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슈퍼히어로의 조건 (2) >
대진 추첨이 끝나고 여러 반응이 튀어나왔다.
대체로 '재밌다'는 반응이었다.
축구팬들이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우선 매치업들이 화려했다.
바이에른 뮌헨 VS 맨체스터 시티.
바르셀로나 VS 파리 생제르맹.
AT 마드리드 VS 나폴리.
첼시 VS 유벤투스.
각자 서로 비등한 전력끼리 맞붙는다.
그 누구도 쉽사리 승리의 향방을 예측하지 못한다.
축구 커뮤니티에선 어느 팀이 4강에 갈 것인가는 뜨거운 감자였다.
사실 어떤 팀이 이겨서 올라가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었다.
당장 나 같아도 여기서 누가 4강에 진출할지 모른다.
"많이 바뀐 거 같은데."
매 시즌 챔피언스리그의 모든 매치업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시즌에 리버풀이 없다는 것도 신기했고, 나폴리가 8강에 있다는 사실도 회귀 전과는 달라진 것 같았다. 내 기억이 흐릿해서 정확할지는 모르겠다만.
그래서 결국 이번 시즌에 누가 우승하냐는 이제 운명에 달렸다.
어찌 됐건 우리는 유벤투스를 상대로 준비를 시작했다.
최근 선수들의 훈련 의욕은 정점에 달했다.
이제 모든 대회에서 우승과 가까워졌다는 것이 실감되는 순간이니까.
1년간의 농사가 앞으로 남은 2개월에 걸렸다.
2개월 동안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그간 이겨 온 경기들이 모두 소용이 없게 된다. 코치진과 감독은 그런 사실을 선수들에게 꾸준히 주입했다.
하지만 사실 필요가 없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유벤투스는 이미 4강에 있다. 내가 유벤투스에 온 순간부터 정해진 사실이다.']
저 인터뷰가 대대적으로 언론을 타면서 선수들은 하나같이 눈동자에 불이 타올랐다.
이미 4강을 기정사실화하는 말이었으니, 우리를 무시하는 거 아니냐고 난리가 났다. 당장 나부터 열이 뻗쳐서 그날 당일 개인 훈련까지 빡세게 했다.
"흥. 4강에 이미 가 있다고?"
"1차전에서 일찌감치 포기하게 만들어 주자고!"
"난 이탈리아 놈들이 싫어!"
"쟨 포르투갈인데?"
어쨌거나.
의욕이 넘치는 건 좋은 일이다.
감독은 여러 전술을 실험했고, 우리는 충실하게 따랐다. 거기에 컨디션을 유지하고 몸을 만드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으아아아아!"
올리버가 괴성을 질러 대며 기구를 들어 올렸다.
"좀만 더 하자."
"뒤질 거 같은데?"
"아냐 할 수 있어."
"아니야. 더 했다간 팔이 부러질 거야."
"네 팔은 튼튼해."
"개자식아."
"욕하는 거 보니 한 세트 더 할 수 있겠다."
"······."
"눈빛 보니 하나 더."
올리버와 운동하는 건 꽤 재미있었다.
내 말에 잘 따라 주기도 했고.
의외로 몸이 유연했다. 근육도 잘 붙고, 튼튼했다. 은근슬쩍 내 트레이닝 팀과 함께 한번 운동을 했는데, 그 율리아겐도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꽤 좋은 신체입니다. 순발력이 다소 떨어지지만, 몸이 단단해요.'
흔히 말하는 떡대가 되기 쉬운 체격이란다.
근육이 아주 잘 붙는 몸.
그래서 생각했다.
애당초 올리버가 캉테처럼 될 수는 없다. 커팅능력, 드리블, 패스, 시야, 흐름을 읽는 눈까지.
그나마 올리버가 비빌 만한 건 커팅능력.
차라리 다른 능력을 따라가지 못할 바에는 피지컬을 키워서, 아예 전형적인 피지컬과 커팅능력으로 상대를 두들겨 패는 홀딩형 미드필더로 성장하는 게 좋다.
이제 올리버도 나이가 있으니, 더 늦었다간 이도 저도 아니게 될지도 모르니까.
"하나만 더!"
"끄으으으!"
부들부들 떨리는 올리버의 팔을 보니.
무언가 흐뭇하다.
'이게 트레이너의 감정이란 건가.'
나중에 은퇴하게 되면 피지컬 트레이너로 가는 것도······.
재미있겠는데.
***
"봐봐, 쟤. 올리버를 고통스럽게 하면서 웃고 있잖아."
우트의 말에 타미는 시선을 돌렸다.
트레이닝 센터 한쪽.
얼굴이 새빨개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올리버와 그걸 옆에서 팔짱 끼고 지켜보며 미소 짓고 있는 제퍼슨.
타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으음. 진짠가?"
"그래. 쟤 올리버가 그 여자한테 찝쩍대서 화나서 저러는 거 맞다니까."
"제프가 그렇게 유치한 얘가 아닌데."
타미의 말에 우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남자는 의외로 이상한 데서 유치해지는 법이지. 쟤 스무 살이라고. 한창 유치할 때야."
