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로드킬 (1) >
선택과 집중.
트레블을 노리는 팀에겐 가장 중요한 문구다.
아무리 스쿼드가 두껍다고 한들, 여러 대회를 병행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상대가 약팀이라도 공은 둥근 법이다. 이변은 언제든 일어난다.
축구 게임처럼 1군과 2군을 완전히 나눠서 경기를 치를 수는 없다. 그랬다가 FA컵에서 4부리그나 5부리그에 무너지는 명문팀이 어디 한둘이었나.
때로는 포기해야 하는 경기도 분명 있다.
지금이 그렇다. 선택과 집중이 여실히 필요할 때다.
[첼시, 챔피언스리그 16강 진출 확정. 나머지 두 경기는 로테이션 가동할 듯.]
이런 기사가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감독도 로테이션을 천명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나와 일대일 면담을 했다.
"조별리그 남은 두 경기에서 선발은 우트와 타미, 또는 지루를 내보낼 생각이다."
감독이 나에게 선발 얘기를 하는 이유는 명백했다.
"너에게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괜찮아요. 문제없어요."
"정말이냐? 그······ 20골을 넣겠다고 호언장담했으니까. 조별리그 두 경기가 중요할 텐데."
감독은 은근슬쩍 눈치를 봤다.
바로 20골을 넣겠단 목표.
인터뷰로 호언장담하지 않았나.
만일 그 목표를 해내지 못하면, 안 그래도 날 싫어하는 양반들이 여기저기서 조롱하고 물어뜯으리라.
하나 그런 건 아무 상관 없다.
"문제없어요. 어차피 우리는 결승까지 갈 건데요. 경기는 많잖아요?"
내 말에 감독은 호탕하게 웃었다.
"고맙다. 그렇게 말해 줘서."
사실 조별리그에서 골을 많이 넣지 않으면, 갈수록 득점을 하기가 힘들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16강부터 만나는 상대는 각 리그의 명문팀과 난적들이다.
토너먼트 특성상 변칙 전술에 따라 득점이 나오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내가 지겹게 상대한 프리미어리그 팀하고는 또 팀 색깔과 성향이 다르지 않겠는가.
하나 여기서 내가 감독의 의견에 반발하면 그것도 우습다.
'팀 위에 서 있는 선수여서는 안 돼.'
선수의 선발은 감독 고유의 권한이다.
그런데도 감독은 나를 따로 불러 양해를 구할 정도다.
현재 나의 팀 내 입지가 그 정도라는 의미다. 굳이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감독마저 내 눈치를 볼 정도라는 것이다.
'좀 불편하지.'
이학현은 한국과 일본에서 오래 뛰었다.
문화적인 특성상, 팀에서 감독의 권한은 절대적이었고 선수가 대드는 모양새는 쉬이 상상하기 어려웠다.
난 거기서 오래 뛰었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가 익숙치 않다.
유럽은 달랐다. 선수와 마찰을 빚어 잘려나가는 명장이 수두룩하지 않나. 심지어 즐라탄은 한때 과르디올라에게 라커룸에서 물건을 집어 던지며 쌍욕을 했단 얘기는 유명한 일화다.
유럽에서 슈퍼스타가 팀 위에 서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그 팀은 반짝일 수는 있어도 오래가지는 못한다.
첼시도 그랬던 적이 여러 번 있으니까.
감독이 형편없으면 모를까.
필마르크는 훌륭한 감독이다. 나는 절대로, 팀 위에 서는 선수가 될 생각은 없다.
"감독님."
"응?"
"전 감독님의 모든 생각과 전술에 절대적으로 지지해요. 설령 제가 세 경기, 네 경기 연속 출전하지 못해도 그럴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하고 기다릴 겁니다. 그러니까 전혀 신경 쓰지 마세요."
"······."
"구단주가 뭐라 하면 저한테 얘기해요. 확 다른 팀으로 간다고 협박해 버릴 테니까."
"아니, 그건 나한테도 안 좋은 거 같은데."
"같이 가면 되죠."
감독은 피식 웃었다.
내 어깨를 잡은 그의 손아귀에서 무언가 느껴지는 듯했다.
"고맙다, 제프. 네가 말했지. 내년 월드 베스트는 다 첼시 선수로만 꾸려질 거라고."
"네."
"나도, 그렇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모든 걸 다 쏟아붓겠다."
감독의 눈이 이글거렸다.
음.
왠지, 감독에게 내가 동기부여를 심어 준 거 같은데.
"뭐, 챔스에서 20골 못 넣으면, 리그에서 60골 넣으면 대충 80골은 넘지 않겠어요?"
