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이제 스무살 (3) >
전설의 스트라이커 4명 선발 출전 경기를 내가 직접 볼 줄이야.
스트라이커 성애자란 별명이 붙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바이에른 뮌헨에서 이 짓거리를 했던 거 같은데.
당시 라인업이 뜨고 난리가 났던 적이 있다. 하필 그게 또 챔피언스리그 8강전인가 그랬거든. 아주 중요한 경기에서 감독은 그런 미친 짓을 했다.
문제는 그 네 명이 전원 득점을 올리는 쾌거를 올렸다는 것.
그 이후 그는 스트라이커 성애자란 별명과 함께 스트라이커란 포지션을 가장 완벽하게 이해하는 감독이란 찬사를 받았었다.
그게 여기서 시작될 줄이야.
뭐, 여러 이유가 있다.
"풀리시치가 경고 누적이야."
"오도이는 스토크전에서 다친 것 때문에 다음 경기부터 뛸 수 있어."
"페드로는 폼이 영. 마크 우트가 그 자리에서 뛰는 게 더 폭발적이잖아."
챔피언스리그에서 경고 누적으로 인해 풀리시치 출장 불가.
오도이는 부상.
그 자리를 대신할 레프트 윙 페드로는 명백히 주전 경쟁에서 밀렸다. 오른쪽의 윌리안도 시즌 초반에는 그 특유의 기복을 보여 주고 있어서 안심하고 출전시키기 어렵다.
"미친 감독이야."
하베르츠는 유난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하기야 미드필더 두 명이서 중원을 커버해야 한다.
그것만큼 어려운 일이 있겠는가.
"타미가 활동량이 많잖아. 충분히 잘 도와줄 거야."
"지금 전술 패턴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데."
타미는 활동량이 많다. 저번에 타미를 윙어로 썼을 때처럼, 중원 가담 역할을 더 부여할 확률이 높다.
그러나 감독은 그것마저 부정했다.
"그냥 전진해. 필요할 땐 내려와서 가담해 주는 것도 괜찮지만, 그건 타미. 네가 판단해라. 위치는 날개지만 넌 스트라이커야. 오케이?"
중원 가담을 덜 하라는 주문까지 하다니.
정말 스트라이커로서 쓰겠다는 건데.
"제프, 난 조금 이해가 안 돼."
"왜?"
"윙어로 뛰면서 스트라이커처럼 뛰라는 게 무슨 의미야?"
"음. 그냥 닥치는 대로 공격하란 얘기 같아."
"그러면 우리 중원이 힘들지 않을까?"
"힘들겠지."
이래저래 중원이 고통스럽게 됐다.
뭐 하베르츠는 그래도 감독의 지시라면 철저하게 이행할 거다. 다만 경기 내내 구겨진 표정이 펴지진 않을 듯하다.
"후우.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캉테는 체념한 얼굴이다.
그간 감독의 스타일을 완전히 파악했다.
"한번 정해진 건 쉽게 포기하지 않지."
"고집 있는 양반이야."
중원은 캉테와 하베르츠 조합이다.
오늘 가장 고통스러울 선수 두 명이다.
그리고 우트가 왼쪽, 타미가 오른쪽.
지루가 최전방에 서고, 내가 뒤에서 살짝 쳐진 모양새로 프리롤을 부여받았다.
"제프! 하고 싶은 거 다 해! 다만 두 골 이상은 넣고!"
***
챔피언스리그는 이변이 자주 발생하는 대회 중 하나다.
특히 본선인 아닌 조별리그에서는 더 그렇다.
클럽마다 리그 일정을 함께 치르다 보니 그런 경우가 종종 생긴다.
"리버풀이 2패로 무너지고 있어."
"AT와 PSG에 당했으니까."
리버풀이 죽음의 조에서 AT와 PSG에게 제대로 당했다는 건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변이라고 보기는 힘들지. AT와 PSG는 늘 우승권으로 뽑히는 팀이니까."
AT마드리드가 리버풀을 2대 1로 잡았을 때, 동점골과 역전 결승골을 넣은 산티아고가 잔뜩 흥분한 채로 나에게 전화했었다.
