 인터뷰할 때마다 보여 준 발언과 이미지는 좋게 말하면 '즐라탄스럽게' Badass다운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비호감이다.
ㄴ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야지
ㄴ꼰대 등장;
ㄴ미국인한테 그딴 거 강요 좀 하지 마;
뭐, 이런 댓글이 올라오면 비추 폭탄을 받고 금세 바닥에 처박히긴 하지만.
어쨌건 내 언행을 아니꼽게 보는 사람도 당연히 있기 마련이다.
사실 완벽한 이미지가 어디 있나.
아무튼 확실한 건, 파파라치들의 사진이 공교롭게도 내 이미지를 더 좋게 만들어주고 있단 사실이다.
"더구나 몸값 올리기에도 아주 좋죠. 엄청난 잠재력과 월드 클래스의 실력에 언론을 들었다 놨다하는 스타성까지! 거기에 사생활도 깨끗하다니!"
"면전 앞에서 너무 금칠을 해 주시네요."
"오, 이런! 모두가 당신이 거만한 스타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겸손하죠. 성실하기까지 하죠. 그 어느 구단이 당신을 마다하겠어요?"
제크 팀장이 이런 식으로 말을 늘어놓는 이유는 하나다.
이젠 슬슬 얘기가 나올때가 됐다.
오늘의 만남의 목적.
"재계약하실 겁니까? 아니면 타 구단 이적을 모색하실 겁니까?"
내가 잠시 대답하지 않자, 제크 팀장은 여러 조건들을 나열했다.
"상세조건은 더 나눠 봐야겠지만, 에이전시 측으로 몇 개 구단이 은근히 주급을 제시했습니다."
"사전접촉 아닌가요?"
"들키면 그렇죠."
제크 팀장은 별 대수롭지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규칙이 있다고 그게 잘 지켜지나.
"레알과 바르셀로나에선 주급으로 37만 유로(한화 5억 원)를 제시했습니다."
"허."
"물론 기타 조건도 엄청납니다. 이거는 정리가 필요하구요. 파리에서는 52만 유로(한화 7억 원)까지 얘기가 나오더군요."
"와, 이번 건 좀 놀랐네요."
"그렇군요. 제프. 당신도 놀라는 표정을 지을 줄 아네요."
"그럴 수밖에요. 52만 유로라니. 허 참."
"현재 리오넬 메시의 주급보다 살짝 부족한 수준입니다."
리오넬 메시는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최정상의 위치에 있었다. 발롱도르를 7회 수상하면서 실력을 입증해 왔다.
그래서 그만한 주급을 받을 가치가 있는 선수였다.
한데 프로무대에 데뷔한 지 4년 차에 접어드는 내가 그 정도에 근접했다는 건.
음.
솔직히 놀랍네.
내가 이렇게 컸나.
싶을 정도로 내 자신이 기특하기도 하고.
흠흠.
"하지만 중요한 건 본인 의지겠죠."
주급이라.
근데 뭐······.
이쯤 되면 5억이니, 7억이니 하는 건 쉽게 현실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세금을 워낙 많이 떼서 말이지.
"아, 첼시에서는 세금 대납까지 한 후에 37만 유로를 맞춰주겠다는군요."
허.
첼시에서도 아주 장난 아니네.
"물론 5년 이상이란 장기계약을 제시했지만, 장기계약은 늘 득과 실이 있으니 신중해야하고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계약자의 선택에 맞춰 움직일 겁니다."
"음."
여름이 되면 첼시와 나는 계약기간이 1년 남는다.
그 얘기는 1년 후 FA로 풀릴 수도 있단 얘기다.
첼시는 나와의 재계약에 미친 듯이 힘쓸 수밖에 없고, 다른 구단들도 1년 후 나를 잡기 위해 미친 듯이 구애할 게 뻔하다.
지금은 에이전시에게 물밑으로 사전접촉하고 있지만, 경쟁이 과열되면 직접 나와 접촉하려고 시도하는 구단도 있겟지.
뭐, 그게 문제가 아니다.
가장 걱정되는 사실은 올해 겨울에 2022 카타르 월드컵이 있다는 점.
월드컵을 준비해야 하는 과정에서 계약 문제로 시끄러워지면, 나도 좋지 않다. 여기저기서 '제발 우리 팀으로 와 줘요!' 이런 식으로 들어오는 구애를 번번이 뿌리치는 것도 힘들 테고.
그래서 결정했다.
"재계약 진행하죠."
제크 팀장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이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물론 급하지 않게 할게요. 급한 건 저쪽이니까요."
"네. 그리고 계약기간은 짧게 해 주세요. 5년은 너무 깁니다."
"으음!"
내가 첼시에 애정을 가진 건 분명하다.
그러나 유스 아카데미 출신도 아니다. 장기계약은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할 수 있고, 팀의 전설이 될 수 있지만,
선수의 미래는 모르는 법이다.
