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158화 (158/258)

< 158. 챔피언스리그의 외래종 (4) >

프리킥의 궤적은 환상적이었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수비벽이 갈라지는 틈을 노린 프리킥. 골키퍼의 손에 닿는 순간 좀 더 미묘하게 휘어졌다.

그 감각에 선수들의 동공이 흔들렸다.

특히 골키퍼 쿠르트아는 마른 침을 삼켰다.

'대체 뭐지?'

손끝에 닿는 순간.

잡지는 못해도 공을 쳐 냈다는 감각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공은 마치 미끄러지듯이 조금 더 휘어졌다.

마치 프로 볼링 선수가 공을 굴렸을 때, 직선으로 쭉 가다가 막판에 급격하게 휘어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 지랄 해 놓고 레알에 가더니 딱 어울리는 수준이구나!"

"쿠르트아! 오! 어디 있나! 골문 앞에 있는데 보이지가 않네!"

"쿠르트아! 세계 최고의 골키퍼! 하지만 그건 자기만 생각하지!"

쿠르트아와 끝이 좋지 않았던 첼시팬들은, 어깨동무하며 조롱을 시작했다.

'제기랄.'

쿠르트아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입술을 깨물었다.

한때 저들의 응원을 받으며 이곳에서 뛰었지만.

축구판은 원래 이런 법이다.

아자르가 특이한 케이스다.

지금 아자르는 첼시를 떠난 지 꽤 됐지만, 아직도 첼시팬들은 그가 슈팅할 때마다 적절한 손뼉을 쳐 주면서 존중을 표하고 있었다.

그런 걸 보면 쿠르트아는 확실히 첼시팬에게 원성을 샀다.

그런 쿠르트아에게 한 방 먹여 준 제퍼슨의 강력한 프리킥에 팬들은 환호작약했다.

"빅이어를 들기 위해 마드리드로 갔겠지?"

"오 쿠르트아! 넌 16강이 네 인생 최대 커리어야! 왜냐면 제퍼슨이 너희를 죽여 버릴 거거든!"

경기 흐름은 분명 레알 마드리드가 우세했다.

중원 싸움에서 점차 밀리면서 무너지는 듯한 첼시였건만.

롱패스 한 방에 이뤄진 전개.

그리고 프리킥까지.

"정신 차려! 고작 한 골이야!"

홈팬들의 압도적인 응원은 선수단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왔다. 라모스는 흔들리는 선수들의 눈동자를 읽었다.

예상치 못한 실점이다.

코너킥 또는 간접 프리킥에서의 실점을 대비했다.

첼시는 공중볼이 좋은 선수들이 즐비했으니까.

물론 좋은 키커를 갖고 있었지만, 직접 프리킥에서 득점하는 경우가 얼마 없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그렇게 분석했고, 라모스가 마지막 순간에 경고를 각오하고 반칙을 시도한 것도 그런 분석에 근거한 판단이었다.

"제기랄."

라모스는 씰룩이며 웃는 제퍼슨을 보며 욕설을 삼켰다.

분명 시비는 그가 먼저 걸었건만, 이상하게 말려드는 기분이었다.

"노인네, 아직은 멀쩡하네?"

"미국인이라서 그런가? 빌어먹을 예의는 쓰레기통에 갖다 쳐 박았나 보군."

"억울하면 막아 보던가."

"이······!"

라모스는 겨우 욕지기를 참았다.

제퍼슨의 능글거리는 웃음에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길. 스무 살짜리 애송이가 맞는 거야?'

실력이야 차치하고서도, 필드 위에서 대선배격인 선수한테 이런 형식의 트래시토크에서 밀리지 않는 선수가 또 있던가.

배짱이 두둑한 건지, 아니면 천둥벌거숭이인지.

라모스는 입술을 깨물며 제퍼슨을 노려봤다.

이미 심리전에선 제퍼슨이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퍼슨은 표정을 찌푸리며 돌아서는 라모스를 보고 씰룩 웃었다.

'그런 식으로 한 선수를 의식하면 큰일 나거든.'

선수 경력만 따지면, 제퍼슨의 경력이 더 많다.

물론 세계무대에서의 경험은 다르지만, 제퍼슨은 회귀 전 구르고 굴렀던 놈이다.

온갖 잡다한 리그에서 뛰었고 수없이 쏟아지는 인종차별과 비난, 조롱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런 그에게 심리전을 거는 라모스는 오히려 우스울 정도다.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린놈에게 당하는 기분은 상상도 하기 싫군.'

물론 그걸 본인이 하는 건 재밌는 일이었다.

***

레알 마드리드는 강했다.

솔직히 말해 우리 중원이, 프리미어리그에서 맨시티와 리버풀로도 밀리지 않던 캉테-하베르츠 조합이 에워싸이는 모습에 감탄이 나왔으니까.

'다이아몬드형이군.'

