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이제 스무살 (2) >
맨시티의 축구는 딱히 이렇다고 정의할 수가 없다.
펩 과르디올라는 전술의 천재다. 고로 언제든 변칙적인 전술을 가지고 온다.
때문에 우리 감독은 많은 고민을 했다가 결국 가장 쉬운 방법을 선택한 것 같다.
"빠르고 간결하게! 측면 공략하고! 크로스 올려!"
맨시티는 오늘 더블 볼란테(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포백을 보호)를 준비했다.
로드리와 페르난지뉴가 4-2-3-1에서 '2'의 역할을 맡아 철저하게 틀어막은 것이다. 촘촘한 압박이 거셌다. 우리는 다이렉트 패스로 공략하지 않고,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대등했다.
"간결하게! 짧게 유지해!"
카이 하베르츠라는 천재적인 미드필더가 있으므로 가능했다. 상대팀에는 케빈 데 브라이너가 있어서 이런 싸움은 우리가 늘 밀렸지만, 이제 캉테와 하베르츠, 그리고 돌격대장 마운트가 있다.
까짓 붙어볼 만하다 이거였다.
"Yeaaaaaaaaaa!"
중원에서부터 거세게 들어오는 더블 볼란테의 압박.
그런 압박을 하베르츠와 마운트가 간단하게 원투패스로 풀어내자 순간적으로 함성이 울린다.
"저 자식 놓치지 마!"
그리고 나는 오른쪽 측면으로 내달렸다.
나에게 달라붙은 스톤스가 멈칫거린다.
"제기랄!"
날 따라올 것인가, 위치를 지킬 것인가.
하지만 측면에 있던 마크 우트가 스위칭하며 안쪽으로 파고들자, 그쪽으로 붙는다. 대신 나에게는 진첸코가 달라붙었다.
"Hello."
"닥쳐!"
인사를 했는데 돌아오는 건 욕설이라니.
이건 좀 너무한데.
"한국에 이런 말이 있어."
"뭐?"
"가는 게 고와야 오는 게 곱다."
"닥치라고!"
"응. 넌 좆 된 거야."
내 말에 진첸코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때 맞춰, 짧은 패스로 압박을 피해 내던 하베르츠가 순간적으로 오른쪽 측면으로 긴 스루패스를 찔렀다.
타앗!
진첸코의 반응속도 역시 빨랐다.
스루패스가 찔러지는 순간에 거의 나와 동시에 반응했다. 곧바로 몸을 틀고 패스를 향해 냅다 달린다.
다만 그의 약점은 위치선정이 썩 좋은 편이 아니라 뒷공간을 내주는 틈이 많다는 것이다.
방금도 그랬다. 나와 괜히 신경전을 벌이느라 너무 가까이 붙어있던 터. 그게 실수였다.
"제기랄!"
순식간에 그를 제치고 뛰어 들어가 공을 잡았다.
레프트 백이 털렸다. 남은 건 텅텅 빈 공간이다. 앞으로 쭉쭉 밀고 나갔다. 중앙으로 붙었던 스톤스가 재빠르게 달려온다.
"제프!"
우트가 내 이름을 외치며 안쪽으로 파고든다.
마크 우트는 기민했다. 기본기가 충실하다 보니 언제 어디서든 공을 받아도 충분히 트래핑해 낸다.
스톤스와 순간적으로 거리가 벌어지는 틈을 노려, 그에게 짧은 대각선 패스를 보냈다.
"저 자식을 막아!"
맨시티 골키퍼의 외침은 허망했다.
내가 측면에서 드리블 돌파로 몇 번 공략하는 모습을 떠올렸는지, 수비들이 모두 멈칫거리는 순간에.
우트는 비교적 여유롭게 공을 트래핑해 내는 데 성공했다.
분데스리가에서 잔뼈가 굵은 스트라이커다.
매 시즌 두 자릿수 득점을 올려 주는 착실한 공격수.
공격수에게 슈팅은 마지막 패스라는 격언이 있다.
우트에게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격언이다.
왜냐면.
투웃!
"······!"
저 자식은 득점기회에서 슈팅이 아닌, 나에게 패스를 하거든.
발뒤꿈치로 뒤로 내주는 깔끔한 힐패스.
그리고 그쪽으로 침투하던 나는 달려가던 관성 그대로 인프런트 킥을 때렸다.
뻐어엉!
기가 막힌 궤적으로 감겨 들어가는 슈팅.
맨시티 골키퍼는 차마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그 궤적을 따라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Yeaaaaaaaaaaaaaaaaaa!"
"Goal! Goal! Goal! Goal!"
"제프 골! 제프 골! 제프 골!"
중원에서 치열하게 이어지던 싸움이,
순간적인 스피드와 패스 한 번에 뚫렸다.
이 속도감과 쾌감이 관중들을 미치게 했다.
그들이 날 좋아하는 이유다.
"제프!"
우트는 헤실헤실 웃으며 다가왔다.
"솔직히 말해봐. 하베르츠의 패스보단 내 패스가 호흡이 더 잘 맞지?"
