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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의 괴물 러닝백-151화 (151/258)

< 151. 박싱데이 (4) >

'그 정도면 되지 않냐?'

어릴 땐 그 얘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회귀 전.

주위에서 모두 날 축구 천재라며 치켜세워 줄 때.

한국 축구의 전성기를 열어 줄 선수라며 칭찬할 때.

습관처럼 훈련에 임하러 나갔을 때, 친구 중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난 멍청하게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이미 완성됐다고 자만했기 때문에, 그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당시 나는 발전해야 할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훗날 부상으로 유리 몸이 점점 부각되면서 나중에는 성장하고 싶어도 몸이 따라 주지 않는 딜레마에 빠졌으니까.

만약 그때, 내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그대로 훈련장에 나갔다면······.

유리 몸이라는 약점이 노출됐어도 어떻게든 성장하고, 이겨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실제로 축구계에선 피지컬이 아주 부족해도 정상급의 플레이를 보이는 톱클래스 선수는 많지 않은가.

그래서다.

만족할 수 없다. 현실에 안주할 수 없다.

"지독하다. 지독해!"

"힘들면 가서 쉬어."

땀을 뻘뻘 흘리며 불만을 토하는 올리버를 향해 조금은 차갑게 대꾸하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운동기구를 잡았다.

"빌어먹을. 나도 자존심이 있지."

올리버는 내 훈련을 따라했다.

물론 강도는 낮게. 중량도 더 낮게. 하지만 꾸준히 내 곁에 달라붙어서 최선을 다했다.

적어도 시즌 초반에 보여 준 게으른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요즘 여자들은 근육질 덩어리를 좋아하더라고."

물론 그 계기엔 여전히 여자를 좋아하는 그의 특유의 바람기가 가득했지만.

어쨌거나 올리버는 내 훈련 메이트로서 꽤 괜찮은 친구였다.

"그런데, 너는 그 정도면 되지 않아?"

어쩐지 회귀 전이 생각나는 그 질문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올리버는 내 반응을 보지도 않고 떠들었다.

"골도 잘 넣고, 피지컬로도 완벽하고, 리그에서 널 막을 수비수도 없고. 흠. 물론 열심히 해야 하긴 하지만 그렇게 기계처럼 할 필요는······.'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심지어 감독과 동료들도 날 완벽하다고 추켜세우지 않나. 나에게 연신 날을 세웠던 전문가라는 양반들도 이젠 날 인정했다.

이만하면, 좀 쉬엄쉬엄해도 되지 않나.

그런 마음이 불쑥 드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게 좀처럼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세상에 완벽한 건 없어. 완성된 선수는 없어. 완성에 가까워지는 것뿐이야.'

완성된 선수라는 말은 허울 좋은 얘기다.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나.

언제까지고 내 방식이 늘 통할 리는 만무하다.

그럴 가능성은 적지만, 나보다 더한 피지컬을 지닌 수비수가 탄생할 수도 있지 않은가.

또한 리그 38라운드, 챔피언스리그, FA컵, 기타 A매치까지 60~80경기를 치르다 보면 내가 장점으로 내세우는 피지컬을 이용한 축구도 언젠간 막힐 가능성이 높다.

나라고 기계는 아니니까.

분명 지치고, 근육도 빠지고, 힘도 약해질 때가 온다.

더구나 지금 수많은 견제를 받고 있다.

한 경기만 치러도 온몸에 여러 개의 멍 자국이 생긴다.

만일 내가 끔찍한 반칙으로 부상을 입는다면?

사실 근래 그런 불안감이 없지 않아 있다.

내 신체가 엄청난 회복력을 보여 주긴 하지만 그것도 젊으니까 가능한 것이다.

적어도 서른 살, 그리고 그 이상이 되면.

지금의 회복력을 장담할 수 없다.

거기에 도저히 재기 불가능한 부상을 당하게 된다면,

나는 어찌될 것인가.

늘 플랜 B를 준비해야 한다. 지금의 플레이 방식을 언제든 바꿀 준비를 해야 한다. 아니, 적어도 거기까지는 아니어도 새로운 걸 더 보고 몸에 익혀야 한다.

'더 다양한 플레이를 몸에 익혀야 해.'

맨 처음 스트라이커로 뛰면서 내가 본 역대 선수들은 호나우두와 히바우두였다.

롤모델에 가까운 두 선수.

그들의 플레이는 현재 내 신체가 할 수 있는 최적의 플레이를 선보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고 두명에게서만 배울 필요는 없다. 다른 선수에게도 배울 게 충분히 차고 넘쳤다.

"이번에는 그 선수야?"

올리버는 땀을 닦고 옆에 앉으며 물어봤다.

"응."

"솔샤르? 선수 때 한창 날아다녔단 소리는 들었는데."

"그렇지. 나도 영상으로만 봤는데 대단해."

현재 내 또래의 선수들은 솔샤르의 선수 시절을 잘 모른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하나 영상을 찾아보면서, 그가 선수시절 보여 준 임팩트만큼은 대단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욕심일지도 모르지.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피지컬을 얻게 되면서, 지금까지 존재했던 수많은 스트라이커의 플레이를 모두 배우고 싶단 욕심.

