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슈퍼히어로의 조건 (4) >
필드로 나가는 터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이곳이 익숙했다.
맨유에서 뛰던 시절 수없이 지나온 곳이니까.
한데 그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지 못 했다.
'제퍼슨 리.'
그 이름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세상은 그를 두고,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스트라이커라는 별칭을 붙여 줬다.
혹자는 프리미어리그의 왕,
한쪽은 캡틴 아메리카, 다른 한쪽은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란 수식어까지.
그의 플레이를 봤다.
확실히, 그렇게 불릴 만했다.
'하지만 세계 최고는 나다.'
그건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자신감.
시간이 지나 기계적인 훈련으로도 무너지는 피지컬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발이 느려지며, 어깨 싸움에서 밀리고, 슈팅도 부정확해졌지만.
호날두는 세계 최고라는 프라이드로 똘똘 뭉쳐 있었다.
'더구나, 건방진 자식이지. 애당초 날 좋아하지 않아.'
저번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었을 거다.
뒤늦게 봤다.
제퍼슨이 메시를 칭찬하고, 호날두란 이름을 듣고 비웃음을 내보이던 그 인터뷰.
똑똑히 기억했다.
그런 수모를 당하고 맞대결에서 져 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호날두는 이를 으득 씹으며 분노를 토해냈다.
"아직 네가 세계 최고가 되기엔 멀었다."
그때 필드의 뜨거운 함성이 어렴풋이 들려올 때.
왼쪽의 제퍼슨과 눈이 부딪쳤다.
다소 복잡한 심정이 어린, 약간의 적의가 담긴 눈빛. 제퍼슨이 살짝 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해 왔다.
"안녕, 크리스티아누."
"반가워. 소문은 잘 들었지. 다음 발롱도르가 유력하다고 했던가?"
"이제 받을 때 됐지."
"어련한 자신감이군. 내가 몇 번 타 봐서 아는데, 그 정도로는 부족해."
"글쎄. 트레블에 월드컵 우승까지 생각하면?"
호날두는 순간 말을 잃었다.
두 눈에 담긴 또렷한 빛이, 결코 허풍이나 과장이 아닌 걸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불현듯 이 친구에 대한 적의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솔직히 말해 그가 자신의 은퇴 이후 최고의 축구선수라고 부를 건 당연한 일이다. 지금까지 보여준 센세이셔널한 활약은, 자신, 그리고 메시가 보여줬던 것들이니까.
물론 지금은 본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어쨌거나 호날두는 저 과도한 자신감과 그 자신감에 대해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눈빛에 솔직히 감탄하고, 반했다. 적의와 새로운 라이벌의 등장에 느끼던 위험이 조금은 사라진 기분이었다. 이왕이면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든 것이다.
그때, 제퍼슨이 물었다.
"혹시 기억 나? 한국에서 친선경기 나가지 않고 벤치에 있던 거?"
호날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언제 한국에 갔던가 했더니, 떠오르는 건 불과 몇년 전의 기억.
"뭐? 아······ 그렇군. 혹시 그것 때문에 날 싫어하는 거야? 너도 알잖아. 프로는 체력관리 해야한다는 거."
"······."
하나 호날두는 친해지고 싶단 생각을, 그저 생각 선에서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에 제퍼슨의 눈동자는 더 적의로 타올랐으니까.
***
유벤투스를 대표하는 건, 흔히 말하는 수비력이다.
인테르가 최근 빗장수비로 유명해졌지만, 원조는 유벤투스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감독은 수비를 공략할 방법을 많이 연구했다.
그러나 난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인테르 때 그랬던 것처럼.
'미국인은 문을 열쇠로 열지 않지.'
솔직히 말해,
지금 내가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정의할 수 없다.
희열이라면 희열이고, 분노라면 분노일 것이며, 뜨거움이라면 뜨거움이리라.
한때 호날두는 내가 바라던 영웅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 노쇼 사건 때, 현장에서 느낀 배신감은 말할 수 없던 종류였다. 알 수 없는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었다.
그래도, 혹시나 내가 모르는 일이 있을까 봐 터널에서 물어봤다.
그런 그에게.
