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 챔피언스리그의 외래종 (1) >
전반전에만 두 골을 넣었을 때, 오늘 경기는 쉽게 가져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기가 쉽게 흘러만 가지는 않았다. 스트라이커가 네 명이 출전한 만큼, 라인이 점점 올라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올라온 라인의 뒷공간 공략하는 레스터 특유의 역습이 발동하면서 제이미 바디가 비수처럼 두 골을 꽂아 넣으며 동점을 만들었다.
"해트트릭은 내가 먼저 할게, 친구."
터널로 들어가는 중에 바디가 그렇게 말을 걸어왔다.
기분 좋은 웃음엔 어떤 악의도 느껴지진 않았다.
뭐라 표현해야 할까.
호승심?
그런 느낌이었다.
득점 랭킹을 살펴보면, 바디는 5위나 6위쯤 일거다.
하지만 정확한 슈팅을 생각하면,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빅클럽에서 탐낼 만한 자원임은 틀림없다.
오늘 그가 보여 준 역습에서의 모습은 감탄스럽다.
빠르고 간결하고, 정확한 역습의 정석.
"뭐, 그 정도는 양보할게."
내 말이 의외였는지 바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캉테한테 듣기론 지나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지만, 그게 또 어울리는 놈이라고 들었는데? 너무 겸손한걸?"
"캉테가 그렇게 말했어?"
내가 어이없게 웃자 뒤에서 따라 들어오던 캉테가 퀭해진 눈으로 급히 시선을 피했다.
"캉테가 나보다 더 대단한 스트라이커라고 막 얘기하더라고. 그 말에 어찌나 질투심이 생기는지."
바디는 짐짓 쾌활하게 웃었다.
생글거리는 눈동자는 아직도 20대의 젊은 선수처럼 반짝였다.
"사실 보니까 질투할 것도 없어. 네 활약 정말 감명 깊게 보고 있으니까. 너랑 같이 뛰면 재밌을 것 같단 말이지."
"첼시로 와. 여긴 스트라이커에 미친 감독이 있거든."
"괜찮은데? 내가 나이가 좀 있는데?"
"지루를 봐. 우리 감독은 나이 상관없이 그냥 스트라이커라면 환장을 해."
"멋진 감독이군!"
"어쨌든 해트트릭은 먼저 해. 그 정돈 양보할게."
"뭐야, 너 교체 당해?"
"아니. 그건 아니고······ 오늘 해트트릭을 두 번 할 예정이라서. 먼저 하는 것쯤이야 양보할 수 있지."
"하하하하······ 하······ 하?"
바디는 내 말을 처음엔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막 웃다가, 내 진지한 표정을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진심이야?"
"응."
"······제기랄. 그래. 스트라이커라면 그 정돈 야망은 있어야지. 네가 나보다 뛰어난 놈인 건 인정하지. 하지만 오늘만큼은 내가 더 잘난 놈인 걸 보여 줄게."
"물론이야, 바디. 이건 조롱이 아니고, 나 정말 네 플레이를 좋아해."
이건 진심이다.
속 시원시원하게 골문을 갈라 버리는 그 플레이를 어찌 싫어하랴.
내 말에 바디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좋아, 친구. 후반전에 보자고."
물론.
그때 만나면 지금처럼 웃지는 못할 걸.
***
후반전, 필마르크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레스터가 동점골을 만들어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여우가 바로 레스터가 아닌가.
필마르크는 절대 모험수를 쓰지 않았다. 어쨌거나 FA컵이란 타이틀이 걸린 대회.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는 지루를 빼고 메인스 마운트를 출전시키면서 중원을 강화했다.
"물론 절대로 너한테 그 세레모니로 맞을까 봐 그런 게 아니다."
"맞아요?"
"아니, 말이 잘못 나왔구나. 포옹 말이다."
"감독님이 좋아서 안긴거 아시죠?"
"······그래. 이제 다른 세레모니는 어떠냐?"
"6골 넣을 때 까지 계속 올게요. 제가 감독님 좋아하는 거 아시잖아요."
제퍼슨의 그 농담 아닌 농담에 필마르크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선수들은 그 모습에 킥킥 웃었다.
"제기랄! 그래! 가서 6골까지 처박아! 오늘 내 몸을 샌드백처럼 마음껏 써라!"
해탈한 필마르크가 그렇게 외쳤고,
제퍼슨은 그의 말을 충실히 이행했다.
[제퍼슨 리! 발을 쭉 뻗어서 떨어지는 공을 완벽하게 통제합니다!]
"이 자식은 대체!"
레스터의 수비수 찰라르 쇠윈쥐의 눈이 커다래졌다.
저번 시즌 제퍼슨을 상대한 경험이 있다.
그때의 기억을 토대로 몸싸움을 시도했다.
완전히 막지는 못하더라도 순간적으로 견제는 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
그러나 부딪치는 순간, 느껴지는 둔중한 충격은 생각과는 너무 달랐다.
