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153화 (153/258)

< 153. 박싱데이 (6) >

"흐음."

필마르크 감독은 프리미어리그 24라운드와 FA컵 4라운드를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24라운드 상대는 토트넘.

FA컵 4라운드는 레스터 시티였다.

"대진표 참 맘에 안 드네."

FA컵 초반부에는 비교적 약팀을 만나는 게 좋다. 운이 좋으면 4부, 5부리그팀을 만날 수도 있다. 한데 같은 프리미어리그 팀, 하필 그중에서도 난적인 레스터하고 맞붙는 건 영 좋지 않은 대진이다.

생각해 보면 레스터하고 경기를 치를 때마다 시원하게 이긴 적은 없다.

아쉽게 비기거나, 간신히 이기거나.

리그 경기는 매번 중요하다.

하지만 FA컵 경기와 고작 3일 간격으로 치러지는 일정.

선수들의 로테이션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달한 것이다.

현재는 박싱데이 기간.

너무나 짧은 간격동안 연이어 펼쳐지는 경기에 선수들의 체력에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얘들 체력은 어때?"

"슬슬 한계가 오고 있어요. 박싱데이니까요."

"쩝."

수석코치의 의견에 감독은 입맛을 다셨다.

그의 눈에도 슬슬 과부하가 걸리는 게 보인다.

"24라운드보단 FA컵에 집중하는 게 낫겠지?"

다행히도 리그는 아직 여유롭다.

2위 리버풀과의 격차는 무려 승점 8점차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맞는 얘기다.

하나 내심 필마르크는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아직 리그 일정은 많이 남았고, 승점 8점은 아차 하는 순간 역전당할 수도 있으니까.

축구란 게 원래 그러지 않는가.

"그래도 리그보단 FA컵이 더 중요하겠어."

욕심내면 안 된다. 토트넘 경기는 로테이션을 가동하되, 최소한 무승부 이상을 바라보면 된다.

FA컵은 포기하지 않는다. 트레블을 위해서 필요한 트로피고, 만일 무승부로 끝나면 재경기를 치러야 하니 더 끔찍한 일이다.

더구나 리그컵처럼 아예 포기할 만한 수준의 대회도 아니다.

오래된 명성을 갖고 있고, 웸블리에서 트로피를 들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하베르츠는 어때?"

"좀 쉬어야 할 타이밍입니다."

"캉테는?"

"캉테 역시 마찬가지예요."

"중원이 초토화군."

"션 올리버와 메이슨 마운트. 두 친구의 체력은 아주 좋아요."

"올리버도 나름 괜찮지. 마운트야 패스 실력이 아쉽지만, 그거야 하베르츠하고 비교해서 그렇고. 오케이. 그러면······제프는?"

수석코치는 어깨를 으쓱였다.

굳이 왜 물어보냐는 투였다.

"걔는 말할 게 없어요. 그냥, 신기해요. 저번 시즌보다 더 힘이 넘치고, 회복력은 여전히 괴물 같아요. 작년에는 그래도 지친 모습이 자주 보였지만, 지금은 그런 빈도가 무척 적어요."

필마르크는 피식 웃었다.

축구계에는 때론 신기한 선수가 많이 등장한다. 일반적인 상식을 파괴하는 선수. 모든 선입견을 짓밟아 버리는 선수.

제퍼슨이 바로 그런 선수였다.

첼시의 닥터와 체력코치들이 무색하게도, 그는 스스로 부상과 체력관리에 아주 충실했다. 미세한 부상을 얻은 적은 있지만, 3주 이상의 부상을 당한 적은 없다.

그건 불가사의한 그의 피지컬 탓도 있지만, 스스로의 관리가 철저한 것이다.

거기에 늘 쏟아지는 엄청난 스포트라이트.

웬만한 베테랑들도 혀를 내두를 압박감이겠지만,

제퍼슨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인터넷이나 신문 따위는 일절 보지도 않으니까요."

"신기한 친구야. 그 나이대라면 으레, 자랑도 하고 어깨에 힘도 들어가야 정상인데."

"저 녀석이 어디 정상입니까."

수석코치가 턱짓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제퍼슨을 막으려고 달려드는 두 명의 수비수가 뻥뻥 날아가는 모습이었다.

수석코치가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이야, 고릴라야.'라고 중얼거리는 걸 들은 필마르크가 피식 웃었다.

"어때? 그러면 두 경기 연속 출장은?"

"하지만 한 번쯤 쉬어 줘야 합니다. 아무리 좋아 보여도, 정신적인 피로도 있을 게 분명하니까요."

"흠. 그러면 리그 경기는 교체 투입하고, FA컵은 풀타임으로 가야겠군."

바로 직전 경기에서 풀타임을 뛰었으니,

다음 리그 경기에는 다소 휴식이 필요하다는 판단.

필마르크는 제퍼슨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선수들의 관리도 중요하지만, 이 팀이 더 먼 곳까지 나아가기 위해선 제퍼슨의 관리는 더욱 철저해야 한다.

"토트넘이 최근 기세가 어떻지?"

