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154화 (154/258)

< 154. 박싱데이 (7) >

레스터는 이번 시즌 목표를 FA컵 우승이라 천명했다.

"리그 우승은 좀 힘드니까."

"솔직히 말하자고. 우리의 기적적으로 이뤘던 우승을, 지금도 이루기엔 너무 어려워. 리버풀과 맨시티에 이젠 첼시까지!"

"리그컵은 성에 차지 않지."

"리그는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목표로 하고."

"우리도 FA컵 정돈 들어야지!"

레스터시티는 프리미어리그 중에서도 자부심이 가득한 팬들로 구성되어 있다.

몇 년 전, 기적적인 리그 우승 이후, 매 시즌 챔피언스리그와 유로파리그 진출권을 오가는 좋은 성적을 보여 주고 있으니까.

이제 그들은 우승 트로피에 다시금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갈증을 해소하기엔 FA컵 트로피가 가장 탐스러워 보였다.

하여 레스터시티는 FA컵 시작부터 우승을 약속하고 전력을 쏟아붓기로 했다.

직전 리그 경기에서 얇은 스쿼드임에도 불구하고 로테이션을 가동하여 패배했다. 그런데도 그들의 얼굴엔 단 일말의 조급함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현시점 가장 위험한 첼시라는 상대를 만났다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불안함.

"까짓 못 이길 게 뭐야?"

"우리가 첼시에게 그렇게 약한 팀도 아니잖아."

"저번엔 제퍼슨이란 놈이 있었는데도, 꽤 비등하게 붙었지!"

실제로 레스터는 강팀 상대로 유난히 저력을 발휘한다.

경기 내용이나 흐름은 상대팀에게 분명 지고 있는데도,

결과를 보면 어떻게든 동점을 내거나 이겨 내는 경우가 잦았다.

자신들이 가진 축구 철학에 대한 믿음이 뚜렷했다. 레스터는 늘 하던 대로, 흔들림 없이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경기 당일.

상대방 포메이션을 확인한 레스터 감독은 미간을 좁혔다.

레스터는 빠르고 다이내믹한 역습에 특화된 팀.

그런 팀을 상대로······.

"스트라이커가 네 명이라고?"

입술을 비집고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

"스트라이커 네 명이 과포화라고? 이게 무슨 개소리야?"

감독이 갑자기 훈련장에 신문 한 장을 들고 오더니 그렇게 소리쳤다.

그 기사.

분명 우리를 칭찬하는 기사였다.

스트라이커 네 명이, 선발과 백업 상관없이 각자 특색 있는 플레이와 누가 선발로 나가도 엄청난 위협이라는 점을 지목하며 칭찬한 기사다.

네 명 다 너무 잘하지만, 선발로 뛸 수 있는 인원은 제한되어 있으니까 과포화란 얘기였는데······.

왜 저렇게 화를 내지?

"아니, 다음 경기 벤치에 앉힐 스트라이커도 없는데 과포화라니! 이 기자는 축구를 전혀 볼 줄 모르는군!"

"아."

일순 선수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특히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이 확정적인 캉테와 하베르츠의 얼굴엔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제기랄. 이래서 기자 놈들이란. 축구도 모르는 놈들이 기사를 써 대는 꼬락서니를 보고 화가 나지 않고 배기겠냐고! 에잉!"

음.

가끔 세상엔 참 괴짜가 많다고 생각된다.

회귀 전에 아시아 리그에서만 오래 뛰어서 그런가.

이런 분위기에 적응 되지 않을 때도 있다.

뭐, 어쨌거나 우리 라인업은 확정됐다.

4-1-1-4.

"우트. 아스날 전에서 보여 준 플레이. 아주 멋졌다."

아마도 감독은 우트가 솔샤르의 플레이를 보여 준 것에 감명받은 듯했다.

하여 스트라이커 네 명을 다시 쓰는 방법을 고려했다.

"타미가 왕성한 활동량으로 미드필더처럼 뛰어주고, 지루는 최전방과 2선까지만 오가면서 공을 지켜줘. 우트는 기회가 생기면 파고들고, 저번처럼 말이지."

감독은 여러 얘기를 했지만, 요약하면 이렇다.

타미는 말만 스트라이커지, 이번에는 왼쪽 윙어 자리에서 중원까지 커버하는 조금 힘든 언성 히어로 역할을 맡았다.

지루는 이전처럼 수비형 포워드에서 타겟터를 오가는 움직임.

우트는 솔샤르처럼 때로는 오프사이드 트랩을 찢어 버리거나, 때로는 아무도 모르는 암살자 같은 움직임으로 마무리를 짓는 것.

사실 타미가 중원 커버에 들어가면서 이 전술은 거의 4-3-3에 가까운 것이다. 저번처럼 괴악한 4-2-4 포지션은 아니다.