제크 팀장은 다소 난처해했다.
"계약기간이 짧아지면 다른 조건에서 양보해야 할지도 모르는데요."
"그걸 막아야하는 게 에이전시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렇긴 합니다만."
"아, 제크 팀장님. 어머니의 소개 이후로 저는 에이전시에 아주 만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북미 두 번째 규모의 에이전시 측에서 저에게 연락이 오더라고요."
"······최선을 다해 최고의 조건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전 팀장님을 믿습니다."
제크 팀장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이렇게 조일 필요가 있다. 아무리 돈독한 관계여도, 에이전시와 나의 사이에는 계약서가 존재하니까.
***
<2021-22 프리미어리그 테이블>
1. 첼시 29승 4무 2패 승점 91점
2. 리버풀 28승 4무 3패 승점 88점
3. 맨체스터 시티 26승 5무 4패 승점 83점
4. 아스날 21승 7무 7패 승점 70점
5. 토트넘 22승 4무 9패 승점 70점
6. 레스터 시티 19승 9무 7패 승점 66점
···
···
9.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5승 7무 13패 승점 52점
35라운드에서 맨시티가 우리에게 지면서, 사실상 우승경쟁에서 탈락했다.
물론, 우리 팀이 36라운드에서 리버풀과 사이좋게 비기고, 내리 2패를 한 뒤 맨시티가 3승을 다 해 버리면,
첼시와 승점 동률이 된다.
그러나 골득실차에서 맨시티보다 우리가 20점정도 앞서고 있으니.
우승 후보에서 99%정도 탈락한 셈이다.
하면 이제 남은 건 리버풀이다.
[프리미어리그 36라운드, 첼시 VS 리버풀 우승결정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과 FA컵 결승전을 코앞에 둔 첼시, 오로지 리그만 남은 리버풀.]
[리버풀 콥들, '리그는 우리가 우승하겠다!']
[첼시 팬들, '우리의 목표는 트레블이다. 2위는 스포츠에서 기억하지 않는다.']
맨시티에 이어 리버풀전.
여기에 우리에게 악재가 있다면, 우리는 챔피언스리그와 FA컵을 병행하느라 시즌 막바지 체력이 상당히 고갈됐다는 점.
그에 반해 리버풀은 리그에만 집중해 비교적 주전 선수들의 체력관리에 성공했다.
뭐, 우리에게 부담도 되는 것만큼 리버풀도 부담이 되리라.
리버풀이 이기면 승점이 동률이 된다.
득실차는 리버풀이 6점정도 높다.
리버풀로서는 첼시전을 포함 세 경기를 다 이겨야 우승할 수 있지만, 만일 우리에게 패배한다면 우승은 물 건너가는 거나 다름없다.
그때 감독이 드레싱 룸에 들어왔다.
다소 피곤한 기색의 표정.
감독도 마음고생이 심할 거다.
감독은 조용히 선수들을 둘러봤다.
약간의 침묵 후, 선수들의 시선이 주목된 걸 느낀 감독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피곤하군. 제군들. 오늘 아침까지 밤새우면서 경기 분석을 했거든."
감독은 피식 웃었다.
"바이에른 뮌헨 경기 분석하는 게 꽤 힘들더라. 독일 팀이라 스타일도 다르더라고."
느릿하면서도 평범한 말투.
선수 중 누군가 손을 들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건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인데요?"
"맞아. 맞아. 그렇지. 그건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지. 그래, 맞아. 오늘 아침까지 챔스 결승전을 준비했거든. 오늘은 특별할 건 없잖아? 그냥 늘 하던 리그 경기잖아? 리버풀? 그 시뻘건 놈들이 언제 우리를 제대로 이긴 적이 있나?"
감독은 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사실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선수의 긴장을 풀어 주는 게 효과적인지, 아니면 선수에게 어느 정도 결연한 마음을 심게 해 주는 것이 더 도움이 되는지는 어느 것도 옳다고 얘기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팀은 전자였다. 긴장이 풀리면 원하는 플레이가 잘 나오는 편이었다.
리그 경기는 마치 당연히 이기는 것처럼 말하고, 벌써 챔스 결승을 준비하고 있다는 식으로 감독은 농담을 했다.
드레싱 룸에 팽팽했던 긴장감이 살짝 옅어졌다.
"우리는 지금까지 완벽하고, 또 아름다웠다. 내 인생을 통틀어 너희들만큼 사랑스러운 친구들이 없었지. 솔직히 집에 있는 와이프보다 너희가 더 예뻐 보여!"
여기저기서 웃음과 괴성이 터져 나온다.
누군가는 깔깔 웃었고, 누군가는 우우하고 장난스럽게 야유했다.
"귀여운 아가씨들! 가서 리버풀을 무관으로 만들어라! 우리는 빛나는 실력과 대단한 재능을 갖고 있어. 오늘로 우리는 프리미어리그 최악의 악역이자, 최고의 우승팀이 되는 거다. 가서 박살 내 버려!"