그때의 사건은 수많은 사건과 스캔들처럼 흔히 벌어질 수 있는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했다.
당시 경기장에 아버지 손을 잡고 모여 기대에 찬 얼굴로 호날두를 외치던 수많은 어린아이들에게는 평생 갈 배신감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깔끔하게 미련을 접었다.
호날두는 축구 선수로서 정점에 오른 대단한 인물인 걸 인정하고, 존중한다.
하지만 단지 거기까지다.
우리는 필드 위에서 상대편으로 만났고,
나는 반드시 상대편을 이겨 내기 위한 스포츠에서 뛰고 있다.
단지 그것이다.
투욱!
공이 아름다운 궤적으로 내게 날아오고.
발바닥으로 쭉 드래그하며 전진하는 동안,
내 모든 감각을 동원했다.
"······!"
있는 힘껏 내달렸다. 미친 듯이 뛰어갔다.
내 발끝의 볼을 마치 내 신체인양 인식하며.
몸에 각인된 수많은 감각을 느꼈다.
'왼쪽.'
바람의 방향이 바뀐다. 상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다. 왼쪽에서 태클이다.
툭.
공을 오른쪽으로 빼내며 피한다.
'앞, 뒤.'
나만 빼고 주위가 느리게 흘러간다.
아니, 그런 기분이다.
마치 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앞에서 험악한 표정을 짓는 수비수를 몸을 비틀며 밀어낸다. 뒤에서 압박하는 미드필더의 발끝을, 다리를 좁혀 공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는다.
'그리고 오른쪽.'
길은 반드시 있다.
오른쪽이 비어져 있다고 인식한 순간.
괴성인지, 이탈리어로 된 욕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오며.
"---!"
또 다른 수비가 그 길을 막는다.
길이 없다?
그럴 리가. 축구는 간단한 스포츠다.
뻐억!
없으면 뚫어내면 된다.
"끄윽!"
상대가 신음을 내지르며 쓰러져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심판의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는, 인플레이. 오로지 공만 보고, 뚫고, 파고들고, 상대를 부순다.
단지 그것뿐이다.
"제----프!"
지금 나의 머릿속엔 딱 하나만 존재한다.
오로지 승리.
한 선수에 대한 배신감이나 적의는 그저 그런 승리를 위한 원동력일 뿐.
단지 그것뿐이다.
데 리흐트와 조르지 키엘리니. 두 수비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 그 어느 때보다 정확하고, 완벽하게 공을 컨트롤했다.
공은 나와 떨어진 사물이 아니다.
내 발끝으로 연결 된 또 다른 신경체다. 그렇게 여겨야하고, 그렇게 다뤄야한다. 그것이 공을 다루는 방법이다.
"······!"
"개자식! 미친놈!"
내가 플레이를 잘하고 있는가?
그러면 상대의 표정과 감정을 살펴라.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살아난다.
아드레날린이 퐁퐁퐁 쏟아진다. 손끝, 발끝의 감각이. 살짝 스치는 바람에도 예민하게 느껴진다. 그 모든 감각을, 오로지 공을 통제하는 데에만 쏟아붓는다.
"LEE Will, LEE Will Kill you!"
그 응원가 문구가 들려오는 순간.
보였다.
날 둘러싼 네다섯 명의 수비수들이, 하나같이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음을.
나는 그 상황에서도 본능적으로 공을 빼내며.
정확하고, 그리고 완벽하게.
또는 치명적으로.
"제-------프!"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서늘한 감각을 느끼며.
왼발로 땅을 딛고.
오른발을 쭉 빼다가.
내 몸의 모든 힘을 허벅지와 종아리에 실었다. 말 그대로, 심장까지 쥐어짜며.
뻐어어어엉!
얹혔다.
발등에 소름 돋을 정도로 완벽하게.
"----------!"
모든 사람이 미쳐 버린 것만 같다.
내 이름을 외치고, 부르짖는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땅이 울리는 것만 같았고, 동료들이 달려와 날 마구잡이로 껴안다 못해 덮친 채 쓰러졌다.
"미친놈! 넌 정말 미친놈이야!"
"네가 무슨 짓을 한지 알아?"
