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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의 괴물 러닝백-170화 (170/258)

< 170. You're Fired! (3) >

사실 유벤투스가 1차전에서 우리에게 5대 0으로 지고, 그다음 인테르와의 리그 맞대결에서 패배해 3위로 떨어졌을 때. 사리 감독의 경질은 거의 확정적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경질 소식을 바로 발표하기엔 시기가 어정쩡했다. 어찌 됐건 새로운 감독이 오든, 수석코치가 감독대행을 하든, 챔피언스리그는 탈락이 매우 확실시되는 상황이 아닌가. 신임감독이 오자마자 챔피언스리그 탈락이란 불명예를 쓰는 건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다.

결국, 사리 감독이 마지막까지 모든 수모와 치욕을 안고 가게 된 것이다.

아마 2차전을 유벤투스가 이겨도, 극적인 4강 진출이 아니라면 경질이 확정적이리라.

하나 기적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온갖 행운과 치열한 노력, 그리고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힘이 작용하지 않는다면야.

"어째서 네가 선발이지? 직전 경기에서도 뛰었잖아?"

상대팀, 데 리흐트가 살짝 불안한 기색이 감도는 눈빛으로 물었다.

흠.

아마 내가 결장할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7일 전 풀타임에 3일 전에는 60분을 뛰었으니까.

"조금만 뛰다 들어갈 거야."

"조금만?"

"전반전만 뛰어도 너희 수비 박살 내는 건 일도 아니니까."

"······."

데 리흐트는 차마 나와 말싸움을 이어 갈 자신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좋은 판단이다.

괜히 신경전 펼쳐서 그쪽에 유리할 건 없거든.

"Wuuuuuua!"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에서는 첫 출장인 올리버가 강한 차징으로 디발라를 밀어 넘어뜨렸다.

"움직여!"

그리고는 바락바락 날 바라보며 소리 지른다.

자식.

챔스 경기에 뛰고 싶다더니, 아주 모든 걸 쏟아붓네.

올리버의 활약이 빛나려면, 적어도 그의 패스가 나에게 성공적으로 도달한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

"압박해!"

그러나 올리버의 패스 실력은 솔직히 말해 좋은 편은 아니다.

막말로 하베르츠의 패스를 받는 내게 성이나 찰까.

올리버는 분명 날 보고 패스를 찔러줬지만, 압박 때문에 정확성이 떨어졌다.

너무 길었다.

이대로라면 우측 터치라인 바깥으로 나갈 게 분명하다.

올리버의 얼굴이 일순 찡그려지는 게 보인다.

그러나 그 전부터 나는 달리고 있었다.

타앗!

"Yeeeeeeeeeeeeeeeaaaaa!"

러닝백에는 두 가지 스타일이 있다.

엄청난 방향 전환으로 수비를 피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스타일.

또 하나는 오로지 힘으로 달려드는 디펜스맨들을 우직하니 버텨 내며 전진하는 스타일.

내 스타일은 본래 전자였으나, 최근 근육이 붙고 키가 커지면서 후자에 가깝게 변했다.

하나 두 개의 스타일에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일반인의 시선으로, 아니 같은 운동선수의 시선으로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스피드'였다.

타다다다닷!

"수비라인 정돈해! 나가는 공이야!"

"스로인 직후 바로 공격 전개할 준비해! 크리스티아누! 측면으로 빠져 있어!"

수비들도 모두 벗어나는 공으로 판단.

공을 향해 달려가는 선수도 없다.

그저 풀백만이 스로인을 준비하듯이 천천히 갈 뿐.

그것은 명백한 실수다.

"미친!"

"저걸, 저걸 잡는다고?"

뛰고, 또 뛴다.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치고, 허벅지 근육이 미친 듯이 당기고, 아킬레스건부터 종아리, 허벅지, 골반까지 엄청난 과부하가 실리는 게 느껴지지만.

역설적으로 머릿속에선 아드레날린이 미친 듯이 솟구친다. 온몸에서 솟아나는 활력이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

투욱!

터치라인 동일 선상 바로 위.

벗어나려는 공을, 넘어지면서 발을 쭉 뻗어 올리며 안쪽으로 차올린다.

"!"

부심을 흘깃 바라봤다. 부심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날 쳐다볼 뿐, 깃발을 들어 올릴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됐다.

살렸다.

"제기랄! 잡아! 잡으라고!"

뒤늦게 수비들이 달려온다.

러닝백 특유의 몸동작이 필드에서도 빛을 발하는 순간이 지금이다.

엄청난 체중의 선수들과 끊임없이 부딪치고, 쓰러지고, 다시 부딪치고 쓰러지면서.

러닝백은 본능적으로, 그리고 반사적으로 넘어진 후에 일어서는 딜레이가 극도로 짧다. 단련된 것처럼. 그 과정이 물 흐르듯이 끊김이 없다. 마치 넘어지는 순간 동시에 일어서는 과정이 이뤄지는 것처럼.

