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160화 (160/258)

< 160.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 (2) >

솔직히 말해 미국에서 돌아다닐 때,

날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꽤 많았다.

그건 내가 캡틴 아메리카니, 미국의 영웅이니 엄청난 유명세를 얻은 후에도 그랬다.

워낙 땅이 넓고 인구도 많고, 축구를 포함한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아예 없는 사람도 많으니까.

의외로 난 미국에서 제법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런던은 아니었다.

"제프다!"

애들은 날 보면 손가락질하면서 소리쳤고.

"저거 제프의 차 아니야? 훈련장에서 봤어!"

도로에서 운전하고 있노라면 옆에서 경적을 울려 대며 반갑다고도 하고.

"오, 제프! 우리 집에 와서 식사라도 하는 게 어때요? 내 이 뱃살이 다 와이프 요리 덕택이거든!"

영국 요리가 맛있다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어쨌건.

런던 시내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건 꽤 힘든 일이었다. 덕택에 나는 할리우드 스타처럼 선글라스니, 모자니, 스카프로 무장한 채 돌아다닌 적이 많았다.

하지만 여기서는 의외의 경험을 하고 있었다.

"흠. 여긴 딴 세상 같아. 이 슈퍼스타, 션 올리버를 못 알아보다니."

"넌 별로 안 유명하잖아."

"······이래봬도 연예계에서 좀 핫하다고. 날 좋아한다고 말한 배우와 가수가 어디 한둘 인줄 알아?"

"몰라."

올리버를 상대하는 건 간단하다.

뭐라 떠들던 그냥 무시하거나 단답으로 대응하면, 혼자 떠들다가 지친다.

뭐, 말은 이렇게 해도 올리버뿐만 아니라 날 알아보는 시선도 얼마 없다.

물론 흘깃 날 보고 알아보는 눈치도 있건만, 막 달려들진 않는다.

그럴 만했다.

정장을 입은 모든 사람이 한없이 바빠 보였고.

그나마 한적한 카페도 노트북을 꺼내고 전화를 들고 연신 작업하면서 겨우 커피만 홀짝이는 사람도 많았다.

아무리 축구의 나라라고 해도,

여기 런던 금융가, 시티 오브 런던은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알아보더라고 해도, 굳이 아는 척을 하지는 않는 거겠지.

"역시 이런 데가 좋지 않나요? 열렬한 팬들도 없고, 아무런 방해 없이 얘기를 나눌 수 있으니까요. 반갑습니다. 아메리칸 엑스포트 스포트 유럽지부의 제크라고 합니다."

제크는 나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옆에 있던 올리버에게 악수를 청했다.

올리버는 언제 떠들었냐는 듯이 우아하고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악수했다.

"반가워요, 첼시의 션 올리버입니다. 의류사업을 하나 하고 있기도 하구요."

"네, 반갑습니다. 여기 명함입니다. 아, 제퍼슨 당신에게도요."

명함? 나는 받을 필요가······.

"유럽지부 총책임자라. 흐음, 승진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모두 제퍼슨 덕택이죠."

제크 팀장은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이다.

"에이전시가 본격적으로 똬리를 트나보네요. 팀장이 아니라 총 책임자라."

"예. 이제 규모도 확장할 타이밍이죠. 욕심내서 좋은 선수들과 많이 계약하고요."

제크는 웃으면서 올리버를 바라봤다.

'좋은 선수'라고 말할 때 노골적으로 올리버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올리버는 내심 좋아했지만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입꼬리 올라가는 거 다 보인다.

이번 만남을 주선한 건 나였다.

올리버가 내 에이전시와 계약하고 싶단 뜻을 밝혔다.

"저는 축구에 전념할 생각입니다. 제가 운영하는 패션 사업도 전문 CEO를 영입했고요."

올리버는 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이었다.

"당분간 모델로 런웨이에 서는 것도 자제해야죠. 잡지 사진 찍는 것도요. 축구에 집중하기 위해서, 기타 모든 걸 담당해 줄 에이전시를 찾고 있어요. 제프가 당신을 추천해 주더군요."

제크는 씩 웃었다.

"그럼요, 올리버. 당신은 이제 축구만 하면 됩니다."

제크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것저것 한참 설명을 늘어놓았다.

에이전시가 어디까지 해 주고, 어떤 성과를 내고 있는지부터 해서 등등.

나도 꽤 들을 만한 이야기였다. 한참 이야기를 하던 둘은 이내 당연하다는 듯이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제크가 웃으며 말했다.

왠지 모르게 사악한 웃음으로.

"좋아요, 올리버. 우선 첼시와의 계약서부터 다시 확인해 보죠. 이왕이면 돈은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좋잖아요?"

흠.