"오, 제-프! 혼자서 8명을 제쳤다고! 센터서클에서 박스까지!"
"내 평생 그렇게 소름 돋는 광경은 보지 못했어!"
"오, 신이시여, 아니 제프시여!"
흠.
좀 멋지게 골을 넣은 거 같은데?
***
그걸 뭐라 표현해야 할까.
필마르크는 테크니컬 에어리어에서 미친 듯이 소리쳤다.
"이 개자식! 개자식! 미친놈아!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것이냐!"
그것이 방금 골을 넣은 본인 팀의 선수에게 하는 말로는 적합한가. 혹은 감독이 미친 것일까.
하나 필마르크는 진심이었다.
"사랑스러울 정도로 완벽한 스트라이커라니!"
그는 스트라이커란 포지션을 사랑했다.
축구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고, 결국엔 승리를 만들어 내는 영웅과도 같은 포지션.
영화 속 히어로처럼, 결정적인 순간 팀을 구하는 위치.
필마르크는 보았다.
스트라이커가 할 수 있는 절정의 플레이를.
센터서클부터 그가 질주하면서 제쳐 낸 유벤투스의 선수가 정확히 8명이다.
골키퍼와 스트라이커, 그리고 왼쪽 윙어이면서 수비에 가담하지 않은 호날두까지, 셋을 제외한 모든 선수를 바보로 만들었다.
폭발적인 스피드, 역동적인 유연성, 고난이도의 테크닉. 그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어어?'하는 순간 유벤투스는 박살이 났다.
화려하다 못해, 경이롭고 전율이 일어나는 장면이었다.
때문에, 그는 제퍼슨이 미치도록 미웠다.
만일 제퍼슨을 자신이 지휘하지 못하게 된다면?
가령 제퍼슨이 팀을 떠나거나, 자신이 경질이라도 된다면?
"세상 그 어떤 스트라이커를 봐도 만족 못하는 몸이 되어 버렸잖아! 이 개자식아!"
애정 섞인 욕설을 격렬하게 토해 내며.
필마르크는 연신 다시 소리쳤다.
"제퍼슨에게 공 줘! 저 자식이 오늘 마음껏 날뛰게 해!"
필마르크는 오늘 특별한 전술을 준비하지 않았다.
유벤투스의 빗장수비?
이미 제퍼슨이 인테르를 통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않았던가.
"막아 보라지! 어떤 강철문이 핵무기가 폭발하는데 멀쩡해?"
실제로 유벤투스는 제퍼슨 리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최우선 경계목표였다. 때문에 제퍼슨이 달리기 시작했을 무렵. 그에게 달라붙은 선수만 무려 세 명이었다.
하지만 첼시는 이제 하나의 팀이었다.
누군가는 첼시를 보고 제퍼슨의 원맨팀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뛰어-! 우-트! 우트!"
제퍼슨은 원팀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일 뿐.
첼시는 하나로 이뤄진 팀이었다.
제퍼슨이 선수 세 명을 끌고 들어가는 사이, 우트는 귀신처럼 움직여 측면을 타고 질주했다.
사람들은 제퍼슨의 폭발적인 스피드와 믿기지 않는 피지컬에 주목한다. 그러나 더 무서운 건, 그런 축복받은 신체를 지니고 있음에도 축구에 있어서 만큼은 세계 최고의 천재라는 것이다.
제퍼슨에게 몰린 수비. 그리고 뒤늦게 우트에게 쏠린 시선.
그 모든 걸 제퍼슨은 필드 안에서 뛰면서 파악했다.
투욱!
제퍼슨의 발끝에서 터져 나오는 날카로운 패스.
오른발로 시작되는 아웃프런트 패스가, 모두가 예상했던 우트가 아닌, 길게 휘어져 중앙으로 휘어져 하베르츠에게 닿았다.
"맙소사!"
"열렸잖아! 열렸잖아!"
완벽하게 열린 모습.
물론 수비가 있었지만, 달려드는 하베르츠와는 거리가 있다. 이대로 중거리를 때리면 위험하다.
"제기랄!"
그것을 파악한 데 리흐트가 몸을 날리듯이 던졌다.
하나 늦은 것일까.
