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밸런스 패치 (1) >
[첼시의 기세는 어마어마합니다. 31라운드에서 돌격을 외치는 아스톤 빌라를 2대 0으로 잡았습니다! 제퍼슨이 두 골을 터뜨렸습니다!]
[이후 벌어진 제퍼슨의 도핑 해프닝으로 인해 32라운드, 에버튼전은 다소 맥 빠지는 결과가 나왔네요. 아주 신기한 광경입니다. 제퍼슨이 무득점한 경기거든요! 일대일로 무승부로 끝났습니다.]
[33라운드, 스토크는 첼시를 향한 복수의 칼날을 겨눴습니다! 찰리 아담의아웃, 그리고 수많은 축구팬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던 이유는, 아무래도 첼시와의 저번 맞대결이 있었거든요.]
[그러나 첼시는 그런 스토크를 아주 잘근잘근 다져버렸죠! 5대 0! 힘을 숨기지 않은 제퍼슨이 무려 1골 4도움으로, 경기를 지배했습니다!]
[현재 제퍼슨 리는 리그 45골을 기록했습니다. 압도적인 득점 페이스입니다! 작년 기록을 벌써 깨 버렸죠. 시즌 초, 리그 50골을 기록하겠단 각오! 이제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첼시에게 남은 경기는 5경기! 경기당 1골 이상만 기록한다면, 전무후무한 기록이 다가옵니다!]
[현재 리버풀과의 승점은 3점 차이! 3위 맨시티와는 5점 차이! 두 팀 다 유럽대항전에서 모두 탈락했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건 리그밖에 없어요!]
[그에 반해 첼시는 FA컵 결승전과 다가오는 유럽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을 준비해야 합니다! 승점 3점과 5점 차이, 앞으로 남은 경기에서 충분히 뒤바뀔 수가 있죠!]
[아주 흥미진진한 시즌입니다. 필마르크 감독은 과연 공언한 대로 트레블을 가져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제퍼슨 리는, 시즌 80골을 넘길 수 있을까요?]
[이제 막바지입니다! 긴 시즌의 끝에, 과연 마지막에는 누가 웃고 있을지!]
***
구단별로 선수단에 관한 규정이 있다.
감독마다 팀의 규율을 위해 규정을 만든다. 가령 지각을 하면 벌금을 내는 규정 말이다.
그러나 벌금이 적다면 그걸로 징계가 될 순 없다. 그래서 일반인들의 시선으로는 '억'소리가 날 정도로, 웬만한 직장인의 반년, 또는 일 년 치 연봉에 가까운 벌금을 내는 경우도 왕왕 있다.
"감독이 벌금을 모아서 선수를 사려는 게 아닐까?"
"근래 빡세지긴 했지."
"너무 빡세졌는데?"
감독 사무실에 들어가 한바탕 깨지고 온 올리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감독은 본래 빡세게 규칙을 강요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즌 막바지에 이르면서 감독은 규칙을 강화했다. 벌금도 확 올려 버렸다.
지각 한번 하면 일반 직장인의 반년치 월급이 날아가는 건 우스운 일이다.
"얼마 내래?"
"일주일치 주급 깎였어."
"별로 안 되네."
"별로긴!"
"내 주급에 5분의 1이나 되나?"
"하."
올리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 지각했다. 듣기로는 어제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한잔했다던가.
"정말 조금만 마시고 집에 가서 쉬려고 했다니까. 그런데 웬걸, 그 술집에 클로이가 있더라고."
"그래서 오늘 훈련 있는 것도 모르고 신나게 놀았다?"
뭐라 반박하려던 올리버가 축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래."
"정신 차려, 이 친구야. 조금만 있으면 시즌 끝나는데."
"네 말이 맞아, 제프."
올리버가 순순히 인정했다.
뭐지?
이렇게 인정할 녀석이 아닌데.
의아한 시선을 느꼈는지 올리버는 한숨을 내쉬었다.
"웃긴 게 뭔 줄 알아? 그 술집이 런던에 있던 곳이라고. 근데 날 못 알아보더라. 축구선수 올리버가 아니라 어디 TV쇼에 나온 모델이나 배우인 줄 알더라고."
"잘생겼다는 반증이지."
"그만 놀려, 제프."
원래 나르시시즘 기질이 있는 올리버는 이렇게 말하면 혼자 좋아 죽는 반응을 보였었는데······, 확실히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나 보다.
"아예 축구에만 집중하게 다른 일들을 접을까 생각 중이야."
"모델을?"
"응. 회사도 가족한테 넘기고 말이지."
"허."
"조금이라도 신경이 분산되는 것 같아서. 운동에만 집중하면, 좀 잘되지 않을까?"
오호라.
올리버가 이 정도로 축구에 의지가 강해졌다니.
