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150화 (150/258)

< 150. 박싱데이 (3) >

에이전시는 꽤 많은 일을 한다.

단순히 선수의 계약만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선수의 자잘하고 사소한 고민까지 관리한다.

때문에 제크 팀장은 나에게 종종 전화를 걸어온다.

-구단 측에서 장기 계약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적시장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움직이는 모습이다.

내 계약기간은 이제 2년 남았다.

원래 첼시는 아무리 좋은 선수여도 계약을 한 번에 길게 가져가지 않는 팀으로 유명하다.

30살이 넘으면 1년씩 계약 기간을 늘리는 방칙도 있는 팀이었으니까.

"장기 계약이요?"

-6년 이상의 장기 계약을 원하고 있습니다.

"조건은요?"

-주급 33만 파운드(5억 원가량)부터 시작하더군요.

"일단 거절해 주세요."

이적시장은 모르는 일이다. 어떤 일이, 또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모른다.

장기 계약은 팀의 핵심으로 자리 잡을 수 있고, 선수에게 불확실한 미래를 대처할 안정적인 기반이 될 수 있는 부분에선 메리트가 있다.

그러나 함부로 맺을 종류는 아니다.

-알겠습니다. 제 생각에도 장기계약은 도움이 되지 않아요. 주급 5억 원? 3년 후면 주급 10억 원도 아깝지 않을 겁니다.

"제 얼굴에 너무 금칠해 주시는 거 아닙니까?"

-그럴 리가요! 미국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아시지 않습니까?

미국에서 내 활약으로 인해 문자 그대로 난리가 났다.

심지어 첼시는 그에 맞춰 경기 시간까지 조정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보기 좋은 시간대에 맞춰서.

-가치는 스스로 만들어 가는 법이죠. 제프, 전 당신에게 정말 고마워하고 있어요. 덕택에 제 고객들이 많아졌으니까요.

제크 팀장은 유럽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저번 스토크전 이후 보여 준 에이전시의 대응에 감명 받은 많은 선수가, 내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은 것이다.

그중에는 꽤 유명한 선수도 많았다.

이름만 들어도 감탄을 터뜨릴 선수와 연이어 계약을 맺었다.

제크 팀장은 단숨에 유럽 축구계의 대형 에이전트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그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나도 좋은 일이다. 축구계의 그 누구도 날 함부로 대하기 어려워진다는 뜻을 의미했으니까.

-아, 그리고 몇 가지 후원사 계약이 새로 들어왔습니다. 이 중에 저는 이 기업과······

뭐, 실제로 일을 잘하기도 했고.

***

<챔피언스리그 16강 대진 추첨>

맨체스터 시티 VS 도르트문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VS 샬케 04

토트넘 핫스퍼 VS 파리 생제르망

바이에른 뮌헨 VS 발렌시아

유벤투스 VS AFC 아약스

FC 바르셀로나 VS FC 포르투

SSC 나폴리 VS 올림피크 리옹

첼시 VS 레알 마드리드

16강 대진 추첨이 끝나고.

그 광경을 클럽 하우스에서 모여서 지켜본 첼시 선수들은 어설픈 표정을 지었다.

"우리 조 1위로 진출하지 않았나?"

"그런데 레알 마드리드를 만났네."

"이거야 원."

16강 상대 레알 마드리드.

최근 여러모로 흔들리는 면모가 있다. 때로는 강등권 팀에게 패배해서 망신을 사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유럽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여전히 막강한 상대다.

3연속 빅이어를 들어 올린 대단한 클럽 아닌가.

그 클럽을 16강에서 맞닥뜨리게 되자 선수들은 모두 아연한 기색이었다.

심지어 자신 넘치던 필마르크 감독도 인상을 한껏 구기고 어떻게 경기를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다만 그 와중에 한 선수만이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제프. 걱정 안 돼? 레알인데?"

제퍼슨 리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축구화 끈을 조였다.

"걱정은 그쪽이 해야지. 거긴 고작 라 리가 3위 팀이잖아? 우리는 지금 프리미어리그 1위 팀이고."

"······."

제퍼슨의 태연한 반응에 선수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제퍼슨은 그런 선수들의 반응이 오히려 이해가 안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알이 그 옛날의 레알은 아니잖아? 오히려 우릴 만나서 골치 아픈 건 쟤들이어야지."

제퍼슨은 그렇게 말하곤 훈련장으로 나갔다.

그의 뒷모습에 선수들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첼시가 분명 현재 유럽에서 큰 클럽중 하나이지만, 레알 마드리드의 저력과 역사에 비견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제퍼슨의 태연한 반응이 오히려 선수들의 긴장감을 풀어 준 것이다.

그 모습에 감독과 같이 앉아 있던 아스피가 혀를 내둘렀다.

"다음 주장은 쟤 시키는 게 어때요?"

"끄응. 저런 선수를 여기 오랫동안 붙잡으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할까."