"미친!"

"도대체 저 자식은 인간이 맞기나 해?"

비명을 내지르며 달려오는 수비수보다 먼저 공을 발바닥으로 긁어내며 달렸다.

그들보다 더 빠르게.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데 리흐트가 시야에 담기고, 그 뒤편으로 차마 아무런 욕설도, 함성도 내뱉지 못한 채 경악 어린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관중이 보인다.

무서울 정도의 침묵이 내 주위를 감싼 것처럼. 주위의 시끄러운 소리가 모두 차단된 것처럼.

나에게 보이는 건 오로지 공과, 전진해야 할 길, 그리고 골대다.

투욱!

왼쪽에서 들어오는 태클을 피하고,

툭!

오른쪽에서 들어오는 수비의 가랑이 사이로 공을 빼내며,

"제기랄!"

앞을 막는 데 리흐트를 슈팅 페이크로 한 차례 무너뜨리자.

일대일 찬스.

스트라이커에겐 일대일 찬스는 고통스럽다.

골을 넣어도 당연히 넣어야 할 일이었으며, 득점에 실패하면 엄청난 비난에 직면하는 그 부담감.

한데, 나는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았다.

왜냐면,

철럭-!

"씨이이이발!"

괴로워하는 골키퍼 얼굴을 정면에서 보며 즐길 수 있잖아?

***

[호날두가 최전방으로 움직입니다. 포메이션이 약간 바뀌었군요. 다이아몬드형 4-1-3-2입니다. 오늘 캉테와 하베르츠가 빠진 첼시의 중앙을 공략하겠단 의도로 보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공격도 공격이지만 수비에서 제퍼슨을 막아 내지 못하고 있어요.]

[아주 지독한 딜레마입니다!]

지독한 딜레마.

유벤투스는 딜레마에 빠졌다.

승리를 위해선 다득점이 필요하다. 전진하고 또 전진해야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럴수록 승리가 아니라 패배에 가까워진다.

"제기랄! 라인을 올리란 거야! 말란 거야!"

사리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물통을 차 버렸다.

대기심이 와서 구두 경고를 했지만, 사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막말로 잘릴 게 뻔한데 뭐가 무섭다고! 시이이이이이발!"

사리는 이 경기가 마지막 경기임을 알았다.

해서 후회 없이 싸워 보자고 결심했다.

질 때 지더라도, 마지막까지 화끈하게 공격을 퍼부으며, 그래도 잘 싸웠다! 이 말을 들으면서 퇴장하고 싶었다.

한데 이게 뭐란 말인가?

공격을 위해 라인을 올리면 제퍼슨이 그 뒷공간을 여지없이 쑤셔 버린다.

그 지독한 딜레마!

문제는 이게 사리만의 고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제퍼슨이 날뛰기 전에 득점해야 해.'

'그에게 패스가 가기 전에 끊어야 해.'

'최대한 어려운 패스가 가게 만들어야 해. 저기엔 하베르츠도 없어. 아스필리쿠에타도 없어. 제퍼슨과 시셀도, 오도이를 제외하면 모두 백업이야!'

'제퍼슨에게 공만 안 가면 가능하다!'

선수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 하베르츠라는 엄청난 패서가 출전하지 않았다.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러나 그들이 경악하며 낙담하는 건 단 한 번이었다.

올리버의 패스는 분명 틀려먹었다.

그가 패스하려는 순간, 마투이디와 퍄니치가 순간적으로 압박했다. 하여 패스는 턱없이 길게, 분명 아웃되는 공이였다.

모든 패스를 차단할 수는 없다. 하면 이런 식으로 압박해 패스의 길을 흔들리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일견 성공적이었으나.

"어떤 미친 새끼가 그딴 공을 잡아서 골로 연결해? 어떤 미친 새끼가!"

그 미친 새끼가 상대팀에 있었단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위닝 멘탈리티가 점차 사라지고, 지독한 패배의 기운이 그들 사이에 감돌 때.

전진하던 아론 램지의 패스가 끊겼다.

올리버가 강한 차징으로 아론 램지를 밀어 넘어뜨린 것.

아론 램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딪치는 순간 옆구리를 찌르는 손가락에 숨이 턱 막히며 집중력이 흩뜨려졌다.

"비겁한!"

"닥쳐!"

올리버는 뻔뻔하게 소리치고는, 그대로 제퍼슨에게 패스를 찔러줬다.

이번에는 긴 패스가 아니라 제퍼슨이 달려 나가는 방향으로 정확하게 보내는 패스.

"제기랄!"

"물러나! 물러나! 물러나서 지켜!"

유베 선수들의 동공이 흔들렸다.

