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묻고 더블로 가! (2) >
스포츠의 목표는 승리다.
축구에서 승리는 간단하다.
오로지 득점을 해야만 한다는 가장 간단한 공식.
이기는 방법 중에는 여러 방식이 있다.
화끈한 공격력으로 밀어붙이거나,
재미를 버리고 오로지 실리만을 추구하는 안티 축구.
그러면 지금 과르디올라가 하는 방식은 무엇일까?
'끄응.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무의미한 패스라고 보일 정도로,
오로지 점유율에 집착하는 모습.
공의 소유권을 절대 내주지 않고, 지독하게 안정적으로 공을 지키고만 있는 것이다.
솔직히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예상외였다.
날 막으려던 모든 팀은 두 가지 방식을 택했다.
약팀들은 파이브백과 더블볼란치 등을 통해 지극히 수비적으로 나섰다.
강팀들, 특히 리버풀 같은 경우엔 오히려 라인을 올리면서 공격적으로 나왔다.
어차피 나를 못 막으니, 차라리 득점을 더 해서 이기겠다는 것이 리버풀의 판단이었다.
어느 것이 옳다고 할 수 없다.
두 가지 방식 모두 날 완전히 제어하는 걸 실패했으니까.
한데 맨시티의 방식은 두 가지 방식 모두 해당되지 않았다.
오로지 공을 돌리기만 한다. 패스를 통해 공격을 시도할 틈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패스, 패스, 패스.
만일 공격적으로 패스한다면, 캉테가 중간에 차단하고 우리가 역습으로 전환할 수 있을 터인데.
그것마저 할 수 없을 정도로 그저 자기들끼리 오로지 점유율만 중시한 패스를 주고받는다.
결국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얼마 없다.
"크윽!"
"헉······ 헉, 뒈지겠네. 진짜."
풀리시치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공을 뺏기 위해 쉼 없이 뛰어다니니 전반이 끝날 동안 체력 소모가 엄청나게 컸다.
이게 문제였다.
상대가 공격할 생각을 안 하고 볼을 돌리기만 하니, 우리는 어떻게든 공을 뺏기 위해 뛰고 또 뛸 수밖에 없다.
체력 소모가 급격하게 커진 건 당연한 일.
승리가 더 절실한 건 우리다.
우리가 패배하면, 리버풀과 승점 동점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에 반해 맨시티는······.
'승점 3점은 포기했다는 건가?'
무승부에 만족하겠다는 듯한 플레이.
우리는 계속 체력 소모를 크게 가져갈 순 없다.
나도 공을 잡기 위해 엄청나게 뛰어다닐 수만은 없다.
다음 경기도 중요하고, 그다음 경기도 중요하고.
감독도 내게 체력 관리를 철저히 하라고 말해 준 상황.
지독한 딜레마다.
지금 승리를 위해선 나라도 전방압박을 통해 공을 뺏어야 한다.
하나 그것도 쉽지 않다.
내가 달려들려고 치면, 일단 빠르게 공을 돌려 버리니까.
아무리 내가 빠르다고 한들, 공보다 빠를 수가 있겠는가. 하물며 맨시티 선수들은 모두 탑 레벨이다. 그들이 작정하고 패스만 돌리니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란 쉽지 않다.
'맨시티도 승점 5점 차야. 아직 1위를 포기할 때가 아닌데.'
하면 과르디올라의 목적은······.
후반 막판에 우리 팀이 지친 틈을 타 한 방을 노리겠다는 것.
물론 우리도 그때 맨시티의 뒷공간을 공략할 수 있다.
하나 그때까지 뛰고 있노라면, 내가 아무리 체력을 관리해도 지칠 수밖에 없다.
'상대를 곤혹스럽게 하는 건, 상대가 준비해 온 계획을 완전히 흩뜨려 놓을 때다.'
아마도 맨시티는 과르디올라로부터 확실히 전술적 지시를 받은 상태.
이 계획을 흩뜨려 놓는다면?
'흐음.'
축구엔 여러 방식이 있다.
멋지고 화려하거나.
또는.
조금은 더럽거나.
"이봐, 스톤스. 오늘 컨디션 어때?"