-내가 반 다이크를 제치고 골을 넣었다고!
그건 대단한 일이 맞다.
"물론 나는 작년부터 반다이크를 상대로 넣고 있긴 하지만, 일단은 칭찬해 줄게."
-하! 좋아. 너희도 보니까 되게 순항 중이던데?
"솔직히 너희처럼 죽음의 조는 아니야."
-그건 좀 부러워. 우리는 매 경기 신경이 곤두서서 미칠 지경이야. 감독이 죽일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면 몸이 떨린다니까.
시메오네 감독은 저런 식으로 동기 부여하는구나.
-하여튼 본선에서 보자고. 16강이든 8강이든 말이야.
"그래, 산티. 2승 했다고 기뻐하지 마. PSG하고 리버풀 상대로는 언제든 패배할 수도 있으니까."
-응! 너희 팀도 괜히 이변의 희생양 되지 말라고!
이변의 희생양이 되는 건 늘 경계해야 한다.
AS 모나코는 침착하게 필드 위에 올라섰다. 각오가 남다르게 느껴지는 표정이다.
AS 모나코는 현재 1무 1패.
여기서 우리에게 패배한다면 16강 진출은커녕, 유로파리그마저 꿈도 못 꿀 지경에 처할 터.
배수의 진에 몰린 팀이다.
그런 상태로 우리는 4톱이라는 모험수를 던졌다.
때론 많은 감독이 선수와 전문가, 그리고 팬들이 이해 못 하는 포메이션과 전술을 지시할 때도 있다.
"명장이냐, 아니면 그냥 괴짜냐."
그것으로 갈린다.
가령 맨유의 퍼거슨이 그렇다.
퍼거슨도 챔피언스리그에서 미드필더만 7명을 넣고 수비수를 한 명만 넣는 아주 괴상한 포메이션을 가지고 왔다.
결과는 어떤가?
당시 그 경기도 완벽한 승리를 가져왔다.
그런 경기가 한둘이 아니었다. 수비수만 7명을 넣고 아스날을 잡은 경기도 있었다.
그것에 비하면 스트라이커 4명을 선발로 내놓은 우리 감독은 귀여운 수준이지.
결과가 말해 줄 거다.
"이왕이면 명장으로 기억되면 좋겠어."
나에게 적잖이 도움이 되는 감독이다.
스트라이커로서의 움직임에 관해 이따금 툭 던지듯이 조언을 던지는데, 그게 내 플레이에 분명 영향을 미치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좋은 감독이다.
"내가 결과를 만들어 줘야지."
AS모나코는 4-3-2-1로 중원에 미드필더 세 명과 비교적 수비적인 윙어를 투입한 전술이다. 중원에서부터 힘을 꽉 준 포메이션이란 말이지.
"지---루!"
"지루! 지루! 지루!"
지루도 첼시에서 꽤 사랑받는 선수다.
첼시가 가장 힘든 시기를 겪을 때, 그 자리를 지켜 준 선수였으니까. 더구나 두 번의 유로파 우승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선수가 아닌가.
그가 아스날에서 왔다는 사실도 잠시, 이제는 첼시에서 사랑받는 선수가 됐다.
삐익!
휘슬이 울리고, 하베르츠는 침착하게 뒤로 공을 돌렸다.
그리고 우리는.
"뛰어!"
우트와 타미만 조금 처진 위치에서 올라올 뿐.
거의 다 전진했다.
자연히 공격진과 중원의 사이는 벌어졌다.
하지만 그래도 캉테가 있으니까. 또 하베르츠도 있으니까 잘해 줄 거다.
그런 믿음과 함께 경기가 시작된 지 10분쯤 지났을 때.
"집중해!"
4명의 미드필더가 순간적으로 하베르츠를 에워싸고, 공을 빼낸다.
그리고 단번에 공격진으로 이어지는 패스는 공격수가 침착하게 슈팅으로 연결했다.
철렁!
우리 쪽 골네트가 흔들렸다.
"······!"
이거.
