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말하는 대로 (1) >
내가 혼자 살기 시작한 지는 꽤 됐다.
18세 생일이 딱 지났을 때, 런던에 같이 오셨던 어머니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기러기아빠 생활이 너무 길어진 탓이다.
내가 토론토에 뛰던 시절부터 하면 벌써 3년이다.
그런 아버지가 못내 걱정되신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미국으로 가신 이후 쭉 혼자였다.
트레이닝 팀이 저택에 따로 붙어 있는 별채에 있긴 했지만, 넓은 저택에 혼자 있는 외로움은 꽤 컸다.
나름 타지에서 외로움을 조금씩 느끼고 있을 무렵.
부모님이 런던에 오셨다.
"아들! 아들! 아들!"
190cm에 100kg 가까운 스포츠머리의 선글라스 남성이 펄쩍 뛰며 손을 흔드는 건 너무 눈에 띄었다.
"조용히 좀 해요!"
옆에서 어머니가 얼굴을 붉히며 아버지를 때리셨다.
아직도 금실이 좋으시구나.
"아들! 밥은 먹었니?"
"아직이에요."
"왜? 잘 먹고 다녀야지."
"엄마가 해 주는 밥 먹으려고 기다렸죠."
"아이고! 몸은 커졌는데 아직도 애네, 애야!"
"네 엄마가 먹을 거 잔뜩 해줄 거다. 친구들도 불러. 성대하게 꾸리자."
"뭐 굳이, 그냥 가족끼리 지내죠."
부모님이 오신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이 나의 20살 생일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바쁜 미주한인태권도협회 일도 마다하시고 런던에 오신 거다.
"아냐. 친구들도 불러."
"여자 친구도 부르고."
아버지가 툭 던지시고 내 반응을 살핀다.
"이런. 아직도 없어? 그 뭐시냐. 할리우드 배우가 너 좋아한다고 인터뷰까지 했던데?"
"이이는. 운동선수한테는 연애가 때론 독이 될 수도 있다니까."
어머니가 흘깃 바라본다.
"응? 운동선수가 금발에 글래머 모델 만나서 선수생활 망치는 경우, 어디 한두 번 있어?"
"음."
"하긴. 내가 그래서 태권도 선수 생활을 금방 접었지."
아버지가 갑자기 능글거리는 말투로 어머니의 어깨를 거칠게 끌어당기셨다.
그러고 보니 엄마도 금발이시지.
허 참.
"여기 공항입니다. 제발 쫌."
내가 말리자 부모님은 그제야 헛기침하면서 캐리어를 끌고 오셨다.
"하여튼, 아들! 친구들 다 데리고 와! 오늘 엄마가 아주 뷔페를 만들어 줄 테니까!"
친구들이라.
당장 생각나는 건, 캉테와 풀리시치. 둘은 불러야지.
타미랑 우트?
아냐. 걔들 둘 부르면 아버지가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볼지도 몰라.
하베르츠는 불러도 안 올 거 같고.
이 녀석은 선수들을 직장 동료라고만 인식하는 것 같아서.
훈련장 밖에서 만나면 딱딱하기 짝이 없다.
일단 대충 연락 돌리지 뭐.
***
"아들, 인기 많네."
아버지는 저택에 주차되는 수많은 고급차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음, 요리 도와주는 사람들 좀 빨리 불러야겠다."
"네. 어머니 혼자 힘드시겠네요."
분명 서너 명에게만 연락했다.
그리고 혹시 더 올 사람 있으면 연락해서 데리고 오라고.
캉테는 예의 그 귀여운 미니쿠퍼를 타고 도착했고, 풀리시치는 깔끔한 세단을 타고 도착했다.
그 외에도.
"안녕하세요, 어머님. 엄청 미인이시네요. 제프가 누굴 닮아서 잘생겼는지 알겠습니다."
올리버는 아주 우아한 자세로 어머니 손을 잡고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미친놈.
여하튼 동료들이 대부분 다 왔다.
어쩌다 보니 첼시 선수단 회식 분위기가 날 정도다.
"반갑습니다."
동료들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부모님 앞에서 정중한 모습을 보였다.
걱정했던 우트와 타미는 부모님 앞에서 신경전 펼치는 모습을 절대 보이지 않았다. 아주 정중한 모습으로 인사했고 대화도 즐겁게 나눴다.
"늦어서 미안해."
예상치 못한 손님도 도착했다.
하베르츠마저 꿀 같은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것이다.
"우리 아들, 인정받고 있네?"
아버지가 흐뭇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나도 운동선수 출신이라 잘 알아. 저 녀석들, 다 널 좋아하니까 이렇게 온 거야."
