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챔피언스리그의 외래종 (3) >
레알 마드리드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명문이다.
물론 최근 명성이 약간 빛 바란 감이 있다. 하지만 찬란했던 과거를 비롯해 불과 몇 년 전에 지네딘 지단이 3연속 빅이어(챔피언스리그 트로피)를 들어 올린 커리어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레알 팬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클럽임과 동시에 가장 강한 팀이라는 프라이드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런 팀일수록 상대를 얕보고 방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방심에 경기를 망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에덴 아자르 '첼시는 유럽에서 가장 강한 팀. 우리는 그런 팀을 이기기 위해 왔다.']
첼시의 에이스였던 에덴 아자르가 포문을 열었다.
그는 기존 첼시 선수들과도 종종 연락하고 있다.
-너희들이 제퍼슨 때문에 날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건 들었어.
에덴 아자르는 부정할 거 없이 대단한 선수다.
이적 첫 시즌에는 저조한 활약에 많은 비난에 직면했지만, 그다음 시즌부터 7번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 자식이 그렇게 잘해? 이 아자르가 잊혀질 만큼?
"아, 이거 스피커폰이야. 아자르."
아스피가 웃으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아하. 훈련장에서 다 같이 듣고 있었나?
"네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동료들이 많아서."
-하하하! 그래, 뤼디거하고 케파도 거기 있지?
뤼디거와 케파가 유쾌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그래, 아자르. 우리 여기 있어."
-너희는 모든 걸 동원해서 날 막아야 해. 나는 옛 팀에 대한 예의는 있지만 자비는 없거든.
그 말에 라커룸에 쾌활한 웃음이 가득했다. 물론 웃지만, 그 속에는 살짝의 묘한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아자르는 한다면 한다는 놈이었다고, 그렇게 얘기했으니까.
확실히 아자르는 기존 동료들하고 친했나 보다.
보통 팀을 떠나면 전화조차 잘 안하는 경우도 많은데 말이지.
"제프, 너도 한마디 해 봐."
음, 아자르하고는 말도 안 섞어 봤는데.
나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자르, 거기 골키퍼하고 수비진한테 전해요."
-아, 네가 제퍼슨이야? 그래, 뭘?
"모든 걸 동원해도 날 막지 못할 거라고. 그러니까 마음 비우고 오라고요."
-······.
"오, 이런! 아자르가 한 방 먹었군!"
아스피가 통쾌하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흠. 제퍼슨, 이거 기억해. 프리미어리그의 왕은 원래 나였지. 난 그 왕관을 누구한테도 물려주지 않았어. 네가 그 자격이 있는지는 경기장에서 만나면 알게 되겠군.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뭐, 아자르가 스탬포드 브리지에서 야유를 받을지 환호를 받을지는 모르겠다만.
어찌 됐건 홈에서 레알에게 질 생각은 그 누구도 가지지 않았다.
"좋아, 런던까지 오는 마드리드 놈들을 처참하게 밟아 주자고!"
***
사실 원래 역사로 생각하면, 포체티노는 지금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이 아니어야 한다.
그는 토트넘에서 부진을 겪다가 결국 경질당한다.
그 이후 여러 팀을 오가지만, 레알 마드리드는 그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원래라면 레알은 이때 다른 감독이 챔피언스리그 4강까지 이끌었을 것이다.
이젠 역사의 흐름이 완전히 바뀌었으니.
레알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무시할 수는 없다. 원래대로라면 4강에 진출할 저력이 있는 팀이니까.
"흐음. 역시 이 경기장의 분위기가 아주 좋아."
"건강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랜파!"
선수들이 반갑게 소리쳤다.
우리 팀의 전속 사진사였던 할리 할아버지가 복귀한 것이다.
그간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있었는데, 최근 회복한 후에 다시 스탬포드 브리지로 돌아왔다.
물론 조금 힘들어 보이긴 했지만, 할리는 희미한 웃음을 머금으며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이봐, 캡틴!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위한 시작인데 모두 기념사진이나 한 장 찍지!"
