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주인공이 힘을 안 숨김 (1) >
축구는 과연 무엇일까.
누군가에는 직장이고, 어떤 이에게는 일상을 벗어나는 취미며, 한편으로는 인생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첼시의 40년 경력 전속사진사, 할리에겐 어떤 의미일까.
"내가 살고 싶은 이유겠군."
40년, 그 이전 블루스의 서포터였던 시절부터. 인생의 대부분을 첼시와 함께했다. 연애할 때도, 결혼할 때도, 아이를 출산할 때도, 그리고 그 아이가 장성해 결혼하고 손녀를 선물해 줄때까지.
그는 파란 유니폼을 입고 스탬포드 브리지에 있었다.
그래서 첼시는 그에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무언가였다.
하여, 그는 암세포가 췌장까지 번졌단 선고를 받았을 때.
병원 치료를 거부하고 축구나 보면서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겠다고 결심한 채.
2차전의 현장을 직접 찍기 위해 이곳에 왔을 때.
그는 결심했다.
"오래 살아야지. 오래. 진짜로 오래."
굳은 결심이었다.
왜 그런 결심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단 하나다.
"황홀하군."
황홀했다.
평생 축구장에서 사진을 찍었고,
가장 크고 극적인 순간에 함께 했지만.
황홀하다는 감정을 느낀 건, 단언컨대 처음이었다.
유벤투스 팬들은 지독하다.
울트라스라고 불리며 인종차별을 서슴지 않는 강성 서포터로 유명한 유베의 팬들이다.
그들이 오로지 제퍼슨을 향해 기립 박수와 환호를 쏟아 내는 그 장면은······.
온몸에 소름이 다닥다닥 올라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댔다. 절로 몸이 떨리는 광경이다.
쏟아지는 박수 세례.
그리고 그 앞에서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제퍼슨 리.
그 뒷모습, 백넘버 9번을 바라보며 할리는 찰칵, 사진을 찍었다.
기립 박수치는 유벤투스 유니폼의 물결 앞에,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감사해하는 제퍼슨의 그 모습은. 정말로.
"아름답군."
축구의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생산성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그저 공놀이에 불과한 스포츠가.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더 살아가야 할 의지를 다져 주는,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할리는 결심했다.
제퍼슨 리는 앞으로 미래가 창창한 선수다.
그는 몇 년이고 더 최절정의 폼으로 뛸 것이며, 이와 같은 황홀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을 더 보여 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할리는 그 모든 광경을 보고 직접 사진을 찍고 싶었다.
'살아야지. 오래오래. 지켜봐야지.'
축구란,
누군가에게는,
그런 존재였다.
***
[첼시, 유럽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에서 유벤투스 3대 1로 격파! 총합스코어 8대 1로 4강 진출!]
[제퍼슨 리 2골로 경기 MOM 선정]
[축구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퍼포먼스!]
[첼시 감독, '경이로운 선수의 경이로운 플레이다. 솔직히 말해, 그날 갈아입을 속옷을 준비하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유벤투스 경기 직후, 사리 감독 경질 발표]
(Photo) 유벤투스 팬들에게 기립 박수 받는 제퍼슨 리.
(Photo) 경의를 표하는 유벤투스.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제퍼슨 리.
(Photo) '슈퍼히어로 랜딩' 제퍼슨 리.
[유벤투스의 기립 박수. 제퍼슨 리, '경이로운 플레이'를 선보이다.]
[축구계의 원로들, 일제히 제퍼슨을 찬양하다.]
[펠레, '그런 건 보지도 못했다. 그는 괴물이다.']
[마라도나, '메시 이후에 그만한 선수가 나올까 싶었다. 그런데 웬걸, 이미 나왔다!']
[UEFA, 8강 2차전 제퍼슨 리의 활약에 약물 도핑 의혹]
[제퍼슨 리 '약물은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나, 그 자체다.']
[도핑테스트 결과, 제퍼슨 리 아무런 약물을 사용하지 않았다.]
['내추럴 몬스터 피지컬, 제퍼슨 리' 경고 누적으로 챔피언스리그 4강 1차전 결장]
***
매 경기가 끝나고 도핑 테스트를 치르는 건 이젠 내게 너무 익숙한 일이다.
다만, 그날 경기 직후 받은 도핑 테스트는 철저하다 못해 엄청났다.
두어 명의 검사관이 대동하던 것과는 달리 무려 일곱 명이 테스트 진행을 지켜봤다.
경기가 끝나고 나서 검사받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쉽진 않다.
당연히 결과는 음성 판정.
한데······.
[NFL 선수들의 비밀, '약물 도핑']
[지구상 0.1%의 피지컬? 약물로 이뤄진 피지컬. 익명의 NFL 선수 출신, '도핑은 누구나 하는 것, 그러지 않으면 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어디선가부터 이상한 기사들이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꽤 유명한 이야기다.
