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밸런스 패치 (2) >
[챔피언스리그 4강 1차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첼시를 1대 3으로 격파!]
[산티아고 차베즈 해트트릭! 경기 MOM 선정]
[첼시, 홈에서 3실점을 내주며 무너져.]
[2차전에 3골 이상이 필요한 첼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가능성은?]
[유럽 챔피언스리그와 프리메라리가 최소 실점팀 AT 마드리드. 최근 5경기 동안 2실점]
[2차전에 복귀하는 제퍼슨 리, 그의 어깨에 걸린 무거운 첼시의 운명]
[AT 마드리드 감독, '우리의 공격과 수비는 완벽하다. 그 어떤 것이 온다고 한들 뚫리지 않는다. 우리는 빅이어를 향해 간다.']
***
경기가 끝난 다음 날.
의외로 팀은 차분한 분위기였다.
물론 경기 직전, 뜨겁고 치열했던 분위기와 비교하면 확실히 처지긴 했다.
그러나 패배감에 찌든 느낌은 아니었다.
모두 차분한 얼굴로 훈련과 의료팀 테스트를 진행했다.
경기 직후 지친 선수에게 휴식을 얼마나 줄 것인지, 또는 컨디션이 최고인 선수에게는 어떤 훈련을 통해 그 컨디션을 유지할 것인지.
의료 분야의 내로라하는 닥터들이 코치진과 상담하고, 불편을 느끼는 선수들과도 일대일로 면담을 했다.
"선수들은 다 어떤가?"
"지친 선수들이 있지만, 부상자는 없습니다. 하베르츠가 미세한 근육통이 있긴 합니다만, 곧 회복될 겁니다."
필마르크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제 경기, 1차전에서 그나마 상대의 견고한 수비를 무너뜨렸던 건 하베르츠의 패스가 있던 탓이 컸다.
하나 그만큼 하베르츠도 평소와 달리 무리하게 뛰었다. 최전방과 2선, 3선을 미친 듯이 오가면서 미들라이커의 모습을 마음껏 뽐냈으나 상대 골키퍼의 신들린 선방과 견고한 수비에 번번이 막혔다.
"그런 날 있지 않습니까. 재수 옴 붙은 날."
"그건 너무하다고. 우리가 유효슈팅이 12개였어! 근데 그중에 하나만 들어가고, 놈들은 7개를 때렸는데 3골을 넣었지!"
"우리 수비가 일찍 경고를 받은 게 컸습니다."
"그 빌어먹을 심판 말이지."
여러 얘기가 나온 경기였다.
우선 첼시는 홈에서 3실점이나 내줬다.
2차전에서 무조건 3골 이상을 넣어야만 한다.
"우리 팀의 패인을 분석해 보자고!"
필마르크가 코치진과 전력분석관을 모아 소리쳤다.
첼시가 패배한 이유에는 여러 분석이 나왔다.
"심판 탓을 하기는 쪽팔리지만, 사실 심판 성향이 문제가 있어요."
"관대함과는 너무 멀었죠."
"프리미어리그의 심판과는 너무 달랐어요. 자그마한 충돌로도 파울을 불었고, 상대팀은 그걸 아주 잘 이용했죠. 특히 해트트릭한 산티아고 말이에요."
"터프하고 몸을 날리는 수비가 우리 수비의 장점이에요. 산티아고는 일부러 파울을 유도했고, 우리 센터백 뤼디거와 시셀도가 20분 만에 나란히 경고를 받았죠."
"이게 컸어요. 이후로 수비진이 위축되면서 기회를 내줬으니까요."
하나 이건 첼시의 실수였다.
심판의 성향을 미리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플레이하는 것도 주요 능력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아틀레티코는 완벽하게 경기를 운용했다. 심판의 성향을 일찌감치 이용했으니까.
"끙. 제퍼슨이었으면 똑같이 해 줬을 텐데."
"제프라면 영악하기 짝이 없으니까요."
"능글맞죠. 뻔뻔하게 상대 수비수의 반칙을 이용할걸요?"
"아니, 오히려 그놈 입담이면 수비수를 화나게 만들어서 레드카드 받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닐걸?"
코치진이 피식 웃었다.
"자, 집중하자고. 다음 패인은?"
"이것도 변명 같지만, 상대팀은 되는 날이었고, 우리는 안 되는 날이었다는 겁니다."
"안 되는 날?"
"우리가 기록한 유효슈팅은 12개, 아틀레티코는 7개죠. 두 배에 가깝습니다. 점유율도 55:45, 공중볼 경합도 우리가 앞서고, 패스성공률도 우리가 압도적입니다."
"내용만 봐서는 이겨야 하는 게 맞죠."
"하지만 상대 골키퍼의 평점이 몇 점인 줄 아십니까?"
