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 (1) >
[챔피언스리그 16강 첼시 3 : 2 레알 마드리드]
[스탬포드 브릿지로 돌아온 아자르, '첼시는 내가 있을 때보다 더 강한 팀이 되었다.']
[제퍼슨의 해트트릭, 아자르의 2골. 제퍼슨이 승리를 쟁취해 내다.]
[프리미어리그의 왕이라는 칭호, 제퍼슨이 아자르로부터 강탈해 내다.]
[레알 마드리드의 수비마저 부숴 버린 제퍼슨 리, 챔피언스리그의 더 높은 곳까지 갈 수 있을까]
[레알 마드리드 팬들, '우리의 공격수자리엔 제퍼슨 리가 필요하다.' 구단주에게 선수 영입 요구!]
***
경기는 끝나고도 그 열기가 쉬이 식지 않았다.
늦겨울이지만 런던은 벌써 여름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뜨거웠다.
경기 끝나기 직전 아자르에게 한 골을 더 내줘서 3대 2가 되어도, 경기는 어쨌거나 승리는 승리였다.
챔피언스리그 3연속 우승이라는 업적을 세웠던 거대한 클럽을 상대로 말이다.
선수들인 우리가 느낀 짜릿함도 대단한데, 그걸 지켜본 팬들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Blues! 너희는 우리에게 세계 최고의 클럽이란 자부심을 선물해 줬어!"
런던 시내를 돌아다니다 만나는 시민들은 모두 저렇게 소리쳤다.
첼시는 빅이어를 들어 올렸던 경험이 있는 팀이다.
하지만 그건 무려 정확히 10년 전.
그때만 해도 첼시는 당시 한국에서 우스갯소리처럼 '레바뮌첼(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바이에른 뮌헨, 첼시)'라고 묶여 부를 정도로 강팀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리그 우승은 몇 번 더 성공했지만, 유럽 무대에서의 성적은 크게 좋지 못했다.
물론 유로파 우승이 여러 번 있긴 했으나.
챔피언스리그란 무대와는 다르다.
"우리는 당신들이 빅이어를 들고 올 거라고 믿어요! 올해에도, 내년에도, 내 후년에도 말이죠. 늘 빅이어에 도전할 수 있는 팀이 되길, 다시 바라고 있어요. 새로운 감독과 선수들이 그걸 해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젠 이들이 바라는 건 이거다.
한 시즌 반짝이는 팀이 아니라.
우리가 1차전에서 잡은 레알 마드리드처럼, 매 시즌 빅이어에 도전하는 꾸준한 강호이자 찬란한 역사를 가지는 팀이 되기를 바라는 것.
그렇게 말하는 팬들에겐 내가 뭐라 할 수 있겠나.
"신이 그 믿음을 들어주실 겁니다. 만일 안 들어주면, 제가 들어주죠."
***
1차전은 이겼다. 1점차로.
"홈에서 2실점을 내줬지."
감독은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더럽게 강하더라고."
맞다.
더럽게 강하더라.
솔직히 우리가 어떻게 이겼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 경기는, 중원에서부터 철저하게 당했고 전술적인 면에서도 우리는 완패한 게 분명했다.
"솔직히 그렇게 선수를 쓰는 건 나도 생각해 봤지. 하지만 진짜 될 줄은 몰랐어. 선수들이 90분 내내 그걸 해내다니."
감독은 모두 전술적인 식견이 우수하다. 아는 것도 많다. 하지만 그걸 실제로 구현해 내긴 어렵다. 그 전술을 이해하고 따르는 선수들의 퀄리티 때문이다.
포체티노가 토트넘에 있을 때, 전술적으로 아주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감독은 아니었다.
하나 그가 마드리드에서 보여 준 일전의 다이아몬드형 4-4-2는 확실히, 놀라운 것이었다.
"그게 선수들이 퀄리티겠죠. 90분 동안 감독이 요구하는 전술을 완벽하게 수행해 내는."
펩 과르디올라가 왜 맨시티의 첫 시즌에선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나.
자신의 전술을 완벽하게 따라 줄 선수진을 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즌이 지날수록 맨시티는 과르디올라의 전술을 완벽하게 수행해 내는 팀으로 바뀌었다.
"그래. 감독도, 선수도 아니지. 축구는 모두가 중요해. 모두가."
선수들이 성장하는 것처럼.
감독도 성장한다.
난 우리 감독이 많이 발전해서 세계적인 감독이 되면 좋겠다. 그저 스트라이커 성애자, 스트라이커를 가장 완벽하게 이해하는 감독이란 호칭을 떠나 세계 제일의 전술가나, 승부사. 뭐 그런 걸로.
그래야 우리가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겠나.
"원정 다득점 원칙이 있지. 우리가 베르나베우 원정에서 0대 1로만 져도 게임은 끝이야."
1차전은 분명한 승리지만, 불안한 승리였다.
원정 다득점의 원칙에 따라, 총합 스코어가 동점이 돼도 우리가 지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원정에서 세 골 이상을 넣는다면 다르지만.