"넌 스트라이커야, 우트. 거기선 슛을 했어야지."
"하베르츠랑 밥 한번 같이 먹었다면서? 패스 잘해 주니까 그런 거 아니야?"
뭐지.
이건 질투인가.
***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행복한 팬을 뽑으라고 하면, 첼시팬들은 망설임 없이 소리칠 거다.
"우리지!"
"이게 축구야!"
제퍼슨 리는 첼시 아카데미 출신이 아니지만, 첼시 팬들에게는 여러모로 특별한 의미였다.
9번의 저주를 깬 것부터 시작해서 두 번째 시즌까지 골 폭격을 멈추지 않는 폭발적인 득점력까지.
"Yeaaaaaaaaa!"
심지어 나이도 어리다.
이제 스무 살이다.
스무 살에 리그의 모든 팀이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리고 두려워하는 괴물이 됐다.
"드록바? 아자르? 오! 미안하군!"
"이젠 그들이 그립지가 않아!"
팀의 레전드들이 그립지 않다는 건,
지금이 무척 만족스럽다는 방증이었다.
그랬다.
첼시 팬들은 지금이 만족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제퍼슨은 어린 선수였지만 뛰어나고, 대단하며 치명적이다. 이 선수가 클럽에서 이룩해 낼 수 있는 미래는 찬란하지 않겠는가.
꾸준한 활약?
아니다.
그냥 미친 활약이다.
"그가 없으니 답답했어. 하지만 돌아오자마자 속이 시원해!"
타 팀이 보면 어이가 없는 말이다.
타미 아브라함은 잉글랜드 차세대 스트라이커였고, 마크 우트 역시 경기마다 공격 포인트를 찍어 주는 아주 우수한 자원이다.
다른 팀에 갔으면 늘 붙박이 주전이 가능한 선수들.
그런 선수들이 답답하다니.
하지만 제퍼슨의 플레이를 보면 일견 이해가 될 수밖에 없다.
뻐엉!
캉테가 아주 깔끔한 태클로 데 브라이너의 공을 차단한 후, 하베르츠에게 패스.
하베르츠는 유려한 움직임으로 페르난지뉴를 속여 넘기고 단 한 번에 대지를 가르는 패스를 쏘아 보냈다.
"제프 골! 제프 골! 제프 골!"
팬들이 일제히 제프와 골을 외쳤다.
패스가 쏘아짐과 동시에 제퍼슨은 냅다 달렸다.
굵은 허벅지에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힘이 필드를 박찼다.
수비수가 먼저 패스를 끊기 위해 움직였지만, 늘 앞서는 건 제퍼슨이었다.
"누가 저 자식 다리를 좀 부러뜨려!"
수비수들의 압박은 당연히 쏟아진다.
하나 제퍼슨은 오로지 피지컬로 경쟁한다는 이미지와는 달리, 기술적인 면에서도 천부적인 선수였다.
상체를 미묘하게 뒤틀어 수비수의 무게중심을 역이용했고, 그러면서도 발을 빠르게 놀려 순간적인 팬텀드리블로 수비라인을 무너뜨렸다.
[제퍼슨의 화려한 무브먼트! 치명적입니다! 아주 치명적이에요! 팬텀드리블로 가볍게 상대를 속여 넘깁니다!]
그러면서도 딜레이가 없다. 허벅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스피드는 전혀 죽지 않았다. 수비수들이 도통 수를 쓸 수가 없는, 그야말로 완벽함 그 자체였다.
놀라운 건 그가 스무 살이라는 사실이고.
리그 최강으로 군림한 맨시티의 수비진이 또 한 번 농락당했단 사실이다.
뻐어엉!
무지막지한 속도와 다른 선수와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힘이 실린 임팩트가 그대로 공에 작렬했다.
흡사 공이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은 소리를 내며.
맨시티의 골문을 허물어 버렸다.
"제----프!"
"제프 골! 제프 골! 제프 골!"
제퍼슨은 웃으며 손가락 두 개를 펴 올렸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손가락 하나를 다시 한번 폈다.
해트트릭을 기다리라는 신호.
스탬포드 브리지를 가득 메운 5만여 명의 관중이 일제히 일어나 땅을 구르고 손뼉을 쳤다.
"LEE Will, LEE Will Kill You!"
늘 그렇듯이.
스탬포드 브리지에서 볼 수 있는 장관이었다.
***
최고의 감독이란 어떤 것일까.
기기묘묘한 전술? 완벽한 선수단 관리? 하프타임의 기적을 만들어 내는 동기부여?
그 모든 걸 고려하면, 펩 과르디올라는 최고의 감독 중 하나일 거다.
방금도 그렇다.
전반전에 두 골을 먹여놓고, 침착하고 치가 떨리도록 냉정한 모습을 보여 줬다.
그의 지시에 세계적인 선수들은 기계적으로 철저하게 따랐고, 끝내 두 골을 뽑아내며 동점을 만들어 냈다.
[케빈 데 브라이너의 추격골과 동점골이 5분 간격으로 터져버립니다! 대단합니다!]