"MOM인 산티아고가 9.6점, 골키퍼 오블락이 8.9입니다."
"저희 찬스를 혼자서 막아 버렸죠. 신들린 선방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어요."
"하지만 상대팀은 산티아고가 슈팅 7개를 때려서 3개를 넣었죠."
"이 자식도 미친놈입니다. 우리에게 제프가 있어서 체감이 안 됐지, 지금 아틀레티코에서 27득점을 올리는 놈 아닙니까?"
필마르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첼시에선 제퍼슨이 없었다. 그래서 그 많은 찬스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기회를 놓쳤다. 아무리 상대가 신들린 선방을 한다고 해도,
제퍼슨이었다면?
'넣었겠지. 그놈은 그런 놈이니까.'
그에 반해 상대팀엔 산티아고가 있었다.
침착하게 골문을 정확히 노리는 슈팅은, 보는 필마르크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제프도 제프지만, 저 자식도 미친 스트라이커야.'
그 순간에 갖고 싶단 욕심이 생길 정도였으니까.
"그럼 그것들이 패인이란 말이지? 우리가 그럼 2차전에서 그 패인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지?"
코치진은 동시에 대답했다.
그 모두가 예상했던 것처럼.
"제퍼슨 리만 있으면 됩니다."
"뭐라고?"
"제퍼슨 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변수를 만들어 내는 선수니까요."
"몇 번 오지 않는 기회? 그거야 제퍼슨이 있다면 다르죠.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내거나, 아니면 오는 기회들을 모조리 득점으로 만들 겁니다."
"심판 성향? 그게 무슨 문젭니까. 제퍼슨 그놈은, 스무 살짜리 어린 선수가 아니에요. 20년은 축구한 것처럼, 아주 노련해요. 오히려 심판을 갖고 놀 겁니다."
"골키퍼가 평점 9점을 받는다고요? 그것도 문제 안 될 거예요. 대포가 나오고 유럽의 성이 쓸모없어진 것하고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필마르크는 허탈하게 웃었다.
사실 제퍼슨이 있었다고 해도 1차전을 이겼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아틀레티코는 이길 만한 경기를 보여 줬으니까.
하나 경기를 지켜본 모든 사람이 90분 내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저 찬스에서 제프가 있었다면?'
'제프라면 저기서 어떻게든 공간을 만들어 냈겠지?'
'우트도 좋아. 하지만 제프였다면 결국엔 해낼 거야.'
'골을 넣든지, 아니면 수비를 혼자 돌파해 동료에게 어시스트를 해 주든지 간에 말이지!'
제퍼슨은 그런 선수였다.
"슈퍼 크랙(Super crack)이니까요."
홀로 경기를 뒤바꿀 수 있는 카드.
경기의 승부를 혼자서 결정해 낼 수 있는 선수가 바로 제퍼슨 리였으니까.
감독에겐 제퍼슨은 그런 선수였다.
갖은 수를 쓰고, 전술을 이리저리 바꿔 봐도.
도저히 이기기 어렵다고 느껴질 때.
어떻게든 경기를 바꿔 주는 한 명의 선수 말이다.
그랬기 때문에, 감독은 오히려 1차전 패배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다.
모든 패인을 분석했다.
그리고 해답도 나왔다.
"제프! 2차전 준비되어 있나!"
그리고 저 멀리서 선수들과 같이 몸을 풀던 제퍼슨이 씩 웃었다.
"감독님은 결승전 준비 시작하셔야죠!"
"미친놈!"
***
[제퍼슨 리! 오늘 컨디션이 아주 좋아 보입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그를 제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프리미어리그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는 제퍼슨 리! 지금 무려 45골입니다! 앞으로 득점할 때마다 역사가 바뀝니다! 오늘도 역사가 바뀔······ 오 갓! 역사가 바뀝니다! 제퍼슨 리! 리그 46호 골을 신고합니다!]
[맨유 선수들! 모두 고개를 떨어뜨립니다! Lovely Goal! 엄청난 골입니다! 마치 하늘에서 미사일이 쏘아지듯이 제퍼슨 리! 공중볼을 그대로 골문 안으로 박아 넣습니다! 엄청나네요! 첼시, 이대로 리버풀과 승점 3점 차이를 유지하며 1위 자리를 고수합니다!]
[제퍼슨 리의 플레이는 볼 때마다 경이롭습니다. 서전트 기록이 109cm리고 했죠? 도대체 그 누가 제퍼슨과 공중볼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단 말입니까?]
[리그 46호 골이란 역사를 만들어 낸 제퍼슨 리! 이제 50골까지 단 네 골이 남았습니다!]