우리 구단에서 할리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40년간 구단에서 일해온 경력을 모두가 존중했다.
그는 나직하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로 소리쳤고, 아스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랜파. 다들 모여! 사진 한 장 찍자고."
할리가 병원에 입원한 후에 팀에 이적했던 선수들은 다소 뻘쭘한 얼굴로 모여들었다.
그들로서는 할리가 낯설면서도 신기할 거다. 감독뿐만 아니라 구단의 모든 직원이 그를 반겼으니까.
듣자 하니 그가 입원한 동안 병원비도 로만 구단주가 다 처리해 줬다고 들었는데.
그런 영향력을 가진 할리가 한마디 하자, 선수들은 물론 코칭스태프까지 필드 위에 올라왔다.
마치 시즌 시작 전에 사진을 찍는 것처럼 말이지.
"이 사진이 빅이어와 함께 클럽하우스에 전시되면 좋겠군."
할리가 사진을 찍으며, 흐뭇하면서도 약간은 슬픈 눈빛으로 웃었다.
"10년 전에 첼시가 챔스 우승했을 때, 그랜파는 그때 거기 없었거든. 손녀가 아파서 병원에 있었대."
아스피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때 현장 사진을 찍지 못했다는군. 그래서 아쉬워하는 거 같아."
아하.
그럴 만도 하다.
40년 동안 첼시의 사진을 찍었는데,
정작 역사의 한 페이지를 직접 찍지 못했으니까. 사진사로서 허무하겠지.
나는 사진을 몇 장 더 찍는 할리를 보며 소리쳤다.
"빅이어를 옆에 놓은 사진도 찍을 테니까, 그때까지 카메라 렌즈 관리 잘해 주세요! 그랜파!"
할리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땐 기가 막힌 사진을 찍어 주지.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말이야. 너희들을 모두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게."
***
[드디어 스탬포드 브리지에서 엄청난 경기가 열립니다! 첼시와 레알 마드리드의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 경기가 시작됩니다!]
[아주 기대되는 경기네요. 사실 먼저 치러진 경기는 모두 이변이 없었습니다.]
[맨시티가 도르트문트를 4대 2로 격파했고, AT 마드리드가 1대 0으로 샬케를 이겼죠. 바르셀로나는 무려 6골을 넣으며 FC 포르투를 침몰시켰습니다! 그 외에도 바이에른 뮌헨과 유벤투스가 모두 승리를 가져갔습니다.]
[이변이 없는 정석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지금 이 경기도 레알 마드리드의 약우세가 예상되죠?]
[라리가에선 조금 아쉬운 성적이지만, 챔피언스리그에선 완벽한 모습을 보이는 강력한 우승후보죠!]
[그에 반해 첼시는 제퍼슨 리라는 핵심선수가 너무 대단하지만, 나머지 포지션에서는 다소 아쉬운 감이 있습니다.]
축구는 팀 스포츠다.
팀으로 따지면 레알 마드리드는 이미 훌륭한 팀이다. 선수들은 하나같이 슈퍼스타였고, 그들은 적어도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누구보다 스스로 동기부여를 철저하게 하니까.
그에 반해 첼시는 제퍼슨 리가 있지만, 챔피언스리그에 오랜만에 왔다는 점. 그리고 비교적 선수들의 평균 어빌리티가 레알에게는 밀린다는 점으로 인해 레알의 약간 우세가 예상됐다.
만일 여기가 스탬포드 브리지가 아니라 베르나베우였다면 레알 마드리드의 강승이 예상됐으리라.
[첼시는 홈에서 승리를 확실하게 가져가겠단 의지입니다. 골키퍼에 케파, 수비진은 에메르송, 뤼디거, 그리고 부상에서 회복한 시셀도, 아스필리 쿠에타가 수비진을 지킵니다. 캉테, 카이 하베르츠, 메이슨 마운트가 중원을 담당하고, 2선에는 풀리시치와 허드슨 오도이, 그리고 원톱에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공격수! 제퍼슨 리입니다!]