오늘은 후자를 선택해야 할 것 같다.
***
존 스톤스는 공이 오면 빠르게 패스를 전개했다.
툭, 툭!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맨시티는 과르디올라의 영향으로 몇 년 전부터 패스가 장착된 팀이다.
하물며 패스로 빌드업을 하는 게 아니라, 단지 소유만 하는 것이라면 패스가 끊길일이 없다.
지금 이 시점에서 맨시티는 거의 85%에 육박하는 패스성공률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 자식 표정을 보니 속이 뻥 뚫리는군.'
곤혹스러워하는 첼시 선수들.
특히 그중에서 제퍼슨의 얼굴을 보고 애써 웃음을 참았다.
매번 경기 때마다 그에게 고통과 좌절감을 맛보게 해 준 선수가 누구였나.
바로 제퍼슨 리가 아니었나.
존 스톤스는 그간 그에게 당한 수많은 치욕과 수모를 잊지 않았다. 분하지만 자신은 번번이 패배했었으니까.
한데 지금 저 표정을 보라! 난처함이 얼굴 가득 드러나 있지 않나.
현재 공 한 번 제대로 터치하지 못하고 있단 사실에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때였다.
"스톤스, 컨디션 어때?"
제퍼슨이 말을 걸어왔다.
스톤스는 순간 당황했지만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든지 말든지, 제퍼슨은 퍽 친근한 어조로 말을 계속 걸어왔다.
"오늘 너희들의 방식은 그냥 패스 놀이인가?"
"······."
"하긴. 그것도 나쁘지 않지. 원래 약팀은 패스부터 연습해야 하거든. 안 그래?"
"과르디올라가 확실히 선생님이군. 애들 수준에 맞춰 실전교육이라니! 암, 그렇고 말고. 어린 학생들은 패스부터 연습해야지. 우승도 불가능하니까 이런 식으로 공이나 돌리는 연습하는 판단, 나쁘지 않아."
"닥쳐."
"뭐, 그 정도 선수단 규모에 지레 포기하고 패스 연습만 하는 게 조금 좀스러워 보이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자고. 너희 수준이 딱 그 정도니까."
"쓰읍!"
스톤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퍼슨은 공이 오지 않아서 그런지, 플레이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 따라다니며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다.
처음엔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아예 옆에서 귀에 대놓고 속삭이는데 어찌 무시할 수 있을까.
심지어 유들유들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를 듣고 어찌 평정심을 유지하리요.
"오늘 헤어스타일 좋아 보이는데?"
"밥은 뭐 먹었냐?"
"맨시티 훈련장에선 밥 잘 주냐?"
"챔스 8강에서 떨어졌었지? 기분은 어때?"
"아, 우리는 곧 결승전이라서. 바빠. 이렇게 패스 연습할 시간도 없고 말이야."
끊임없이 쏟아지는 제퍼슨의 잡담.
뜬금없는 일상 얘기와도 같은 잡담이 있는가 하면, 팀 성적에 대한 조롱도 있었다.
'이 미친놈이 이렇게 말이 많았나?'
스톤스는 황당해서 말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것이 트래시 토크인 걸 짐작했지만,
경기 내내 끊이지 않고 아무 말을 마구 쏟아 내는 제퍼슨이 신기할 정도였다.
하물며 그것들이 하나같이 사람 신경을 툭툭 거슬리게 만드는 것들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스톤스는 제퍼슨의 말에 신경 쓰느라.
정확히 제퍼슨의 표정과 손짓을 미처 보지 못하고 있었다.
제퍼슨은 끊임없이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와중에도, 동료들과 눈을 마주치고 손을 흔들며 틈을 보고 있었다.
지루한 볼 돌리기와 제퍼슨의 트래시 토크가 계속 될 무렵.
오른쪽에서 공을 돌리던 베르나르도 실바가 순간 삐끗했다.
잠깐 볼을 받고 보내는 과정에서 약간의 오차가 발생.
그 순간이었다.
"압박해!"
지금껏 제퍼슨과 눈빛으로 마주하며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감각적으로 느낀 캉테가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캉테뿐만이 아니다.
