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165화 (165/258)

< 165. 슈퍼히어로의 조건 (3) >

"이로써 드디어 논문을 완성할 수 있겠습니다."

율리아겐은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논문이요?"

"당신의 신체도 부상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됐으니까요."

"······우리 팀에도 독일 선수가 있어서 느끼는 것이지만, 독일인들은 애당초 DNA에 유머감각이 없는 것 같아요."

"흠흠."

율리아겐은 다소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이 모습을 한쪽에서 지켜보던 또 다른 트레이너, 디 파코가 빙글빙글 웃었다.

"말이 좀 나올 수도 있겠네요. 하필 A매치 직전에 부상이라니."

"조금 그렇긴해요. 딱 2주 동안, 2주 부상이라니."

"저희 입장에선 다행입니다. 항공시간이 짧다고 해도, 비행은 무릎에 무리가 가고, 미국대표팀에서 제프의 위상을 생각하면 풀타임은 거의 확정이니까요. 챔스와 리그, FA컵 우승을 위해선 쉴 필요가 있죠."

"그렇게 생각하면 다행이긴 한데······."

끝내 토트넘전에서 부상을 당했다.

경기를 뛸 때는 몰랐다. 약간 저린 느낌이 있긴 했지만, 그 정도는 필드를 뛰다보면 감내하는 고통이니까.

인터뷰를 끝내고 와 보니 발목 쪽이 심하게 부어 있었다.

감독이 아주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소리치더라.

'당장 닥터들 뛰어와!'하면서 호들갑을 떨었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다. 2주 부상 OUT 판정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A매치 휴식기가 2주간 열린다는 점이다.

물론 팀의 입장에선 다행이지만, 내 입장, 그리고 국가대표팀의 입장에서는 좀 아쉽다.

월드컵 진출이 확정된 지금.

미국 축협은 친선경기 상대로 독일과 포르투갈을 골랐으니까.

그들을 상대 못한단 사실에 아쉬움이 덜컥 치밀었다.

그리고 나에게 부상을 입힌 에릭 다이어에게 화도 났지만, 그거야 뭐 금방 풀렸다.

"에릭 다이어, 그 자식은 부상 몇 주래?"

아놀드가 걸걸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식축구 출신인 그는, 상남자다 못해 그냥 마초 중의 상마초였다.

"4주랬나? 그랬을 걸요?"

"흥, 약해 빠졌군. 나였으면 영영 선수생활 못하게 뼈를 부러뜨렸을 거야. 제프, 넌 마음이 너무 여려. 몸도 약하고 말이지. 그딴 태클에 부상이라니!"

아놀드의 말에 난 멋쩍게 웃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율리아겐과 디 파코는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아놀드를 쳐다봤다.

"제프가 몸이 약하다고요?"

"도대체. 미국인들의 머릿속이란······."

물론 율리아겐은 절대 이해 못할 마초들만의 가치관이다.

***

선수들은 경기를 치르면서 성장한다.

테크닉과 피지컬, 경기를 읽는 시야와 지능적인 플레이까지.

뿐만 아니다. 개과천선이란 말이 있듯이, 멘탈리티 측면에서도 성장하는 선수가 있다.

"월드컵에 나갈 거야."

올리버의 변화는 꽤 색달랐다.

이번 A매치 예비명단까지 올라갔던 션 올리버였지만, 끝내 명단에서 탈락했다. 그 후 올리버는 절치부심했다.

'올리버가 잉글랜드 대표로 활약했었나.'

회귀 전, 올리버에 대해 알려진 건 잦은 염문설들이었으니까.

실제로 그의 선수 행적이 어떠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예상은 된다. 시즌 초 첼시 이적 당시의 모습을 보면, 대표팀엔 가지는 못 했을 거 같은데.

확실히 올리버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좋은 일이다.

캉테는 첼시의 핵심이지만, 그만큼 과부하가 걸리고 있다.

우트와 타미, 그리고 지루까지 내 역할을 보조해 주는 나와 비교하면 캉테의 백업이 절실한 상황.

올리버가 그 역할을 열심히 해 주면 좋지.