그는 전술보드 판을 크게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내 전술 지시는 딱 두 개다!"
감독은 살짝 흥분된 얼굴로 전술판에 휘리릭 단어를 적었다.
"Run! And Kill!"
그렇게 외치곤, 소리쳤다.
"미친 듯이 뛰고, 그냥 죽여 버려!"
선수들이 화답했다.
"Run and Kill!"
***
드레싱 룸에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필마르크는 엄청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승 경험이라곤 작년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FA컵과 리그컵, 유로파.
물론 FA컵과 유로파는 훌륭한 대회지만, 사실 그때는 '어쩌다보니 우승컵을 얻었더라!'가 맞는 말이었다.
정신없었다.
첫 시즌이었고, 새로운 선수들이었고, 새로운 나라였으니까.
그냥 무작정 전술을 지시했을 뿐이다.
'난 행운아다.'
그런데 제퍼슨이 그렇게 만들었다.
별것도 아닌 평범한 지시를 환상적으로 만들었고,
그가 꿈으로만 그리던 스트라이커의 모든 모습을 다 보여 줬다.
그렇게 첫 시즌을 마쳤고, 이번 시즌은 정말 작정하고 준비했다.
구단 운영 측과 얘기해 좋은 선수들을 영입했으며, 프리시즌부터 착실하게 준비했다.
트레블을 외쳤지만, 사실 가능성은 크게 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챔피언스리그 결승, FA컵 결승, 그리고 프리미어리그도 결승이 코앞에 있다.
물론 오늘 리버풀에게 진다고 해도, 우승이 물 건너가는 건 아니다.
그러나 득실차로 인해, 남은 두 경기를 모두 승리해도 쉽지 않다.
챔스와 FA컵이 남은 상황에서, 그 지독한 부담감을 느끼기란······.
그래서 오늘 결정지어 줘야 한다.
선수들에게 반드시 승리하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괜히 부담감을 줄까 차마 그러지 못했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첫 시즌 3개의 타이틀을 따냈지만,
스스로가 천재가 아님을 알았다.
과르디올라가 말했던 것처럼.
본인이 엄청난 행운을 손에 쥐었을 뿐이라고 여겼다. 제퍼슨이 있었으니까. 솔직히 운이 좋았다. 그리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그는 실패하지 않았다.
하나 세 개의 우승컵을 코앞에서 놓칠 수도 있단 두려움은 그를 잠식해 가고 있었다.
트레블 또는 세 개 대회 모두 2위.
그런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면, 필마르크는 결국 여기서 사임을 할지도 모른다. 스스로 너무 두려워서 도망칠지도 모른다. 전 세계의 블루스들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야한다는 막중한 부담감.
필마르크는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떨리는 동공을 감추기 위해 선글라스를 썼다.
그런데도 몸이 떨리는 걸 감추지 못해 5월인데도 겨울 점퍼를 꽁꽁 동여맸다.
그렇게라도 선수들에게 자신의 부담감을 전염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부담감과 두려움에 몸을 떨 무렵.
필마르크는 저도 모르게 떨림이 잦아드는 걸 느꼈다.
아니,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Ruuuuun! Jeff!"
그것을 뭐라 해야 할까.
자기 팀 페널티 박스 부근에서 튕겨 나온 공을 잡고.
투욱!
"LEE Will, LEE Will Kill you!"
순간적으로 속도를 끌어올리며.
탓, 탓탓탓!
양옆에서 들어오는 수많은 태클들을, 요리조리 피해내면서.
전후좌우, 기괴한 각도로 미친 듯이 꺾어 버리면서.
풀악셀을 밟고 아우토반을 달리는 부가티처럼.
미친 듯이 드래프팅하는 스포츠카처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과격한 움직임으로.
"Ruuuuuun! Run! Run! Run!"
뒤쫓아 오는 수비수를 모조리 스피드 하나만으로 떨쳐내는 광경은.
그리고 마지막 순간 시원하게 골문을 갈라버리는 호쾌한 슈팅은.
"너희에게 어울리는 건 2부 리그 우승컵이지!"
"썩 꺼져 버려! 오늘 첼시가 우승 세레모니를 하는 날이니까!"
거의 76m에 이르는.
단독 질주에 이른 벼락같은 슈팅이 골문을 갈랐다.
그 순간에 필마르크는 역설적으로 몸을 떨었다.
두려움과 부담감으로 떨리는 게 아니다.
척추에서부터 짜르르 흐르는 전율, 희열, 감동.
"Run."
제퍼슨은 달렸다.
필마르크의 지시대로 미친 듯이 달렸다.
그리고.
"And······ Kill."
리버풀을 죽였다.
본인 스스로가 천재가 아님을 자각하는 필마르크의 전술 지시는 아이러니하게도 늘 상대팀에게 제대로 먹혀들고 있었다.
< 179. 묻고 더블로 가!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