그렇긴 하지.

***

"어디 대박이라도 쳤나."

아치 테일러는 조금은 부러운 기색으로 옆에 테이블을 흘겨봤다.

정장 차림의 비즈니스맨 한 명과 캐쥬얼한 차림이지만, 체격이 워낙 좋아 눈길이 절로 가는 혼혈인, 거기에 배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잘 생긴 남자까지.

시티 오브 런던에서 보기 힘든 조합이라 눈길이 한번쯤 갈만했다. 더구나 피로에 찌든 얼굴이 아니라 즐거운 일이 있는지 웃음을 터뜨리는 대화까지.

그러나 아치는 이내 고개를 젓고는 노트북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깔끔한 듯한 정장이지만 살짝 빛이 바랜 셔츠 칼라. 면도했는데도 살짝 지저분하게 자란 턱수염, 푸석한 머리칼과 지친 눈빛은 흔한 금융가의 사업가중 하나였다.

"후."

한번 찌푸려진 표정은 펴지지 못했다.

하는 사업도 쉽게 풀리지 않고, 사무실이 아닌 카페에 와서 머리 좀 식히려했건만, 막상 오니 워커홀릭처럼 결국 노트북을 보며 일을 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휴식을 취한지가 언젠지 모르겠군.'

주말도 반납하고 살아온 삶.

불현 듯 회의감이 들지만, 이내 털어냈다. 회의를 느끼기엔 너무 바쁜 삶이었고, 신경 쓸 게 많았으니까.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꽉 조인 넥타이를 좀 풀었다.

"아버지 한번 보러가야 할 날이군."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토했다.

카페에서 노트북을 접고 아치가 찾아간 곳은 요양병원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지내는 곳이기도 했다.

아치는 바쁜 생활 중에도 적어도 한달에 한번은 아버지를 찾아갔다.

"왔냐."

"네."

그러나 아버지는 쳐다도 보지 않고 TV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익숙한 듯 아치는 가지고 온 음료와 과일을 한쪽에 내려놓으며 흘깃 TV를 바라봤다.

"또 축구 보세요?"

"그렇지. 내 유일한 낙이다. 네 손 잡고 경기장 갔던 게 엊그제 같은데."

"엊그제는요. 20년은 지났습니다."

"쯧쯧, 정 없는 놈."

둘 사이는 이랬다.

어렸을 때는 서로 살갑기도 했지만, 아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고 저도 모르게 사람이 건조해졌다. 아치는 흘깃흘깃 TV를 바라봤다.

"첼시네요?"

"우리 가족은 영원한 블루스 아니냐."

"제 직장엔 구너들이 더 많아요."

"당장 그만둬라. 그딴 쓰레기 같은 회사."

"제가 CEO인데요."

"다 잘라 버려. 구너 놈들은 믿을게 안 돼."

"일만 잘하면 되죠. 그래도 스퍼스는 없어요."

"스퍼스까지 직원으로 있으면 당장 내일이라도 망할 회사지."

아치는 오랜만에 웃었다.

괴팍하긴 하지만 아버지는 진지했다.

'마지막으로 언제 갔더라.'

그도 어렸을 때 열렬한 블루스였다.

경기마다 아버지 손을 잡고 갔다.

축구는 삶의 전부였다.

10년 전, 챔피언스리그 우승 이후 아마도 경기장을 찾는 게 줄어들었다.

그때부터 자기 사업을 시작했으니까.

그러다보니 축구의 나라 영국에서, 그것도 축구의 수도 런던에서 그는 축구를 보지 않는 극히 일부의 사람이 되었다.

"레알 마드리드하고 붙네요? 챔피언스리그?"

"16강이다. 저놈 봐라, 저놈. 저거 물건이야 물건. 제퍼슨 리라고, 아주 난놈이다."

별안간 아버지가 흥분하며 소리쳤다.

"지안프랑코 졸라? 그 늙은 놈은 이제 잊혀졌어. 저 녀석이 진짜야. 진짜."

아치는 신기한 눈길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축구에 유난히 흥분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가 선수 한명을 극찬하는 건 처음 본다.

램파드니, 드록바니, 첼시의 영웅이었던 선수들도 저렇게 칭찬하진 않았건만.

아치는 이내 TV에서 나오는 선수를 보고 흠칫했다.

'어?'

눈에 익은 덩치 큰 선수.

'아까 카페에서?'

어찌 잊겠는가.

그 큰 덩치를.

아치는 저도 모르게 TV화면에 빨려 들어갔다.