측면 미드필더처럼 뛰던 모드리치와 페데르코 발베르다가 중원에 가담하면서, 순간적인 다이아몬드를 이루는 포메이션이었다.

네 명의 미드필더가 우리 중원을 그대로 에워싸면서 질식시키는 형태.

내가 첫 골을 넣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하베르츠의 번뜩이는 패스 한 방 덕분이었다.

전술적으로, 그리고 선수진의 개인 기량에서도 우리는 확실히 밀리고 있다.

툭, 툭!

"오- 아자르! 아자르!"

첼시팬으로서는 조금은 안타까운 장면이 나왔다.

모드리치의 우아한 패스를 받은 아자르는 벤제마가 수비들을 끌어낸 틈을 타고 들어가 동점골에 성공했다.

스코어는 단숨에 1대 1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지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챔피언스리그는 원정 다득점이 원칙이니까.

"두 골은 더 필요하겠어."

한골 차이는 상대에게 늘 여지를 줄 수있다.

하지만 두골 차이는 다르다. 상대의 의지를 꺾어버릴 수 있다.

하면 시간은 많지 않다.

아직 전반전이지만.

공격 기회가 얼마나 찾아올 것인지는 현재 흐름만 봐도 알 수 있다.

'숨 막히는군. 작정하고 나왔어.'

몇 번 찾아오지 않을 기회.

그 기회를 반드시 살려내야 한다.

그리고 전반 종료 직전.

우리에겐 분명한 찬스가 또 한 번 찾아왔다.

그 찬스는 갑작스레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싸워 주던 캉테의 저돌적인 돌진에, 우아하기 짝이 없던 모드리치가 턴오버 실책을 범했다.

"달려 들어가!"

누구의 외침인지는 모르겠다.

그 소리를 듣고 벼락처럼 뛰었다.

풀리시치는 터치라인에서 박스 쪽으로 크게 돌고 들어오고,

오도이는 터치라인을 따라 질주.

나는 중앙에서 막아서는 카세미루를 곁에 달고 뛰었다.

메이슨 마운트 역시 박스 쪽으로 향하며 수비의 시선을 빼앗고.

툿!

"이 자식!"

나에게 낮게 깔려 오는 패스를 향해 먼저 발을 뻗는 카세미루를 가벼운 바디체크로 밀어뜨리고.

공을 완벽하게 내 통제 아래 둔 뒤.

달려간 내 동료들을 바라본다.

찾아야 한다.

패스를 찔러줄 수 있는 길을.

그러자 수비수들은 나에게 달려들지 않고 뒤로 슬그머니 물러선다.

그래, 패스 길을 막겠다 이거지?

좋은 판단이다.

스트라이커의 무리한 드리블을 유도할 수밖에 없는, 아주 영리한 수비.

역시 라모스다.

근데 판단을 잘못했다.

툭!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수비진 앞에서 왼쪽 대각선으로 공을 길게 차고.

"잡아!"

수비수들의 눈동자에 희열이 어린다.

그들의 예상대로 내가 무리한 돌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

'보이는 것'일뿐이다.

"어어?"

라모스의 파트너로 출격한 바란이공을 막기 위해 달려오지만, 그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확실히 보였다.

분명 나보다 먼저 움직였으니, 공을 걷어 낼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겠지.

그래.

착각이다.

"미친! 왜 이렇게 빨······!"

"막아!"

바란보다 한 발짝 앞서 툭 치고 간 공을 다시 잡고.

"슈팅 때릴 수 없게 막아!"

라모스의 외침과 함께 카르바할이 몸을 날리는 태클을 한차례 공을 차 놓고 피한 뒤에.

보인다.

순간적으로 무너진 수비 틈 사이.

골키퍼가 날 노려보고 있고, 나 역시 그를 노려본다.

열렸다.

방향은 단 한 갈래. 골키퍼는 미리 자세를 잡고 있다.

이미 방향을 읽었으면, 골키퍼가 승리할 확률이 높다.

'일반적으로'는 말이다.

단 한 갈래의 길을 향해.

슈팅을 날리려는 순간.

기습적인 라모스의 슬라이딩 태클이 들어온다.

"!"

솔직히,

감탄했다.

깔끔하고도 공만 노리는 태클.

이 상황에서 이런 태클이라니.

'챔피언스리그는 다르구나.'

그 상황에서 상대에 대한 감탄이라니.

물론 그건 찰나였다.

내 중심이 무너지고 쓰러지는 순간까지 공에 대한 집념은 꺼지지 않았다.

스윽!

팔 한쪽으로 땅을 짚고, 다리를 쭉 뻗어 넘어지면서도 잔디를 빗자루로 쓸 듯이 공을 끌어안고.

"미친 새끼!"

비명처럼 외치는 라모스의 손을 뿌리친 채.

오뚝이처럼 일어나서,

"막-아!"

