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이제 스무살 (4) >
스코어만 보면 막상막하다.
실제로 점유율에서도 모나코가 조금 앞섰다.
그런데도 관중석의 반응은 확연히 갈렸다.
첼시 팬들은 느긋하게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반면 모나코 원정팬은 초조한 기색으로 필드를 내려다 봤다.
[제퍼슨이 공을 잡고 전진합니다! 동시에 양쪽 날개가 뛰고, 지루가 내려와 미드필더를 견제합니다!]
지루와 제퍼슨의 호흡은 매끄럽다.
최근엔 타미와 우트와의 호흡을 주목하지만,
사실 제퍼슨과 지루의 트윈타워는 이전부터 위력적인 것으로 정평이 났다.
높은 활동량으로 수비형 포워드에 가깝게 움직일 수 있는 지루와 펄스나인 역할에도 절정의 능력을 보여 주는 제퍼슨은 순간적인 스위칭으로 수비진을 분열시켰다.
"제기랄!"
공간을 만들고, 침투하고.
[방금도 위협적인 슈팅이었습니다! 에데르손 골키퍼! 간신히 쳐 냈습니다!]
[모나코의 원정팬, 손톱을 물어뜯고 있네요. 하베르츠의 움직임이 적극적으로 변하면서 주도권이 첼시에게로 넘어갑니다!]
모나코는 기적을 바랐다.
이 원정경기에서 승점 3점을 따내지 못한다면 16강은 포기해야 했으니까.
챔피언스리그는 오래 살아남을수록, 그리고 더 높이 올라갈수록 무조건 이득인 대회다.
하지만 그들의 염원이 이뤄지는 건 쉽지 않았다.
[제퍼슨 리가 공을 받고, 내주고, 냅다 뜁니다!]
등진 채 공을 받고, 왼쪽 측면으로 달려가는 우트에게 찔러준 뒤 달려나가는 제퍼슨 리.
모나코의 수비들 얼굴이 노랗게 질렸다.
"도대체 누굴 막아야 해!"
미칠 지경이다.
제퍼슨의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은 두 눈으로 쫓기에도 눈앞이 핑핑 돌 정도다. 환장할 지경이다. 거기에 지루의 묵직한 피지컬은 수비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고, 왼쪽과 오른쪽에서 부지런히 뛰고 또 뛰는 우트와 타미는 결코 방심할 수 없다.
모든 신경이 4방향으로 분산되니 집중력 있는 수비가 가능할 리가 있는가.
"공간을 지켜! 거리를 둬! 달려들면 다 벗겨진다!"
그나마 최선은 간격을 유지하면서 최대한 중거리슛으로 유도하는 것.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다.
제퍼슨이 어태킹 서드 지역에서 받은 공을 침착하게 뒤로 힐패스로 보내 줬고,
다소 내려와 있던 지루가 조금 먼 거리에서 중거리 슛을 때려 박았다.
[Gooooooal! 지루가 이번 시즌 첫 득점을 올립니다!]
"제기랄!"
"미친 새끼들!"
모나코 수비들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지루가 떨어뜨려주는 볼! 제퍼슨 침착하게 잡고, 왼쪽으로 파고드는 마크 우트! 우트! 우트! 우트가 해결 짓습니다!]
마크 우트의 쐐기골이 터지고.
[마크 우트 반대편으로 공을 전환합니다! 타미 아브라함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그대로 다이빙 헤더! 세상에! 엄청난 골입니다! 첼시, 4대 1로 모나코를 박살 냅니다!]
끝내 스트라이커 네 명 모두 득점을 터뜨리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필마르크 감독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축구는 이래야지! 암! 보라고! 내가 틀렸다고? 결과를 보고 더 지껄여 보란 말이야!"
***
시골에서 올라온 믹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런던까지 왔지만 스탬포드 브리지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우선 표가 너무 비쌌던 게 가장 큰 이유였고, 그마저도 매진돼서 구할 수 없는 지경이었으니까.
경기장 바깥까지 들려오는 응원가가 가슴을 쿵쿵 뛰게 했다. 너무나 아쉬웠다.
"보고 싶은데."
믹스는 태생적으로 몸이 약한 아이였다. 병원 신세를 오래졌다. 일반 아이들처럼 밖을 뛰어놀지도 못했다.
"그럼 여기서 기다렸다가 얼굴이라도 보고 갈까?"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가 안쓰럽게 말했다.
경기까지 보여 주고 싶었지만, 현장 발권표는 순식간에 매진됐다. 암표라도 구해 보려 했지만, 가격이 너무 비쌌다. 빈곤층에 가까워 믹스의 병원비 대는 것도 힘든 어머니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믹스가 최근 기운을 차린 건,
그 선수 때문이다.
TV에서 나온 제퍼슨의 무지막지하고, 터프한 활약상.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믹스는 그 모습을 보고 반했다. 자신도 저런 선수처럼 건강하고 강해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 런던까지 왔건만, 얼굴도 못 보고 가는 건 애한테 너무 아쉬울 거 같았다.
