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162화 (162/258)

< 162.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 (4) >

모드리치와 크로스, 카세미루는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하는 팀에겐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들의 중원 조합은 강력했고, 단단했으며, 창의적이었다.

더구나 챔피언스리그라는 무대에서는 더욱 빛을 발했다.

하나같이 베테랑이면서 우승을 향한 동기 부여가 확실한 선수들이니까.

그렇기 때문일까.

홈 팬들은 모두 무시무시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제퍼슨 리가 공을 잡았습니다! 카세미루와 크로스의 협력 수비! 엄청난 탈압박 기술이네요! 그 압박을 피해 빠져나갑니다! 공간이 생겼어요! 제퍼슨 리가 공간을 창출해 냅니다! 레알 마드리드를 부수면서 말이죠!]

캉테와 하베르츠는 절실히 느꼈다.

중앙에서 미친 듯이 날뛰는 괴물 같은 제퍼슨 덕택에, 그들의 플레이는 날개를 단 것처럼 자유롭고도 간결해졌다.

[제퍼슨! 이번엔 에덴 아자르의 드리블을 막아 냅니다! 엄청나네요. 제퍼슨 리가 작정하고 2선과 3선을 오가면서 모든 공격을 끊어 냄과 동시에 모든 공격의 시발점이 되고 있습니다!]

"제기랄!"

슬그머니 레알 선수들의 얼굴에 드러나는 당혹감과 초조함.

총합 스코어 4대 3이 되면서 레알 마드리드는 또다시 득점이 절실해졌다.

그러나 쉽지 않다.

후방에서부터 빌드업이 시작돼도, 미드필더에서 쉽게 풀리지 않는다.

[캉테는 캉테입니다. 모든 길목을 막아서고, 차단하고, 끊어 내고, 다시 달려듭니다! 거기에 제퍼슨이 몸으로 버텨 주기까지 하죠!]

보는 사람들은 모두 확신했다.

지금 첼시의 미드필더가 레알을 압도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렇게 된 것에는, 제퍼슨 리가 핵심이라고.

[타고난 역동성! 폭발적인 스피드! 고난이도의 테크닉과 그물로 잡을 수 없는 탈압박 능력까지! 제퍼슨 리는 미드필더 자리에서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무자비했다.

카이 하베르츠, 은골로 캉테, 그리고 제퍼슨 리.

첼시의 월드클래스 선수들은 짧고 긴 패스를 서로 끊임없이 주고받았다.

때로는 가볍게 공을 소유하면서 템포를 조절한다. 패스를 짧게 보내면서 라인을 천천히 올린다. 그러다가 긴 패스로 단 한 번에 수비진을 무너뜨린다.

설령 막혀도 문제없다.

저들의 공격을 중앙에서 끊어 내고,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하면 되니까.

'정말로 미쳤군.'

하베르츠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왜 이리 쉬워?'

제퍼슨 리가 중앙에서 같이 뛰어 줌으로써.

하베르츠는 상상 속에서나 이루어지던 플레이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그에게 들어오는 모든 압박은 제퍼슨이 한발 앞서 해결했다. 강력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상대 선수들이 압박을 걸어오는 족족 무너뜨렸다.

"Blues---!

하베르츠, 캉테, 제퍼슨 리로 이뤄지는 삼각 편대가 더 빠르고, 간결하고 고난이도의 패스로 견고한 마드리드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Wuuuuuuuuuuuaaaaaa!"

우측면 뒷공간을 파고드는 제퍼슨 리의 그림 같은 스루 패스가 오도이에게 도달하자.

[제퍼슨 리의 패스가 끝내는 마드리드의 수비진을 무너뜨립니다!]

박스 구석까지 공을 몰고 들어간 오도이가 중앙으로 다시 컷백.

그 볼은 수비의 발끝에 굴절되어 막히나 싶었지만.

어느새 달려온 제퍼슨 리가 공의 소유권을 획득하며 몸을 빙그르르 돌았다.

등진 채, 살짝 뒤로 공을 내주는 플레이.

그리고 달려들던 하베르츠는 본능적으로 슈팅을 날렸다.

뻐엉-!

9만 명의 마드리드 관중이 침묵하고.

수천에 불과한 첼시 원정 팬들이 베르나베우를 쩌렁쩌렁 울리는 함성을 내지를 때야.

그들은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이해했다.

[대단합니다! 치명적인 골이 터졌습니다! 제퍼슨 리의 엄청난 패스 워크로부터 이어진 역전 장면입니다! 그 누구도 제퍼슨부터 시작되는 패스를 통제하지도, 막지도 못했습니다! 총합 스코어 5대 3! 이젠 마드리드는 동점을 위해 최소 2점, 승리를 위해선 3점이 필요한 끔찍한 상황에 부딪쳤습니다!]