제퍼슨에게 공이 갔다.

그것도 등진 채 받은 것이 아니라, 달리는 와중에 받은 패스.

스피드는 이미 절정에 도달하고 있고, 제퍼슨은 그 엄청난 스피드 속에서도 소름 돋을 볼 컨트롤을 보여 준다.

하면, 또 뭐겠는가?

그나마 다행이란 건 수비수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점. 마투이디가 포백을 보호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리를 지키며 수비했다간 타이밍을 놓친다!'

마투이디는 그렇게 생각했다.

1차전에서도 그랬다. 자리를 지키는 수비에도, 제퍼슨은 망설임 없이 드리블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을 훔쳐서 골을 넣었다.

지키는 수비로는 어렵다.

'차라리 내 몸이 부서지더라도 적극적으로 달라붙는다.'

경고?

까짓것 받는다.

몸 어디 하나 축나는 거?

겁은 나지만, 그도 어디 가서 몸싸움에서 밀리는 선수는 아닌 터.

그런 생각은 마투이디만 한 게 아니다. 보누치가 최종 수비수 역할을 맡고, 데 리흐트 역시 이번만큼은 차라리 같이 죽겠단 심정으로 뛰쳐나왔다.

"Wuuuuuuuuuuuua!"

무시무시한 광경이다.

건장한 선수 둘이, 서로 죽겠단 각오로 적극적으로 달려오는 광경은.

일반적인 선수라면, 여기서 뒤로 공을 돌리거나 크게 돌아가거나 하는 식으로 벗어나리라.

하나.

그 순간 제퍼슨은 웃었다.

엄청난 압박감 속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두 명이군.'

120kg가 넘는 디펜스맨 4-5명이 에워싸는 게 기본일 터.

제퍼슨의 신체는, 고교 미식축구 시절 그런 압박감에 익숙해진 신체였다. 외려 알 수 없는 고양감이 솟구쳤다.

세 선수가 필드 위에서 얽혀지는 순간.

투욱!

공이 먼저 허공으로 떠올랐다. 제퍼슨이 수비 뒤로 공을 넘긴 것.

그러나 이미 달려들고 있던 수비 둘은 멈추지 못했다. 뒤돌아 공으로 향하지 못했다. 관성 때문에, 그대로 제퍼슨과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끔찍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분명 다칠 수도 있는 바디체크.

한데, 그 순간 '날았다.'

"······!"

대체 그걸 뭐라 표현해야 할까.

제퍼슨은 하늘을 날았다. 달리는 속도 그대로, 바닥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허리를 살짝 숙이며 달려드는 마투이디의 머리 위로.

"미친!"

누군가 질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몸을 붕 띄워, 상대의 머리 위에서 한 차례 텀블링하듯이 돌아서.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져 착지하는 '슈퍼히어로 랜딩'처럼.

누군가는 짐승과도 같은 반사 신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어디선가는 '허슬 플레이'라고 부르는.

미식축구에서도 오로지 괴물 중의 괴물들이 아주 이따금 보여 주던, 상대 머리 위로 뛰어넘는 플레이.

그 플레이가 필드에서 펼쳐진 순간.

"······."

아무도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못했다.

완벽한 착지, 그리고 다시 공을 잡고 드리블.

마지막 남은 수비는 자신이 본 광경을 믿지 못해 얼떨떨했다. 그건 모든 선수가 마찬가지였다.

화려한 플레이 뒤로, 제퍼슨은 어쩌면 너무 허무하게 두 번째 골을 집어넣었다.

뻐어엉!

그러나.

함성도, 야유도 그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침묵과 정적.

제퍼슨은 골을 넣고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 그제야 시선을 옮겼다.

오로지 공과 그저 골대에만 집중했던 터.

제퍼슨은 그제야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

경악과 괴물을 보는 듯한 감정이 뒤섞인 시선들.

첼시 선수뿐 아니라 유벤투스 선수도 그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어쩌면, 질투나 시기, 또는 자괴감이 아니었다.

'경외감'이었다.

짝, 짝짝.

누군가 손뼉을 쳤다.

관중석이었다.

짝짝짝짝······짝짝짝!

하나둘, 손뼉 치는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Wuaaaaaaaaaaaaaaaaaa!"

"------!"

짝짝짝짝짝짝짝!

어느새 유벤투스 유니폼을 입고 있는 유베의 팬들이 일어나 손뼉을 쳐댔다. E석에서 N석으로, N석에서, W석으로, W석에서 S석까지.

모든 관중이 기립해 손뼉을 쳤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짝짝짝짝짝짝짝!

오로지 환상적이며 믿기지 않는 플레이를 보여 준 '상대팀'의 제퍼슨 리를 향해서.

축구장에서 볼 수 있는 경이로운 장면중 하나가.

제퍼슨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 170. You're Fired!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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