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말하는 대로 (3) >
그날 아스톤 빌라는 처참하게 깨졌다.
첼시를 상대로 라인을 올리면 어떻게 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됐을지도 모른다.
[첼시, 아스톤 빌라에 4대 2로 승리!]
뭐, 경기 자체는 재밌었다.
템포도 빨랐고 서로 치고받느라 바빴으니까.
그러나 그 몇 번 없는 기회를 득점으로 만들어 내는 건 온전히 우리 팀의 능력이었다.
[제퍼슨 리, 아스톤 빌라전, 5개의 슈팅으로 2골 폭발!]
현대에서 요구되는 스트라이커의 요소는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2선 플레이메이커가 점차 실종되는 것처럼, 전형적인 스트라이커를 상징하는 골게터도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전방에서부터 강한 압박과 더불어 왕성한 활동량과 넓은 수비 범위까지.
그러면서도 득점과 어시스트를 만들어 줘야 한다.
현대 축구에서 풀백이 공격과 수비 양면에서 많은 것이 요구되는 것처럼, 스트라이커도 그렇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나는 완전히 역행한다고 볼 수 있다.
"활동량? 수비가담? 전방압박? 그딴 건 골을 못 넣으니까 요구되는 것뿐이지."
감독은 때때로 그렇게 말했다.
그는 절대적으로 내 역할을 규정했다.
수비가담이니, 압박이니, 패스니.
"그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 마. 단지, 골만 넣고 생각하라고."
어쨌거나 축구는 골을 넣어야 이기는 스포츠다.
스트라이커에게 요구되는 여러 가지 요소는,
팀이 득점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것들이다.
왜냐면.
"스트라이커가 골 넣기가 너무 힘들어졌거든."
전술이 다양화되고 복잡해지면서,
또 수비 전술의 발달과 수비수의 피지컬이 한층 더 발전하면서.
공격수가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 골을 넣기 어려워졌다.
골을 못 넣는 스트라이커는 결국 다른 방면으로 골을 넣기 위한 움직임을 가져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 흐름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널 사랑한단다, 제프."
"음. 다시 말하지만, 저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치? 제프? 오늘 훈련 끝나고 클럽이나 갈까?"
"올리버. 제발 조용히 해. 감독님이랑 얘기 중이잖아."
올리버 이 자식은 어쩌다가 여자 얘기가 나올 거 같으면 기가 막히게 냄새를 잘 맡는다.
하여튼, 어찌 됐건 감독이 날 좋아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골을 잘 넣잖아!"
스트라이커들은, 그러니까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선수들은 늘 골 찬스를 맞이한다. 완벽한 기회를 반드시 찾아간다.
다만, 몸이 따르지 못한 경우가 많다.
떡대들로 가득한 수비진의 방해.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위협적인 태클. 그 사이에서 생각대로 슈팅하는 것?
어렵다.
내가 골을 잘 넣는 이유는 그거다.
그런 태클과 방해 속에서도, 안정적으로 중심을 잡고, 심지어 그들을 농락할 수 있는 피지컬을 소유했으니까.
제아무리 기술을 갖고 있어도, 그걸 받쳐 줄 피지컬이 없으면 완벽할 수 없다.
"고로, 네 트레이닝 방식을 도입하기로 했다."
감독의 진지한 말에, 훈련장에서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선수들이 일제히 기함했다.
"그건 트레이닝이 아니라 혹사입니다."
"저희는 축구를 하는 거지, 격투기를 하려고 운동하는 게 아니에요."
"저 근육 괴물의 트레이닝을 하라구요?"
근육 괴물이라고 한 놈 누구야.
어.
캉테야?
***
[첼시는 이번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다면, 챔피언스리그 16강 진출이 확정적입니다!]
AS 모나코는 도시 자체의 경관이 유럽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스타드 루이 2세 경기장은 그 아름다움 속에, 18,000석으로 이루어진 작은 규모의 경기장이었다.
오로지 모나코 선수와 관중을 위한 공간.
그런 공간이 오늘은 이방인에게 처절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제퍼슨 리가 스타드 루이2세 경기장을 지배합니다!]
제퍼슨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치명적이었다.
[아주 기민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에 수비들이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끝내 페널티킥을 허용합니다.]
민첩한 몸놀림과 엄청난 탈압박 능력.
그걸 막아 내기 위해선 손과 위험한 태클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여기가 프리미어리그였다면, 그 반칙에 쓰러진다고 한들 페널티킥은 주어지지 않는다. 제퍼슨의 우월한 피지컬 덕택에, 할리우드 액션이 들어갔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는 챔피언스리그다.
