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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의 괴물 러닝백-163화 (163/258)

< 163. 슈퍼히어로의 조건 (1) >

"꼭 레알로 와."

"아니, 레알로 오지는 않더라도 바르셀로나로는 가지마."

"제기랄. AT도 마찬가지야!"

"레알이 아니라면, 스페인에 아예 오지를 마!"

언제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냐는 듯.

선수들은 경기가 끝나고 서로 가볍게 인사하며 유니폼을 교환하거나 했다.

나한테 온 선수들은 하나같이 칭찬 아닌 칭찬을 저렇게 던졌다.

자기 팀에 올 거 아니면 죽어도 바르셀로나와 AT 마드리드는 가지 말라니.

"제기랄. 유니폼 없어? 누가 네 걸 가져간 거야?"

"어떤 괴상한 할아버지 팬에게 던져 줬어."

"괴상한? 흐음, 내 건 그냥 가져가."

나와 유니폼 교환하기 위해서 온 아자르는 거의 강매하다시피 내 품에 자기 유니폼을 안겨 줬다.

"가서 우승하라고. 꼭."

"뭔가 영화 같은 그림을 연출하고 싶은 거야?"

"개소리. 우리가 고작 8강에서 탈락할 팀한테 진 게 되면 쪽팔리게 되잖아? 이왕이면 우승팀을 일찍 만나서 떨어졌다고 해야 우리도 체면치레 할 수 있다고."

선수들은 서로 격의 없는 농담을 던졌다.

물론 상심에 잠긴 몇몇 레알 선수는 그냥 곧바로 터널로 빠져나갔지만.

애당초 서로 국가대표팀에서 만나는 선수들도 있으니까.

"뭐, 너무 걱정하지는 마. 네가 여기서 못 들어 올린 빅이어는 내가 들어 올릴 테니까."

"······캉테의 말을 이제 알겠군."

"응?"

"꼴 보기 싫을 정도로 자신 넘치는데, 그게 사실이라서 어떻게 할 수 없다고."

"······."

요즘 캉테 성격이 많이 바뀐 거 같은데······.

***

2월이 끝나고, 3월로 접어들면서.

날씨가 점점 풀리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러나 팀을 둘러싼 긴장감은 오히려 더 조여졌다.

남은 잔여 리그 경기는 9경기.

FA컵은 6라운드(8강)가 코앞이고, 좀 있으면 챔피언스리그 8강 대진 추첨이다.

리그와 FA컵, 그리고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위해서는 아주 중요한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살랑살랑 따뜻한 봄기운과는 정반대인 차가운 기운이 구단에 감돌았다.

물론, 아닌 녀석도 있었다.

"흐흐응."

유난히 발랄한 웃음을 짓고 있는 올리버가 괜히 눈에 밟혔다.

"너 축구에 집중한다고 하지 않았어?"

"축구에 집중하고 있지. 모든 훈련에 빠짐없이 다 따라가고, 남아서 개인훈련까지 하잖아."

그의 말에 사실 더 할 말은 없었다.

실제로 올리버는 내 에이전시와 계약을 체결한 이후, 잡지와 본인이 하던 사업도 잠시 멀리한 채 축구에 집중하고 있으니까.

"제프, 네가 저 녀석 사람 만들었어."

"내가?"

"감독이 그러던데? 네가 올리버 두들겨 팼다고?"

"······."

"그래도 올리버가 나이가 많은데 두들겨 팬 건 좀 아닌 거 같긴 하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도대체 내가 언제 두들겨 팼다고.

이런 루머가 퍼지고 있을 줄이야.

올리버가 자기 할 일 하면서도 저렇게 웃음을 짓는 건.

별거 아니다.

저번에 유니폼을 던져 준 여자 관중하고 최근 연락을 하고 있나 보다. SNS를 통해서든 뭐든 간에 말이다. 원래 여자를 좋아하던 친구니 그러려니 할 만하다. 그게 문제가 될 것도 아니고. 훈련도 다 열심히 하는데 내가 뭐라 할 수는 없지.

근데.

뭔가 좀 께름칙한 느낌이 있다.

'클로이라.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올리버가 중얼거리던 이름이다. 어렴풋이 귀에 익은 이름인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회귀 전, 들어본 이름인 거 같은데.

단지 이름만 그렇다면 모를까, 그때 본 얼굴이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분도 드니까.

"그런데 관중이었는데 연락은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풀리시치가 불쑥 물었다.

사실 그게 궁금하긴 했다.

단지 관중한테 유니폼을 던져 준 것뿐인데, 어찌 연락을 이어 가나.