제퍼슨의 실제 감정이 어떻던,
오해는 오해를 낳고 있었다.
처음엔 회의실에서 짓궂게 농담처럼 몰고 갔다. 장난이었다.
한데 선수들은 당황하는 제퍼슨을 보며 의외의 인간미를 느꼈다.
마치 기계처럼 늘 운동만 하던 제퍼슨이 그나마 사람처럼 보였던 순간이었으니까.
그제야 선수들은 제퍼슨이 스무 살처럼 보인다고 쑥덕댔다.
"근데 저렇게 계속 올리버만 괴롭힐 생각인가."
"덩치에 안 맞게 소심하네. 난 필드에서처럼 적극적으로 여자한테 다가갈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완전 숙맥이네."
"흠."
"올리버하고 얘기해 볼까?"
"뭐, 올리버는 연락이 잘 안 되니까 흥미가 팍 식은 것 같긴 하던데."
우트와 타미는 서로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프리미어리그 30라운드, 첼시와 번리가 부딪칩니다!]
[FA컵 8강을 앞둔 첼시는 선발 라인업의 절반이 로테이션이네요. 하지만 그래도 번리는 쉽사리 첼시를 공략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퍼슨 리가 스트라이커로 돌아왔습니다!]
[번리는 파이브백에 더블 볼란테를 준비했습니다. 명백히 제퍼슨 리를 의식한 포메이션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리는 순간! 제퍼슨-리! 그대로 수비진을 헤집고, 마치 호나우두처럼 비집고 들어가면서 골네트를 찢어 버립니다!]
[goal, gol, gol, gol! 제퍼슨의 선제득점이 터지면서 번리의 선수비 후역습의 생각은 시작부터 망가졌습니다! 1분 19초 만에 터진 골! 이번 시즌 최단시간 골입니다! 제퍼슨 리가 1분 만에 번리의 단꿈을 짓밟아 버립니다!]
[근래 프리미어리그에선 이런 말이 있죠. 제퍼슨은 무자비한 파괴자라고.]
[정확한 말이네요. 번리, 이대로 리그 19위로 떨어집니다. 리그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제퍼슨이 그들을 강등권으로 처박아 버립니다!]
[번리는 아직 진 게 아닙니다. 힘을 내서 동점을 만들어야죠. 아! 올리버의 저돌적인 커팅! 휘슬 불지 않습니다! 그대로 이어지는 로빙 패스! 제퍼슨에게! 제퍼슨! 날아오릅니다! 맙소사 공중을 지배하네요! 제퍼슨의 헤더가 번리의 골문을 두들깁니다!]
[현재 전반 5분 24초! 제퍼슨이 5분 만에 두 골을 집어넣으며, 번리를 강등권에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만드네요.]
[정말, 무자비한 파괴자, 그 자체입니다! 파괴자! 그가 번리의 프리미어리그에 대한 미래를 부숴 버립니다!]
***
체력관리는 필수적이다.
감독은 21분 만에 분노를 토하듯 해트트릭을 터뜨린 날 교체해줬다.
"아주 슈팅 때릴 때 힘을 제대로 실어서 때리더군. 이제 스트레스 좀 풀렸나? 제프."
"좀 후련하네요."
"좋아. 스트라이커는 그래야지. 스트레스 따위는 골로 해결해야지!"
축구선수의 스트레스는 경기장에서 푸는 법이다.
사실 그간 스트레스가 좀 쌓이긴 했다.
우선 나에게 돌아오는 수많은 반칙이 지긋지긋했다.
매 경기마다 상대 선수들은 날 견제하기 위해 거친 반칙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걸 피하는 것도 힘들었고, 맞받아치는 것도 꽤 스트레스 받는 일이다.
그런 경기가 이번 시즌 내내 반복되고 있었고, 몸에도 점차 흔적들이 많아졌다.
불가사의한 회복력이 아니었으면 벌써 몇 번이고 바닥에 쓰러졌으리라.
하여튼 그런 상황에서 유벤투스의 그런 인터뷰까지 터지니, 스트레스가 좀 쌓였다.
번리전에서 해트트릭으로 몰아치니 스트레스가 다소 풀리는 기분이다.
"봐봐. 저 녀석 화났잖아."
"올리버. 그냥 양보하는 게 어때?"
"그래야겠어. 제프가 요즘 날 못살게 구는 이유가 그것 때문인 거 같다니까."
근래 날 놀리는 녀석들이 생겼다.
그러니까.
우리 팀 선수들 전체가.
세상에.
난 올리버와 달리 그 여자 관중, 클로이랬나? 어쨌거나 사적으로 연락도, 만난 적도 없다.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다. 그런데 이 녀석들은 내 반응에 재미가 들렸는지 저런 식으로 몰아가는 걸 계속했다.
그래서 애써 모른 척 했다.
남자는 나이를 먹어도 애 같은 구석이 있어서, 반응을 보이면 보일수록 더 짓궂어지리라.
어쨌거나 번리를 철저하게 무너뜨리고, FA컵 6라운드, 8강전이 다가왔다.
상대는 토트넘.