바람둥이 기질이야 천성인거 같으니 어쩔 수 없다만, 스캔들만 나지 않게 조심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잠깐, 스캔들?

"아!"

"왜 그래?"

"아, 아냐."

기억났다.

클로이란 이름이 왜 께름칙했는지.

재빠르게 폰을 꺼내 SNS를 찾아봤다.

그 여자의 SNS를 찾는 건 쉬운 일이었다.

올리버가 팔로우하고 댓글까지 달았으니까.

"확실히······ 맞는 거 같은데."

하얀 얼굴에 냉한 분위기의 눈매는 확실히 지나가다보면 시선이 절로 갈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그래서일까.

올리버의 다른 스캔들 상대와는 달리, 클로이의 이름과 얼굴은 어렴풋이 기억에 잔상에 남았던 것 같다.

"비공개 계정이라 더 볼 수가 없네."

좀 더 확인해 보면 확실할 거 같은데.

팔로우 하면 알 수 있나.

기억이 애매하긴 했다.

그저 가십거리로 들었던 스캔들이라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는다.

올리버와 클로이가 진지한 사이였다는 건 확실했다.

그러나 그 만남이 영 좋지는 않았다.

클로이도 회사를 운영하는 전문 CEO였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 사업가이자 모델, 패션 사업으로 더 유명한 잘생긴 축구 선수의 만남.

둘의 만남은 꽤 화제가 됐다.

문제는 당시 클로이의 비서와 올리버가 바람이 났다.

당연히 둘 사이가 갈라지는 건 명확한 사실. 꽤 시끄러운 뉴스가 됐고, 거기에 황색언론들이 올리버의 과거 스캔들을 다시 들춰내고, 온갖 추문을 퍼뜨리면서 올리버를 말 그대로 무너뜨렸다.

하지만 자세한 내막이 나중에 밝혀졌는데, 바람난 비서는 올리버를 유혹하다가 올리버가 거절하자 홧김에 그런 식으로 스캔들을 터뜨렸다고 고백했다.

물론 너무 늦은 일이었다. 이미 올리버는 사업뿐만 아니라 축구 선수 생활도 그만뒀을 때니까.

그때 내가 뉴스에서 올리버를 봤던 것 같다.

당시 내 감상은, '그냥 축구 선수가 축구나 하지.' 이런 것이었으리라.

하여튼.

이미 바뀐 역사고, 미래이니.

회귀 전처럼 올리버가 그 스캔들에 휩싸이리라는 보장은 없다. 클로이와 만난다고 한들, 그 회사 비서가 또 그런 짓을 하겠는가.

하지만······.

다음 국가대표에 뽑히겠다고 한쪽에서 열심히 운동을 하는 올리버를 보고 있노라니.

"이걸 어째."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는 건도 오지랖이지만.

뻔히 보이는 미래를 무시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뭘 그렇게 봐?"

"응? 아냐. 운동해야지. 다음 챔스까지 회복해야 하니까."

"흐음."

"뭐?"

올리버는 장난기 어린 샐쭉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들고 있는 핸드폰 액정화면과 날 번갈아 보면서.

물론 화면에는 클로이의 SNS 사진이 있었다.

뭔데, 그 눈빛.

"나하고 취향이 같구나?"

뭔가 오해하는 거 같은데······.

***

[미국, 독일에 3대 1 패배]

[제퍼슨 리 없는 미국,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다.]

[북중미 챔피언의 한계. 제퍼슨 리의 원맨팀이었나?]

미국은 독일과의 친선전에서 패배했다.

지금 미국의 색채는 딱 하나다.

바로 조직력이다.

대부분 미국 국내리그로 구성된 선수인 만큼, 실력은 서로 다 엇비슷하지만 조직력만큼은 아주 좋았다.

현재 미국 대표팀 감독이 그렇게 팀을 만들었다.

약팀이 강팀을 이기는 방법은 단단한 조직력이라고 생각하면서.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단단한 조직력보다 더 대단한 조직력의 축구를 만나면 무너질 수도 있단 사실이다.

독일이 그런 사실을 잘 보여 줬다.

-젠장! 이 빌어먹을 도이칠란트 놈들. 네가 있었으면 숨도 못 쉬었을 걸?