그러자 올리버는 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유니폼에 내 번호와 SNS를 적어놨지."

"······대체 언제?"

"그냥 늘 적어 놓지. 난 유니폼을 관중한테 던져 줄 때 마음에 드는 여자한테만 주거든."

"맙소사."

세상에.

그런 방법이.

몇몇 선수들은 진심으로 감탄한 얼굴이었다. 심지어 기립박수 치는 동료들도 있었다.

"어떻게 유니폼에 번호를 늘 적어 놓을 생각을 하는 거지?"

캉테의 중얼거림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올리버는 지금까지 선수들하고 유니폼 교환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팬들에게 늘 자신의 유니폼을 던져 줬다.

그래도 팬 서비스 하나는 좋은 놈이구나 싶었는데······.

"넌 뭐 하냐."

"흠흠."

몰래 유니폼에 번호를 적던 풀리시치는 내 지적에 괜히 헛기침했다.

"근데, 이 여자 많이 바쁜가 봐. 아니면 철벽을 치는 건지. 도통 연락이 잘 안 되네."

올리버는 마음대로 잘 안되는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마음에 들었어?"

"그 수많은 관중 중에 순간적으로 시선을 빼앗겼지. 이 올리버가 말이야."

클로이라.

사실 잘 모르겠다.

회귀 전에 들어본 이름인지, 아니면 흔한 이름인지. 어디선가 낯선 이름이 아니라서, 뭔가 찝찝한 기분이긴 한데.

"뭐, 연애는 이런 밀고 당기는 맛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올리버는 어깨를 으쓱이며 실실 웃었다.

음.

"인연이 아닌 거 같으면 일찍 포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 올리버."

뭔가 촉이라고 하는 게 있지 않나.

좀만 더 생각하면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다.

올리버가 회귀 전에 유명했던 이유.

끊임없이 터지던 스캔들이 아니었던가.

그 스캔들 중에 클로이란 여자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스캔들이 워낙 쇼킹해서 그런지, 내 기억 속에 잔상처럼 남은 것일지도 모르고.

이제 축구에 집중하고 있는 녀석인데, 괜히 회귀 전처럼 안 좋은 일이 닥칠까 봐 조금 염려가 됐다.

"······."

뭐야.

"왜 갑자기 다 조용해져서 날 쳐다봐?"

분위기 왜 이래?

올리버는 특히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

우트는 갑자기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흠. 제프가 그 여자한테 관심 있나본데, 올리버?"

"그러게."

"맞아. 저번에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괴상한 얘길 했잖아. 손녀딸하고 유니폼을 교환하자고."

"그리고 제프는 쪼르르 달려가서 유니폼을 던져 줬지."

"생각해 보니 그러네."

"유니폼만 주면 손녀딸을 내준다는데."

"나 같아도 혹할 거 같긴 해. 솔직히 올리버가 반했을 정도로 그 여자 관중 예뻤어."

"제프가 냉큼 할아버지한테 유니폼 던져 준 것도 이해가 가긴 가네."

"그럼 교환성립인가? 유니폼을 주는 대신 여자친구라."

"제기랄. 내가 할걸 그랬나."

"아냐. 그 할아버지가 제프를 딱 지목했잖아. 손녀 사윗감 고른거지."

"그건 그냥 그 할아버지가 맨 앞에 앉아 있어서 유니폼 준거야. 한국에서는 노약자 공경하는 게 아주 흔한 일이라고."

갑자기 이상하게 몰아가는 분위기에 다급히 뭐라 얘기해봤지만.

"넌 미국인이잖아, 제프."

풀리시치의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경기장이 아닌 밖에선 늘 조용한 아스피가 갑자기 짓궃은 웃음을 지었다.

"하긴. 제프가 이제 스무 살이지? 한창 여자 좋아할 때가 됐군."

"캡틴. 갑자기 이야기가 왜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지 저는 도통 모르겠어요."

"흠. 재밌는데. 팀 동료끼리 여자를 두고 치정싸움이라."

"허."

아스피를 비롯한 팀 내 나이가 좀 있는 선수들이 실실 웃었다.

이미 결혼까지 하고 아이까지 있는 유부남 선수들이 더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동료들은 피식 웃으면서 이 상황을 재밌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었고.

올리버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뭐.

왜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는데.

"뭐, 임마."

"제프."

"뭐."

"드디어 남자가 됐구나. 훈련 끝나고 클럽가자는 말에 질색을 하던 널 보고 참 이상하다 생각했었는데."

"이상한 개소리 좀 하지마."

"뭐, 그 사람 연락처는 내가 알려 줄 수는 있어."