***

포지션 변경은 일반적으로 선수들에게 부담이 된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아니었다.

'오랜만이군.'

이 자리에서 뛰었던 게 얼마만인지.

그리고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기분이란 게 어떤 것인지.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개 같은!"

물론 상대의 일그러진 얼굴, 절실한 표정, 긴장하고 초조함이 가득 담긴 욕설을 들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툭!

다시 캉테에게 패스를 보내 압박을 피해 내고.

투욱!

피해 내자마자 도달하는 패스를 딜레이 없이 하베르츠에게 찔러 주고.

툭!

하베르츠는 그 패스를 왼쪽의 풀리시치에게 보내 줬다.

"Blues! Blues!"

첼시는 중원에서부터 공격진까지 단 세 번의 패스로 모든 압박을 꿰뚫어 내고는 풀리시치가 중앙으로 날카로운 크로스를 올렸다.

공이 떨어질 자리에는 우트가 있었다.

내가 없는 박스 안에서의 공중 볼을 딸 확률은 턱없이 낮지만, 그래도 그는 최선을 다해 라모스와 경합을 벌였다.

우트의 필사적인 움직임은 분명한 효과가 있었다.

공은 라모스가 걷어 내긴 했지만, 세컨 볼은 우리가 차지한 것이다.

"제기랄!"

내 발 끝에 떨어진 볼을 발바닥으로 긁으며 컨트롤하고.

어느새 성큼성큼 전진해 온 하베르츠를 흘깃 바라봤다.

마치 레버쿠젠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베르츠는 온몸의 힘을 쥐어짜내며 뛰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입가에 떠오른 웃음을 보니, 지금이 즐거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최선을 다하는 하베르츠라, 그것도 조금 어색한 말인데.

그 순간, 하베르츠와 눈이 마주쳤다.

그럴 때가 있다.

미드필더는 눈빛만 보고 선수의 다음 행동을 예측한다.

그리고 그 예측되는 움직임으로, 새하얀 길이 보인다.

'여기로 패스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처럼.

무언가 홀린 것처럼, 나는 들어오는 압박을 이겨 내고.

달려드는 선수 가랑이 사이로 볼을 빼낸 다음, 공을 컨트롤하며 발끝으로 툭 찍어 차 올렸다.

"-------!"

비명인지, 외침인지, 함성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괴상한 소리가 이명처럼 울려 퍼졌다.

하늘을 날으며 수비진 머리 뒤로 넘기던 패스는.

어느 순간 파고든 하베르츠가 그대로 머리를 갖다 대면서 헤더 슛으로 이어졌다.

"Blues!"

"하-베르츠! 하-베르츠!"

"제-프! 제-프!"

어디보자.

이제 어시스트가 두 개인가.

미드필더로 출전했으면, 어시스트로 해트트릭은 해야 하지 않겠어?

***

베르나베우에서의 90분은 길었다.

현재 경기 스코어는 3 대 1이었으며, 총합 스코어는 6 대 3이었다. 여기서 레알 마드리드는 무조건 4골을 넣어야만 했다.

그들이 그렇게 자신했던 원정 다득점에 의해서 3골을 넣어 동점을 만들어 봤자 지는 경기였으니까.

제아무리 마드리드 선수라도, 그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기적과도 같은 역전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포체티노는 참담한 기분을 느끼며 교체와 전술 변경을 지시했지만.

첼시는 견고했다.

"지독하게 안정적인데."

코너 에어리어에서 몸을 풀던 올리버가 중얼거렸다.

제퍼슨 리가 중앙에 있음으로 인해 얻어지는 효과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첫째는 안정감이었다.

늘 약점으로 지목됐던 수비 불안이 완벽히 사라졌다.

중원에서부터 상대를 무력화시키니, 상대는 그만큼 공격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보는 입장에서는 도저히 질 거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경기 자체가 안정적으로 흘러가게 됐다.

'나보다 미드필더를 잘하다니.'

물론 시기와 질투 같은 건 아니었다.

올리버는 선망의 대상을 보듯 제퍼슨을 바라봤다.

그리고 관중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홀로 8만 명의 홈 관중을 침묵케 하고.

수천 명의 원정 팬들을 열광케 했다.

'이런 게 챔스구나.'

리그에서는 몇 번 교체와 선발로 뛰긴 했지만,

올리버는 점점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여자와 TV, 잡지에서 보여지는 모습이 아니라, 이와 같은 경기장에서 뛰고 싶단 욕망.

그는 관중석에서 스탠드가 무너질 것처럼 열광하는 팬들의 얼굴을 하나씩 눈에 새겼다.

