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161화 (161/258)

< 161.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 (3) >

드레싱 룸에 들어선 라모스가 별안간 소리쳤다.

"우리는 챔피언이지."

눈을 하나씩 맞추며 나직하게 말했다.

"난 여기서 수없이 트로피를 들어 올렸어. 빅이어? 내 손으로 몇 번이나 들어 올렸는지 모르겠어."

라모스의 연설은 나직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나이가 들어 기량이 하락하면 스타 플레이어라도 거침없이 내친다. 라모스는 노장이었지만, 오로지 실력만으로 아직까지 레알의 캡틴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슈퍼스타들에게 통하는 건 오로지 실력과 명성이다.

수많은 감독이 이들을 장악하지 못하는 건 그런 이유였다. 선수 모두가 인정하는 라모스의 말에 선수단은 집중했다.

"하지만 매번 기분이 색달라. 우리는 지겨울 정도로 트로피를 들어 올렸지. 트로피가 없는 시즌은 기억도 안 나는군. 그런데 말이야. 자칫하면 이번 시즌이 그럴 수도 있어."

라모스는 냉정하게 현실을 지적했다.

라리가는 3위.

국왕컵은 탈락하지 않았지만, 라이벌인 바르셀로나와 AT마드리드가 여전히 대진표에 있지 않은가.

챔피언스리그도 1차전 패배로 명백히 수세에 몰린 상황.

"오늘 다들 정신 차려! 우리는 여기서 반드시 승리를 쟁취해 낸다. 그리고 빅이어를 향해 달려갈 거야. 알겠어? 친구들?"

라모스는 거창하게 얘기를 늘어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드레싱 룸은 뜨겁게 달아올랐으니까.

뒤늦게 드레싱 룸에 들어간 포체티노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럴 때 보면 여긴 감독이 왜 있나 싶군.'

새삼 이 선수단을 장악했던 지네딘 지단이 감탄스러울 뿐.

포체티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라모스를 바라봤다.

'라모스를 선발에서 빼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옳다.

1차전에서 라모스는 명백하게 제퍼슨을 통제하지 못했다.

오히려 제퍼슨에게 당했다.

베테랑의 경험과 노련한 판단을 기대했지만, 제퍼슨은 심리전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압도적인 피지컬로 노쇠화가 뚜렷한 라모스를 그야말로 패대기쳤다.

'라모스는 제퍼슨을 통제하지 못해. 차라리 젊은 수비수를 넣는 게 맞는 판단이야.'

제퍼슨은 1차전에서 주구장창 라모스의 피지컬을 공략했다.

20대의 한창인 선수들도 제퍼슨의 반응속도와 힘을 이겨 내지 못한다. 라모스가 세계 최고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지금 그 시기가 지났다는 것 역시 부정 할 수 없지 않나.

불과 5년만 젊었어도 라모스는 제퍼슨을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이겨냈으리라.

그런데도 포체티노는 라인업에서 라모스를 뺄 수 없었다.

'팀의 스타 수준이 아니지. 역사 그 자체야.'

2005년부터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어온 수비수.

수많은 트로피를 수집한 최고 선수.

그의 팀 내 영향력은 포체티노가 감히 손댈 수 없었다.

만일 라모스가 포체티노에게 반감을 품는다면?

지금은 서로 원하는 걸 주고받는 공생관계다. 감독은 라모스의 어느정도 월권을 수긍하고 라모스도 감독의 권위를 어느정도 인정한다.

만일 라모스가 대놓고 반기를 든다면?

포체티노는 챔피언스리그뿐만 아니라 앞으로 남은 모든 경기 일정에서 크나큰 위기에 직면할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라모스가 투입되면서 팀의 분위기가 뭉쳐지는 건 확실하니까.'

베테랑의 존재, 캡틴의 존재.

라모스가 5년만 젊었다면, 오늘의 승리는 당연했을 것이다. 포체티노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였다.

'우리가 원정 2골을 넣었다고,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다고 말하지. 하지만 제퍼슨이라면, 원정에서 두 골쯤은 가볍게 생각하지 않을까.'

***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이 시작부터 거셉니다!]

레알은 무조건 첫 득점을 가져가야 한다.

여기서 실점을 내준다면 총합스코어는 더 벌어진다.

경기를 여유롭게, 원하는 대로 이끌어 가기 위해선 득점이 필요했다.

4-3-3의 포메이션을 들고 온 레알 마드리드는 시작부터 거세게 몰아쳤다.

[벤제마가 많은 비난을 듣지만, 그가 수년 간 레알 마드리드의 원톱 스트라이커인 것에는 이유가 분명합니다!]

원톱에 위치한 벤제마는 펄스나인의 역할을 철저하게 수행했다.

그리고 그때 발생한 빈틈을 에덴 아자르와 비니시우스 주니오르가 파고들었다.

[에덴 아자르 기습적인 슈팅! 시셀도의 아슬아슬한 태클에 맞고 나갑니다! 코너킥입니다!]

[시작하자마자 코너킥 찬스를 맞이하는 레알 마드리드. 모드리치, 올려줍니다, 오! 세상에! 라모스! 헤더! 세-르히오 라모스 헤더! 라모스가 헤더로 선제골을 넣습니다!]

