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박싱데이 (5) >
"거짓말해서 미안해."
토모리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무슨 거짓말?"
"5분 후에 일대일이 될 거라 얘기했었는데, 3분도 걸리지 않은 것 같네."
"맙소사."
괜히 5분을 얘기한 게 아니다.
득점 직후는 가장 집중력이 떨어지고 어수선한 순간이다.
거기서 설마 내가 센터서클부터 돌파를 시도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터.
우트가 선수 몇 명의 시선을 끌어 준 게 주효했다. 그렇게 생긴 공간 덕분에 순간적으로 치고 나갈 수 있는 속도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
마지막 슈팅까지 우트의 조력이 컸다.
그가 박스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 슈팅이 먹힐 수 있었다.
솔샤르 특유의 슈팅 폼.
허리를 쭉 펴며 때리는 슈팅.
이건 의외로 쉬운 슈팅 폼이 아니다.
이런 자세라면, 공은 붕 뜨거나 똥볼이 되기 쉽다.
그런데 솔샤르는 이런 슈팅 폼으로, 정확하고 낮게 깔아 차는 득점에 늘 성공했다.
거의 신기에 가까운 퍼포먼스였다. 왼발, 오른발 가릴 것 없이 정확했고, 쇼트 패스인줄 알았던 골키퍼가 당황해하는 표정은 덤이었다.
그 영상을 보면서 따라 하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축복받은 하드웨어는 그걸 가능케 했다. 연습하다 보니, 적어도 솔샤르의 슈팅 폼은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건 내 또 다른 무기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강력하고 반박자 빠른 슈팅으로 골키퍼를 무너뜨렸다면,
이젠 거기에 대비하는 골키퍼를 상대로 때론 이런 슈팅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을 테니까.
"좋아! 귀여운 녀석들! 이대로 역전까지 가자고! 저것들을 질질 짜면서 돌아가게 만들어!"
감독이 그렇게 소리치면서 우리를 독려했다.
어쨌든 이로써 분위기는 반전됐다.
다만 우리도 너무 들뜨지 않게 주의해야 했다. 아스날이 득점 직후 실점한 것처럼, 우리도 그럴 수도 있으니까.
때마침 캡틴이 소리쳤다.
"다들 정신 바짝 차려! 멍청하게 공 놓치지 마! 집중해! 집중하라고! 끝까지 봐!"
아스피는 갈수록 카리스마가 장착된 느낌이다.
평소엔 모범생 같아도, 필드에서만큼은 180도 바뀐다. 그의 외침에 내 골로 안심한 표정을 지었던 토모리도 이내 다부진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적어도 실점을 내줬단 부담감은 사라진 듯했다.
좋아.
수비진은 어느 정도 안정된 거 같고.
그러면······.
"가자, 우트."
오늘 우리의 포메이션은 4-4-2.
내가 넣은 동점골과는 다르게, 전형적인 롱볼 축구를 준비했다. 빅앤 스몰로 대표되는 킥앤 러쉬.
유난히 피지컬이 강한 축구에 늘 약세를 보였던 아스날을 공략할 의도다.
'내가 솔샤르는 될 수 없다.'
잠깐이지만 실제로 솔샤르의 플레이를 흉내내보니 알 수 있었다.
내 신체 조건상 솔샤르 같은 플레이로 축구를 하는 건 힘들다.
그렇다고 솔샤르의 플레이를 모두 포기하는 건 아니다.
'적어도 신기에 가까운 위치 선정, 완벽한 피니쉬 능력, 그리고 골을 찾아가는 그 천부적인 능력만큼은.'
그것만큼은 가져가야 한다.
나머지는 다 버리더라도.
***
[경기가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졌습니다! 제퍼슨 리의 벼락같은 동점골!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환상적인 골입니다!]
제퍼슨의 득점이 터진 직후 아스날 감독은 곧바로 소리 질렀다.
"제기랄!"
벤치 앞에 놓여 있는 생수를 뻥 차더니.
"정신을 차리라고 이 자식들아!"
거칠게 화를 쏟아 냈다.
"빌어먹을! 왜 겁을 먹어? 쟤가 무슨 귀신이라도 돼? 살인마라도 돼? 끝까지 공을 보라고! 동작에 속지 말란 말이야! 공을 끝까지 보라고!"
잔뜩 격양된 목소리는 필드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공을 차! 영리하게 공을 빼내려고만 하지 말라고! 그냥 보이면 차라고!"
벤치에서 열정적이다 못해 격렬하게 말을 토해 내는 건 때론 효과적일 때가 많다.