그런 사실이 꽤 마음에 드는지, 아버지는 연신 웃고 계셨다.
"다들 괜찮아 보이네."
"좋은 동료들이야. 아들이 혹시 못난 녀석들하고 친할까 봐 걱정했는데."
뭐, 굳이 따지면 저기 올리버는 조금 못난 녀석이긴 합니다만.
올리버 녀석은 부모님 앞에서 세상에 이런 신사가 있나 싶을 정도로 우아한 모습을 보여 줬다.
누가 보면 영화에 나오는 전형적인 영국 신사로 보일 정도다. 역시 잘 생기면 뭘 하던 그럴듯하게 보이네.
인정받는다라······.
뭐,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
첼시의 12라운드 상대는 스완지 시티였다.
승격팀이긴 하지만, 나쁘지 않은 조직력으로 현재 강등권을 벗어나 중위권 진입을 노리는 팀이다.
제퍼슨의 어머니 앨런 여사와 부친인 이성학은 첼시 구단에서 마련해 준 특별석에 앉아 경기를 관람했다.
"여보. 제프가 많이 큰 거 같지?"
"많이 컸지. 이번에 안아봤는데, 내가 안기는 느낌이더라고."
필드의 제퍼슨을 바라보는 이성학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190cm에 100kg 넘는 체격을 아직도 유지하는 이성학은 헤비급 메달리스트였다. 태권도 은퇴 후에는 종합격투 쪽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을 정도다.
최근 눈에 띄게 성장한 제퍼슨의 피지컬에 절로 감탄이 일었다.
"유럽 애들하고 흑인들이 조그맣게 보일 정도야."
"흐흐. 누구 아들인데."
"솔직히 우리 제프는 육상을 시켰어도 잘했을 거야. 내가 말은 안 했지만, 어렸을 때 정말 욕심이 나더라니까."
감탄하는 건 앨런 여사도 마찬가지다.
타고난 허벅지와 스피드를 보고 있노라면, 일찍 육상을 시켰으면 엄청난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시도 때도 없이 들었다.
"우리 유전자 중에 정말 좋은 것들만 물려받은 느낌이야."
운동선수라고 피지컬에서 고루 완벽할 순 없다. 이성학은 선수 시절 내내 순발력이 발목을 잡았고, 앨런 여사는 회복력이 늘 문제였다. 한번 뛰고 나면 근육이 회복되는 속도가 너무나 느렸던 것.
이렇듯이 세계 최정상급의 운동선수도 각자 아킬레스건이 있기 마련이다.
한데 제퍼슨은 세계 최정상 선수였던 부모의 유전자 중에 장점만 물려받은 것처럼 완벽한 모습을 보였다.
"타고났지."
"타고났어."
두 명 다 흐뭇한 얼굴로 제퍼슨을 바라봤다.
제퍼슨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필드를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문득, 하베르츠의 직선 패스가 찔러지는 순간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제프! 제프! 제프 좀 봐봐!"
제퍼슨의 실제 플레이를 직접 보는 건 A매치 이후 오랜만인 이성학은 눈에 띄는 플레이에 소리를 빽 질렀다.
상체 페인트로 가볍게 수비 하나를 속인 뒤, 무자비한 속도로 공을 잡고 질주하기 시작하는 건 시각적인 쾌감이 느껴졌다.
그러더니 오른쪽으로 달려나가는 오도이에게 툭 내주고, 아주 기민하게 수비진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쟤 왜 축구한다면서 막상 축구는 미식축구처럼 해?"
"버릇이 어디 가겠어?"
공을 돌리고 발을 쓰는 건 화려하기 짝이 없는 테크니션처럼 굴더니.
수비진 사이로 파고드는 매서운 움직임은 러닝백 특유의 움직임이었다.
한마디로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졌다'라는 러닝백의 움직임.
미식축구에서 잔뼈가 굵은 디펜스맨들도 피하기 어려운 무브먼트다.
이제 승격팀인 스완지 수비수들이 제퍼슨을 시야에서 놓친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올라오는 오도이의 정확한 크로스를 중간에 잘라먹는 깔끔한 발리슛까지.
"제---프!"
"제-프! 제-프!"
"와아아아아아아!"
침착하게 경기를 지켜보던 앨런 여사와 이성학 모두 벌떡 일어나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부모님을 봤던 걸까.
제퍼슨은 부모님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와 손으로 하트를 보내는 셀레브레이션을 펼쳤다.
190cm가 넘고 도저히 애처럼 보이지 않는 거인에 가까운 체격이지만.
두 부모의 눈에는 그저 사랑스러워 보였을 뿐이다.
***
[제퍼슨의 부모님이 경기장에 찾아왔군요.]