어깨가 부러진 것처럼 고통이 치밀었고, 절로 신음을 삼켰다. 자신은 온몸이 나가 떨어질 정도로 큰 충격이건만, 상대는 아무런 문제 없이 공을 가볍게 키핑했다.
전혀 흔들림 없이.
'고작 1년 만에?'
1년 만에 괴물 같은 피지컬이 더 발전했단 말인가?
믿기 힘든 현실이지만, 그것이 진실이기도 했다.
쇠윈쥐는 제퍼슨이 공을 키핑하는데 아무런 방해도 하지 못했고,
제퍼슨은 침착하게 공을 소유한 뒤 골문 구석을 향해 정확히 노리고 찼다.
철럭-!
"Yeaaaaaaaaaaaa!"
"제-프! 제-프! 제-프!"
그의 전매특허인 강슛과는 다른 깔끔하고도 낮게 깔리면서 정확하게 파고드는 슈팅.
솔샤르 특유의 슈팅이 제퍼슨에게 장착되면서.
골키퍼는 막지 못했다.
[정말 제퍼슨은 날이 갈수록 대단해지는군요.]
[기어코 제퍼슨이 해트트릭을 달성합니다! 레스터의 수비진은 역습에 특화된 만큼 단단하기로 유명한데, 오늘은 제퍼슨에게 유린당하고 있습니다!]
레스터 선수들의 얼굴에 짜증과 허탈함이 올라왔다.
사실 엄청나게 멋진 공격 전개에 이은 골은 아니었다.
단지 뚝 떨어지는 공을 제퍼슨이 너무나 쉽게 받아 내고, 너무 허무하게 내준 실점이다.
보기에는 턱없이 허무하고 간단한 플레이.
그러나 오히려 그런 플레이가 정말 어렵다는 사실을 선수들은 잘 안다.
바글거리는 살벌한 수비수 사이에서 화려한 무브먼트와 속임수가 아닌, 단지 우직하고도 간결한 플레이.
그게 쉬울 리가 있겠는가.
그런 사실을 잘 아는 선수들의 얼굴에 초조함이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
'경기 첫 해트트릭은 양보한다더니.'
바디는 제 감독에게 달려가 거칠게 포옹하는 제퍼슨을 보면서 쓰게 웃었다.
'하긴, 저래야 스트라이커지.'
누구보다 지독한 골 욕심을 가져야 하는 포지션.
제퍼슨 리는 가장 적합한 플레이를 보여 준 것일 뿐이다.
'그럼 나도, 이대로 물러설 순 없지.'
해트트릭의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어떤 선수는 1년, 2년 동안 시즌을 치르면서 한 번도 해내지 못한다.
지금이 기회다.
골 감각이 절정에 오른 느낌.
그리고 팀의 FA컵 타이틀을 위해서도 득점이 필요한 상황.
그런 상황 속에서 레스터는 전술 변경을 시도하지 않았다.
어쨌든 전반전에도 이렇게 끌려다가 동점골을 터뜨린 전례가 있으니까.
하나 착각한 게 있다.
지금의 첼시는 전반전과 달리 중원을 강화하면서 가장 안정적이고도 공격적인 플레이를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탁탁!
[메인스 마운트의 돌파가 막히고, 제퍼슨에게 짧은 패스를 내줍니다!]
[제퍼슨 리, 패스하는 척, 이런! 그대로 드리블 치는군요!]
[제퍼슨이 빠르게 레스터의 수비진을 헤집으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두 줄로 이뤄진 빽빽한 수비블록.
깊게 웅크린 채 역습을 노리던 레스터의 수비진은 파고들 틈 없이 단단했다.
한데 제퍼슨은 패스를 내주는 척, 곧바로 드리블을 시도하는 특유의 극도로 짧은 딜레이를 보여 주면서 단숨에 수비진을 헤집었다.
"미쳤군!"
"Wuaaaaaaaaa!"
과감하기 짝이 없는 플레이.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위험한 태클에 분명 부담이 있건만, 제퍼슨은 단 조금의 틈만 존재해도 드리블에 성공했다.
그것이 레스터의 수비들을 일순 당황하게 했다.
"미꾸라지도 아니고!"
"제기랄!"
놀라운 건 마치 몸에 기름이라도 바른 것처럼, 손을 뻗는 대로 툭툭 미끄러지는 것이다. 손뿐인가? 그토록 짧은 공간에 발을 쭉 뻗어 봐도 그걸 간단히 피해 낸다.
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러닝백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역동적인 무브먼트였다.
꾸역꾸역 공간을 파고드는 제퍼슨.
수비들이 당황해서 제퍼슨에게 집중된 사이.
사이드가 완전히 비었다.
그리고 제퍼슨은 그 틈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툭!
"와아아아아아아아!"
"풀리시치! 풀리시치!"
왼쪽 터치라인을 질주한 풀리시치가 제퍼슨의 공을 받고 종횡무진으로 달렸다.
"막아! 달라붙어!"
그토록 단단한 수비블록이 무너지는 건 단 하나였다.
제퍼슨을 전혀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
그 사실이 수비수들의 머릿속에 각인처럼 새겨질 때.