"필요 없어."

"그래? 흐음. 그럼 뭐 내가 계속 연락하고."

"······."

거울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지금 내 얼굴이 어떤 표정인지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뭐가 이렇게 어수선해?"

다행히도 그쯤에 회의실에 감독과 코치들이 들어왔다.

코칭스태프 앞에서 계속 장난을 칠 수 없던 터라 선수들은 이내 잠잠해졌다.

"에휴, 모르겠다."

"뭘?"

"아니, 그냥 뭐 8강 상대가 누가 될지 모르겠다고."

올리버의 일이니까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뭐.

지금 집중해야 할 건 앞으로 남은 경기들이니까.

"8강 진출 팀이 어디지?"

"맨시티, AT마드리드, 바이에른 뮌헨, PSG, 그리고 바르셀로나. 나폴리. 유벤투스"

"만만한 팀 하나 없군."

우리가 오늘 클럽하우스에 모인 이유는 훈련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챔피언스리그 8강 조추첨식이 열리는 날이라 모두 모여서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이런 장면들이 지금 촬영 중인 첼시 다큐멘터리인 리얼 블루스 시즌 2에도 꼭 들어가야 할 모습이니까.

그러고 보니 아까 동료들이 하던 얘기도 카메라에 다 담겼을텐데.

이거야 원······.

괜히 머리가 복잡해지려는 걸 빨리 훌훌 털었다.

지금 중요한 건 대진 추첨이니까.

사실 어떤 팀을 만나든지 상관없다.

이젠 무시할 팀도 없고, 만만하게 여길 팀도 없다.

8강부터라면 다 한가락 하는 팀이다. 저력이 있고, 우승을 꿈꾸는 팀이다.

프리미어리그 3위 맨체스터 시티.

라 리가 2위 AT 마드리드.

분데스리가 1위 바이에른 뮌헨.

리그앙 1위 파리 생제르망,

라 리가 1위 바르셀로나.

세리에A 1위 유벤투스와 3위 나폴리.

그리고 프리미어리그 1위 첼시까지.

모두 8강에 만족하고 떠날 팀들은 아니다.

아마 우리뿐만 아니라, 각 팀의 선수들은 긴장, 또는 초조감 어린 시선으로 조 추첨식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왕이면 나폴리지?"

사실 많은 팀은 나폴리를 원하고 있다.

나폴리가 강팀인건 부정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나마' 할 만한 팀이다 싶은 거다.

첫 번째 공에서는 파리 생제르멩이 나왔다.

[파리 생제르맹, 그리고 상대는 바르셀로나입니다.]

첫 대진은 파리 생제르맹과 바르셀로나였다.

카메라에 비친 두 팀의 관계자들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바르셀로나 관계자들은 무덤덤한 얼굴이었고, 늘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목말라 있는 PSG 관계자는 다소 안타까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저 경기 재밌겠는데?"

"확실히 빅매치네."

두 번째 추첨에선 AT마드리드가 적힌 종이가 먼저 나왔고.

[상대는 오, 나폴리군요!]

흠.

AT마드리드 관계자들 얼굴은 밝아지네.

산티아고를 잘하면 4강에서 만날 수도 있겠는데?

반면 나폴리 관계자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의외로 AT라서 상대할만하다고 여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진 추첨.

세 번째 공에서 바이에른 뮌헨이 나왔다.

"······."

순간 회의실에 팽팽한 긴장감이 어렸다.

자.

이제 마지막이다.

남은 팀은 세 팀.

여기서 뮌헨의 상대가 결정되면, 나머지 두 팀은 자연스럽게 대진이 완성된다.

[바이에른 뮌헨의 상대는, 하하하! 재밌군요. 펩 과르디올라가 과거의 자신의 팀을 상대합니다. 맨체스터 시티입니다! 바이에른 뮌헨과 맨체스터 시티가 8강에서 맞붙습니다!]

3번째 대진이 완성됐다.

바이에른 뮌헨 VS 맨체스터 시티.

잠깐만.

그러면 남은 대진은?

"자연스럽게 첼시와 유벤투스가 마지막 대진표에 이름을 올립니다."

회의실에 모인 선수들은 크게 기뻐하거나, 또는 안타까워하진 않았다.

무언가 크게 놀라워하기에는 꽤 할만하다 싶은 팀이었고, 그렇다고 우리가 무조건 이길 수 있는 상대라고도 여겨지지 않았으니. 다소 김새는 듯한 반응이 나왔다.

그러나 난 아니었다.

"드디어······!"

드디어.

만난다, 유벤투스를.

< 163. 슈퍼히어로의 조건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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