[하하하! 누가 봐도 제퍼슨의 부모님인 줄 알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체격 보세요. 제퍼슨의 피지컬이 어디서 왔나 했더니, 부친에게 물려받은 것이군요.]
[어머니인 앨런 여사는 육상 단거리 은메달리스트이고, 아버지인 이성학 씨도 한국 태권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네요. 대단합니다.]
중계화면에 비치는 이성학과 앨런 여사의 모습에 중계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봐도 대단한 체격의 이성학은 노련한 무도가의 분위기를 풍겼으니까.
제퍼슨의 그 말도 안 되는 피지컬이 누구에게서 왔는지 제법 이해가 된다는 눈치였다.
[스완지는 제퍼슨을 처음 만나죠.]
[수비진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습니다. 때로는 과격하고 미친 듯이 몰아치지만, 때로는 마치 유령처럼 아무도 못 알아차리게 수비진을 파고들죠. 제퍼슨의 움직임이 그러합니다!]
러닝백은 온몸을 무기라고 부를 정도로 단단하다. 그러나 매번 힘 싸움을 하진 않는다.
그랬다간 몸이 남아나지 않을 테니까.
제퍼슨은 미식축구보다 상대적으로 피지컬이 약한 축구선수 상대로는 힘 싸움을 피하지 않는 타입이긴 했다.
때로는 단순무식한 것이, 치밀하게 잘 짜인 수비조직력을 깨부수는데 엄청난 효과가 있으니까.
하나 오히려 조직적인 수비가 아닌 약간 헐거운 수비 상대로는 굳이 힘 싸움을 하면서 불도저처럼 밀고 나갈 이유가 하등 없었다.
그래서 제퍼슨이 선택한 건.
"잡아!"
"없어졌어!"
러닝백 특유의 급격한 방향 전환 무브먼트였다.
"Uwaaaaaaaaaaaaaa!"
중앙에서 공을 잡고 치고 들어가는 제퍼슨의 움직임은, 왼쪽 측면으로 틀었다.
그를 따라가던 수비의 무게 중심이 순간 흔들리며 무너졌다.
제퍼슨의 무서운 점은 순간적인 스피드.
정적인 속도에서 최대속도로 도달하는 딜레이 타임이 극도로 짧다는 것.
방향 전환하면서도 특유의 속도가 죽어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
"우와아아악!"
스완지의 풀백이 급하게 달려들어 옷깃을 잡아끌지만.
"크흡!"
반대 방향으로 또다시 전환하는 움직임에 관성으로 수비수는 나가떨어졌다.
순식간이었다.
중앙, 측면, 다시 중앙!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페널티 박스 안에 도착한 제퍼슨.
러닝백 특유의 움직임에 그간 갈고 닦은 테크닉을 보여 줬다.
툭, 툭!
팬텀 드리블로 최종 수비수를 무너뜨리는 순간.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감한 관중들은 반박자 빠르게 함성으로 응답했고.
뻐어엉!
슈팅이 작렬하는 순간.
"Yeaaaaaaaaaaaa!"
"제---프!"
함성과 동시에 골네트가 흔들렸다.
[엄청난, 엄청난 드리블 이후에 치명적인 쐐기골입니다!]
그 뒤로 제퍼슨의 슈팅이 몇 번 이어졌지만, 해트트릭이라는 운이 따르지 않았는지 경기는 2대 0으로 끝났다.
제퍼슨의 부모는 경기장을 쉽사리 떠나지 못했다.
그들이 가족인 걸 알아보고 접근해 오는 팬들도 있었거니와.
5만 명의 관중이 일제히 약속한 것처럼 기립해서 발을 구르기 시작한 것이다.
쿵쿵, 짝!
"You got grin on yo'face,"
"너는 웃게 될 거야."
"You big World class!"
"너는 위대한 월드 클래스!"
쿵쿵, 짝.
어쩌면 첼시팬들은 이걸 하기 위해 경기장에 온다고 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스탬포드 브리지만의 고유한 응원 장면.
쿵쿵, 짝!
"LEE Will, LEE Will Rock you!"
"LEE는 널 뒤흔들어 버릴 거야!"
"LEE WIll, LEE Will Kill you!"
"LEE는 널 죽여 버릴 거야!"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다.
그저 일어나 박자에 맞춰 발을 두 번 구르고 손뼉을 한번 치면 되니까.
오늘 경기장에 처음 온 사람들도 곧장 그 응원을 쉽게 따라 했고,
자연히 제퍼슨의 이름을 연호하는 목소리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아들이 잘살고 있는 거 같지?"
"그럼, 누구 아들인데!"
이성학과 앨런 여사는 마주 보며 웃었다.
< 143. 말하는 대로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