이미 공은 하베르츠의 발끝을 떠났다.
뻐어엉!
하베르츠는 패스로도 유명하지만, 레버쿠젠에선 한 시즌 20득점을 기록했을 정도다.
그의 발리 슈팅은 매섭고, 날카로웠으며, 빅이어를 꿈꾸는 유벤투스에 치명적이었다.
"이게 바로 축구다! 이 유치한 토리노 촌놈들아! 미국산 핵무기에 고개를 쳐박으라고!"
그리고 빅이어를 향한 첼시의 꿈이,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는 걸 의미했다.
***
경기는 2대 0로 첼시가 리드했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미친 새끼."
"도대체 저 자식은 뭐야?"
"대체 저 스킬은 뭔데!"
"사람이 저렇게 움직일 수가 있냐고!"
유벤투스의 원정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제퍼슨은 그야말로 유벤투스를 상대하는 데 있어, 화려한 스킬을 쓰지 않았다.
우직하니 몸으로 밀고 들어갔다.
달려드는 수비수와 끊임없이 경쟁했고, 수비수들은 마치 트럭에 부딪친 사슴마냥 괴성을 질러 대며 쓰러졌다. 몇몇 이들이 파울이라고 소리쳤지만.
"닥쳐! 제퍼슨은 그냥 움직였는데, 허약하기 짝이 없는 너희 레이디들이 비명을 질러 대는 거니까!"
"약해 빠진 놈들아! 그래 놓고 공이라도 찰 수 있냐!"
압도적인 홈팬들의 응원에 항의는 묻히기 일쑤였다.
[제퍼슨 특유의 고스트 스텝이 펼쳐 나옵니다!]
"미쳤군!"
데 리흐트는 질겁했다.
분명 눈앞에서 막으면서 견제하고 있었건만.
어느 한 순간 시야에서 훅 사라지는 게 아닌가.
정신을 차려 보니 제퍼슨은 대각선으로 괴상한 스텝을 밟더니 단숨에 공간을 파고들고 있었다.
"대체! 그 족보 없는 기술은 뭐야!"
난생 처음 보는 러닝백 특유의 스킬.
그걸 필드에서 구현해 내는 제퍼슨에게 그저 소름이 돋을 뿐이었다.
뿐만 아니다.
선수 두세 명이 순간적으로 질주하는 제퍼슨 앞을 에워싼다.
그 순간에.
투욱!
[아아! 제퍼슨 그대로 백스텝을 밟습니다! 엄청나네요! 온몸에 딜레이가 걸릴 게 분명할 텐데, 아주 자연스럽게 동영상을 역재생하는 것처럼 공을 끌고 빠져나옵니다! 수비수들! 그대로 역동작에 걸려 허무하게 무너집니다!]
눈앞에서 질주를 멈추고, 역재생하는 것처럼 공을 뒤로 빼내는 백스텝 스킬을 보고 유벤투스는 기함했다.
마치 시간을 뒤로 되돌리는 착각을 주게 할 정도로.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기 짝이 없지 않나.
[공은 이제 유벤투스에게 향합니다! 긴 패스가 왼쪽으로 달려가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게! 아! 제퍼슨이 내려와 수비에 가담합니다!]
더구나 오늘의 제퍼슨은 평소와 달랐다. 최전방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수비가담도 철저했다. 아니, 정확히는······.
"컥!"
호날두가 공을 잡았을 때만 수비에 가담했다.
제퍼슨의 강력한 바디체킹이 호날두를 순간적으로 날려 버렸다.
터치라인 근처에서 충격을 받은 호날두는 비틀거리며 카메라 쪽으로 우당탕탕 넘어졌다.
온몸에 치미는 충격과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에 수치심이 불쑥 치미는 가운데. 호날두는 이를 씹으며 소리쳤다.
"너 이 자식······!"
"피곤하면 벤치로 가서 쉬지 그래? 저번에 서울에서 했던 것처럼. 몇 년 전이니까 기억날 거 아니야?"
호날두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너하고 무슨 상관인데? 넌 미국인이잖아?"
제퍼슨이 씩 웃었다.
"내 마음이야, 이 새끼야."
< 166. 슈퍼히어로의 조건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