"네가 한 골 넣었잖아, 산티."

-솔직히 후, 힘들더라. 네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월드컵은 같이 나갈 테니 걱정 마."

-그래야지. 다음 포르투갈은 반드시 이길 거야.

"꼭 이겨줘."

미국의 A매치 2연전은 독일과 포르투갈이었다.

그리고 이어 만난 포르투갈은.

[포르투갈 미국과 2대 2 무승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침묵하다. 산티아고 차베즈 2골!]

[포르투갈과의 인상적인 경기력 미국, 월드컵에 대한 미래를 심어 주다.]

[호날두 팀 내 평점 6.3점. 감독 교체 지시에 'XXXX' 욕설 논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동세대 선수 중 빅클럽과 국가대표에서 나만큼 잘하는 놈이 또 있나?']

[포르투갈 감독, '호날두가 흥분해서 그런 것일 뿐, 욕설은 아니었다.' 제 식구 감싸기]

"산티가 해트트릭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속이 완전히 시원했을 것 같은데 말이지.

미국의 A매치 2연전은 유럽의 강팀을 상대로 1무 1패, 아쉬운 성적으로 끝났다.

[미국 팬들, '우리에겐 제퍼슨 리가 필요하다.']

[제퍼슨 리의 귀환을 간절히 원하는 미국.]

[미국 국가대표의 전력 8할은 제퍼슨 리.]

날 그리워하는 반응이 미국에서 대단하단다.

그간 웹플릭스 다큐멘터리, 골드컵 우승, 나와 풀리시치의 유럽에서의 활약상.

여러 가지 요소와 축구협회에서 대놓고 축구에 많은 투자를 하면서, 북미 내 축구 열기가 올라가던 중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모든 스포츠는 미국이 최고였지만,

막상 독일과 포르투갈한테 무기력한(포르투갈과는 잘 싸웠다.) 모습을 보이니 충격이 큰 것이다.

그들이 봤던 건 내 플레이였으니까.

ㄴ제퍼슨 리가 멕시코를 연이어 깨부술 때의 모습이 그리워.

ㄴ제퍼슨이 없으니 너무 무뎌지잖아.

ㄴ그는 마법과도 같은 선수야. 좋은 패스가 없어도 혼자 기회를 창출해 내지.

ㄴ산티아고는 좋은 공격수야. 2경기 동안 3골을 넣었어. 하지만 승리를 얻지 못했지.

ㄴ제퍼슨 리는 승리를 가져다주는 선수야.

ㄴ정말로 그가 그리워. 고작 두 경기에 대표팀에 없었을 뿐인데, 빈자리가 너무 커.

ㄴ근데 이것도 문제야. 월드컵은 제퍼슨 리 혼자서 해낼 수 있는 대회가 아니잖아?

마지막 댓글을 보고 나도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월드컵이 그리 만만한 대회는 아니란 말이지.'

고민할 게 많은 대목이긴 했다.

월드컵은 나 혼자 잘한다고 해서 어찌할 수 있는 대회가 아니니까.

축구협회에서는 아마 목표를 16강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실제 역사에서는 나와 산티아고가 없었음에도 16강 진출은 선공했다.

하나 내 목표는 고작 16강이 아니다.

그 이상, 그 정점.

가능한 가장 높은 곳까지 가고 싶었다.

혹자는 26년 북중미 월드컵에서 노려보는 것이 낫지 않겠냐하겠지만.

글쎄.

선수가 매 대회 우승컵을 차지하려는 욕심을 내는 게 나쁜 일이겠는가.

많은 트로피와 타이틀.

그것이 선수에게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선수로서 도전해야 할 가치로서는 충분했다.

아직은 시간이 많이 남은 월드컵부터.

이제는 코앞까지 다가온.

프리미어리그, FA컵.

그리고 별들의 무대, 챔피언스리그까지.

"어어! 제프! 몸은 어때? 수요일 경기 출전 가능해?"

A매치 휴식기가 끝나고 선수들이 복귀하고 있다.

그리고 감독은 가장 먼저 재활실에서 회복하고 있는 날 찾아왔다.

수요일 경기.