원래 남의 플레이가 배우고 싶다고 저절로 익혀지는 게 아니다.

그걸 받쳐 주는 하드웨어가 필수적이다.

한데 난 그 하드웨어를 이미 갖추고 있다.

"대단한데. 나도 봤는데, 이런 사람이 서브로만 만족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우트 역시 내 곁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내가 하는 걸 대체로 거의 따라하는 편인데, 우트도 솔샤르의 영상을 보고 꽤 감명 받은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정도의 실력을 지닌 선수가 '슈퍼서브'로만 만족했다는 건 감탄할 일이다.

"배울 게 많은 플레이야. 팀에 대한 헌신을 차치하고도, 정확한 피니쉬, 완벽한 위치선정, 미묘한 라인 브레이킹."

물론 나 역시 가지고 있는 기술이다.

그러나 솔샤르가 보여 준 정점에 달한 플레이까진 아니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런 것들 보단 피지컬을 이용한 파괴력과 강력한 강슛으로 골문을 찢어 버리는 유형에 더 가까우니까.

여기에 솔샤르 플레이의 장점만 흡수한다.

그것이 내 목표였다.

물론 단기간에 될 건 아니지만.

"시간은 많지."

***

첼시와 아스날의 리그 22라운드 경기.

경기 초반은 아스날이 우세했다.

캉테와 조르지뉴, 하베르츠로 이뤄진 중원 싸움은 첼시가 우위였지만, 아스날은 공격 템포를 조절하며 차근차근 첼시의 수비를 공략했다.

현재 첼시의 가장 문제점.

바로 부족한 수비전술과 시셀도의 공백.

아스날은 여지없이 그걸 노리고 있었다.

적어도 아스날은 공격진에서만큼은 꽤 좋은 퀄리티를 지닌 팀이다. 오바메양과 라카제트의 투톱은 빠르고 역동적으로 첼시의 수비를 공략했다.

[경기 초반, 아스날의 기세가 심상치 않네요.]

[중원에서의 싸움은 밀려도, 공을 소유한 순간 템포를 순간적으로 높여서 뒷공간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수비라인이 살짝 어수선하네요. 아스날이 그 틈을 잘 파고들고 있습니다!]

제대로 정신무장이 된 듯한 아스날 선수단의 모습.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첼시를 압박했다.

삐빅!

[이런, 오프사이드군요. 제퍼슨 리가 오프사이드에 걸렸습니다.]

[생각보다 보기 힘든 장면이 나왔네요. 아주 미세한 차이로 걸렸네요. 제퍼슨이 오프사이드에 쉽게 걸리는 선수가 아닌데요.]

아스날의 수비진은 뒷공간을 공략하는 첼시 특유의 공격 방식을 경계했다.

라인을 어느 정도 높이되, 오프사이드 트랩을 이용한 것이다.

물론 이게 쉽게 통할 리가 없다.

제퍼슨의 스피드와 반응 속도는 차원이 다르니까.

다만 오늘 조금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역시, 보고 바로 따라하는 건 쉽지가 않은 일이네.'

제퍼슨은 쓰게 웃었다.

솔샤르가 보여 줬던 특유의 움직임을 따라 해 보려 했지만,

아직은 익숙하지 않아 트랩에 걸렸다.

그렇게 몇 번의 공격 찬스가 무위로 돌아간 사이.

오바메양의 라인 침투에 이은 벼락같은 선제 득점이 터져 나왔다.

"Yeaaaaaaaaaaaaaa!"

"오바메양! 오바-메양!"

"빌어먹을 놈들아! 런던의 주인이라고 으스대기는!"

아스날 팬들의 야유와 조롱.

하필이면 원정 섹터가 수비라인 한쪽에 있던 터라, 오바메양을 놓친 실책을 터뜨린 토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심지어 홈팬 중에서도 한숨이 들릴 정도였으니까.

"토모리, 어깨 펴. 이제 1대 1이잖아?"

"무슨 소리야? 일대일이라니?"

토모리는 제퍼슨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대일이라니?

한 골을 내줘서 0대 1이 아닌가?

"딱 5분만 기다려. 그럼 일대일이 될 테니까."

"······."

토모리가 이해할 수 없어 침묵한 사이.

공은 센터 서클에 놓였고, 선수들이 각자 진영에 포진했다.

"제-프! 제-프! 제-프!"

기를 쓰고 소리치는 홈팬들의 격렬한 분위기 속에서.

제퍼슨은 한차례 심호흡을 한 뒤.

같이 서클 위에 있는 우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무조건 뛰어."

"응? 아, 응!"

삐이이익!

"뛰어!"

제퍼슨이 소리치자마자 우트는 아무 생각 없이 박스로 향해 냅다 달렸다.

그 저돌적인 돌진에 순간 근처에 있던 아스날 선수 두 명이 빠르게 달라붙었다.

타앗!

그리고 그사이로 기다렸다는 듯이 제퍼슨이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우트에게 두 명의 시선이 쏠린 사이.

단숨에 센터 서클 위에서 시작되는 제퍼슨의 돌파.