물론 감독을 절대적으로 지지한다고 해도.
내가 요구할 건 요구해야 한다.
선수는 선발로 뛰어야 하니까.
챔피언스리그는 다른 동료들에게 선발 자리를 양보한다.
하지만 리그는 내가 선발로 나가겠다.
난 가볍게 던지는 농담인 척, 넌지시 내 의견을 어필했고, 감독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라. 나중에는 제발 빼달라고 호소할 정도로 혹사해 줄 테니까!"
***
[첼시, 웨스트브롬 상대로 3대 3 무승부]
[제퍼슨 리, 리그 3번째 해트트릭 폭발! 위기의 팀을 구원하다!]
[시셀도의 발목 부상과 윌리안의 퇴장, 수렁에 빠지던 첼시를 제퍼슨이 해트트릭으로 구해 내다.]
[첼시, 리그 첫 무승부. 하지만 1위 자리는 굳건하다.]
[첼시 감독, 'VAR은 훌륭하다. 하지만 VAR을 보는 심판은 형편없다.']
***
음, 솔직히 말해 이번 시즌 가장 목덜미가 서늘한 경기였다.
시셀도가 거친 반칙으로 인한 발목 부상, 거기에 화가 난 윌리안이 선수를 강하게 가격하면서 다이렉트 퇴장.
미쳐 돌아가는 분위기에 PK 실점과 급하게 교체 투입된 토모리가 몸이 풀리지 않아서 연이어 실점을 두 개 헌납한 것이다.
그게 불과 전반 20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네가 없었으면 그 경기, 분명 무너졌어."
그랬다.
20분 만에 승격팀한테 3실점을 내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관중들도 당황해서 온갖 욕을 하고 있었고, 선수들도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선수 한 명까지 퇴장당했으니.
"사람들이 널 구원자라고 부르는 거 알아?"
"제 얼굴에 금칠 좀 그만 해요. 캡틴, 캡틴의 크로스 세 개가 다 좋았던 것이잖아요."
그런 와중에 아스피만 제정신을 유지하고, 아주 깔끔한 얼리크로스를 세 개 올려줬다. 그리고 그 세 개를 다 헤더로 해트트릭을 터뜨렸다. 아스피의 크로스가 자로 잰 듯 너무 정확해서 말이지.
"어쨌거나, 남은 경기들이 쉽진 않을 거야."
아스피의 말처럼.
웨스트브롬과의 경기는, 이번 시즌 우리가 이겨 내야 할 부분을 정확히 보여 줬다.
연이은 거친 반칙과 조금은 뒷맛이 씁쓸한 애매한 판정까지.
"어느 리그나, 강력한 우승후보는 알게 모르게 이런 견제를 받지."
필마르크 감독은 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덴마크리그에서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했으니까.
문제는 감독의 인터뷰였다.
VAR은 정말 훌륭한 제도지만, VAR을 보는 심판은 사람이라는 사실.
감독은 아예 대놓고 심판을 비난했고, 권위 높은 심판협회에서 감독을 좋지 않게 보고 있다나.
자칫하면 감독이 벤치에 앉지 못할 수도 있다.
뭐, 어쩔 수 없다.
이런 견제를 이겨 내야 하니까.
한데 훈련장에 모인 선수들의 표정은 모두 하나같이 심상치 않았다.
"뭔가 비장미가 흘러넘치는데."
외부에서 팀을 흔들려고 하는 움직임이 생기면,
그 팀은 두 갈래로 나뉜다.
단결하거나, 아니면 흔들리거나.
우리는 굳이 따지면 전자였다.
"다들 네 훈련방식을 따르고 있어."
"힘들 텐데."
감독이 내 개인 트레이닝 방식을 도입하겠다고 농담처럼 말했었다.
쉬운 건 아니다.
신체를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방식이니까.
물론 내가 하는 방식 그대로를 도입하진 않았다.
첼시도 수준급의 피지컬 트레이너들이 있는 팀이고, 율리아겐이 넘겨준 자료를 바탕으로 수정 보완하여 조금은 난이도를 하향시킨 트레이닝 방식을 접목했다.
그것만 해도 근육을 쥐어짜는 듯한 느낌인데도,
평소 훈련이라면 뺀질거리는 올리버마저 비장한 얼굴로 운동에 힘쓰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아스피가 피식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이러다가 베스트 일레븐이 제프처럼 덤프트럭으로만 구성되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음.
그럼 상대팀이 남아나지 않을 텐데.
***
뻐어어엉!
"좋아! 그대로 가볍게 뛰어!"