[챔피언스리그에선 라모스죠! 그간 수많은 경기에서 라모스는 늘 결정적인 골을 기록했습니다! 이로써 총합스코어 3대 3!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이 스코어가 90분까지 유지된다면, 레알 마드리드가 다음 라운드에 진출합니다!]

***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경기장은 생각보다 고요했다.

8만 관중이 가득 찬 경기장이지만, 잉글랜드처럼 격렬한 응원은 없었다.

대부분 오페라라도 보듯이 우아하게 경기를 지켜봤다.

물론 응원단석 쪽은 시끄럽고 열광적이지만, 나머지는 손뼉을 치고 가끔 소리치며 북돋는 정도다.

하나 그런 고요함이 숨 막히는 압박감이 되어 어깨를 짓눌렀다.

특히 전반전 7분이 지날 무렵.

묵직한 응원구호가 1분 내내 울리기 시작했다.

"illa illa illa Juanito maravilla!"

레알 마드리드에서 '기적'이라고 불렸던 7번 후아니토를 가리는 응원구호.

8만 관중이 일제히 묵직한 저음으로 토해 내는 구호는 마치 광기에 찌든 사이비교도들의 울음같았다.

"여긴 베르나베우야. 너희가 런던에서처럼 마음껏 할 수 없겠지."

라모스의 말에 난 멀뚱히 웃었다.

확실히, 베르나베우의 분위기는 차원이 달랐다. 8만 관중은 차치하고, 경기장 특유의 웅장한 분위기가 어깨를 짓누르는 기분이니까.

"후아니토가 말했어. 베르나베우에서의 90분은 아주 길다고. 너흰 그 90분 동안 지옥을 맛볼 거야."

유명한 말이다.

늘 후반 종료 직전, 또는 추가시간에 기적적인 역전골, 결승골을 집어넣는 후아니토가 했던 명언.

베르나베우에서의 90분은 길다.

확실히 레알 마드리드는 챔피언스리그 같은 큰 무대에서, 홈구장에서 엄청난 역전승과 기적을 보여 줬던 팀이다.

레알의 역사와 함께한 라모스는 당당하게 말했다.

난 그를 슥 무시하고 중얼거렸다.

"90분이 길면 다행이군. 골 넣을 시간이 한참 남아서 말이야."

***

[제퍼슨 리가 공을 받습니다!]

센터서클 바로 위, 어태킹 서드 지역으로 넘어가는 제퍼슨에게 캉테의 짧은 숏패스가 도착했다.

레알 마드리드 미드필더들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얕보지 마! 미드필더 자리에서도 미친놈이니까!"

모드리치가 귀신이라도 본 것마냥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랬다.

오늘 제퍼슨 리는 최전방이 아닌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 있었다.

아주 대단한 놈이다.

2선에서 3선까지.

흉흉하기 짝이 없는 피지컬로 중원을 붕괴시키고 있다.

"함부로 붙지 마!"

여러 번 제퍼슨과 부딪친 카세미루가 눈을 빛냈다.

접근해서 태클하기엔 쉽지 않다. 괴물같은 피지컬에 밀리는 건 본인이요, 자칫하면 화려한 테크닉에 바보처럼 속을지도 모른다.

카세미루는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수비 범위를 조정하며 제퍼슨의 몸짓 하나하나 노려봤다.

발바닥으로 공을 슬그머니 움직이는 제퍼슨을 절대 놓치지 않겠단 의지로 바라보면서······.

"빌어먹을! 저 자식은 또 뭐야!"

그런데 그때, 측면에서 중앙으로 크게 파고들었던 마크 우트가 귀신처럼 나타났다.

아니, 정확히는 제퍼슨이 갑자기 찔러낸 아웃프런트 패스가 길게 휘어지더니 도착한 공간에 우트가 나타났다.

"제기랄!"

카세미루의 위치가 오히려 애매해졌다.

제퍼슨을 견제하기 위해 거리를 뒀던 것이 우트에게 달려들기엔 너무 늦었다.

황급히 몸을 날려 패스를 쳐 내려고 했지만,

아웃프런트 패스는 그림같은 궤적을 그려 내며 태클을 피해 갔다.

우트는 그 공을 가뿐하게 트래핑하고 툭툭 치고 나갔다.

"그쪽 라인 지키면서 놈들한테 붙어!"

라모스가 재빨리 수비진을 지휘하면서 카르바할과 함께 우트를 견제했다.

카세미루는 흘깃 뒤를 곁눈질했다.

제퍼슨이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제퍼슨을 견제해야 한다!'

1차전에서 카세미루는 제퍼슨과 많이 부딪치진 않았다.

제퍼슨은 어쨌거나 최전방에서 머무르면서 폭발적인 공격력을 보여줬으니까.

그때만 해도 정말 대단한 스트라이커라고 느꼈다.

한데 오늘, 제퍼슨은 미드필더로 출전했고 서로 포지션 때문에 끊임없이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원래부터 미드필더였나? 원래 포지션이 미드필더였던 게 분명해!'