사실 올리버가 클로이를 만나는 건 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괜히 내가 참견할 일도 아니니까. 더구나 올리버가 이렇게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 모습을 보니 걱정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좋아, 올리버. 네 의지를 잘 느꼈어."
"엉?"
"무게 중심을 잡을 땐 하체만큼 중요한 게 없지. 오늘은 하체를 하러 가자."
"아니, 잠깐만!"
눈을 동그랗게 뜨는 올리버.
순간 동공이 흔들리고 이마 위로 식은땀이 맺히는 게 눈에 훤히 보일 정도다.
평소 나와 같이 운동하면, 그 강도가 어마어마하다는 걸 그간 몸소 체험한 올리버니까.
"너는 4강전 출전하니까 전술훈련해야지! 나 운동 도와줄 시간 없잖아?"
"무슨 소리야? 나 1차전 결장이잖아? 3일 동안 너랑 같이 운동할 시간 있어."
"······맙소사."
흠.
그렇다고 나라 잃을 표정까지 지을 일인가, 이게.
***
훈련장의 분위기는 꽤 치열하고 뜨거웠다.
그런 광경을 모두 카메라에 담고 있는 웹플릭스 다큐, '첼시, 리얼 블루스 시즌2'의 제작진들은 흐뭇하게 웃었다.
"확실히 우리 다큐가 다큐같지 않은 게 스토리가 너무 좋은 것 같아요."
조연출의 말에 메인 PD는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스토리가 있으니까 재미가 있네요."
"제퍼슨 주위로 스토리가 생생하게 살아난다는 말이지."
"올리버도 시즌 초반하고 비교하면 확실히 달라졌고요."
그들이 주목한 건 올리버였다.
시즌 초반만 봐도 카메라에 담긴 올리버는 눈살이 절로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술 냄새가 나는 건 기본, 훈련에 불성실했고 경기에 뛸 의욕도 없었다.
한데 지금은 어떤가.
"어차피 미국에서 인기 많은 다큐인데. 제퍼슨이 주인공처럼 잘 잡아주니까 말이지."
옆에서 제퍼슨이 잡아 주면서, 매 경기 나가고 싶어 하는 욕심까지 내고 있다.
그 확연한 변화가, 어쩌면 스포츠 영화에서나 볼 법했다. 이 장면이 다큐멘터리에서 꽤 큰 화제가 될 거란 걸 직감했다.
"올리버뿐만이 아니죠. 하베르츠도, 시즌 초에 왔을 때 하고 비교하면 달라요."
"흠. 저 친구도 시니컬하다가 지금은 은근히 제프를 의식하는 것 같지?"
"네. 제프가 미드필더로 몇 번 뛰었잖아요? 그때 이후로 그의 플레이를 의식해서인지, 아주 열심히 뛰더라고요."
"카메라에 표정 같은 거 잘 담아. 음악만 제대로 깔면 그럴듯하게 포장할 수 있으니까."
그들은 연신 훈련 장면을 담는 카메라를 돌렸다.
구단에서 자체적으로 찍는 영상은 훈련에 집중되어 있지만, 그들의 카메라는 선수들과 코칭스태프의 표정을 집중적으로 찍었다.
"잘하면 이것도 스토리 되겠는데?"
"네?"
"감독 표정에 포커스 잡아. 스태프들 대화 따고."
제작진이 다음에 주목한 건 바로 코칭스태프였다.
특히 지금 챔피언스리그 4강 1차전을 앞둔 상황.
하필이면 제퍼슨 리가 출전할 수 없게 됐다. 이때의 스태프들의 표정과 차후 벌어질 경기 결과를 교차하면, 꽤 재밌는 그림이 연출될 것 같았다.
"좋아, 샅샅이 찍자고. 올해 월드컵 있는 거 알지? 여기서 제대로 찍고, 월드컵까지 간다."
이번 다큐 시즌2로 대박을 터뜨리고,
월드컵까지 제퍼슨과 미국 대표팀의 다큐멘터리를 따내는 것이 그들의 진짜 목표.
그들에게 있어서 제퍼슨 리는 단순한 다큐멘터리 출연자가 아니었다.
현 시점에서 미국에서 가장 큰 문화적 파괴력을 지닌 말 그대로, 핵무기 그 자체였으니까.
***
감독은 기자회견장에서 당당했다.
"제퍼슨 리는 세계 최고의 선수입니다. 그의 공백은 뼈아프죠.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 팀은 모두가 세계 최고입니다! 아틀레티코는 세계 최고의 팀을 만나 울면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걸요?"
1차전의 핵심은 아무래도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것처럼,
내 결장 소식이었다.
하나 감독은 나를 띄워 주되, 다른 동료들이 섭섭하지 않게 팀의 사기를 끌어올리려고 노력했다.