제퍼슨은 엄청난 피지컬만큼이나 타고난 센스를 지녔다.
위험한 태클이 들어온다 싶은 순간.
망설임 없이 액션을 넣으면서 쓰러졌다.
[제퍼슨 리가 사실 고작 저 정도 바디체크에 쓰러질 선수는 아닙니다. 아주 재치 있고, 현명하게 넘어졌어요. 페널티킥을 받아 냅니다!]
페널티킥 키커는 보통 조르지뉴였다.
또는 윌리안이나 하베츠르가 그 역할을 했다.
정확한 킥을 보유한 선수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제퍼슨 리가 페널티킥을 차는군요! 동료들도 모두 그에게 양보합니다. 사실 제퍼슨이 저번 시즌 세운 엄청난 득점 기록 중에 PK는 단 한 번도 없었거든요?]
제퍼슨은 침착하게 페널티 에어리어에 올라섰다.
골키퍼와 심리 싸움은 신경도 쓰지 않고 우직하니 강한 슛을 때렸다.
설령 막는다고 하더라도 손이 온전할까 싶을 정도로 강슛.
"미친!"
골키퍼는 분명 방향을 읽었다.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나 슈팅의 속도는 압도적이었다. 그의 반응보다 더 빨리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제퍼슨 리가 페널티킥으로 득점을 올립니다! 이로써 챔피언스리그 4경기 7득점이네요!]
제퍼슨 리가 페널티킥을 찼다는 건 어쩌면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퍼슨 리는 공언했습니다. 챔피언스리그 20골을 기록해서, 끝내 시즌 80골을 넣겠다는 것이죠. 그가 공언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 이제 페널티킥까지 차게 된 것 같네요.]
중계진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누군가는 그 인터뷰를 보고, 그저 허세라고 생각했다.
충분히 엄청난 득점기록을 세울 수 있는 선수지만, 그 정도는 기자들과의 기 싸움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제퍼슨은 실제로,
말하는 대로 이뤄질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했으며, 만들어 내고 있었다.
[12-13시즌 때 리오넬 메시가 한 시즌 90골을 넣은 적이 있죠. 어쩌면 우리는 10년 만에, 그 기록에 도전하는 천재의 시대에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솔직히 너도 킥은 말도 안 되게 정밀하잖아?"
페널티킥 키커를 나에게 양보할 때.
본래 키커였던 조르지뉴는 최대한 쿨한 표정을 지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속내는 꼭 그렇지 않을 거다.
미드필더가 골을 넣을 기회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것도 후방에 있는 조르지뉴다.
우리 팀은 스트라이커에게 득점 기회를 최대한 몰아주는 전술이다.
그런 그에게 기회를 빼앗아 가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다. 하지만 부주장이라는 역할과 팀 내에서 내 입지, 그리고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팀 상황을 고려한 조르지뉴는 어차피 넘겨 줄 역할이니 최대한 쿨한 표정을 지었다.
음.
나중에 밥이라도 사야겠다.
이런 미묘한 감정의 파편이, 의외로 운동선수들 사이에선 감정의 골이 깊어질 수 있으니까.
하베르츠는 별 신경 쓰지 않았고, 윌리안은 애당초 경기 출전이 뜸해지고 있다.
오도이와 주전 경쟁에서 완전히 밀렸고, 마크 우트와 타미 아브라함까지 그 자리에서 뛸 수 있으니까.
이렇게 해서 페널티킥 키커는 내가 됐다.
"페널티킥은 별로 재미없어? 선수들을 다 제치고 넣어야 재밌어?"
우트의 물음에 난 피식 웃었다.
"아니. PK가 더 재밌는 거 같아."
"왜? 네 성격상 시시해서 싫어할 거 같은데."
"골키퍼의 온갖 희로애락을 눈앞에서 볼 수 있잖아. 골 먹히고 그 허무한 표정을 코앞에서 일대일로 보는데, 좀 재밌는 거 같아."
"······."
우트가 이상한 표정을 짓건 말건.
나는 다시 필드 속에 녹아 들어갔다.
"캉테!"
캉테는 프랑스어로 들려오는 온갖 욕에도 불구하고, 아주 재치 있게 중원을 휘저었다.
축구는 무게 중심이 낮을수록 유리한 종목이다.
그래서 키가 작은 선수 중에서도, 화려한 발재간과 상당히 좋은 균형을 장점으로 내세우는 선수가 많다.
캉테도 그런 유형중 하나였다.
다만 몸이 가볍다고 거친 몸싸움에 날아가지는 않는다.
"끄응!"