물론,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

제퍼슨 리는 17살에 데뷔해서 이제 스무 살이 된 선수다.

문제는 그 나이대에 이미 프리미어리그를 지배하다 못해 왕이라고 불리고 있단 사실이다.

그 나이대의 선수는 흔히 '성장기'라고 말한다.

스무 살 초반까지. 아니, 요즘에는 서른 살까지 대기만성형으로 성장하다가 포텐을 터뜨리는 일도 있다.

그런 걸 고려하면, 제퍼슨 리는 이미 일찌감치 완성된 선수처럼 보였다.

많은 전문가는 제퍼슨 리를 더 예측하기를 포기했다. 여러 대회를 병행하므로 어린 선수가 너무 많은 경기를 뛰어 문제가 되지 않을까하는 예측도 있었지만, 그것도 모두 쓸모없는 얘기였다.

[Gooooal! gol, gol, gol! 제퍼슨 리! 교체 투입 후 볼튼 원더러스를 상대로 결승골을 터뜨립니다!]

[강력한 왼발 슈팅! 첼시의 로테이션 멤버를 맞이해 FA컵에서 잘 싸워 준 볼튼의 수비 조직력이 프리미어리그의 왕 앞에서는 철저하게 찢겨집니다!]

제퍼슨 리는 저번 시즌보다 더 많은 플레이 타임을 소화하고 있었다.

저번 시즌엔 6~70분만 뛰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젠 풀타임 경기가 대부분이다. 그뿐만 아니라 FA컵 3라운드 같은 경기에도 교체 투입되기도 했다.

이미 완성된 선수.

더는 성장할 건 없을 것 같았던 선수가 또 체력과 지구력에서 한층 더 성장한 기량을 선보인 것이다.

[제퍼슨 리는 이미 완성된 선수입니다. 하지만 더 발전하고 있어요. 지금의 완성도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집중견제와 부담감.

그리고 과도한 압박과 도를 넘은 반칙까지.

한데도 제퍼슨 리를 막아 내기가 어려운 것이, 현재 프리미어리그 모든 팀들의 골칫거리였다.

190cm가 넘어가는 장신. 거기에 좋은 위치 선정과 압도적인 서전트 기록을 바탕으로 한 공중볼 경합.

왼발, 오른발 가리지 않는 강력한 슈팅부터 공을 발끝으로 갖고 노는 테크닉.

때론 펄스나인처럼, 때때론 타겟터처럼, 때로는 라인 브레이킹으로 수비진을 부수고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제퍼슨 리는 공격수가 갖춰야 할 모든 부문에서 탑 클래스를 넘어 월드 클래스의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많은 팀이 후회하고 있어요! 제퍼슨 리의 첼시 입단 시 이적료가 불과 5천만 파운드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2억 파운드를 줘도 첼시에게서 제퍼슨 리를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PSG, AT 마드리드, 맨체스터 시티! 모든 빅팀이 그저 제퍼슨 리를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제퍼슨 리는 그런 높은 관심 속에서.

후반 82분 교체투입된 FA컵 3라운드, 볼튼 원더러스 전에서 두 골을 뽑아내며.

3대 1로 경기를 마쳤다.

[결국, 제퍼슨 리가 또 한 번 승리를 만들어 냅니다! 승리의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첼시에 직접 내려왔군요!]

***

<2021 유럽 골든 보이>

제퍼슨 리(첼시)

싱거운 경쟁이었다.

골든 보이는 대부분의 예측대로 제퍼슨이 수상했다. 사실 쉬운 예상이었고, 경쟁이라고 보기에도 수준 차이가 컸다.

막말로 21세 이하 선수 중에, 한 시즌 60골을 집어넣는 선수가 세상에 어디 있나.

수많은 쟁쟁한 후보들이 있었다.

차기 세계 최고의 재능이라고 불리는 보석들이 많은 최종 후보진이었지만.

제퍼슨은 그 모든 경쟁을 너무 가볍게 이겨 내고 골든 보이를 수상했다.

[제퍼슨 리, 골든 보이 수상! 역대 최고의 재능을 입증하다]

[스탬포드 브리지에 도착한 골든 보이 트로피. 제퍼슨 리에게는 너무나 부족한 트로피가 아닐까.]

하나 이 시점에는 반응이 시즌 초반 하고는 달랐다.

골든 보이 수상은 그의 가치에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것이라는 게 주된 의견이었다.

어떤 전문가는 그가 다음 발롱도르 포디움에 올라야 한다고 말한다.

"제퍼슨 리는 유럽에서, 아니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공격수입니다. 당장 발롱도르 포디움에 들어야하는 선수죠! 그런 선수에게 골든 보이라니요? 세상에 어떤 골든 보이가 시즌 60골을 집어넣습니까?"

실제로 그런 의견은 많은 공감을 샀다.