우리 수비진이 좋긴 하지만, 순간적인 전술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우리 감독은 조금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그는 최고의 감독 중 하나다.
스트라이커 활용에 있어선 천부적이다.
지루가 그 나이에 유로파 득점왕을 차지하고, 타미와 마크 우트가 윙어 포지션과 쳐진 스트라이커로 활용되는데도 꾸준히 공격 포인트를 착실히 올리는 건.
극단적으로 스트라이커 위주로 전술을 짜는 필마르크 감독의 영향이다.
그리고 지금 또 한번. 나에게 순간적인 기회가 온 이유였다.
"제퍼슨에게 기가 막힌 패스를 보내!"
감독님의 어처구니없는 지시였지만,
그 지시를 누구보다 철저하게 이행하는 기계 같은 놈이 있다. 하베르츠라고, 알지 모르겠다. 아마 몇 년내로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명이 될 선수다.
마치 내가 어떻게 뛸 것인지 예측하는 것 같다.
수비수를 등지자, 하베르츠가 눈을 빛냈다.
여기서 어떻게 줄까?
그저 등진 채 공을 받을 수 있게끔?
그 정도만 해도 훌륭한 패스지.
하지만 하베르츠는 그 위의 클래스다.
적어도 맨시티의 데 브라이너 수준은 아니지만, 그에 근접할 잠재력을 지닌 선수다.
'왼쪽!'
내 몸이 살짝 기우는 걸 본 것이 분명하다.
하베르츠는 짧게 주는 패스가 아니라, 내 왼쪽으로 스핀을 먹이며 휘어지는 궤적으로 패스를 보냈다.
여기서 등진 수비수의 무게중심을 밀어내면서.
간단하게 몸을 왼쪽으로 틀면 된다.
그러면 날 막은 수비수는 무너지고, 내 발끝엔 공이 걸린다.
지금처럼.
하면 뭐가 문제겠는가?
골문과의 거리는 20m 정도.
충분하다.
뻐어엉!
해트트릭은 언제나 짜릿하다.
"시발!"
수비수가 가장 크게 좌절하니까.
***
필마르크 감독은 경기가 끝나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알게 모르게 그에게 들어오는 압박이 있었다.
구단주는 저번 시즌보다 훨씬 간섭이 심해졌다.
'리그를 다시 제패하고, 챔피언스리그까지!'
평범한 식사자리에서도 저 말을 늘 했다.
그로서는 격려라고 하는 것이겠지만, 받아들이는 감독 입장에선 답답한 일이다.
리그가 어디 쉬운가? 맨시티와 리버버풀이 언제든 1위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데.
그 외에 중하위권팀에게도 언제든지 덜미를 잡힐 수 있는 게 프리미어리그 아닌가?
챔피언스리그는 어떡하고? 거긴 유로파와는 차원이 다른 무대다.
하지만 지금. 필마르크 감독은 그 압박감을 모조리 벗어던져 버렸다.
미친 듯이 소리쳤다.
"로만 구단주보고 닥치고 경기나 보라고 해! 내가 저 자식들 데리고 리그하고 챔피언스리그, FA컵까지 아예 트레블을 들고 갈 테니까!"
물론 그 말을 전해 들은 로만 구단주는 쿨하게 반응했다.
"그건 당연하지. 제퍼슨이 있잖아?"
***
"후. 다이어트가 정말 힘들었어."
드디어 지루가 복귀했다.
사실 리그 7라운드쯤에 복귀하긴 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서인지, 한번 체중이 불어나자 그걸 줄이기가 매우 어려웠나 보다.
하긴 나이가 나이인지라.
오히려 저 나이에도 활약하는 걸 칭찬해 줘야 한다.
"다음 경기는 모나코니까. 내가 박살 내주겠어."
"모나코가 쉬운 상대는 아닌데."
"내가 리그앙에서 뛰던 시절, 모나코는 그저 그런 팀이었지. 나에게 수도 없이 짓밟히던 팀이야. 보여 줄게, 제프."
지루는 여전히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글쎄, 아마도 선발은 나일 것 같은데.
잠깐만, 저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걸 보니까 감독에게 선발 약속을 받은 것 같은데?
내가 빠질 것 같진 않고.
경기 이틀 전.
확정된 포메이션에 맞춰 훈련에 들어갔을 때.
나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4-2-4?"
"뭐 이거야 그렇다 치는데."
"왜 라인업에 4명이 스트라이커야?"
왼쪽 윙어 자리에 마크 우트.
오른쪽 윙어 자리에 타미 아브라함.
그리고 중앙에 나와 올리비에 지루.
포메이션을 확인한 선수들이 모두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감독이 다가와 기쁜 낯으로 소리쳤다.
"내가 가장 꿈꿔왔던 이상적인 포메이션이야! 스트라이커만 네 명을 넣을 수 있다니!"
최고의 감독이란 건 취소하겠다.
그냥 스트라이커에 미친 감독인 것 같다.
< 140. 이제 스무살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