하나같이 대단한 열정으로 무장한 사람들.

런던에서 여기까지 날아와 그저 축구에 미쳐 응원하는 저 사람들.

'이쁘네.'

별안간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과 함께 온 여자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곤 피식 웃었다.

'습관이 어디 안 가지.'

아무리 축구에만 집중한다고 해도 본래 성격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다.

그때였다.

"올리버. 들어갈 준비해."

"!"

"캉테 대신 들어간다. 이번에는 캉테의 역할을 최대한 따라해 봐. 볼을 끊는 것뿐만 아니라 기회가 생기면 전진하고, 패스하고, 열리면 때려. 알겠어?"

"알겠어요."

올리버는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필드로 나섰다.

"제프. 나한테도 어시스트를 해 줄 수 있겠어?"

제퍼슨은 올리버를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뭐야, 괜찮은 세리머니라도 생각났어?"

"응. 저기 저 여자한테 달려가려고."

올리버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아까 올리버가 감탄했던 미모의 여성 관중이 있었다.

제퍼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자 친구?"

"아니, 오늘 처음 보는데. 근데 곧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거 같아."

"······."

제퍼슨은 괴상한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신호 주면, 박스 안으로 뛰어가. 알겠어?"

"물론이야, 친구."

"못 말리겠군."

***

[제퍼슨 리의 패스가 대지를 가릅니다! 맙소사! 완벽한 로빙 스루 패스가 정확히 골문 앞에 떨어지고, 올리버가 발끝을 갖다 댑니다! 대단합니다! 교체 투입된 올리버가 3분 만에 쐐기 골을 집어넣습니다!]

[총합 스코어 7 대 3! 베르나베우가 무너집니다! 제퍼슨 리는 오늘 세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합니다! 레알 마드리드는 그를 통제하지 못했어요! 첼시, 이대로,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 레알 마드리드라는 거함을 침몰시키고 챔피언스리그 8강에 진출합니다. 이대로---!]

삐이이이익!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립니다!]

[첼시가, 레알 마드리드를 총합 스코어 7대 3으로 꺾고 8강에 진출합니다!]

[믿기지가 않네요. 아니, 제퍼슨 리는 1차전에서 해트트릭, 2차전에서는 1골 3어시스트를 기록합니다. 이 모든 골에는 전부 제퍼슨 리가 관여했다는 겁니다! 이건 제퍼슨 리가 만들어 낸 8강이죠!]

***

"할아버지! 오늘 어때요?"

"최고지. 말했잖냐. 이번 챔피언스리그는 블루스가 우승한다고."

아치는 아버지와 딸의 대화에 그저 속으로 웃었다.

'오길 잘했군.'

90분이 즐거웠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자신의 손을 잡고 경기장을 찾았을 때처럼 열정적이었고, 자신만의 회사를 차리겠다고 밤새 사업에 몰두하는 다 큰 딸도 모든 피로를 떨쳐내고 즐거워했다.

마치 옛날에 그리기만 했던 단란한 가정이 된 것 같은 기분에, 그저 즐거웠다.

물론 경기 자체도 재밌었다.

"제퍼슨 리, 얘 장난 아닌데요?"

아치의 감탄 섞인 말에, 아버지는 마치 본인이 제퍼슨인 것처럼 어깨를 펴며 짐짓 거드름을 피웠다.

"말했잖냐. 이 자식은 물건이라고. 미드필더로 나온 게 좀 아쉽네. 골대 앞에서 진짜 무서운 놈인데."

"이 유니폼 던져 준 선수도 잘하는 거 같은데요."

딸, 클로이는 골을 넣고 션 올리버가 이쪽으로 던져 준 유니폼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흥. 걔는 영 아니야. 최근엔 좀 열심히 하는데. 워낙 노는 걸 좋아하는 바람둥이 같은 자식이야."

"제가 유니폼 받아서 질투하는 건 아니죠? 할아버지?"

"크흥! 필요 없어! 제퍼슨 리라면 모를까."

"흐음. 저기, 오늘 우리의 영웅들이 오네요."

아치는 조손지간의 대화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가 무리해서라도 경기장에 가까운 좌석 티켓을 구한 건 바로 이런 이유였다.

원정 온 팬들에게 인사를 하러 오는 선수들을 바로 코앞에서 볼 수 있으니까.

"할아버지, 보세요. 제가 제퍼슨의 유니폼을 받아 낼 거니까요."

"웃기는 소리!"

그런 대화를 들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놀랍게도 제퍼슨은 그쪽에 와서 유니폼을 던져 주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때 아버지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이! 제프! 내 손녀딸을 줄 테니까! 유니폼을 줘!"

"······."

아치는 말을 잃었다.

< 162.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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