조금은 내려와 있던 풀리시치, 중앙의 캉테, 하베르츠, 왼쪽 풀백 에메르송까지.
네 명이 순간적으로 달려들며 압박했던 것.
"침착하게 돌려!"
하나 그렇다고 한들. 전진패스를 할 수 없을 뿐, 애당초 볼을 돌리기만 하는 맨시티는 침착하게 뒤로 백패스 한다는 선택지가 있었다.
그 압박을 벗어나 유유히 흐르는 백패스는, 스톤스에게 도착했다.
"······!"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기회만 노리던 첼시 선수들의 압박 방향은 오히려 한쪽 길을 내주고 있었다. 마치 이쪽으로 패스하라는 듯이.
그것이 바로 스톤스가 위치해 있는 지점이었다.
그 순간, 달라붙어 있던 제퍼슨도 같이 뛰었다.
스톤스가 순간 기함했다.
언제 떠들었냐는 듯이 눈빛이 확 바뀌며 달려드는 제퍼슨.
스톤스가 당황한 건 자명했다. 그러나 그도 탑 레벨의 선수다. 여기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 지는 명확했다.
'공을 지킬 필요는 없다. 제퍼슨에게 가지만 않으면 돼. 그가 못 잡게, 그냥 밖으로 멀리 찬다!'
머리가 핑핑 돌아가며 빠른 상황 판단이 내려지고.
'몸으로 버틴다. 내가 튕겨 나가더라도 공을 걷어 내기만 하면 돼!'
판단은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진다.
하나 여기서 그가 간과한 점이 있다.
첫째, 트래시 토크에 계속 시달려 스톤스의 반응이 아주 미세하게 늦었다는 점.
"제기랄!"
가끔 그럴때가 있다. 몸의 근육이 생각과 동시에 아주 미세한 차이의 딜레마가 발생하는 것.
지금이 그랬다. 트래시 토크에 정신이 한쪽에 팔려 있던 터라, 그의 반응은 미세하게 늦었다.
둘째, 제퍼슨의 반사 신경과 스피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사실.
제퍼슨은 그 미세한 차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짐승과도 같은 사내였다.
'제기랄! 이대로 몸을 날린다! 내가 날아가더라도, 공은 걷어내야해!'
깔끔하게 볼을 걷어내는 건 실패다.
스톤스가 먼저 볼을 향해 갔고,
제퍼슨이 아슬아슬하게 닿으려는 순간.
스톤스는 작정하고 몸을 부딪쳤다. 튕겨 나가는 게 자신인 건 잘 안다. 그래도 몸을 부딪쳐 약간의 시간을 벌고, 공을 걷어 내면 그만이다.
그러나 스톤스가 간과한 마지막 중요한 마지막 사실.
제퍼슨은 애당초······ 공을 뺏으려는 생각이 없었다는 점.
빠악!
"끄으으윽!"
튕겨 나간 건 스톤스 본인이 아니었다.
가슴 부위를 잡고 고통스러워하며 쓰러진 건, 제퍼슨이었다.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상황.
"······뭐?"
스톤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슴을 부여잡은 채 뒹굴뒹굴 구르는 제퍼슨을 그저 허망하게 바라봤다.
"아니, 부딪치지도 않았는데?"
왜 쓰러져?
삐비비빅!
심판이 파울을 선언하며 다가올 때야 스톤스는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았다.
"아니, 헐리웃 액션입니다! 부딪치지도 않았어요!"
"저 녀석이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고? 뻔하지. 가슴을 때렸잖아?"
"아니, 그 무슨."
"PK는 아니야. 박스 바깥이었어."
스톤스는 억울했다.
하나 보는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생각을 했다.
'제퍼슨이 밀렸다고?'
'그럴 리가. 저 녀석이 반칙했겠지.'
'제퍼슨 표정을 봐. 저게 연기라면 할리우드 진출해야지.'
그간 사람들의 인식이 그러했다.
제퍼슨은 몸싸움에서 절대 먼저 나가 떨어졌던 적이 없었다. 헐리웃 액션으로 경고를 받았던 적도 거의 없었다. 화룡정점은 제퍼슨의 표정이 정말로 고통스러워 보였다는 점이다.