아틀레티코의 감독도 담담하게 인터뷰를 했다.
"우리의 수비는 완벽하고, 공격진의 산티아고는 제퍼슨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대단한 선수입니다. 우리의 공격은 블루스의 수비를 찢어 낼 것이며, 저들의 공격은 우리의 수비 앞에서 질질 짜겠죠."
경기 시작 전부터 양 팀 감독의 신경전이 치열했다.
"제프. 혹시 나한테 해 줄 조언 같은 거 없어?"
나 대신 원톱 스트라이커로 출전하게 된 우트가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그에게 있어 커리어 최고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챔스 4강전 선발이니까.
조언이라······.
"음, 혹시 상대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면 어떤 기분이 들어?"
"뭐라고?"
"아니, 이상한 표정 짓지 말고.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정말 지기 싫은 상대가 널 보면서 괴로워해. 그럼 어떤 기분이야?"
"음, 나쁘진 않겠지?"
"자, 이제부터 자기 최면을 걸어. 상대가 고통스러워하고, 널 욕하고, 표정을 찌푸릴수록 네 기분은 좋아진다고."
"대체 그게 무슨······."
"세계 최고 스트라이커의 마인드 컨트롤 방법이야."
우트는 한숨을 내쉬다가 이내 내 말을 따라했다.
"어때?"
"음. 좋아. 상대가 고통스러워하는 게 나빠 보이진 않네. 기분 좋을 거 같아."
"그 마음 가지고 미친 듯이 뛰어. 골 넣어서 이기겠단 생각? 집어 치워. 골키퍼가 널 보면서 울고불고 욕하는 것만 떠올리라고."
좀 더 실질적인 조언을 기대했는지 우트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이해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너 일부러 나 긴장 풀어줄려고 그런 농담한 거야?"
"어?"
"역시 너란 놈은 진짜. 왜 이렇게 배려심이 깊은 거지?"
그게 아닌데.
진짠데.
그래도 쓸 만한 실질적 조언은 하나쯤 해 줘야겠다.
내가 아틀레티코를 분석한 내용이었다.
"수비벽은 완벽해. 솔직히 말해 유벤투스고, 인테르고 조직적인 수비에서는 아틀레티코에 비견이 안 돼. 하지만 확실한 건 이 친구들은 경직된 것처럼 조직적이야. 하베르츠의 창의적인 패스를 믿어, 그리고 무조건 골키퍼의 왼쪽으로 차."
"왼쪽?"
"몸의 중심이 미세하지만,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더라고. 왼쪽으로 때리면 역동작 걸릴 확률이 높아."
"그런 것도 분석해?"
"기본이지."
"우리 구단에서 분석한 내용에 없었는데?"
"나도 어제까지 영상 돌려보다가 깨달았어."
우트는 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친구. 반드시 득점해서 승리를 가져오지."
***
[우트, 오늘 몸이 가벼워 보입니다! 제퍼슨을 대신해 출전했음에도, 아무런 부담감이 없어 보이네요! 이 친구가 독일에서 뛸 땐 이 정도로 대단한 선수가 아니었는데요? 오, 맙소사! 이때 하베르츠의 끔찍하고도 아름다운 패스가 수비벽을 갈라 버립니다! 우트, 발끝을 갖다 댑니다! 맙소사! 마르크 우트! 전반 6분 만에 아틀레티코의 골문을 활짝 열어젖힙니다!]
[첼시, 시작부터 경기 흐름이 아주 좋은데요? 홈에서 무실점만 지켜 내도 성공적일 텐데, 득점까지 기록했습니다! 자, 이제 아틀레티코는 공격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죠?]
[아틀레티코에서 24골 9어시스트를 기록하고 있는 산티아고가 뜁니다! 산티아고! 산티아고! 산티아고! Oh! 맙소사! 산티아고의 화려한 드리블! 그리고······ 골문 구석에 낮게 깔리는 빠른 슈팅! 동점입니다!]
***
[맙소사! 산티아고가 해트트릭을 터뜨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원정경기에서 3득점을 올리며 엄청나게 유리한 위치에 올라서게 됩니다!]
[첼시는 분명 잘 싸웠습니다. 중앙에서부터 패스워크가 유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아틀레티코의 수비는 철벽과도 같았죠! 어떤 변수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해설자인 저뿐만 아니라 첼시의 모든 팬은 한 선수를 그리워했을 게 틀림없죠?]
[당연하죠! 제퍼슨 리는 저 두꺼운 수비벽을 깨부술 '변수'이니까요! 아, 지금 관중석에 제퍼슨 리가 있네요! 카메라가 향하는······ 으음?]
[무슨 일이죠? 팀이 1대 3으로 지고 있는데, 제퍼슨 리는 웃고 있어요!]
< 173. 밸런스 패치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