필마르크는 벌써 세 번째 골에 웃음을 지었다.
제퍼슨이 벤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런던에 원정 온 갈라타사라이를 짓밟고 있었다.
선발 선수도 1.5군이라고 볼만한 로테이션 멤버가 대거 낀 라인업.
그런데도 갈라타사라이를 압도하고 있었다.
특별한 전술을 준비해서인가?
아니다.
온전히 선수들의 정신무장이 이런 결과를 불러내고 있었다.
션 올리버는 마치 캉테와 같은 움직임을 보여 줬고.
그간 주전 경쟁에서 밀렸던 페드로와 윌리안도 과거의 전성기를 되찾은 것처럼 양쪽 측면을 파괴하고 있었다.
"이거 참."
필마르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사실 그는 분명 초짜 감독이다.
제대로 된 커리어의 시작은 덴마크 리그에서부터니까.
다른 명장들의 경력과 비교하면 얼마 되지도 않는다.
그런 사람이 작년엔 세 개의 컵을 들어 올렸고, 이번 시즌도 벌써 두 개 컵을 들고 시작하고 있다.
거기에 치열하기로 유명한 프리미어리그 1위까지 달리고 있다니.
감독은 흘끔 벤치에 앉은 채로 여유롭게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제퍼슨을 쳐다봤다.
'감독하기 참 편하군.'
첼시에 올 때, 여러모로 걱정한 점이 많았다.
첼시는 감독과 선수들의 마찰이 언론에 여러 번 나온 적이 있는 팀이니까.
거기에 구단주의 간섭에 관한 소문도 퍼져 있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지금 필마르크는 아주 편하게 느껴졌다.
팀 내 최고 입지를 자랑하고, 현재 유럽에서 가장 핫한 슈퍼스타인 제퍼슨 리가 팀에 있다.
일반적인 다른 팀이었으면, 감독의 권한이어도 그를 어찌할 수 없다. 선발 명단을 구성할 때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제퍼슨은 공개적으로 자신에 대한 지지를 표했다.
그 탓일까.
자신이 선수단을 장악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선수들은 괴팍한 변칙 전술도 받아들였고, 기존의 훈련 방식이 아닌 새로운 트레이닝 방식도 곧잘 수용했다.
'다음 경기도 걱정 없겠군.'
협회에선 VAR심판을 비난한 필마르크에게 두 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내렸다.
덕택에 벤치는 수석코치가 지휘하게 될 터.
아무리 수석코치와 성향이 비슷하다고 한들, 실제 감독이 지휘하는 것하고는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하나 그렇게 크게 걱정이 들지 않는다.
'대충 제퍼슨을 박스에 넣으라고 하면 되겠지.'
남들이 보면 감독이 무슨 그런 방법만 제시하냐고 하겠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가장 효과적인데?'
***
벤치에 감독이 앉을 수 없다.
이건 꽤 치명적이다.
축구는 감독 놀음이라고 할 정도로, 감독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크다.
심판 비난으로 인해 두 경기 출장정지.
그리고 만나는 첫 리그 상대는 맨유였다.
누군가는 그 이름값만 보고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맨유를 만나는가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값이 옛날처럼 찬란하지는 않다.
현재 리그 9위로, 올라오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맨유는 과연 그렇게 위험한 상대인가? 싶을 정도다.
"Wuuuuuuuuuuuu!"
하지만 주중 챔피언스리그 경기로 인해 몸이 좀 둔해진 탓일까.
일주일을 푹 쉰 맨유는 우리보다 좀 더 활발한 모습이었고, 먼저 선제 득점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저 세레모니 기분 나빠."
골을 넣은 제시 린가드 그 특유의 세레모니.
보고 기분 나빠진 건 나뿐만이 아닌가 보다.
"무슨 생각해? 제프?"
"내가 최근에 해트트릭을 언제 했는지, 생각해 보고 있었어."
"불과 저번 라운드 경기였어. 머리로만 해트트릭을 터뜨렸다고!"
"그래?"
흠. 그러면.
"오늘이 또 해트트릭할 타이밍인 것 같은데?"
그런 날이 있다.
오늘 왠지 느낌 좋은 날.
벤치에 감독이 없어도, 이상하게 불안한 거나 그런 거 없다. 선제 실점을 내줘도 불안하지 않다.
뻐어엉!
"Yeaaaaaaaaaaa!"
하베르츠가 잘 찔러준 패스를 발끝으로 궤적만 살짝 바꿔서 곧바로 동점 골을 올려 주고.
자.
두 골만 더 넣으면 되는 거지?
< 146. 로드킬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