작고 가벼운 몸이라는 인식과 달리.
우리 캉테는 몸싸움에도 능하다. 단숨에 달려드는 미드필더 하나를 스텝오버로 제치고, 하나는 몸으로 꿋꿋이 밀어내며 패스를 툭 찔러준다.
"뛰어! 제프!"
말하지 않아도 뛰고 있다
공간을 향해 찾아 들어가자.
파트너로 출격한 우트가 내 움직임을 예상했던 것처럼 다른 곳으로 파고들면서 수비의 시선을 끈다.
캉테의 패스는 내가 아닌, 왼쪽의 풀리시치에게 도달했다. 풀리시치는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 선수들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망설임 없이 크로스를 올렸다.
이젠 척하면 척이다.
내 전용 크로스 매크로를 장착한 느낌이다.
딱 좋은 크로스 궤적.
우트가 수비 한둘쯤의 시선을 끌고.
비교적 약해진 압박 속에서.
그대로 머리를 공에 갖다 박았다.
뻐엉!
"공 터지겠다!"
생각보다 축구공은 튼튼하더라.
있는 힘껏 머리로 때려 박아도 터지진 않는다.
다만 상대 수비수와 골키퍼 멘탈이 터질 뿐이지.
철럭!
머리로 골을 넣는 건 좀 재미없다.
"왜?"
그야.
"순간적으로 골키퍼 얼굴이 안 보이잖아. 허무에 잠긴 그 표정을 놓친단 말이지."
우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오케이. 알겠어. 날 이상한 놈이라고 부른댔지?"
"응. 다 널 그렇게 생각해."
"그러면 넌 그냥 미친놈이야, 제프. 미친놈아."
뭘, 새삼스럽게.
***
컨디션이 최고였던 것 같다.
우리는 실점을 하나 내주긴 했지만, 후반전에 내가 또 골을 터뜨리면서 해트트릭을 달성하고, 승리를 거뒀다.
"제퍼슨 리! 당신은 챔피언스리그에서 20골을 넣겠다고 공언했습니다! 16강이 확정된 지금, 20골을 넣으려면 11골이 더 필요한데요.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저번에 했던 인터뷰가 유럽의 기자들에게 꽤 인상적이었나 보다.
요즘 어딜 가나 저런 질문을 받는다.
솔직히 말해, 그땐 좀 홧김에 지른 것이긴 했다. 필터를 거치지 않고 막 내뱉은 느낌.
그런데 어쩌겠나.
막상 골을 넣다 보니, 가능할 것도 같은데 말이지.
"조별리그는 두 경기가 남았습니다. 16강도 1차전, 2차전 두 경기고요. 네 경기 동안 11골을 넣는 건 힘들지도 모르죠. 하지만 우리는 결승전까지 가기 때문에, 20골은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네요."
솔직히 어떻게 매 경기 득점을 올리겠나.
나도 무득점 경기가 분명 있을 거다.
컨디션이 아무리 좋아도, 상대 선수 컨디션이 훨씬 좋은 날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결승전까지 가게 되면 모르는 일이다.
치러야 할 경기 수도 많아지니까, 골 넣을 기회도 많아진다.
애당초 챔스에서 20골을 넣겠다는 건, 무조건 결승까지 가겠단 말이나 다름없다.
"첼시는 10년 전에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한 이후에, 그간 연이 없었습니다. 당시 드록바가 후반 추가시간에 넣은 골로 동점을 만들었고 우승을 이룩했죠. 당신은 첼시에게 그때의 감동을 선물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어.
벌써 10년이 지난건가.
어쩐지. 첼시 팬들이 더 간절하고, 주장 아스필리쿠에타가 이번만큼은 꼭 우승하자고 다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구나.
"토너먼트는 사실 장담해 드릴 순 없습니다. 다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말씀드리죠. 저뿐만 아니라 첼시의 모든 선수와 코칭스태프는, 다시 한번 팬들에게 감동을 선물하기 위해 전심전력하고 있다는 사실을요. 말하는 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이뤄지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은 진지하게.
그런 말이 있다.
무언가를 간절히 염원하면, 온 우주가 그걸 도와준다고.
터무니없는 얘기지만.
그래도 가끔 그 말을 믿고 싶을 때가 있다.
말하는 대로.
내가 시즌 80골을 넣겠다고 말하는 대로.
그리고 반드시 트레블을 차지하겠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대로.
이뤄질 수 있도록, 골을 넣으면 되지 않겠나.
다음 월드컵 직전에.
딱 우승컵 세 개만 들고 월드컵으로 가자.
그게 내 목표였다.
< 145. 말하는 대로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