[안정감을 가져가겠다는 것이죠. 중앙 미드필더를 세 명을 기용해서 안정감을 가져가고, 풀리시치와 제퍼슨 리, 오도이로 구성된 공격진은 이미 수많은 득점을 기록했으니 공격력에서도 합격점입니다.]
그에 반해 레알 마드리드는 다소 의외의 포메이션을 들고 왔다.
[레알 마드리드의 4-4-2라. 신기하네요.]
[원정에서 역습으로 득점을 가져가, 원정 다득점을 노리겠다는 의지인 것 같네요.]
[레알 마드리드가 자존심을 접고 실리를 택했습니다. 이런 건 바르셀로나나 AT 마드리드를 상대할 때 가끔 보였던 장면인데, 레알 마드리드의 각오가 느껴지는군요!]
공격적인 팀일수록 수비는 오히려 탄탄한 법이다.
레알 마드리드가 그랬다.
화려한 공격력을 살리기 위해 그들의 전술은 공격적인 성향이 짙었다.
그러나 모든 팀이 우승하기 위해선 수비력도 필수였다.
공격적인 팀에서 수비력이 탄탄하려면, 수비진의 실력과 전술 역시 좋아야 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선수들의 퀄리티 하나만으로 그런 게 가능한 팀이었다.
그런 팀이 대놓고 수비진을 탄탄하게 하고 역습하는 축구를 한다면?
[첼시, 그러니까 제퍼슨 리가 오늘은 과연 저 레알 마드리드의 벽을 뚫을 수 있을까요?]
삐이이익-!
"Ganar! Campeón!(승리하라! 챔피언!)"
"Ganar! Ga······."
시작을 알리는 휘슬소리와 함께 경기장에 찾아온 원정팬들은 환호를 지르려다 순간 입을 다물었다.
쿵쿵, 짝!
쿵쿵, 짝!
그들로서는 낯선 첼시의 응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5만 관중이 다 기립해 두 발로 바닥을 크게 구르고 손뼉을 치는 장면.
거기서 느껴지는 박력 넘치는 리듬감에 원정팬들은 쏟아 내려던 함성을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설령 함성을 쏟아 내도 묻혔을 것이다.
너무나 커다란 노랫소리가 경기장을 쩌렁쩌렁 울렸으니까.
"LEE Will, LEE Will Kill you!"
마드리드의 선수들은 일순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빌어먹을. 응원가 하나는 더럽게 좋군."
"LEE가 제퍼슨을 말하는 거지? 어이, 아자르! 여기가 네 홈그라운드였다면서. 너도 이런 응원 받았었어?"
벤제마의 물음에 아자르는 다소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도 개인 응원가가 있었다.
하지만 5만 명이 다 같이 따라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손뼉 치면서 박자 맞추고 노래하는······.
아자르는 묘한 눈빛으로 필드를 뛰어다니는 제퍼슨을 바라봤다.
'이곳의 왕은 나였는데, 흐음.'
이전 동료들이 농담처럼 그런 말을 했다.
이젠 팬들이 널 그리워하지 않는다고.
그 말을 내심 믿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이 광경을 보아하니······.
"끄응. 좀 묘한 기분이군."
마치 결별한 옛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는 모습을 본 듯한 느낌.
어쨌거나 팬들의 응원으로 분위기는 첼시 쪽이 좀 더 뜨거웠다.
응원가는 별거 아닌 거 같지만, 의외로 경기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친다.
"빌어먹을. 저 개 같은 노래를 또 듣게 되다니······."
포체티노는 팔짱을 낀 채로 표정을 찌푸렸다.
저 응원가를 듣고 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
포체티노가 이를 아득 깨무는 사이.