그리고 내 역할은······.

"설명 안 해도 알지? 제프?"

"음. 3골이요?"

"No!"

"아하, 4골?"

"No!"

"······더블 해트트릭?"

"Good!"

"······."

음.

유럽 축구 문화에서는 감독을 때려도 되나?

***

"제프."

"왜?"

"골 넣고 세레모니하는 척 감독에게 몸을 박아 버려."

"······."

"차마 주먹질할 순 없잖아?"

새삼 어떻게 감독을 때려도 되는 건가 했던 내 고민을 일소해 주는 캉테의 말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런 말 한 사람이 다름 아닌 캉테였으니까.

"오늘도 아주 죽겠군."

캉테는 피곤한 표정으로 필드에 올라섰다.

하기야.

지금의 역할에서 미드필더가, 그것도 캉테가 느껴야할 부담감은 장난 아니리라.

감독이 애당초 이런 전술을 꺼내 든 건 캉테 때문이다. 혼자서 2인분, 3인분의 역할을 하는 놈이니까.

부담감을 가지는 건 캉테뿐만 아니다.

평소 자주 말을 나누지 않는 사이인 골키퍼 케파마저 나에게 다가왔다.

"제프."

"응?"

"오늘 반드시 6골을 넣어 줘."

"······."

"수비진 초토화된 거 보이잖아?"

"끙!"

감독이 나에게 6골을 넣으라고 요구한 것에는 농담과 진심이 반반씩 담겨 있었다.

바로 우리 수비진의 문제.

시셀도는 아직 회복하지 못 했고,

뤼디거와 아스피는 같이 밥을 먹다가 배탈이 났단다.

결국, 현재 라인업은 에메르송, 토모리, 크리스텐센, 리스 제임스.

우리도 실점을 내줄 확률이 높은 라인업이다.

수비로서도 부담이 심하니, 공격진에서 해결해 줘야 한다.

'아니, 그러면 오히려 중원을 더 두껍게 해서 안정적으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벤치로 고개를 돌렸지만.

필마르크는 싱긋 웃으면서 나에게 윙크를 보냈다.

마치 너만 믿는다는 듯한 저 웃음.

그리고는 손가락 여섯 개를 치켜세운다.

아. 맞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6골을 넣으면 자기 사비를 싹 다 털어서 선수들에게 크게 한턱내겠다고 했는데······.

"캉테."

"응?"

"내가 세레모니하면서 감독에게 몸을 날릴 테니까, 너는 은근슬쩍 발로 밟아 버려."

"······오케이."

캉테와 내가 은밀히 공모하는 사이.

경기 시작 시간이 다가왔다.

레스터는 4-1-4-1의 포메이션.

제이미 바디라는 가장 위협적인 스트라이커가 오늘 우리의 뒷공간을 철저히 노릴 것이다.

뭐.

한두 골 먹히는 것쯤이야.

저 괴짜 감독 밑에서의 첼시 수비수라면 이겨 내야지.

삐이이익!

"우우우우우우우우!"

휘슬과 함께 공을 잡자마자 레스터의 야유가 쏟아진다.

서슴없이 욕을 던지고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뭐, 원래 이렇다. 축구는.

특별히 악연이 없어도 상대팀에겐 시원한 욕을 갈겨 주는 것이, 축구장에서 직관하는 매력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거기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다.

다 입 다물게 해야지.

레스터는 중원에서 숫자의 우위를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캉테와 하베르츠는 숫자가 부족하다고 밀릴 위인들이 아니었다.

특히 레스터에서 캉테의 역할을 대신 수행하는 은디디의 입장에서, 캉테는 그야말로 원조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타앗!

"오, 빌어먹을!"

"제기랄!"

캉테의 깔끔하고 영리한 태클.

그리고 어느새 중원까지 내려온 타미에게 짧은 패스.

타미는 긴 다리로 공을 툭툭 치다가 지루에게 살짝 띄워 주고.

지루는 긴 다리로 아크로바틱하게 공을 잡아 내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대로 중앙으로 파고드는 나에게 살짝 띄워서 주는 로빙 패스.

레스터의 수비수 조니 에반스가 뛰어올랐지만,

오늘의 나는 작정하고 나왔다. 저 감독의 지갑을 털기 위해. 그리고 골 세레모니로 몸통박치기를 하기 위해서. 아주 이를 갈았단 말이지.

뻐억!

"끄억!"

몸을 날려 그대로 에반스를 나동그라지게 만들어 헤더로 공을 떨궈 주고,

떨어뜨린 공을 어느새 오른쪽에서 기민하게 나타난 솔샤르, 아니 우트가 받았다.

우트는 박스로 파고들다가 풀백과 센터백의 간격을 보고 박스 라인 바깥쪽으로 크게 돌아나갔다.