비명인지, 외침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바락 질러 대는 쿠르트아를 향해.

아니, 정확히는 쿠르트아의 벌려진 왼쪽 공간을 향해.

강력한 슈팅을 때렸다.

뻐어어엉!

'됐다.'

그런 느낌.

발등에 얹힌 묵직한 그 느낌이 말해 줬다.

이건 못 막아. 야신이 와야 가능성이 있어.

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먼 포스트로, 급격하게 꺾여 들어가는 역회전이 실려 있는 공.

"-------!"

홈팬의 환호와 원정팬의 절규가 뒤섞인 함성이 고막을 울리는 가운데.

벤치에서 어퍼컷을 들어 올리는 감독의 외침만큼은 또렷이 들렸다.

"챔피언스리그는 우리 것이다!"

암.

그래야지.

***

그런 경기가 있다.

귀신에 홀린 듯한 느낌의 경기.

포체티노는 그런 기분이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

점유율, 슈팅, 공간장악, 기회창출.

그가 원하는 대로, 레알 마드리드의 슈퍼스타들은 완벽하게 수행해 냈다.

그러나 스코어는 반대였다.

이런 경험을 느껴보는 건 처음이다.

'운이 없나?'

그럴 리가.

다만 제퍼슨 리가 두 개의 유효슈팅을 두 개의 득점으로 연결하는 말도 안 되는 공격수라는 점이, 경기를 이렇게 만들었다.

후반전 들어서 첼시는 그야말로 공격적으로 나왔다.

홈에서 다득점을 하겠다는 생각.

중원에서의 싸움은 다이아몬드형을 유지하는 마드리드가 계속해서 가져갔다.

그러나 그 우위가 끝까진 가지는 않았다.

후반 83분.

선수들의 체력이 고갈되어 갈 무렵.

최전방에만 머무르면서 체력을 비축했던 제퍼슨이, 마치 웅크렸던 사자가 사냥감을 앞두고 속도를 내는 것처럼.

하프라인까지 내려와 기습적으로 공을 탈취했다.

"제프!"

마운트가 곧바로 반응하며 먼저 뛰어간다.

공을 달라는 제스처.

그러나 제퍼슨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담담하게, 그리고 침착했다.

투욱!

'속도다. 마운트는 지쳤어. 얼마 달려가지 못하고 시동이 꺼질거야.'

그의 생각처럼.

[제퍼슨 리! 단 조금의 딜레이도 없이 달립니다! 역습입니다!]

마드리드의 선수들이 지쳐 가는 상황.

제퍼슨은 이들을 무너뜨릴 너무 강력한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앞을 막아서는 카세미루를 화려한 개인기로 제치지 않았다.

투욱!

"---!"

가랑이 사이로 공을 툭 차고, 비명인지 욕설인지 내뱉는 카세미루를 무시한 채 쭉쭉 내달렸다.

[제퍼슨! 제퍼슨! 달립니다! 달립니다!]

중계진은 그 이상의 말을 할 수 없었다.

달려드는 수비수를 모두 무시하고 직선으로 쭉쭉 달려드는 그 모습은.

시각적 쾌감뿐만 아니라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바란이 뒤늦게 앞을 막아서지만, 제퍼슨은 그저 우직하니 뚫고 들어갔다.

모두가 지친 상황.

남은 힘을 모두 불사르는 제퍼슨에겐, 화려한 개인기보단 때로는 가장 간단하고 쉬운 것이 통할 때가 있다.

지금처럼.

뻐억!

몸으로 밀치고, 공을 길게 차고.

치달의 전형.

쭉쭉 뻗어 나가는 그 엄청난 기세에 마드리드 수비진은 어느새 떨어져 나갔다.

흡사 혼자서만 1.5배 빠르기로 화면을 재생하는 듯한 광경.

달려드는 쿠르트아의 벌려진 가랑이 사이로.

낮고 빠르게.

"------!"

솔샤르 특유의 그 슈팅이 골네트를 흔들었다.

중계진은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제-퍼슨! 제퍼슨이! 제퍼슨이 해트트릭을, 달-성합니다!]

"하."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본 아자르는 허탈하게 웃었다.

"프리미어리그의 왕이라."

자신이 레알로 이적했을 때, 언론이 그렇게 말했다.

프리미어리그의 왕이 베르나베우로 온다고.

한데 최근 호사가들은 말한다.

프리미어리그의 왕은 제퍼슨 리라고.

그 말을 들었을 땐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자신은 첼시에 수많은 승리와 트로피를 선물해 줬던 존재니까.

그런 팬들이 자신을 그리워하지도 않고 제퍼슨을 좋아한다는 것에 내심 속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게 부질없었다.

너무나 명확한 사실 앞에서는 질투는 멀어지고 그저 수긍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대관식 따위는 필요 없었군."

이미 왕은 제퍼슨 리였다.

< 158. 챔피언스리그의 외래종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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