망한 거 같은데?
***
원래 잘 나가는 팀에겐 갖은 시기가 따라붙기 마련이다.
작년에는 맨시티와 리버풀이 그러했고, 이번 시즌에는 첼시가 그렇다.
특히 첼시와 우승 경쟁을 펼치는 맨시티와 리버풀은 자기네 팀만큼, 첼시 경기 결과를 주목했다.
그뿐만 아니다.
런던의 온갖 라이벌 팀들 역시 마찬가지다.
리그하고는 상관없는 챔피언스리그라지만, 애당초 국가대항전 개념이 없는 게 이 바닥이다.
프랑스 팀이 첼시를 꺾는다고? 그러면 축배를 들어 올릴 잉글랜드 클럽이 한두 팀이 아니다.
[첼시 0 VS 1 AS 모나코]
ㄴ첼시가 잉글랜드 클럽 망신을 다 시키는군.
ㄴ뭐라고? 리버풀이 2패를 당했다고?
ㄴ오, 아스날! 도대체 챔피언스리그 어디에 있습니까?
ㄴ뭐라고? 맨유는 유로파에서 1승 1패라고?
ㄴ웃기고들 있네. 이건 솔직히 첼시가 자만했어. 모나코는 쉬운 팀이 아니야. 그런데 스트라이커만 네 명을 넣는다고?
ㄴ스트라이커 네 명이면 골이 4배로 터지는 줄 아는 바보가 감독인가 보군.
ㄴ오히려 서로 동선 꼬이고 슈팅 욕심내고 난리가 날 텐데 말이야.
ㄴ오케이. 다들 알겠어. 하지만 결과를 끝까지 보고 떠드는 게 어떨까?
ㄴ결과를 보자고. 제프가 뛰고 있어.
ㄴ제기랄. 제프가 만능열쇠라도 되는 것처럼 굴고 있어!
어떻게든 첼시의 패배를 바라는 라이벌팀들의 반응과 달리.
첼시팬들은 꽤 느긋했다.
선제 실점을 내주고 끌려가는 경기는 별로 없긴 했다. 지금 상황이 익숙한 건 아니다.
그래도 라인업에 제퍼슨이라는 믿음직한 존재가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 조급함을 버릴 수 있던 것이다.
[캉테! 미친 듯이 뜁니다! 캉테는 적어도 두 명 이상의 활약을 해 주네요!]
[하베르츠도 역시 날카롭습니다. 탈압박 능력은 물론, 이따금 찔러주는 패스는 위력적입니다!]
[다만 중원에서 숫자로 밀려 주도권을 쉬이 쥘 수가 없군요!]
캉테와 하베르츠는 기대 이상이었다.
고작 두 명이 AS모나코의 3명의 미드필더와 대등한 싸움을 하고 있으니까.
다만 오늘 모나코 선수들이 작정하고 승리를 위해 왔다는 걸 간과한 것이다.
본래의 능력보다 120% 이상 발휘하는 모나코 선수는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선제골을 집어넣었다.
"이럴 줄 알았지."
하베르츠는 미간을 좁혔다.
애당초 이런 말도 안 되는 포메이션과 전술이 어디 있는가.
이 경기는 패배하더라도 책임은 감독에게 갈 것이다.
온갖 손가락질과 욕을 먹겠지.
그뿐이다.
하베르츠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파트너로 출전한 캉테처럼 미친 듯이 날뛰면 기회가 더 생길지도 모른다. 한데 왜 그래야 하는가.
자신은 충분히 싸워주고 있고, 뛰고 있으며 기회가 생기면 여지없이 공을 찔러주고 있다.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하베르츠는 묘하게 계속 신경 쓰였다.
"······."
최전방에서 미친 듯이 뛰면서, 압박도 하고 또 패스를 받기 위해 뛰어드는 제퍼슨의 움직임이 눈에 밟혔다.
공이 오지 않아도 측면을 뛰고 또 뛰며 공격을 위해 헌신하는 우트와 타미도 시야에 들어왔다.