NFL 미식축구 선수들이 약물 도핑을 공공연히 한다는 내용 말이다.
물론, 결론만 말하자면 테스트 결과로는 아무런 혐의가 없다.
다만 NFL의 약물 도핑 테스트 기준이 타 스포츠에 비교해 무척이나 허술하다는 점. 불시 검문이 없다는 점, 시즌 직전에만 검사한다는 점.
이런 점 때문에, 그리고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괴물 같은 플레이가 경기에서 나오는 걸 이해 못 하니까 당연히 저거 '약물'한 거 아니냐! 라는 반응이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뭐, 그거야 그거고.
어쨌든 중요한 건, 내가 미식축구 선수 출신이란 점이다.
이것을 황색 언론들이 제대로 물었다.
'NFL은 암묵적으로 약물을 묵인한다더라.'
라는 얘기가 영국 뉴스에 뜨기 시작했고, 자연히 나 역시 거기서 자유롭지 못할 거란 뉘앙스의 찌라시들이 마구 생산됐다.
이런 분위기는 사실 예전부터 있었다.
문제는 유벤투스 2차전의 허슬 플레이 이후 제대로 불거진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움직임이냐는 것이지.
"뭔가 좀 대대적으로 움직이는데요?"
"작정하고 하는 것 같아요."
"저랑 디 파코, 아놀드 씨도 거론됐습니다."
트레이닝 팀도 어처구니없는 반응을 보였다.
내 몸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양반들이니까.
심지어 몇몇 언론은 내 트레이너들을 거론했다.
이들의 트레이닝은 무척 과학적이다.
식단까지 철저하게 조절하며, 고단백의 음식뿐 아니라 선수에게 꼭 필요한 비타민과 영양소까지 챙겨 준다. 문제는 이것들을 뭉뚱그려서 무언가 '약을 투여한다'라는 뉘앙스로 기사가 올라오고 있단 점이다.
이쯤 되니.
단순히 해프닝으로 넘어갈 사항이 아니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뭐, 걱정할 건 없다.
언젠간 이런 날이 올 줄은 예상했다.
한 몇 년 동안은 이런 플레이를 보여 주다가 의혹이 거세지지 않을까 싶긴 했다만.
다만 지금일지는 몰랐지.
띠링.
때마침. 기다렸던 전화가 왔다.
에이전시였다.
"제크 팀장님."
-제프.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어느 한 놈이 노골적으로 기사를 내더군요.
"누구죠?"
-NFL 사례를 들고 와서 계속 불에 기름을 붓는 친구가 있어요. 로베르토라고, 이탈리아 기자인데······ 유벤투스와 약간 연이 있는 친구에요.
"유벤투스가 기름을 붓고 있다는 겁니까?"
-더 조사해 봐야 하겠지만,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습니다. 유벤투스뿐만 아니라 제법 여기저기 연이 많은 기자예요. 또, 온갖 자극적인 기사로 유명한 친구기도 하고. 애당초 다른 구단에서 손쓴 건 아닌 것 같아요. 이 친구가 먼저 자극적으로 기사를 터뜨린 거고, 거기에 다른 몇몇 구단이 은근슬쩍 동조하는 느낌 같습니다.
흠.
그래도 다행이다.
괜히 다른 구단들이 일부러 나를 고꾸라뜨리려고 대놓고 공모한 것이면 말도 안 되는 스캔들로 커졌겠지만.
우선 기자 본인이 터뜨린 것에, 다른 구단들이 은근슬쩍 동조만 하는 거라면 배후가 있다는 건 아니다.
-이제 여러 공식자료 내놓고 반박할 예정입니다. 다만, 좀 문제가 있어요.
"문제요?"
-제프, 당신이 도핑하지 않았다는 건 확실히 증명할 수 있죠. 기자회견 한 번 열면 됩니다. 다만, 언제든 다시 불이 지펴질 수가 있어요. 가령 당신이 또 우승을 차지하고, 엄청난 플레이를 선보인다면?
"흐음."
-억울할 일이죠. 도핑이 아닌 걸 알면서도, 당신을 싫어하는 몇몇 세력들이 '도핑 아니냐'고 은연중에 불만을 토로할 수도 있으니까요.
확실히, 그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다만 다행인 건, 내가 아는 제크 팀장은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할 때, 그에 대한 해결방법까지 생각해 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이죠, 제프. 전 당신을 믿어요.
"고마운 이야기네요."
-쇼를 하나 하는 게 어떨까요?
"쇼요?"
-저명한 석학, 박사, 의료진, 축구계 스타, 코치를 다 모아 놓고 즉석에서 도핑 테스트를 한 뒤에.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측정하는 거죠. 대놓고 말이에요.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확실하다.