"완성된 선수입니다. 문제는 이 완성도에서 더 완벽해지고 있죠."

그게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더는 성장할 수도 없을 것 같이 완벽한 선수인데,

제퍼슨은 경기를 치를 때마다 무언가 더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수비들은 날이 갈수록 진화하는 제퍼슨의 공격력에 애를 먹다가 이내는 좌절하고 말았다.

[첼시, 노팅엄 포레스트 상대로 2대 0 리그 20라운드 승리!]

[제퍼슨 리의 1골 1어시스트. 경기를 지배하다.]

[프리미어리그 21라운드, 첼시 3 VS 2 웨스트햄]

[제퍼슨 리 1골 2어시스트. 매 경기 득점!]

도저히 질 것 같지 않았다.

첼시는 매 경기 승리를 거두고 있었고, 비길 것 같은 경기를 승리로, 질 것 같은 경기를 무승부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제퍼슨 리는 결승골로 해결을 짓곤 했다.

18승 2무 1패.

2위 리버풀과의 승점 차는 무려 8점.

이런 기세에 아이러니하게도 어깨가 펴진 건 아스날이었다.

"우리가 그들에게 유일한 패배를 안겨 줬지!"

유일한 1패가 바로 아스날이었다.

어쨌거나 재밌는 일이다.

리그 최강인 맨시티와 리버풀도 첼시를 만나서 처참하게 패배했고, 그 외의 모든 팀도 별다른 수를 쓰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아스날은 최근 첼시에게 유난히 약한 모습을 보여 줬던 팀이다. 그리고 리그에서도 현재 5위에 머무르고 있는 팀.

그런 아스날이 패배를 잊은 것 같은 첼시에게 유일한 패배를 안겨 준 건, 축구의 재밌는 점이다.

때문에 22라운드, 첼시와 아스날의 리턴매치가 열렸을 때.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당시 첼시가 아스날에게 패배한 이유에 대해 사람들은 입을 모아 얘기한다.

"제퍼슨 리가 결장했으니까!"

그때 그 경기는 첼시로선 억울한 경기였다.

제퍼슨이 하필 결장했으니까.

그러나 아스날은 그런 반응에 대수롭지 않게 대응했다.

"고작 제퍼슨 리 하나가 없다고 진 거라고?"

"선수 하나 없다고 질 팀이었으면, 제퍼슨이 있어도 똑같이 질 걸?"

"첼시가 아무리 잘나가도, 런던 더비는 모르는 일이지!"

아스날 팬들의 자신감은 최근 성적에서 나온다.

최근 7경기 5승 2무.

아주 좋은 기세였다. 거기에 늘 악몽같이 시달리던 부상자도 스쿼드에 단 한 명도 없다. 베스트 일레븐을 그대로 출전시킬 수 있던 것.

물론 그런 아스날을 맞이하는 스탬포드 브리지도 여전히 자신감이 넘쳤다.

현재 기세가 아주 좋았으니까.

"제프, 이번에는 또 뭘 보고 있어?"

풀리시치가 고개를 쭉 빼곤, 제퍼슨의 태블릿을 바라봤다.

최근 많은 전문가가 의문을 표한다.

제퍼슨은 분명 완성된 선수처럼 보이는데, 경기를 치를 때마다 뭔가 또 다른 플레이를 선보이는 것.

아주 미세하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제퍼슨은 매 경기 발전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 원인은, 제퍼슨 본인의 지독한 노력이 있었다.

이학현으로 살 때, 수많은 유명 선수의 비디오를 보며 끊임없이 분석하고 또 분석하며 따라하려던 행동.

그것이 습관이 되어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다.

"또 호나우두야? 아니면 히바우두?"

스트라이커로 뛰게 되면서.

제퍼슨이 늘 보는 영상은 호나우두와 히바우두의 플레이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계 미국인인 제퍼슨에게 호나우두와 히바우두의 모습이 보인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아니. 이제 그 사람들 건 안 봐도 될 거 같아."

어쩐지 모르게 느껴지는 자신감에 풀리시치는 살짝 놀랐다.

마치 호나우두와 히바우두의 플레이는 다 익혔다는 것처럼 들리는 뉘앙스.

"그럼 누군데?"

제퍼슨은 대답 대신 화면을 슬쩍 보여줬다.

눈에 익은 빨간 유니폼.

그리고 올드 트래포드의 광경.

왜 라이벌 팀의 영상을 보고 있나 싶었지만.

이내 완벽하게 골을 집어넣고 격렬한 세레모니를 펼치는 선수를 보고 풀리시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어린 티가 나긴 했지만,

익숙한 얼굴이다. 적어도 풀리시치에겐 필드가 아니라 벤치에 있는 게 익숙한 사람의 얼굴.

"솔샤르?"

동안의 암살자, 제퍼슨은 솔샤르의 최전성기 시절의 활약을 유의 깊게 보고 있었다.

< 150. 박싱데이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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