최전방에서 끊임없이 뛰어올라서 공중볼을 따내기 위해 노력하는 지루도 보였다.
"대체 축구가 뭐라고."
딱 제 역할만 하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대체 그 이상이 뭐라고 왜 저리 열심히 한단 말인가.
하베르츠는 고개를 돌려 벤치를 바라봤다.
노심초사하는 션 올리버가 보였다.
"저 자식도 이상해졌어."
그는 올리버와 의외로 공감대가 있었다.
축구란 단지 직업적인 것에 제한한다는 것.
물론 올리버는 그것조차 다 하지 않고 딴 길로 샜었지만, 축구에 관한 열정을 쏟아붓지 않는 점에서 비슷했다.
하나 그런 올리버도 바뀌었다. 스토크전에서 부상당하고, 더 경기 뛸 수 없단 사실에 분노하는 그 모습에서 하베르츠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제기랄."
그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툭, 툭!
그리고 가볍게 공을 몰고 드리블을 시작했다.
[하베르츠! 패스하지 않고 직접 공을 몰고 들어갑니다!]
정적으로 움직이며 패스만 찔러주던 하베르츠의 순간적인 돌파.
모나코의 미드필더가 움찔했지만 이내 빠르게 달려들어 강하게 압박했다.
[아! 첼시에서 뛰었던 바카요코의 위험한 태클! 하베르츠, 비틀거리지만 끝까지 볼을 지켜 내고 달립니다!]
첼시에서 뛰었고 다시 모나코로 복귀했던 바카요코의 다소 위험한 태클.
하베르츠는 그 태클에 비틀거리면서도 공을 포기하지 않았다.
태클을 버텨내며 전진하자, 순간적으로 압박이 더 강해졌다.
하나 미드필더 한 명에게 압박이 강해진단 건, 다른 동료들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무려 공격수만 네 명이다.
네 명의 스트라이커가 박스로 파고들자, 수비수들이 우왕좌왕했다.
'누굴 커버해야 해?'
하베르츠에게 몰린 압박. 그리고 그 엄청난 압박에 팔꿈치가 가슴을 찍고 어깨가 밀쳐졌지만, 하베르츠는 이를 악물고 압박을 이겨 냈다.
우아하고도 아름다운 움직임으로, 그는 표정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이겨 낸 것이다.
"제기랄!"
그리고 그의 눈이 번뜩였다.
새하얀 길이 보였다.
여기로 공을 보내면, 잡는다!
무려 그 길이 세 개나 보였다. 세 명의 스트라이커에게 보내 줄 수 있는 패스 경로가.
'그래. 이 정도까지만 하자.'
하베르츠는 그렇게 생각했다. 평소보다 더 열정적으로 뛰자. 딱 이 정도까지만 해도, 충분하지 않겠나.
투욱!
[하베르츠의 스루패스가 공간을 가르고 들어갑니다! 제퍼슨이 번개처럼 튀어나옵니다! 달려드는 수비수들을 어깨로 이겨 낸 제-퍼슨! 제퍼슨 리! 공을 침착하게 밀어 넣습니다! 동점입니다! 동점!]
제퍼슨은 동점골을 넣고 하베르츠에게 달려와 강하게 끌어안았다.
"나이스 패스! 좋았어! 카이!"
그때 왠지 모르게, 하베르츠는 온몸에 희열이 넘쳐흐르는 걸 느꼈다.
미친 듯이 환호하는 관중과 달려드는 동료들의 땀 냄새까지.
평소라면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다르게 느껴졌다.
어쩌면, 올리버의 바뀐 모습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벤치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던 필마르크는 웃었다.
스트라이커 네 명을 다 함께 출전시키는 모험수.
그것이 가능한 건 중원에서의 캉테의 압도적인 장악력과,
하베르츠라는 천재성을 믿었기 때문.
그 천재성에 어느 정도의 열정이 조금만이라도 가미된다면?
"자, 이제 판 뒤집혔고."
감독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필드를 바라봤다.
자신의 축구 인생에서, 이 팀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온갖 기대가 실린 눈빛으로.
< 141. 이제 스무살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