선수들은 잔뜩 굳은 얼굴이었지만, 정신을 바짝 차렸다.
하나, 정신을 차렸다고 경기가 극적으로 변하진 않는다.
[아스날의 긴 로빙패스, 공격진으로 단숨에 배달됩니다!]
아스날 수비진에서 시작된 긴 로빙패스는, 왼쪽 측면으로 빠져나가는 오바메양에게 향했다.
그러나 미리 대비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던 토모리가 이번엔 먼저 붕 떠서 공을 따내는 것에 성공했다. 공의 소유권은 다시 첼시에게 돌아갔다.
[토모리! 침착하게 캉테에게! 캉테, 선수 한 명 제치고 하베르츠에게!]
하베르츠가 내려와 공을 받은 뒤, 낮게 깔리는 전진패스를 제퍼슨에게 보냈다.
하나 아스날 수비들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제퍼슨의 뒤에서 압박하는 마테오 귀엥두지.
귀엥두지가 달려드는 순간, 제퍼슨의 발목이 묘한 각도로 틀어졌다.
공과 닿는 순간, 방향을 순간적으로 틀어 버리는 정밀한 컨트롤.
공은 그대로 방향이 바뀌어 귀앵두지의 왼쪽으로 빠져나갔고, 제퍼슨은 빙그르르 몸을 돌리며 치고 나갔다.
"······!"
귀앵두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의 순간적인 볼 컨트롤. 정교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 대단한 볼 컨트롤입니다! 제퍼슨! 그대로 공을 잡고!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는 우트를 보고 내줍니다!]
제퍼슨은 이번에 무리하게 돌파하지 않았다. 정신을 바짝 차린 아스날 수비진이 미리 자리를 제대로 잡고 있을 터. 무리할 이유가 하등 없다.
그는 언뜻 보면 혼자 플레이하는 독재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선수들을 기민하게 이용할 줄 아는 센스를 지니고 있었다.
오른쪽 측면으로 내달리는 우트에게 닿는 패스.
우트는 그대로 툭툭 치고 나가다가, 중앙을 흘깃 보고는 컷백을 내줬다.
[소크라테스의 발끝에 공이 닿았습니다! 공중에 뜨는 볼!]
애석하게도 한 발 먼저 움직인 소크라테스의 발끝에 아슬아슬하게 닿았고,
공은 중앙 위로 떴다.
그리고 그때, 그 날아오는 공의 경로를 향해 제퍼슨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이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다비드 루이스와 그라니트 쟈카.
"무슨!"
제퍼슨이 공중에 붕 뜨자, 공중볼 경합을 위해 같이 뛰어오른 루이스는 이내 기함을 토했다.
하늘을 가린 검은 그림자.
그리고 먼저 떠오른 제퍼슨보다, 자신이 먼저 공도 건들지 못하고 바닥에 착지한 것이다. 그런데도 제퍼슨은 내려올 줄을 몰랐다.
루이스가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공을 최대한 못 건들게 몸으로 밀치는 것뿐.
엄청난 체공 시간 끝에 제퍼슨은 공에 머리를 갖다 대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골문까지는 거리가 꽤 먼 상황.
그때 누군가는 기회를 찾아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완벽한 위치선정.
공을 향해 머리를 갖다 대던 제퍼슨도 순간 흠칫하고 놀랄 정도였다.
"우트?"
제퍼슨은 본능적으로 그 위치를 향해 공을 떨어뜨려 줬다.
너무나 좋은 위치였다. 당장 슈팅을 날릴 수 있는 공간.
제퍼슨이 떨어트려 준 볼을 향해, 우트가 허리를 빳빳이 펴며 발을 갖다 댔다.
투욱!
그리고 낮게 깔리는, 정확한 슈팅이 골문으로 귀신같이 빨려들어 갔다.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기민하게.
조용히 찾아와 골문을 폭격하는 암살자 같은 모습.
제퍼슨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날 따라서 솔샤르 영상을 보더니.'
어쩌면.
솔샤르의 플레이는 자신이 아니라, 그에게 더 어울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됐다.'
골이 들어가는 순간 우트는 몸에 소름이 다닥다닥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우트는 분명 첼시에 오면서 무언가 발전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분데스리가에서 뛰던 것보단 경기 출장시간은 줄었지만, 축구 자체에 큰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그가 될 수는 없었다.'
남들이 이상하다고 여길 정도로.
우트는 제퍼슨의 남자다운 플레이에 흠뻑 빠졌고, 그걸 따라하고 싶어 했다. 제퍼슨을 닮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와 친해지려고 노력했고, 그의 플레이와 훈련을 따라 했다.