종아리와 허벅지로 이어지는 근육이 순차적으로 작동하며, 폭발적인 가속을 시작했다.

[제퍼슨이 순간 속도를 내며 달립니다! 맙소사! 단숨에 진영에 포진했던 아스날 선수들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군요!]

"Yeaaaaaaaa!"

첼시 팬들의 함성이 스탬포드 브리지를 가득 채웠다.

누군가는 개인플레이라고 욕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저런 플레이를 선보일 선수는 없다. 혼자서 센터서클에서부터 속도를 내며 돌파하는 선수를 쉽게 볼 수 있단 말인가.

우물쭈물하면서 패스나 돌리는 게 아니라, 자신감 넘치게 드리블 돌파를 시도하는 선수의 패기.

그리고 심지어.

툭, 툭!

"흐억!"

"제기랄!"

뒤늦게 발을 뻗었던 쟈카의 태클이 허공을 갈랐다.

마치 그의 태클을 예상했다는 듯이.

들어오는 순간 정확히 맞춰 공을 띄워서 빠져나가는 제퍼슨의 드리블에 아연한 표정이 지어졌다.

'잠깐만, 내가 뚫렸으면 뒤에 몇 명이나 남았지?'

그러고 보니 자신은 후방에 있는 미드필더가 아니었나.

자신이 뚫린 이상.

남은 건 수비진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등골이 서늘했다.

[제퍼슨! 무지막지하게 돌파합니다! 적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그를 막지 못합니다! 오, 세상에! 믿기지 않는, 환상적인 드리블 돌파입니다!]

제퍼슨은 말 그대로 센터서클부터 아스날을 찢어버리고 있었다. 갸우뚱 거리며 패스하는 척 페이크를 넣다가도, 좌우 가리지 않고 폭발적으로 가속하는 무브먼트, 그 사이에 펼쳐지는 고스트 스텝과 제퍼슨 턴 동작은 아스날의 선수들을 일순 렉 걸린 오래된 노트북처럼 버벅이게 만들었다.

끝내 쟈카의 태클마저 피하고, 달려오는 우측 풀백의 가랑이 사이로 넛메그(알까기)를 성공했을 때, 그에게 남은 건 수비수 세명과 찢어질 듯한 함성소리였다.

"Uwaaaaaaaaaaaaaaaaaaa!"

박스에 바글거리는 수비 셋.

그러나 그 순간에 수비들이 놓친 게 있었다.

맨 처음 돌파를 시도했던 우트가 박스에 진입했던 것.

그걸 뒤늦게 파악한 골키퍼가 소리쳤다.

"저 자식을 잡아! 한명 더 있잖아!"

기다렸다는 듯이 제퍼슨이 우트에게 패스하는 척 발을 들어 올리자, 수비수 하나가 살짝 기울여졌고,

"제기랄!"

제퍼슨은 아주 태연하게 공을 거둬들이며 다시 한 번 툭 차며 수비를 제쳤다.

깔끔한 페이크 뒤 이어진 돌파.

그리고 아주 부드럽게 공을 컨트롤 해 왼쪽으로 방향을 전환시키고.

"제프!"

우트가 손을 들어 올리면서 수비들의 마지막 집중력을 분산시키자.

제퍼슨은 마지막 동작을 가져갔다.

'숏패스인가?'

그리고 그 동작을 본 골키퍼는 생각했다.

허리를 펴며 공을 때리는 동작.

아무리 봐도 슈팅 폼으로 보기엔 부적절하다.

저렇게 때리면 공은 위로 붕 뜨곤 만다.

제퍼슨의 강력한 슈팅을 생각하면, 절대 나오지 않는 폼.

골키퍼의 몸이 오른쪽으로 우트에게 기울여졌다.

'모르면 못 막겠지만, 알면 막을 수 있다!'

우트에게 이어질 듯한 숏패스를 미리 차단하기 위해 몸을 기울이는 순간.

투욱!

"······!"

예상치 못한 궤적으로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제퍼슨의 슈팅.

그 순간 골키퍼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슈팅 폼이 아니었건만,

아니. 애당초 똥볼을 때릴 수밖에 없는 아주 특이한 폼이었건만.

공은 낮고 정확하게, 골문 구석으로 쏜살같이 빨려들어 갔다.

"The Blues!"

"LEE WIll LEE Will Kill you!"

전혀 예상치 못한, 심지어 거기에 엄청난 강슛이었다. 빠르고 정확하고 강력한.

[오, 맙소사! 제퍼슨이 결국엔 환상적인 드리블 돌파 후에 엄청난 골을 성공시킵니다!]

[방금 슈팅 폼은 마치, 과거 솔샤르 감독의 슈팅을 연상케 하네요. 엄청난 슈팅이었습니다! 보세요! 골키퍼의 당황한 저 표정을! 예상치 못한 궤적으로 빨려들어 가는 특이한 슈팅이라니요!]

[제퍼슨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무기가 장착된 것 같군요! 제퍼슨 리! 선제골을 내주자마자 곧바로 동점골을 만들어 냅니다!]

< 151. 박싱데이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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