"응! 기다릴래!"
믹스는 엄마의 손을 잡고 선수들이 나오는 통로에서 기다렸다.
운이 좋으면 버스에 타기 전에 사인이라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경기가 끝났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믹스는 통로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윽고 팬들도 그 통로로 몰려들었다. 각자 유니폼을 꺼내 들고 선수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한 기색의 선수들이 한 명씩 나왔다.
몇몇은 반가운 기색으로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긴 했지만.
대부분 선수는 곧바로 버스에 올랐다.
경기가 끝난 직후에는 극심한 피로가 몰려오니까, 섭섭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데 믹스는 끈질기게 기다리다가 제퍼슨의 모습을 보이자 목이 터지라고 소리쳤다.
"제-프! 제-프! 제-프!"
급하게 종이에 꾸깃꾸깃 쓴 제퍼슨의 이름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하나, 워낙 많은 팬이 몰려들었고 거기에 가려져 믹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던 탓일까.
제퍼슨은 손을 흔들며 버스로 향했다.
"아."
믹스는 탄식했고, 어머니도 어쩔 줄 몰라하며 울먹거리는 믹스를 위로했다.
"제프! 여기 꼬마 팬이 울고 있어! 와서 한번 안아 주지그래!"
목소리가 걸걸하고 수염이 덥수룩한 한 남성 팬이 그렇게 소리쳤다. 믹스 옆에서 계속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가 어떤 상황인지 대충 눈치채고 큰 목소리로 외친 것이다.
다행히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제프는 멋쩍게 웃으며 다가왔다.
"이런. 우리 꼬마가 왜 울고 있을까. 이름이 뭐야?"
"믹스, 믹스에요. 제프!"
"좋아. 믹스. 내가 미처 못 보고 지나간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유니폼에 사인을 해 줄까 하는데? 괜찮을까?"
그러자 울먹거리던 믹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제퍼슨은 웃는 낯으로 자신의 유니폼을 꺼내 줬다.
"세계 최고 스트라이커에요! 제프!"
"하하하. 고마워."
제프는 그 소리가 썩 기꺼운지 웃었다.
유니폼에는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가, 믹스에게'라고 적혀있었다.
"앞으로도 세계 최고에 걸맞게 멋진 모습 보여 줄게."
"네, 제프!"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지루가 먼저 다가와 자신의 유니폼을 꺼내 주며 사인해 줬다.
"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최고인 스트라이커의 유니폼이야."
그러자 우트와 타미도 황급히 다가왔다.
"세계 최고 스트라이커와 가장 호흡이 좋은 스트라이커의 유니폼이지, 이건."
"그러면 이거는 가장 친한 친구란다. 꼬마야."
꽤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믹스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저 고맙다면서 고개를 숙였다.
"음. 세계 최고 감독의 사인은 필요 없니?"
뒤늦게 나온 필마르크 감독의 출현에 믹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마, 이 사람은 누구야?"
그 천진난만한 말에 버스에 오르던 선수들도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감독님,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은 들어 올리셔야 하겠네요! 아직 택도 없습니다!"
"빌어먹을! 꼬마야. 여기 다음 경기 티켓이다. 꼭 와서 이 아저씨가 누군지 똑똑히 보고 가렴!"
필마르크는 그렇게 티켓을 건네주곤 웃으며 버스에 올랐다.
경기의 승리는, 때론 깐깐한 사람도 한없이 자비롭게 만드는 법이다.
***
[첼시, 홈에서 AS 모나코를 4대 1로 깨뜨리고, 챔피언스리그 G조 1위!]
[제퍼슨 리 1골, 올리비에 지루 1골, 타미 아브라함 1골, 마크 우트 1골! 스트라이커 포지션 전원 득점!]
[첼시 감독, '스트라이커는 골을 넣어야 한다. 우리 팀 스트라이커들은 그 본분에 충실했다. 그들을 위해 희생한 미드필더와 수비수들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함께 보낸다.']
[오랜만에 챔피언스리그에 복귀한 첼시, 16강 초록불!]
[제퍼슨 리, 챔피언스리그 3경기 6득점으로 리오넬 메시와 산티아고 차베즈를 제치고 득점 순위 1위.]
**
리그컵에서 일찍 탈락한 게 우리에게 꽤 좋은 결과를 낸 거 같다.
리그와 챔피언스리그만을 병행하는 데에도 3~4일 간격으로 한 경기가 치러지는 판이다.
여기에 리그컵까지 겹쳤으면 끔찍했을 것이다.
어찌 됐든 그간 우리는 부상자도 발생했지만, 이제 완벽체다.
캉테는 완벽하게 회복했고, 스토크전에서 다쳤던 올리버 역시 깔끔하게 복귀 완료.
체력적으로 지친 선수도 저번 시즌과 달리 아직 없다.
저번 시즌에는 프리시즌부터 체력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벌써 지친 선수들이 몇 있었으니까.
리그는 10승 1패.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3연승.