그게 쉽지는 않을 거다.
똥개도 자기 안마당에서는 한 수 먹고 들어가는데, 하물며 레알 마드리드는 오죽할까.
"제프, 새로운 전술을 생각해 냈거든. 너의 도움이 필요해."
내 도움?
감독과 함께 팀에 자리를 잡은 일명 필마르크 사단에 속한 코치들은 다 유능하다.
수비 전술에선 아직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내가 느끼기엔 다 좋은 코치들이다.
그런데 굳이 왜 나와 전술 상의를?
날 바라보는 감독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네가 다음 2차전의 KEY다. 늘 그렇듯이. 하지만 이번엔 좀 다르게."
***
[프리미어리그 27라운드, 첼시와 울버햄튼의 경기를 전달해 드립니다!]
[불과 4일전 첼시는 챔피언스리그 1차전을 치뤘죠. 물론 홈구장에서 치렀기 때문에, 체력적인 문제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것 같네요.]
[다만 카이 하베르츠, 아스필리쿠에타와 풀리시치가 벤치에서 시작합니다. 가장 관심을 끌었던······ 제퍼슨 리는 선발이군요!]
첼시는 몇몇 선수를 체력관리 차원에 로테이션을 돌렸다. 대체로 거의 주전에 가까운 라인업이었다.
직전 리그 경기에서 스완지에게 충격패를 당해, 2위 리버풀과 승점 5점 차이, 3위 맨시티와 승점 6점 차이로 좁혀졌다.
이젠 큰 승점차이라고 볼 수는 없다.
[첼시는 세 개의 대회에서 우승을 노리고 있습니다. 매 경기 치열하게 싸워 줘야죠.]
승점이 필요한 건 첼시뿐만이 아니다.
울버햄튼은 리그 초반만 해도 중상위권을 유지했으나, 후반기에 급격하게 무너지며 어느새 강등권을 목전에 두고 있다.
물론 한 경기 진다고 강등권으로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팀의 분위기, 감독이 곧 경질될 거란 루머까지.
그 어느 팀보다 승점이 절실한 팀이기도 했다.
[제퍼슨의 움직임이 시작부터 날카롭네요.]
[불과 4일 전에 경기를 치른 선수 같지 않아요. 감각은 예민하고 날카롭습니다. 지친 모습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불과 작년에만 해도, 그의 유일한 약점은 체력이었죠! 이젠 제퍼슨에겐 체력 따위는 약점이 아닙니다. 그의 약점은······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네요!]
***
타미와 우트의 경쟁에선, 우트가 이겼다.
타미는 좋은 선수지만 우트는 솔샤르의 플레이를 흡수하면서 한층 더 성장했으니까.
"제프!"
조르지뉴의 패스를 2선 라인까지 내려와 받고,
순간적인 내 움직임에 미묘하게 흔들린 수비 틈으로 우트가 쏜살같이 파고든다.
'지금은 아니야.'
패스를 달라는 제스처와 눈빛.
지금은 아니다.
가끔 미드필더들은 착각할 때가 있다.
이 정도 패스면, 스트라이커는 받겠지? 슈팅할 수 있겠지?
아니다.
스트라이커마다 기준이 다르다. 그들의 플레이에 따라 패스의 방향과 세기, 궤적은 모두 달라야 한다. 그걸 모두 완벽하게 통제하는 미드필더가 세계적인 미드필더다. 가령 하베르츠나 데 브라이너 같은 친구들 말이다.
지금 공을 주면, 슈팅에 성공해도 그 특유의 슈팅은 불가능하다.
하면.
툭!
"헙!"
성큼, 한 발짝 치고 나가면서.
수비 하나를 가뿐하게 제치고 달려오는 수비를 끌어낸다.
수비진의 균열을 발생시키고.
빙그르르 돌면서 수비를 등지고.
감각으로 느낀다.
등지기 전에 봤던 우트의 움직임을 상상하고, 또 상상한다.
그리고 발뒤꿈치로, 등 진 수비수의 가랑이 사이로 툭 빼내는 힐 패스.
투욱!
"미친!"
수비들의 입장에선 어이가 없을 거다.
예상치 못한 패스.
상상도 못 한 위치로 향하는 궤적에서, 툭 튀어나오는 자그마한 인영.
우트는 아주 가볍게 공을 트래핑하고, 또 낮고 빠르게 마무리를 지었다.
"우-트!"
"마르크----우트!"
선취골을 넣은 우트가 양팔을 크게 들어 올렸다.
"조만간 내 응원가가 생길거야, 제프."
"그럴 거 같아. 골 감각이 아주 좋아졌는데?"
"너의 마법 같은 어시스트 덕분이지. 어때. 내 여동생하고 만나보는 건?"
"이쁘냐?"
"날 닮았어."
"미안하지만, 이건 인종차별도 국가차별도 아니야. 난 독일 여자하고 사귀고 싶지 않아."
"······."
***
"환상적인 플레이야."