[제퍼슨 리를 주위로 첼시 선수들이 몰려듭니다! 그들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리그 경기에 승리하고,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2차전을 준비하겠네요!]
***
사실 걱정하긴 했다.
챔스 준결승 1차전 패배로 우리 팀 사이에 혹여 패배감이 감돌까 봐.
한데 훈련장에 오니 전혀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
"그거야 다 너 때문이지."
내 의아한 물음에 우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2차전에는 네가 나오니까."
"그게 지금 분위기의 이유야?"
"1차전은 우리가 지긴 했지만, 다들 경기 내용에선 졌다고 여기진 않아. 우리 모두 이길 만한 경기였다고 생각해. 다만 그 상대팀의 골키퍼가 야신이나 다름없었고, 그 네 멕시칸 친구 있잖아? 그 자식도 골을 기가 막히게 넣더만."
"산티가 잘하긴 하지."
"아무튼, 우리 모두 경기 내용은 이겼다고 생각해. 2차전에서 얘들한테 겁먹을 게 없단 말이야. 심지어 너까지 돌아와. 그럼 뭐가 문제야?"
"흠. 이거 부담이 되는걸."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우트가 묘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뭐야, 그 눈빛?"
"네가 부담도 느껴?"
"당연한 일 아니야?"
"그런데 금방 감독한테 결승전 준비하라고 한 거야?"
"부담감을 느낀다고 해도 패배를 예감하는 건 아니니까."
"솔직히 이제 동료들이 날 이상한 놈이라고 여기지 않고, 널 이상한 자식이라고 여기는 걸 너도 인정하지?"
"웃기지 마."
"맞는 얘기야."
이상한 놈에게 이상한 자식이란 욕을 먹는 건 꽤 기분이 묘했다.
하긴, 우트는 최근 많이 바뀌었다.
솔샤르의 플레이를 완벽하게 따라 하면서, 그는 자신만의 플레이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시즌 초처럼 무조건 나에게 패스만 해 주는 스타일에서 이제는 진짜 스트라이커다운 녀석이 되었다.
그래도 가끔 날 향한 동경 어린 눈빛은 여러모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할 정도라서, 이상한 놈인 건 마찬가지지.
"근데 왜 웃고 있던 거야?"
"응?"
"카메라에 웃고 있는 거 잡혔잖아."
아, 그건 물론 오해다.
산티가 해트트릭을 터뜨리는 순간이었다.
근데 내 앞에 앉아있던 어린 애기가 우리 팀이 지는 것인데도, 그냥 골이 들어갔다고 까르르 웃는 게 아닌가.
그게 너무 귀여워서 그냥 웃었는데, 하필 카메라에 잡혔다.
덕택에 그 장면이 한국에서 꽤 화제가 됐다.
꽤 유명한 밈이 있지 않나.
한 유명 프로게이머가 팀이 지고 있는데 웃고 있던 장면 말이다.
그거하고 비교되면서, 2차전 AT는 긴장하라고 여러 반응이 나오더라.
"어떻게 팀이 지고 있는데 웃지?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이상한 놈 맞아."
***
"1차전에서 팀이 지고 있는데 웃고 있는 장면이 중계화면에 담겼습니다. 어째서 웃은 것이죠?"
경기 전날.
필마르크 감독과 함께 기자회견에 참여한 제퍼슨에게 가장 먼저 쏟아진 질문이었다.
제퍼슨은 잠깐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아시아에는 바둑이 있어요. 역사가 깊은 보드게임이죠."
"네?"
"그 보드게임은 엄청난 고수들이 많죠. 하수하고 게임을 하면, 압도적인 차이가 나기 마련입니다. 한데, 그 차이를 줄이기 위해 고수가 일부러 점수를 내주고 게임을 시작할 때가 있어요."
거기까지 말했던 제퍼슨이 씩 웃었다.
"1차전이 그런 겁니다. 점수 좀 내줘야······ 이제야 밸런스가 맞지 않겠어요?"
뚝!
키보드를 두드리던 기자들이 일순 멈췄다.
그만큼 생각지도 못한 발언이었으니까.
심지어 옆에 있는 필마르크 마저 입을 쩍 벌린 채 있지 않은가.
'1차전 패배를 누가 저렇게 말해?'
회견장에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떠올린 생각이었다.
저런 발언을 한 후에,
만일 진다면 돌아올 후폭풍은 어찌할 것인가?
한데도 제퍼슨은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마치 진다는 건 애당초 가정에 없다는 것처럼.
그리고 기자들은 그런 당당함이, 오히려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늘 그랬으니까.
무조건 3골 이상을 넣어야만 하는 상황에서도,
왠지 첼시가 지고 있단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좋은 경기 기대해 주세요. 재밌는 게임이 될 겁니다."
< 174. 밸런스 패치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