하나 애당초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이러다간 자신은 스트라이커라기보단 단순히 제퍼슨의 조력자, 그 이상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첼시의 핵심은 제퍼슨이고, 모든 전술의 초점이 그에게 맞춰진 채로 돌아가고 있으니까.
그리고 우트 역시 제퍼슨을 좋아했다.
하여 어쩔 수 없이, 그 지독한 딜레마에 빠진 채 여전히 제퍼슨을 따라하는 것에 목멨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였던가.
제퍼슨은 솔샤르의 플레이를 라커룸, 훈련장, 아니면 버스 안이나.
늘 돌려보고 그걸 훈련장에서 툭툭 따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트도 당연히 그걸 따라 하게 됐다.
그때 느꼈다.
온몸에 벼락이 관통한 듯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슈퍼 서브'로 불리며 엄청난 득점기록과 함께 팀의 영웅이었던 솔샤르의 플레이.
그의 플레이를 따라 하려면, 늘 완벽한 기본기가 기본 바탕이 되어야 했다.
우트가 유일하게 내세우는 장점 중 하나였다.
제퍼슨도 감탄할 정도로, 우트는 기본기만큼은 팀에서 제퍼슨과 비등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이 팀의 중심은 제퍼슨이다.
그리고 우트도, 스트라이커다. 스트라이커는 평생 조력자로서만 살 수는 없다.
그가 스트라이커로서 살아남기 위해선 언젠가는 제퍼슨을 이겨 내야 한다. 아니면 그를 피해 떠나야 한다.
그 지독한 딜레마.
우트는 그런 딜레마에서 빠져나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이 제퍼슨과 굳이 경쟁하지 않아도, 이 팀에서 제퍼슨과 같이 뛸 수 있는 방법.
아이러니하게도, 제퍼슨이 보고 배우려했던 솔샤르의 플레이는 우트에게 가장 알맞은 것이었다.
"방금 슈팅 아주 좋았어."
제퍼슨의 칭찬에 우트는 씩 웃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 녀석, 일부러 솔샤르 영상을 본 건가? 혹시 나 때문에?'
불현 듯 든 생각.
그가 아는 제퍼슨은 어린 나이에 비해 놀랍도록 치밀하다.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목적이나 의미 없이 괜히 하는 게 없다.
무엇이든 그가 하는 건 결과가 뒤따랐다.
'솔샤르의 플레이는 애당초 제퍼슨하고 잘 맞지 않아.'
그런데도 굳이 솔샤르의 영상을 보면서 따라한 건.
어쩌면 자신을 위해서인 것이 아닐까.
'내가 늘 자기를 따라 하는 걸 알고!'
원래 콩깍지가 쓰이면 이성적인 판단이 잘 안 되는 법이다.
한번 잘못 돌아가기 시작한 생각은 그럴듯한 논리로 이어졌다.
'제퍼슨 정도 센스라면, 내가 나아가야 할 스타일쯤은 파악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걸 직접적으로 말하긴 불편했을 거야.'
아무리 친한 선수 사이라도, 남의 플레이 스타일에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가 없다. 더구나 그것이 프로의 무대라면.
'이 녀석······.'
일부러 자신의 시간까지 소비해 가며 은연중에 알려 준 것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가 본 제퍼슨은 아닌 것 같으면서도 배려심이 넘치는 친구였으니까.
"결정했어."
"뭘?"
"내 여동생이 너와 결혼한다고 해도 허락할게."
"뭐라는 거야 또, 미친놈아."
물론 제퍼슨에게 그런 우트는 이상한 놈일 뿐이었다.
***
[첼시, 시즌 두 번째 런던더비에서 아스날 상대로 4대 1 승리!]
[제퍼슨 리, 1골 3도움. 마크 우트 해트트릭 폭발!]
[가장 위력적인 빅 앤 스몰, 아스날을 두들겨 팬 환상적인 득점쇼!]
[마크 우트, 그에게서 솔샤르의 향기가 난다.]
[시즌 1호 해트트릭 신고한 마크 우트, '솔샤르의 플레이를 제퍼슨과 같이 연구하고 따라 했다. 오늘 그 결실을 맺은 것 같다. 도움을 준 제퍼슨 덕택에 내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
[첼시의 행복한 고민, 제퍼슨 리, 마크 우트, 타미 아브라함, 올리비에 지루까지! 스트라이커 과포화!]
[제퍼슨 리부터, 제 2의 솔샤르까지. 첼시, 프리미어리그를 넘어 챔피언스리그 우승까지 가능성 높아.]
< 152. 박싱데이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