최대한 승점을 쌓아야 한다.
이제 박싱데이가 찾아오면 끔찍할 테니까.
유로파와 박싱데이를 병행하는 것보단, 챔피언스리그를 병행하는 게 심적으로 더 부담되지 않은가.
"헤이, Bro.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우트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찾아왔다.
"뭐가?"
"월드 베스트에 네가 빠졌어!"
"그런가 보지, 뭐."
"뭐라고? 말이 안 되지! 너만 한 스트라이커가 세상에 어딨다고 월드 베스트에서 빠져?"
"흠."
사실 내가 화를 내는 게 맞는 일인데, 우트는 내가 빠졌다는 게 본인이 더 화가 난 얼굴이었다.
우트는 입 다물고 조용히 있으면 꽤 남자다운 분위기를 풍기는 친구다. 그런 녀석이 대놓고 표정을 일그러뜨리니 꽤 험악한 분위기가 됐다.
"진정해. 어차피 월드 베스트는 인기투표라는 비난도 있잖아."
"그래도 그렇지. 작년에 60골을 때려 박은 네가 없다는 게 말이 돼?"
"그렇긴 한데."
오늘 피파에서 여러 수상자를 발표했다.
피파 월드 베스트 일레븐과 피파 올해의 선수, 그리고 푸스카스 상을 발표했다.
올해의 선수는 라리가와 챔피언스리그 더블을 만들어낸 리오넬 메시가 수상했다. 여기엔 이견이 없다. 대부분 동의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나는 이 나이에서 빅클럽에서 25골 이상을 넣었다. 유감이다.']
다만 자존감이 너무 강한 한 선수의 인터뷰 때문에 약간 설왕설래가 있었을 뿐이지.
문제는 월드 베스트다.
매년 발표 때마다 '인기투표 아니야? 어떻게 얘가 들어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논란이 가중되는 발표이긴 한데.
이번에도 당연히 논란이 생겼다.
나와 캉테가 빠졌다는 점이다.
"선수들이 투표하는 방식이니까."
"질투일 수도 있고."
논란의 중심에 내가 서게 됐다.
사실 월드 베스트를 못 받은 게 화가 나거나 하진 않는다.
어차피 발롱도르나 올해의 선수에 비교하면 그저 커리어에 한줄 추가하는 것에 그칠 뿐이다.
그래서 별로 신경 안 썼다.
푸스카스 상을 받은 것에 만족했다.
아, 이건 지루가 다소 질투했다.
"내 스콜피온 킥이 4위라는 게 믿기지 않아."
유로파 결승전에서 보여 준 스콜피온 킥이 4위로 밀린 게 아쉬운가 보다.
하여간 푸스카스상도 받았고, 난 월드 베스트에 뽑히지 않은 걸 그닥 개의치 않았다.
시상식장에서 기자한테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지.
"월드 베스트에 뽑히지 못했습니다. 일각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스트라이커라는 말과 다르게 말이죠. 어떤 심정이신가요?"
말을 할 때 표정과 어조를 잘 살펴야한다.
아무리 좋은 말이어도, 어떤 식으로 하냐에 따라 느껴지는 감정이 다르거든.
그걸 생각하면, 저 기자의 질문은 온갖 악의로 가득 차서 훅 들어왔다.
흠.
저번에 본 적 있다. 맨유하고 경기할 때, 몇 번 성가신 질문을 하던 기자다. 듣자하니 맨유팬이라던데.
"그다지 개의치 않습니다. 월드 베스트에 뽑히지 않았다고 해서, 제가 넣은 시즌 60골이 어디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내가 날선 반응을 보이자 기자들이 눈을 반짝였다.
"뭐, 챔피언스리그에서의 활약이 더 중요한 건 알고 있습니다. 유로파 우승이 아니라 챔피언스리그 우승이었다면 월드 베스트는 여기서 논할 얘깃거리도 아니었겠죠."
흠. 그냥 생각나는 대로 얘기했다.
"시즌 60골을 넣고 스트라이커 포지션에 못 뽑혔으니, 사실 좀 막막합니다."
"무슨 의미이신가요?"
"이번 시즌은 80골을 때려 박아야겠단 생각이 먼저 드니까요."
키보드를 두드리던 기자들이 일순 멈춘다.
"이번 시즌 리그에서 50골을 넣고, FA컵에서 10골을 넣고, 챔피언스리그에선 20골을 넣어 보죠."
여기저기서 헛웃음이 터졌다.
흠. 이것들이 사람을 못 믿네.
"그러면 월드 베스트에 뽑혔니, 안 뽑혔니로 논란이 생기겠습니까?"
축구선수가 실력을 증명하는 건 간단하다.
완벽한 결과로 그냥 찍어 누르면 그만이다.
"트레블을 달성하고 내년 이 시점에 여기서 만나죠. 아마 그때는 월드 베스트가 전부 다 첼시 선수로 채워진 것에 대해 논란이 생기고 있을 겁니다."
< 142. 이제 스무살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