"수탉은 제퍼슨이 약이지. 체력 괜찮지?"
"물론이죠."
"좋아. 잘해 보라고."
감독은 굳이 내게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알아서 잘하리라는 판단이리라.
사실 그게 맞긴 했다.
이젠 감독의 지시가 없어도, 어떤 상대가 와도 어떻게 플레이해야 할지 알겠다. 적어도 프리미어리그에선 말이다.
***
토트넘은 FA컵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리그에서는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목표로 두되, 그들이 현실적으로 노릴 수 있는 타이틀은 FA컵이 유일했으니까.
그러나 첼시를 맞닥뜨리는 상대들이 늘 그렇게 한탄하듯이.
토트넘도 마찬가지였다.
"제기랄! 하필, 하필이면 첼시를 여기서 만나는구나!"
토트넘 팬들은 장탄식을 토했다.
그들은 첼시를 만나서 좋은 성적을 기록했던 적이 없다.
그나마 즐거운 기억은 이번시즌 리그에서 2대 2로 무승부 하나를 기록했다는 사실.
라이벌이란 사실이 무색하게도, 토트넘은 무승부에 만족할 정도로 첼시를 두려워했다.
실제로 경기가 시작되고, 그 두려움은 현실이 되었다.
[에릭 다이어의 태클을 피해 내고! 제퍼슨 리, 우측에 공을 흘려줍니다! 마크 우트! 마르크-우트! 우트가 나타나서 그대로 공을 밀어 넣습니다!]
전반 18분.
이제는 언론에서 독일의 솔샤르라고 부르는 우트가 가볍게 선제골을 기록했고.
[제퍼슨 리, 날아오는 크로스를 침착하게 트래핑하고, 떨어지는 볼을 완벽하게 발리슛으로! 골문을 갈라 버립니다!]
제퍼슨의 두 번째 득점이 전반 종료 직전 터져 나왔다.
두 개의 실점.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상에서 회복해 오랜만에 출전한 에릭 다이어가 실점의 빌미가 되었다.
그런 사실이 에릭 다이어에게는 심한 부담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때 토트넘에서 촉망받는 선수였으나, 어느 순간부터 유리 몸으로 폭삭 무너진 선수.
한번 잃어버린 폼은 쉽사리 돌아오지 못했고, 선발 기회도 점차 잃어갔다.
때마침 베르통언이 경고누적으로 결장이 아니었다면, 오늘 역시 출전하지 못했으리라.
부담감은 점차 초조함이 되었다.
'제기랄.'
다이어는 오늘 처음으로 제퍼슨을 상대해 봤다.
그가 내준 두 개의 실점은, 모두 제퍼슨으로부터 시작됐다.
'어떻게 이딴 자식이 있지?'
그 자신도 몸싸움에서 쉬이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건만, 부딪칠 때마다 날아가는 건 본인이었다.
태클을 시도하면, 마치 미래를 보는 것처럼 감각적으로 피해 낸다.
어떤 상황에서든 볼을 소유하고, 끝내는 슈팅을 만들어 낸다.
그것도 힘을 잃고 방향이 틀어진 게 아니라, 골키퍼를 위협하는 완벽한 유효슈팅을 말이다.
베르통언이 말했다. 제퍼슨을 상대하려면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이건 그것만으로 막을 정도의 수준이 아니잖아?'
애석하게도, 그랬다.
초조함은 선수들의 실수를 유발한다. 또는 예상치 못한 반칙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달려오는 제퍼슨.
"막아!"
"정신 똑바로 차려!"
그리고 압박하는 수비진. 제퍼슨은 압박을 피해 공을 왼쪽으로 크게 벌렸다. 이미 공이 빠져나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에릭 다이어는 거친 태클을 시도했다.
빠악!
"······!"
어쩌면 그건 치명적인 실수일지도 몰랐다.
거친 태클은 제퍼슨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결국 이어지는 프리킥 골에 대한 실점의 빌미가 됐으니까.
더구나 제퍼슨은 아무렇지 않게 필드를 계속 뛰었고.
끝내는.
빠악!
"꺼억!"
아무도 모르게.
선수들로 둘러싸인 세트피스 상황에서.
다이어는 허벅지를 무릎으로 찍어 버리는 아찔한 충격에,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맞을 각오는 하고 그런 짓 벌인 거 맞지?"
귓가에 들리는 스산한 음성에,
그는 치명적인 실수를 한 것임을 뼛속까지 깨달을 수 있었다.
***
FA컵 8강은 제퍼슨의 2골 1어시스트와 우트의 2골로 4대 1 대승이었다.
물론 공교롭게도 69분에 제퍼슨과 계속 부딪치면서 넘어지던 다이어가,
스스로 부상을 호소하며 교체를 요구했다는 건 꽤 재밌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믹스트존의 제퍼슨 인터뷰도 경기가 끝나고도 화제가 됐다.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할 때 어떤 결과가 뒤따를지 예측하지 못할 때가 많죠. 제게 싸움을 걸었으면, 적어도 곧바로 병원에 갈 미래 정도는 예상해야지 않겠어요?"
< 164. 슈퍼히어로의 조건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