경기는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캉테, 카이 하베르츠의 조합은 레알 마드리드와 정면승부를 할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메이슨 마운트는 돌격대장 성향이 짙고, 수비와 패스력에서는 다소 아쉬운 상황.
[하지만 카세미루는 오늘 월드 클래스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중원에서 카세미루가 진공청소기처럼 패스의 길목을 다 차단했다.
모드리치나 토니 크로스에게 연결했다.
그리고 그걸 캉테가 다시 차단하기를 반복.
서로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중원 싸움.
[밴제마와 에덴 아자르가 많이 움직이면서 강력한 전방 압박을 시도하네요!]
두 명의 투톱이 강력하게 전방압박을 하고, 측면미드필더와 두 명의 중앙 미드필더까지 중원 싸움에 가담하는 형세.
마치 숨 막힐 듯이 조여 오는 그 압박감에 첼시의 패스워크는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레알의 수비진은 최전방에서 움직이는 제퍼슨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난 너랑 싸우기 싫어, 친구. 사람이 짐승하고 싸워서야 하겠어? 그건 이치에 맞지 않잖아? 애송이."
라모스는 제퍼슨의 신경을 살살 긁었다.
어린 선수는 이런 가벼운 언행으로도 쉽게 흔들리는 법.
라모스는 그런 데에선 도가 텄다.
하지만 그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나도 그래. 늙고 추레한 노인네랑 싸워 봤자 병실에 침대 하나 추가하는 거밖에 더 되겠어?"
제퍼슨이 흐물흐물하게 웃었다.
라모스의 표정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제퍼슨은 그런 라모스의 표정을 감상하듯이 지켜보다가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근데 가끔 그것도 괜찮은 거 같아. 노인네를 빨리 병원에 보내 줘야 치료를 받지."
"뭐?"
라모스가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순간.
[하베르츠가 긴 롱패스를 보내 줍니다! 순간적인 압박을 뚫고! 제퍼슨에게!]
라모스는 날아오는 공의 궤적을 바라봤다.
반사적으로 제퍼슨을 밀치면서 뛰쳐나갔다. 아니, 하려고 했다.
뻐억!
"······!"
"런던에 좋은 병원이 있어. 병문안은 가 주지!"
제퍼슨이 한발 빨랐다. 거칠게 라모스와 어깨싸움을 시도했고, 이겨 냈다. 나이를 속일 수 없음인가. 라모스는 커다란 충격에 신음하며 나동그라졌다.
'안돼! 이대로라면!'
그 순간까지 빠른 판단.
라모스는 넘어지는 순간에도 팔을 쭉 뻗었다.
삐비비빅!
반칙이었다.
다행히 페널티 박스 바깥이었음을 확인한 라모스가 저지른 과감한 반칙.
아무리 제퍼슨이어도 대놓고 하는 반칙에는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라모스는 옐로카드와 실점을 주고받았다고 생각했다.
방금 제퍼슨이 빠져나갔으면 여지없이 득점에 성공했을 것이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그 싸늘한 감각.
그건 실점의 위기 때 반응하는 감각이었다.
"흐음. 조금 실망인데?"
"나이를 많이 먹어서. 이런 식으로도 살아남아야지."
제퍼슨은 라모스의 능글거리는 목소리에 피식 웃었다.
"괜히 옐로카드만 받았잖아?"
"아니지. 실점과 카드를 바꾼 거지."
"그럴까?"
제퍼슨은 그렇게 웃으면서 공 앞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라모스는 다시 한번 그 감각을 느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서늘한 감각.
비수가 날아와 심장을 찌르는 그 기분.
그리고.
철럭!
뭐라 말할 수 없는 깔끔한 프리킥 궤적이.
수비벽 사이를 갈라 급격하게 휘어져 골문을 갈랐을 때.
레알 수비진의 얼굴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봐봐. 괜히 카드만 받은 거라니까?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 놓고 왜 이리 사람이 판단력이 떨어져?"
< 157. 챔피언스리그의 외래종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