"확실히, 천부적인 재능이네요. 어떻게 저기서 저런 패스를 하죠? 아니, 우트가 저기서 튀어나올 줄은 대체 어떻게 알고?"
수석코치는 혀를 내둘렀다.
필마르크는 씩 웃었다.
"그러니까 제퍼슨이라는 거지."
"뭔가······ 이유가 되게 허무하면서도 합당하군요."
"저 녀석은 스트라이커야. 스트라이커지만, 스트라이커가 아닌 친구기도 하지."
"그런 것 같네요. 방금 전 어시스트는, 엄청난 패스였으니까요. 하지만 이것만으로 새로운 걸 시도하기엔 어렵습니다. 차라리 정석적으로 가시죠. 어차피 우리가 한 점 앞서고 있지 않습니까."
"1점은 당장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스코여야. 더구나 레알이라면. 자네도 봤잖나. 캉테와 하베르츠, 마운트의 중원을 질식시키는 그걸."
"흠!"
"더 지켜보자고."
수석코치는 뭔가 마땅찮은 기색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날 상대하는 팀의 대부분은 수비수를 많이 가져가는 방식을 최우선으로 택한다.
파이브백을 내놓는 포메이션도 있고, 그도 아니면 더블 볼란테를 집어넣어 수비를 강화시킨다.
가끔 선수의 조력 없이 그사이를 뚫고 지나가야할 때가 있다.
그런 나에게 돌아오는 건 네다섯 명의 강력한 압박.
바글거리는 수비수 사이를 피해 내기 위해선 여러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역동성, 스피드, 탈압박, 고난이도의 테크닉과 순간적인 센스까지.
피지컬적인 측면이 아니라 테크닉과 센스 같은 것들은, 이젠 회귀 전보다 훨씬 발전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워낙 치열하게 싸웠으니까.
프리미어리그의 정상급 선수들 상대로 내 실력도, 회귀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이건 확실했다.
왜냐면.
툭!
"개자시이이이익----!"
나에게 몰린 세 명의 압박을 벗어나면서.
텅 빈 공간으로 질주하는 오른쪽 오도이에게 길게 찔러주는 패스.
오도이는 그 패스를 이어 받아, 지금껏 갈고 닦은 슈팅 능력으로 득점에 성공했다.
"The Blues! Blues!"
2대 0으로 달아나는 골.
첼시 팬들은 벌써부터 승리의 냄새를 맡고 소리를 질러 댔다.
"봐봐. 아무리 윙어라도 가끔 슈팅을 날려 줘야 한다고."
"이거, 느낌 좋은데?"
"그렇다고 스트라이커 할 생각은 하지 마. 뚫을 라이벌이 너무 많거든."
"물론이야, 제프. 너와 경쟁하는 스트라이커들이 다 불쌍하게 느껴진다니까."
***
"생각해 봐. 저런 녀석이 중앙에서 딱 자리 잡고, 휘젓는다면? 그 옆에 캉테와 하베르츠가 있다면?"
필마르크의 말에 수석코치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지금까지 늘 수비 서너 명을 오로지 힘과 테크닉으로 뚫어내던 놈이야. 그깟 중앙에서의 압박? 지금 봤잖아. 탈압박 능력은 미쳤고, 순간적인 센스는 천재적이고, 고난이도의 테크닉은, 오! 제기랄. 호나우지뉴를 옆에 세워 보고 싶군!"
필마르크는 흥분된 채 크게 떠들었다.
수석 코치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판단력은 마치 15년은 공을 찬 베테랑 같고, 경기를 지휘하는 운용능력은 캡틴 같기도 하네요. 볼 키핑 능력은 기본기에서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우트도 한 수 접을 정도이이니······."
수석코치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필마르크가 다음 16강 2차전에서 제퍼슨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됐는지 이해했다.
"하지만 그는 스트라이커죠. 그 포지션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올려 주는 선수예요. 그런 선수를······."
그때였다.
중앙에서부터 공을 몰고 드리블을 시도하던 제퍼슨이,
거의 30m거리.
수비들이 뒤로 물러난 잠깐의 틈을 노려 그대로 슈팅을 때려 버렸다.
마치 대포알 같은 직선 슈팅.
그 슈팅은 공간과 수비를 가르고, 골키퍼가 반응조차 못하는 속도로 그물에 처박혔다.
"······."
"봐, 저 자리에서도 잘 넣잖아?"
"······허."
"물론 나도 저 녀석을 스트라이커가 아닌 다른 포지션에 계속 쓸 생각은 없어. 하지만 저런 무기를 16강 2차전에서 보여 준다면, 어쩌면 1차전처럼 무기력하게 중원이 장악당할 일은 없을 것 같거든."
필마르크가 씩 웃었다.
그가 생각한 다음 2차전 전술의 KEY.
"저 녀석은 마치, 원래 미드필더였던 것처럼 너무 그 역할에 익숙해. 잠깐 실험해 본 건데······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가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라니. 하하하!"
< 159.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