"4경기에서 4승을 거뒀어요. 분위기 좋아요."

"제프를 후반에 넣을까, 아니면 전반에 넣어서 나중에 뺄까?"

"전반만 투입하는 게 어때요?"

"그래도 될까?"

"토트넘은 제프만 만나면 겁에 질린 쥐처럼 덜덜 떨던데요. 그 대단한 요리스도 제프의 슈팅에 유난히 약하고요."

사실 제퍼슨은 리그의 모든 팀에게 살벌한 공격력을 보여 주곤 했지만,

유난히 토트넘을 상대로는 더 완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 말이 있더라고요."

"그런 말?"

"제프 걱정은 하지 말라고요."

"허."

"요즘 우리 팬들 사이에서 도는 말입니다."

"그렇지. 그렇긴 하지."

필마르크는 그 말이 맘에 드는지 껄껄 웃었다.

"제프 걱정은 하지 말아야지!"

***

"Blues! Blues!"

"수탉 놈들을 냄비 속에 처박아 버려!"

팬들의 반응은 런던 더비 때보다 더 치열하고 격렬하다.

당장이라도 토트넘 관중과 패싸움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첼시는 런던팀 중에서도 유난히 토트넘을 더 싫어하는 느낌이다.

우리 팀 선발진 대부분이 로테이션 멤버가 끼어 있고, 벤치에도 후보 선수들이 많은 걸 본 관중들은 다소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빌어먹을! 수탉 놈들 따위에게 질 생각은 하지 마!"

"로테이션을 돌려? 이 중요한 경기에?"

"워워. 진정하라고. 제퍼슨이 선발이잖아?"

다행히도 내가 선발인 게 그들의 마음을 녹인 듯했다.

감독은 이 경기에서 무승부만 해도 만족스러울 거란 뉘앙스를 경기 전에 풍겼지만,

막상 경기장의 반응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말했다.

"승점 3점을 가져와라!"

끙.

사실 쉽지 않다.

오늘의 스트라이커는 나 혼자.

오른쪽은 기량이 많이 하락한 윌리안.

하베르츠 대신 마운트, 캉테 대신 션 올리버.

"Blues!"

그러나 언제든 늘 우위에서 싸울 수는 없지 않나.

이럴 때도 있는 법이다.

하베르츠 대신 투입된 마운트는 좋은 선수다.

다만 하베르츠의 그 말도 안 되는 궤적의 패스를 기대하는 건 어렵다.

그래도 그는 안정적으로 많이 움직이며 드리블할 공간을 찾아 누볐다.

그의 장점은 중거리 슈팅과 저돌적인 드리블 능력이다.

그걸 보여 주려면, 내가 움직여야 한다.

투욱!

"제-프!"

토트넘의 수비들은 이제 눈에 익다.

그들의 플레이가 어떤지는 다 보인다.

가볍게 선수 농락하며 돌파를 시도하자.

마운트는 공간을 엿보고 거침없이 질주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저 저돌성.

흠. 이런 것도 나쁘지 않군.

"마운트! 받아!"

내가 측면으로 빠지며 선수들을 끌어내고,

그 비좁은 틈을 발견하고 뛰어가는 마운트에게 공을 살짝 띄우는 로빙패스를 툭 떨어뜨려 주자.

마운트는 거침없이 발리슈팅을 욱여넣었다.

뻐어엉!

골문 앞에서 뚝 떨어지면서 요리스의 발끝을 스치면서 들어가는 선제골.

"마운트! 아주 좋았어!"

"최고야, 제프! 너는 미드필더인 나보다 패스를 잘하는 거 같은데?"

마운트는 내 칭찬을 하려고 그런 말을 한 것 같지만.

미안하지만 그게 맞는 이야기인 것 같아.

어쨌거나 경기는 그렇게 흘러갔다.

조금은 단순한 경기였다.

캉테와 달리 션 올리버는 공을 운반하는 역할에 충실했고, 조르지뉴는 패스만 했으며, 마운트는 연신 뛰어다니며 돌파했다.

너무나 전형적이고 딱딱한, 그러나 그래서 안정적인 플레이.

토트넘은 우리의 방식에 오히려 방법을 찾지 못하고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다.

"좋아, 나쁘지 않았어. 이대로 플레이해도 괜찮아. 다만 부담감을 느끼지 마. 자기 역할에 충실해!"

전반전이 끝났을 때.

감독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다만 날 보면서 얘기했다.

"사실 전반전만 치르고 널 빼 줄 생각이었는데······."

난 충분히 활약했다.

어태킹 서드에서 끊임없이 움직였으며,

토트넘이 후방 빌드업을 하는 걸 차단했다.

그리고 마운트의 득점을 어시스트 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간의 활약에 비교하면 저조한 건 사실이다.

"음. 후반전 5분만 주세요."

"······가능하겠어?"

"원래 시작 5분을 가장 조심하란 격언이 있잖아요."

내 말에 감독은 피식 웃었다.

"그래! 가서 박살 내고 와!"

***

[오늘 경기, 조금은 다소 지루한 양상으로 경기가 흘러가고 있는데요.]