그런 점으로 미뤄 보아 심판은 프리킥을 선언했다.
만일 박스 안이었다면 PK였기에 VAR을 볼 수도 있었겠지만, 박스 바깥이었다.
스톤스는 어이없는 눈길로 공을 차기 위해 다가가는 제퍼슨을 노려봤다.
"너 지금 웃음 참고 있는 거지?"
"그럴 리가. 내가 지병이 있어."
"지랄하지 마. 너의 저번 도핑 테스트 결과를 봤는데? 그 강철 같은 몸이 아프다고?"
"흠. 오늘 아침에 뭘 잘못 먹었나. 가슴에 뭐가 얹힌 것 같네."
제퍼슨은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하게 웃으며 공 앞에 섰다.
그리고.
뻐어어어엉!
"Yeaaaaaaaaaaaaa!"
"Bules!"
전반 43분.
너무나도 깔끔하고, 완벽하게 낮게 깔아 차는 프리킥.
제퍼슨은 첫 볼터치를 프리킥 골로 연결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깔끔한 프리킥에 맨시티 선수들이 아연실색하는 사이.
스톤스에게 다가온 제퍼슨이 웃었다.
"어휴, 이제 얹힌 게 좀 내려가네. 속 시원하다 야."
물론, 얄미운 웃음이었다.
***
[첼시,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로 1대 0 신승!]
[제퍼슨 리, 환상적인 프리킥 골 작렬!]
[존 스톤스, '그건 헐리웃 액션이었고, 더러운 플레이였다. 제퍼슨 리에게 실망했다.']
[제퍼슨 리, '우리는 승리했다. 승리를 위해 뛰었고 싸웠다. 승리를 위한 과정 중에 벌어진 일이다. 맨시티에게 묻는다. 과연 당신들은 승리를 위한 축구를 했는가? 패스 연습을 위해 축구를 했는가? 경기장에 온 팬들이 경기력에 만족했으리라 보는가?']
[점유율 73대 27. 맨시티의 압도적 점유율, 하지만 슈팅은 단 2개.]
[펩 과르디올라 졸전이란 비난에 답하다. '우리는 FA컵 결승전을 대비한 여러 전술 시험을 시도했다. 물론 패배에 대해서는 나를 욕해라. 선수들은 내 지시에 충실했을 뿐이다. 챔피언스리그 진출과 FA컵 우승으로 팬들에게 용서를 구하겠다.']
[첼시의 우승 확률이 높은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과르디올라 감독은 '제퍼슨 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특별히 대단한 전술이 없는 첼시에서도 홀로 경기를 뒤바꾸는 압도적인 선수다. 첼시 감독은 제퍼슨을 가졌다는 행운에 감사해야 할 것,']
[첼시 필마르크 감독, 과르디올라의 발언에 화답하다. '나는 행운에 감사해하고 있다. 제퍼슨도 가졌고, 머리카락도 있으니까. 과르디올라는 둘 다 없지 않은가?']
***
올리버가 피식 웃었다.
"왜 이러신대?"
"몰라. 발끈했나보지."
"기사가 순화 되서 그런데, 과르디올라가 우리 감독의 전술적 특색이 뭐인지 물어봤는데 제퍼슨이 있으니까 행운이라고만 말했다는데?"
재밌는 이야기였다.
필마르크는 전술적으로 아주 대단하진 않지만,
자존심 하나만큼은 대단한 감독이다.
작년에 유로파와 FA컵, 리그컵을 들었고,
올해도 트레블을 노린다.
그만큼 자부심에 차 있는데, 과르디올라가 칭찬은커녕 그저 행운아라고 말하니 저런 발언은 했으리라.
"그런데 좀 웃기긴 하다."
"난 제퍼슨도 있고 머리카락도 있는데 펩은 둘 다 없다고 디스하다니."
"아, 우리 감독도 머리카락 요즘 빠지고 있지 않아? 나중에 후회할 텐데 이런 발언."
올리버는 키득키득 웃었다.
글쎄.
올리버야.
내가 미래를 아는데,
너도 나중에 머리가 좀 없던데······?
< 178. 묻고 더블로 가!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