크로스를 올릴 각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박스 안으로 나와, 지루, 타미까지.

"이런 미친 새끼들!"

스트라이커들이 일제히 달려들자 레스터 수비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물론 나에게 가장 많은 견제가 쏟아졌지만,

지루와 타미가 어디 가서 무시당할 위인도 아니고.

투욱!

수비들의 시선이 여기저기 분산되고 집중력이 흩뜨려진 사이.

나보다 좀 더 뒤에 있던 지루를 노리고 찬 크로스의 궤적.

수비들도 공의 궤적을 보고 빠르게 지루에게 붙었다.

하지만 선수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바로 판단을 내릴 때, 기본적으로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문제다.

자신의 반응속도를 기준으로, 상대 선수도 비슷할 거라는 판단.

그건 크나큰 착각이다.

내 반응속도, 그리고 그걸 따라가는 근육의 딜레이 과정은 극도로 짧다.

타앗!

지루에게 향하는 크로스를.

오른쪽 쏜살같이 뛰어나가 중간에 잘라 먹는 다이내믹한 헤더 슈팅.

뻐어엉!

"Yeaaaaaaaaaaaaa!"

"Goal! Golgolgol!"

아슬아슬하게 이마 위를 맞은 공은 크게 튕겨 나가며 골네트를 찢을 듯이 박혀 버렸다. 멍한 눈빛의 골키퍼가 나를 쳐다보는 사이.

"캉테! 뛰어!"

나는 그렇게 외치곤 미친 듯이 어퍼컷 세리모니를 하는 감독에게 달려갔다.

감독은 자신에게 안길려고 하는 것인 줄 알았는지 양팔을 벌렸다.

흥.

어림도 없지.

몸통박치기다!

뻐억!

"컥!"

남들이 보기엔 그렇게 보일 거다.

내가 너무 흥분해서 안기다 못해 몸을 던졌고, 감독은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고.

어찌 보면 선수와 감독의 깊은 유대감이 느껴질 장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캉테가 은근슬쩍 허벅지를 지그시 밟고 지나갔다.

"끄헉!"

"남은 다섯 골 넣을 때마다 다시 안길게요, 감독님."

"······!"

흔들리는 눈빛을 애써 무시하고.

다시 센터서클로 뛰었다.

뭐.

자업자득 아니겠나.

***

[필마르크 감독이 선수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많나 보네요!]

[하하하하! 정말 보기 흐뭇한 광경입니다. 팀 내 최고 선수인 제퍼슨 리가 감독에게 안기는 장면은, 외부에서 팀을 흔들려고 온갖 비난과 억측을 쏟아 대는 언론에게 통렬하게 일침을 가하는 장면이군요.]

[간혹 그런 뉴스가 나왔죠. 제퍼슨 리의 영향력이 감독을 압도하고, 훈련장에서 감독보다 제퍼슨의 말이 더 영향력 있다고. 그런 억측을 쏟아 내는 외부 반응에 제퍼슨이 감독과 끌어안으며 일침을 가합니다!]

제퍼슨이 감독에게 소소한 복수를 하는 것이, 남들에게는 꽤 다르게 비쳐졌다.

최근 여러 언론에서 첼시를 흔들려는 속셈으로 그런 억측을 쏟아 낸 경우가 있었다.

사진 한 장으로 온갖 궁예짓을 하거나, 감독은 바지사장이고 핵심 선수인 제퍼슨이 사실상 팀을 손에 쥐고 흔든다는 루머까지 퍼져 있었다.

제퍼슨은 의도하지 않게, 그런 루머와 외부 억측을 일소에 없애 버리는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제퍼슨이 오늘 컨디션이 정말 좋군요!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제퍼슨 리! 다시 한번 공을 잡고 질주합니다! 오 맙소사! 순식간입니다. 오른쪽의 우트에게 패스, 우트! 패스인 척 슈팅을, 아! 아닙니다! 패스입니다! 제퍼슨 리! 제퍼슨 리! 이런 기회 절대 놓치지 않죠! 제퍼슨 리가 팀의 두 번째 득점을 터뜨립니다!]

첫 실점 후 어수선한 상황.

제퍼슨의 두 번째 득점이 연이어 터지자 레스터의 홈구장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제퍼슨은 또 한 번 감독에게 안겼다.

[하하하! 오늘 두 번이나 안기는군요. 필마르크 감독이 제퍼슨 리 선수에게 되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나봅니다.]

[음, 근데 감독 표정이 조금 고통스러워 보이는데요?]

[글세요! 아무래도 제퍼슨의 체격에 넘어져서 그런 거겠죠! 저런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닐 겁니다! 저런 선수는 뭘 하던지 사랑스러울 테니까요!]

[으흐음. 그렇겠죠?]

< 154. 박싱데이 (7)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