[전반전은 메이슨 마운트의 벼락같은 골로 첼시가 1대 0으로 앞서갔습니다. 후반전은 전열을 정비한 토트넘이 동점골을 터뜨릴 수 있을지······ 아! 마침! 시작하자마자 메인스 마운트의 저돌적인 돌파! 베르통언의 태클! 공 흘러나오고, 제퍼슨이 잡았습니다! 제퍼슨 잡고! 맙소사! 그래도 잡아채서 중거리를 때려 박아 버립니다! 오, 언빌리버블! 엄청난, 골! 골! 골!]

후반전 시작 멘트를 치던 중계진은 이내 벌떡 일어나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고작 30여 초가 지났을까.

제퍼슨이 필드에 굴러다닌 볼을 그대로 잡고는, 직선으로 때린 강슛이 말 그대로 네트를 찢어 버릴 듯이 꽂혔기 때문이다.

토트넘의 전열이 미처 정비되기도 전에 벌어진 기습과도 같은 슈팅.

그 슈팅에 토트넘 선수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제가 본 게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엄청난 골입니다. 마치 대포알이 터져 나간 것 같네요. 직선으로 레이저가 쏘아지듯이 속 시원한 슈팅이 토트넘 수비진을 갈라놓았습니다! 맙소사! 제퍼슨, 거기서 슈팅을 때리다니요!]

[자, 이로써 제퍼슨이 또 다시 기록을 경신합니다! 스스로 자신이 세운 16경기 연속 득점기록을, 다시 갈아치우고 17경기 연속 득점기록을 기록하네요!]

[제퍼슨, 정말 믿기지 않는 선수입니다. 그저 꿈만 같은 선수네요. 첼시 관중들이 제퍼슨의 응원가를 부르네요. 그들이 외칩니다! 제퍼슨이 모두 죽여 버릴 거라고!]

[첼시 선수들이 제퍼슨을 둘러싸고 소리치고 있네요. 하지만 제퍼슨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벤치로 가네요. 어, 바로 교체인가요?]

[하하하하! 필마르크 감독이 웃으면서 교체를 지시하네요. 다음 FA컵을 대비한 교체로 보입니다만, 골을 넣자마자 체력관리를 위해 빼 주네요.]

[제퍼슨은 결국 오늘도 득점을 기록합니다. 제퍼슨의 이 득점기록이 도대체 언제쯤 깨질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건 제퍼슨만이 알지 않을까요?]

***

24라운드, 토트넘전은 2대 1로 승리했다.

내가 빠지고 나서 팀이 잠시 흔들리는 사이,

토트넘의 쏘니가 바로 추격골을 터뜨렸다.

토트넘은 좋은 기세를 증명하듯이 연신 좋은 경기력을 펼쳤지만, 우리 팀도 토트넘에게 만큼은 지면 안 된다는 팬들의 욕설 섞인 응원에 힘입어 점수를 지켜 냈다.

이로써 우리는 승점 65(21승 2무 1패)로 2위 리버풀과 승점 8점 차이를 유지했다.

승점 8점 차.

리그 일정을 살펴보면 아직 여유가 있다.

다만 계속 승리를 거두고 있는데도 승점차가 더 벌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2위 리버풀도 계속 연승중이란 얘기이기에,

의외로 팀에 압박감으로 돌아온다.

확실히 이놈의 리그는 치열하다. 고작 1패만 했는데도 불구하고 2위와 8점 차이밖에 안 난다니.

거기에 FA컵과 챔피언스리그를 병행해야 하니, 선수들이 느낄 압박감도 만만치 않다.

이래서 트레블이 어려운 거다.

역사상 몇 개 팀밖에 하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거기에 도전한다고 했을 때, 많은 팀에게 빈축을 샀던 이유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진 순항 중이다.

다음 FA컵 상대가 난적인 레스터라 그렇지.

"레스터는 쉬운 상대가 아니야."

캉테가 진지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레스터에서 꿈같은 동화를 만들어 냈던 주역이 하는 말에 선수들은 모두 캉테를 주목했다.

"분명 우리가 이기고 있는데, 우리가 밀어붙이고 있는데, 스코어를 보면 어느 순간 동점이 되거나, 역전당하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았어."

실제로 그랬다.

내가 첼시에 온 이후로도, 그런 경기가 몇 있었다.

이기더라도 간신히 이기거나.

경기 내용은 다 이겼는데도, 어쩌다가 먹힌 역습 한 방에 동점골을 허용하거나.

레스터는 그런 상대였다.

난적 중의 난적.

그 특유의 팀컬러가 살아 있는 팀이었다.

더구나 FA컵 같은 토너먼트에서 만나는 대진으로는 만나기 껄끄러운 팀이 분명하다.

"내 생각엔 레스터가 제퍼슨을 만나는 걸 더 껄끄러워하지 않을까."

하베르츠가 툭 그런 말을 던졌다.

그리고 순간 모두 나에게 고개를 돌리던 선수들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왜 다 날 귀신 보는 것처럼 쳐다보는 건데?

< 153. 박싱데이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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