딱 하나다.

챔피언스리그 8강 유벤투스전.

"상대를 고통스럽게 하는 건 제 특기죠."

물론, 준비 완료다.

***

강팀이 자만심에 빠져 약팀에게 패배하는 건 흔한 클리셰다.

그러나 그런 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강팀에는 강한 선수들이 있다.

선수들의 강한 기준을 어찌 판가름할까?

일부는 기술, 피지컬을 논하겠지만, 일부는 멘탈을 얘기한다. 강팀일수록 멘탈이 튼튼한 선수들이 많다. 그들은 쉽사리 자만하지 않는다. 약팀을 만나도 쉽게 상대하지 않는다.

축구는 절대적인 스포츠가 아니니까.

수백 배의 주급차이가 나더라도, 약팀이 강팀을 잡는 자이언트 킬링은 분명히 존재하니까.

하여 유벤투스의 선수들은 결단코 방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첼시는 강하다!"

사리 감독은 그렇게 소리쳤다.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선수는 없었다.

"단단하고, 튼튼하다. 빠르고, 날카롭다. 경기장을 넓게 쓰고, 측면을 지배하며, 끝내는 하늘을 차지한다. 그리고 최전방에는 가장 위험한 놈이 있다. 제퍼슨 리."

약팀 상대로도 방심하지 않는다.

하물며 레알 마드리드를 16강에서 처참하게 부숴 버린 첼시를 놓고, 그 누가 마음을 편히 먹는단 말인가.

"그를 막는 방법은, 정말 부끄럽게도 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내가 믿는 건 그저 우리가 지금까지 해 온 수비 방식을 유지하는 거다."

이번 경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누가 봐도 제퍼슨 리였다.

그를 조금이라도 경시하던 이들은 레알 마드리드를 4골 3어시스트로 쳐부수던 모습에 전율했다.

그건 사리도, 유벤투스 선수단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세리에A 리그 10연패에 빛나는 찬란한 팀이며, 무패 우승 팀이고, 최다 승점팀이자, 유럽 역사상 챔피언스 리그, 유로파리그, 컵 위너스컵을 모두 제패한 위대한 클럽이다."

사리는 팀을 모두 장악한 거대한 보스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유벤투스 선수들은 모두 감독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라커룸에서 감독보다 영향력이 컸던 호날두가 잠자코 있었기에.

오히려 그는 더 진중한 얼굴이었다.

"원정에서 우리는 수비하고, 공격한다. 지키고, 골을 넣는다. 그리고 홈에서 박살을 낸다. 간단하다. 너희는 그렇게만 하면 된다."

나직하면서도 조용했고, 사리는 선수들이 생각을 정리하고 의욕을 다질 시간을 주기 위해 드레싱 룸을 나갔다.

물론 입에는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담배를 물고.

그와 같은 드레싱 룸에서의 연설은 반대편 홈팀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다만, 조금 달랐다.

"이 경기, 무조건 이겨야 돼! 겁먹어서 엉덩이 뒤로 빼는 놈들은 내가 장담하지. 나랑 UFC나 찍으러 가는 거야!"

드레싱 룸 정중앙에서 소리치는 건, 그들의 감독도, 주장도 아니었다.

지금껏 드레싱 룸에서는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제퍼슨 리가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우트와 올리버가 속닥였다.

"쟤 왜 저래?"

"유벤투스 안티인가보지."

"미국인이 유벤투스를 싫어할 이유라도 있나?"

"이거 큰일인데."

"왜?"

"제프가 저렇게 죽여 버리겠다고 공언했는데, 유벤투스가 멀쩡히 살아서 돌아갈까?"

"흠. 설마 유베가 네다섯 골 먹혔다고 죽기야 하겠어."

"아니. 그거 말고. 골 먹히고, 물리적으로, 그러니까 생물학적으로 진짜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제프가 죽일 각오로 몸싸움하면?"

"······."

우트는 제퍼슨이 살벌한 얼굴로 뛰어오는 광경을 상상하곤,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쟤랑 같은 팀인 것에 나는 신께 감사하고 있어."

"나도."

< 165. 슈퍼히어로의 조건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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