스트라이커가 펄스나인의 역할에서 뛰는 것 자체도 쉬운 게 아니다.

타고난 감각이 있어야 한다.

한데 오늘 제퍼슨은 펄스나인도 아닌, 전형적인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했다. 그런데도 카세미루는 질겁했다.

너무 버거웠다. 그의 전진 드리블을 막는 것도, 그의 패스를 예측하는 것도.

문제는 제퍼슨이 중원에 가담하면서 하베르츠와 캉테가 1차전보다 더 미쳐 날뛴다는 것이고, 마드리드의 모드리치-카세미루-크로스 조합의 위력이 무뎌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방금 전 아웃프런트 패스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귓구멍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니고 말이지.'

카세미루가 식은땀을 흘리며 제퍼슨을 견제하는 사이.

라모스를 비롯한 마드리드의 수비진은 훌륭하게 우트의 접근을 막아냈다.

파고들 틈을 놓친 우트는 결국 뒤로 백패스를 보내면서, 다시 템포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됐다.'

이 정도면 막은 것이나 다름없다.

수비진은 자리를 잡았고, 모든 선수가 내려와 패스 줄기를 틀어막았다.

그런데 카세미루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우트의 백패스가 제퍼슨에게 도달한 것.

'공간이 없다.'

이미 모든 공간은 레알의 선수들이 틀어막았다.

한데도 제퍼슨이 공을 잡자, 안도감은 깔끔히 사라졌다.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이 슬그머니 목을 간지럽혔다.

"자리 지켜!"

카세미루에게 소리치고 크로스가 옆에서 제퍼슨에게 강하게 달라붙는다.

하나 그 좁은 공간.

"Wuuuuuuuuuaaaaa!"

소수의 첼시 원정팬이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한 순간.

제퍼슨은 협소한 공간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들러붙는 크로스를 바디 페인팅으로 속여내고,

같이 압박하던 카르바할의 다리 사이로 공을 빼낸 다음, 순식간에 페널티 박스 코앞까지 도착했다.

'미쳤어!'

저런 플레이를 너무 간단하게 해낸다. 마치 게임처럼.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에 카세미루가 욕설을 내뱉으며 달라붙었다.

길쭉한 다리를 쭉 뻗고, 한쪽 팔은 벌리면서 치고나갈 공간을 잡아 두고, 나머지 한쪽 팔은 굽혀서 충격에 대비한다.

그러나 그 순간에.

제퍼슨이 전진하면서 스트라이커 포지션으로 이동하고, 그 자리를 메꾼 하베르츠에게 공이 도달했다.

'어떻게?'

카세미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공은 제퍼슨의 발끝에 있었건만.

어느 순간에.

'여기서 백힐을 한다고? 뒤도 안 돌아보고?'

온몸에 소름이 다닥다닥 올라왔다.

선수들은 가끔 예상치 못한 공간으로 패스를 한다. 중계로 보는 사람들은 감탄한다. 어떻게 보지도 않고 패스하지?

하지만 실제로는 다 본다. 공을 드리블하는 순간, 키핑하는 순간, 모든 플레이를 하기 전에 선수들은 고개를 빠르게 돌려 선수들의 위치를 파악한다. 그게 축구의 기본이다.

한데 제퍼슨은 정말로 고개를 돌려보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만 노려본 채 달려오다가, 감각적으로 백힐 패스를 했다.

달려오는 제퍼슨을 보며 카세미루는 격렬한 위기감을 느꼈다.

공을 컨트롤하지 않는다면, 러닝백은 살인무기 그 자체다.

네다섯 명의 디펜스맨을 뚫어내는 러닝백을, 카세미루가 어찌 막겠는가.

"크윽!"

제퍼슨은 카세미루를 밀고 달렸다.

툭!

하베르츠는 두 명의 머리를 넘기는 로빙패스를 올려 줬고,

라모스가 험상궂은 얼굴로 공을 향해 달려갔다.

먼저 도착한 건 제퍼슨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라모스는 눈을 빛냈다. 공을 컨트롤하려는 순간 어깨싸움을 걸어 중심을 무너뜨린다. 그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하나, 그 순간.

라모스는 차마 욕도 내뱉지 못했다.

무시무시한 침묵이 박스 안에 내려앉았다.

"!"

투욱!

떨어지는 공을, 다시 한번 그대로 긴 다리로 쭉 차올리는 제퍼슨.

공은 달려들던 라모스의 머리를 넘기고,

제퍼슨은 라모스를 가볍게 터닝으로 피해 내며.

뛰쳐나오는 골키퍼를 향해 다시.

투욱!

로빙 슛.

단 한 번도 필드에 떨어지지 않은 채.

제퍼슨은 오로지 공중에 뜬 볼을 컨트롤 하며 골네트를 흔들었다.

그 무시무시한 광경에 레알 마드리드의 관중들은 입을 꿀꺽 다물었다.

무시무시한 침묵이 내려앉은 채.

제퍼슨이 실룩이며 라모스에게 말했다.

"베르나베우에서의 90분은 길다고 했지? 그럼 너흰 좆 된거야. 90분 내내 처맞아야 하니까."

< 161.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 (3)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