[레알 마드리드가! 빛나는 블랑코(Los Blancos:레알 마드리드의 애칭)가 또 한 번 통한의 실점을 내줍니다! 제-퍼슨 리! 공에 대한 완벽한 통제, 환상적이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엄청난 골을 성공시킵니다! 해트트릭입니다! 해트트릭! 레알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제퍼슨 리! 누가 프리미어리그의 왕인지 보여줍니다!]

"와."

아치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런 모습에 아버지가 흐뭇한 얼굴로 쳐다봤다.

"봐라. 쟤가 지금 블루스의 주전 공격수인데, 스무 살 밖에 되지 않았어. 2시즌 째인데 작년엔 60골을 넣었지. 지금도 40골 가까이 넣었을걸? 아주 물건이야 물건!"

아버지는 끊임없이 제퍼슨의 칭찬을 쏟아냈다.

아치도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랑 대화가 통하는 건 늘 축구뿐이군.'

생각하는 게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그렇게 살아왔건만.

이 괴팍한 아버지와 대화가 통할 때는 늘 축구 얘기였다.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그렇게 자신을 데리고 경기장에 데려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끙. 저 자식 공차는 거 한번 보고 싶건만."

"······."

대화의 끝에 아버지가 미련처럼 남긴 말에 아치는 무언가 말하려다 목 뒤로 삼켰다.

여러 가지로 힘들다.

아버지의 건강, 본인의 스케줄 등등.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복잡한 원인들.

아치는 애써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이제 가 볼게요."

"그래라. 요즘······ 많이 바쁘냐."

"브렉시트니 뭐니 난장판이잖아요."

"그래, 그래. 가끔 적적하니 놀러 와라."

"네."

"네 생일 때도 오고."

"······네."

아치는 쓰게 웃으며 나왔다.

한 달 전, 생일일 때 찾아왔건만 아버지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빌어먹을 치매.'

그 저주받을 병에 걸렸다.

그순간, 아치는 차에 타려다 멈췄다.

아들의 생일도 잊으신 양반이, 방금 전 축구 경기와 제퍼슨 리의 개인 기록까지 아주 줄줄 읊어 댔다.

뿐만 아니다.

손잡고 경기장을 갔던 시절까지 모조리 기억해 내고 있었다.

그 사실에 아치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짜릿한 감정이 들었다.

사실 고통스러운 게 이거다.

세상을 잊어가는 아버지와 추억을 쌓고 싶지만, 그 추억마저 잊혀질 거 같단 고통.

하지만 축구라면.

아치는 심호흡을 하고 비서에게 전화했다.

"다다음주 수요일 마드리드행 비행기 티켓 좀 끊어 줘. 퍼스트 클래스로. 아, 세 개. 내 딸하고, 아버지하고, 나까지."

***

16강 2차전까지, 리그 28라운드와 29라운드 모두 승리했다.

사우스 햄튼과 웨스트브롬위치.

두 팀 다 1대 0, 2대 1 신승이었다.

감독은 과감하게 부분 로테이션을 가동했고,

어찌됐건 우리는 결과를 얻어 냈다.

주전 선수들의 체력 비축과 승점 6점까지.

이쯤 되니 언론들도 호들갑을 떨기 시작한다.

[트레블을 노리는 첼시, 16강 2차전을 위해 마드리드의 베르나베우로!]

하지만 트레블은 아직 멀다.

FA컵은 8강부터 3경기가 남았고, 리그도 9경기, 챔스도 16강을 넘어도 8강, 4강, 결승까지.

끔찍한 일정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고 기죽지는 않는다.

감독은 마드리드 경기장 관리인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트로피 전시장 좀 보여 주시죠."

일찍 도착해 경기장에서의 감각을 익히는 게 보통이다.

한데 감독은 우리를 전시장으로 이끌었다.

"더럽게 많네."

올리버가 감탄 반, 시기 반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시장에는 온갖 트로피가 가득했다.

그리고 감독은 맨 가운데, 빅 이어를 향해 다가가 소리쳤다.

"오늘! 너희가 이 트로피를 빼앗아 오는거다! 아니, 강탈해 오는 거야! 우린 강도가 돼서 베르나베우를 철저하게 털어 버리는 거지!"

확실히 트로피를 실물로 보니 체감이 확 된다.

물론 16강.

갈 길은 멀다.

하지만 저 빅이어를 들기 위해선, 지금 이겨야 한다.

선수들의 눈동자가 불타오른다.

"근데 저거 진짜 트로피야? 모조야?"

"그게 중요해?"

"중요하지. 가짜면 훔쳐봤자 뭔 소용이야."

"······."

아.

그 얘기가 맞나보다.

금발에 잘생긴 놈은 멍청하다고.

내가 한숨을 내쉬자, 올리버는 뭐가 문제냐는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쯧.

"닥치고 가서 몸이나 풀어."

"응."

< 160.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 (2)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