그건 확실한 퍼포먼스임과 동시에 추후에 또 불거질 도핑 스캔들을 무마할 명확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다만, 내가 확실히 보여 줄 수 있냐가 문제였다.
물론, 답은 정해져 있다.
"나쁘지 않네요."
-좋아요, 제프. 일단 진행해 보죠. 첼시 구단과 얘기 중입니다. 곧 반박 기사와 성명문이 발표될 거고, 고맙게도 미국 축구협회에서도 도와준다고 하더라고요. 내일이면 미국의 모든 스포츠 신문에 헤드라인으로 반박 기사가 다 올라올 겁니다.
에이전시는 작정하고 덤벼들었다.
일전에 스토크와의 징계 건보다 더 확실하게.
"절 믿어 줘서 고마워요, 제크 팀장님."
-하하하하! 제프, 설령 당신이 도핑을 실제로 했다고 한들 아무 상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당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까요.
난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저건 거짓일 확률이 높다.
정말 도핑이 맞다면, 그걸 보호하려고 한 에이전시도 뭇매를 맞을 수밖에 없다.
다만 말이라도 저렇게 한다는 것.
애당초 내가 도핑하지 않았단 확신 하에 저러는 것이다. 말로도 천 냥 빚을 갚는다는데, 저렇게 공언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확실히, 타고난 사업가 양반들이군.'
약간 '꾼'냄새가 난다지만.
뭐, 내 편이면 좋은 일이지.
***
그가 처음에 기사를 썼던 건 특별한 이유가 아니었다.
정말 순수하게 의문이었으니까.
"축구선수가 저게 가능하다고?"
그런 의문에서 시작됐다.
그러다가 약물로 생각이 옮겨졌다.
약을 하지 않았으면, 저런 플레이가 가능하지 않다.
라는 것이, 로베르토의 생각이었다.
하여 그는 1차전 기자회견장에서 제퍼슨에게 질문을 던졌었다. '혹여 약물 경험이 있느냐'라는 식으로 돌려서 질문했다.
당연히 반응은 좋지 않았다.
제퍼슨은 대놓고 그를 삼류기자라며 깎아내렸었다. 그는 분명 삼류기자의 쓸데없고 쓰레기 같은 질문이라 생각하고 기억도 못 할 것이다.
그러나 로베르토는 자신이 기자로서 어떤 대단한 선수라도, 펜대 한번 굴려서 자존심을 꺾을 수 있다는 묘한 선민의식에 차 있었다. 정말 제퍼슨의 생각대로 '삼류기자' 수준이었다.
하여 로베르토는 그때를 똑똑히 기억했다.
"흥. 스무 살 애송이 자식이 세계 최고니, 발롱도르니. 건방지기 짝이 없어."
그는 실룩 웃었다.
어느 정도 인종차별 기질까지 가진 그는, 제퍼슨이 잘나가는 꼴을 더 보기 어려웠다.
특히 그가 서포트하는 유벤투스가 8대 1로 처참하게 무너지면서, 속된 말로 배알이 꼴렸다.
그래서 도핑 테스트 결과로 무혐의가 떴음에도, 그는 NFL의 약물 관련 기사를 갖고 오면서 계속 불을 지피고 기름을 부었다.
"뭐 그 자식이 약물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지. 이미지란 말이야. 이미지."
도핑 테스트는 이미 음성으로 떴으니, 실제로 문제가 되진 않는다.
다만 이런 찌라시 같은 기사들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제퍼슨은 엄청난 활약을 펼쳐도 '약물'이란 단어가 연상되는 그런 이미지를 가지게 되리라.
이것은 추후 그가 발롱도르 수상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되리라.
로베르토는 단지 거기에 만족했다.
물론, 그에게 신문사 사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야이 개새끼야! 도대체 뭔 개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거야!
"네?"
-이 미친놈아! 너 고소당했어, 임마!
"그게 무슨?"
-그간 네가 쓴 악의적인 기사들 싹 다 모아서 피해자 54명이 단체로 고소를 냈다. 네 기사로 피해를 봤다고 피해 금액까지 회사에 고소하고, 이 자식아. 도대체 누굴 건드렸길래 갑자기 이 난리야?
누굴 건드렸는가.
그냥.
"축구선수 하나······."
물론 그는 제대로 몰랐다.
제퍼슨 리 뒤에, 북미 대륙의 스포츠를 장악한 에이전시와.
'미국의 영웅'이라며 무작정 지지하는 수많은 시민.
단일 규모로는 유럽의 협회에도 밀리지 않는 미국 축구협회.
그리고 그 선수에게 달라붙은 세계적인 스폰서십까지.
고작, 축구선수 하나였을 뿐이다.
< 171. 주인공이 힘을 안 숨김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