투욱!
[제퍼슨! 뛰어 오릅니다!]
제퍼슨이 하늘을 날았고, 이제는 매크로처럼 첼시의 득점공식이 된 풀리시치 크로스-제퍼슨 헤더 득점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Yeaaaaaaaaaaa!"
"FA컵 타이틀은 우리가 가져간다!"
"여우 자식들은 가서 풀이나 뜯으라고!"
좋아하는 첼시 팬과.
"설마 또 오겠어?"
그러면서도 울상을 짓는 필마르크는,
황소처럼 돌진해 오는 제퍼슨을 보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끙. 오늘 팀 닥터한테 가 봐야겠군."
***
"첼시 구단주가 선수들에게 보너스라도 걸었나."
제퍼슨이 4번째 골을 터뜨리고, 1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5번째 골을 터뜨렸을 때 레스터 감독은 씁쓸하게 웃었다.
5대 2.
팀은 완전히 무너졌다.
프로의식이 투철한 선수들이 그래도 선수단을 다독이면서 어떻게든 전열을 정비하고 있으나, 이미 승부의 추는 기울여졌다.
감독인 본인마저 어찌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데 선수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는 어이없는 눈빛으로 또 한 번 감독에게 포옹인지 바디체크인지 알 수 없는 셀레브레이션을 하는 제퍼슨을 바라봤다.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손자 녀석이 하는 축구 게임에서나 볼 법한 플레이.
그만큼 충격적인 플레이의 연속이었다.
내려앉은 수비를 상대로는 압도적인 제공권과 강력한 피지컬로 단숨에 부수고.
빽빽한 수비진 사이에서 공을 소유했을 때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수비를 파훼한다.
온 더 볼에서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완벽함, 그 자체였다.
'저런 선수에게 약점이 있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제퍼슨의 플레이는 조금의 낭비도 없었다.
그는 오프 더 볼에서 공이 있는 장소로만 뛰었다.
공이 없는 곳에서 뛰고 있어도 어느 순간 그에게 공이 배달되고 있었다.
"리그에서 저 녀석을 상대할 선수는 없군."
그리고 후반 종료 직전.
제퍼슨 리가 마지막 6번째 골을 터뜨릴 때.
감독은 그저 하늘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거, 적당히 해먹어야지······."
그의 목소리에는 그저 허탈함만이 묻어나왔다.
***
선수의 화려하고 믿을 수 없는 플레이를 보고 있노라면,
그것에 기뻐하는 건 선수의 팬이고,
고통스러워하는 건 상대편,
즐거워하는 건 중립팬이다.
관중석 한편.
일단의 무리는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믿기지 않는 플레이인데."
"레스터가 약한 팀도 아니야. 수비수는 영리하고 조직력도 단단했어."
"우리 팀의 스트라이커라고 쉽게 뚫을 조건이 아니었단 말이지."
"그런데 저 자식은 너무 쉽게 뚫었어."
남자들은 서로 느낀 바를 공유했다.
하나 공유하면 공유할수록, 그들은 점점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꼈다.
"좋아. 녀석의 무서운 점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 느끼고 있어. 우리는 그걸 얘기하려고 온 게 아니잖아?"
"······그렇지."
"얘기해 보자고. 저 녀석을 어떻게 대비해야 하지?"
그 말을 끝으로 남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전력 분석관이다.
그것도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클럽 중 하나인 레알 마드리드의 분석관.
한 명, 한 명의 연봉이 대단한 높고, 그들의 실제 능력도 뛰어나기 그지없었다.
때문에 아주 잘 아는 것이다.
지금 제퍼슨에 대한 대비책을 여기서 꺼내라는 건, 불가능한 일이란 걸.
"당장 결론을 내릴 수는 없군."
"맞아. 다들 모여서 코치진하고도 얘기를 해 봐야 해."
"일단 현장에서 본 건, 너무 압도적이라서 당장 우리 머리가 굳은 것일지도 모르지."
"돌아가서 찬찬히 영상을 보면서 뜯어보자고."
"아직 2주는 남았잖아."
레알 마드리드의 분석관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첼시를 분석하고 대비하기 위해 왔건만,
돌아가는 그들의 어깨는 무겁기 그지없었다.
'저런 놈이 챔피언스리그를 뛴다고?'
챔피언스리그는 토너먼트다.
수많은 변수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런 대회에 저런 괴물이 뛰어든다면······.
'생태계가 파괴되겠군.'
분석관들의 머릿속엔,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다 비슷한 생각이 떠올랐다.
호사가들은 말했다.
첼시의 챔피언스리그 도전은, 하필 16강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만난 것이 가장 큰 벽이 될지도 모른다고.
라리가에서 아무리 제 실력을 보여 주지 못해도, 토너먼트에서만큼은 레알은 레알이었다.
때문에 첼시를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하필 레알을 만난 것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러나 지금.
'하필 제퍼슨 리를 16강에서 만나다니. 운도 더럽게 없군.'
상황은 정반대였다.
< 155. 챔피언스리그의 외래종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