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 분노조절잘해 (2) >
챔피언스리그 경기는 주중에 치른다. 리그 경기는 주말에 있다.
챔스 경기가 있는 주에는, 그 주에만 3경기를 뛰는 게 일반적이다.
아무리 로테이션을 싫어하는 감독도, 로테이션을 돌릴 수밖에 없는 여건이다.
특히 현재 중원에서 힘이 약해진 우리로서는 그게 필수적이다.
"초반 일정이 그야말로 행운이군."
말 그대로였다.
갈라타사라이전 직후 만난 사우스햄튼은 리그 16위에 머무르고 있는 팀이었다.
리그 초반 끔찍한 일정을 보내고 있는 팀.
초반부터 토트넘, 아스날, 리버풀, 맨시티를 상대하다가 강등권 코앞까지 처박힌 팀이었다.
힘든 시기가 찾아온 팀이었다.
"막아! 막으라고!"
오랜만에 출전한 윌리안이 오른쪽 측면을 초토화하면서 올리는 러닝크로스.
"젠장!"
"너무 빨라!"
"그냥 갖다 박아!"
나는 있는 힘껏 달렸다.
수비수 한 명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엉켜 왔다.
공을 걷어 내는 것이 아닌 몸으로 부딪치는 거친 수비.
사실 이건 PK로 볼 수도 있다. 내가 무너지면 말이다. 다만 요즘 심판은 나에게 PK를 잘 불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내가 워낙 몸싸움에서 잘 버티니까, 액션이 과한 거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냥 확실하게 넣어버리는 게 낫다. 그게 마음 편하다.
후웅!
아주 절묘하게, 나에게 달라붙은 수비수의 상체를 지지대 삼아 가볍게 뛰어올랐다. 상대의 무게 중심을 이용하는 점프였다.
날아온 크로스가 이마에 닿았다. 먼저 달려온 수비수와 뒤늦게 뒤에서 압박하는 수비수는 몸싸움으로 날 저지할 수 없었다.
터엉!
제대로 맞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강력한 헤더가 골키퍼가 차마 반응하기도 어려운 속도로 내리꽂혔다.
"Yeaaaaaaaaaaaaaaaaa!"
"제-퍼-슨!"
스탬포드 브리지는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늘 축제였다.
폭죽이 터지고 풍선이 하늘을 날아오르고.
쿵쿵, 짝!
"LEE Will, LEE Will Rock you!"
노래를 부르는 축제의 현장.
그리고 그런 노래를 지휘하는 지휘자처럼, 팬들 앞에서 양손을 흔드는 지휘자 셀레브레이션을 펼쳤다.
**
"리그 7연승을 달리고 있는 첼시의 기세가 어마어마합니다!"
"제퍼슨 리는 출장한 리그 6경기에서 모두 득점을 올려 주고 있죠. 부상으로 휴식한 웨스트햄전을 제외하고 모든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 중입니다."
"폭발적인 득점력입니다! 문제는 이 선수가 이제 20살이 되기 전까지 딱 한 달 남은 선수라는 것이죠."
"프리미어리그뿐만 아닙니다! 챔피언스리그에서도 2경기 4골을 기록 중이죠."
"바야흐로 제퍼슨 리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지금껏 프리미어리그를 지배한 수많은 EPL의 왕들이 존재했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죠. 저는 프리미어리그만 20년째 보고 있는데. 지금의 제퍼슨 리는 사자심왕 리처드1세나 다름없는 존재입니다!"
물이 올랐다. 시즌 초반은 내가 생각해도 컨디션이 최고였다.
여러 이유가 있다.
휴식기 때 골드컵이 있었지만, 내가 뛴 경기는 많지 않았다.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거기에 프리시즌 일정에서도 철저히 계획된 트레이닝 루틴을 따랐다. 트레이닝팀의 조력 아래, 시즌 초반 최절정의 몸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언제 들어가든, 어떻게든 골이 나올 거 같은 느낌.
"어때? 나랑 같이 찍는 건?"
션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물어온다.
"거절."
"응? 왜?"
"초반엔 경기에만 집중할 거야."
"하아!"
자신이 메인모델로 있는 잡지의 커버모델로 사진을 찍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나도 한번 그 잡지를 봤는데,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딱히 이점도 없다. 경기에 집중하려고 에이전시가 물어오는 스폰서를 제외하고 웬만해선 외부활동을 자제하는 편이다.
"인생을 좀 즐겨야지, 제프. 축구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
물론 그 말도 맞다.
축구는 직업일 뿐이다.
인생의 전부일 수는 없다. 다만 내가 애당초 회귀한 이유는, 이 축구를 제대로 하고 싶단 소원 때문이다.
뭐, 최고의 축구선수 몸을 달라고 했는데, 그게 미식축구일 줄은 몰랐지만.
"그럼 그 여자도 안 만날 거야?"
그 여자?
"SNS 보니까, 너 팔로우한 할리우드 여배우 있잖아."
"아!"
"맙소사. 그 사람, 내가 팔로우 신청하고, DM(다이렉트 메시지)을 보내도 씹던 사람인데. 어째서지? 내가 너보다 못생긴 외모도 아닌데."
"그 여자 취향이 빼빼 마른 놈은 아닌가 보지."
"웃긴 소리. 여자들은 나처럼 잔근육을 좋아해."
"그거 다 개소리라더라."
"······."
션이 흘깃 내 몸을 머리부터 발끝을 훑는 느낌이 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말한 여배우는 할리우드에서 핫한 배우인데, 최근에 내 SNS를 팔로우해서 꽤 화제가 됐다.
떠들기 좋아하는 삼류잡지는 그 사실을 크게 보도했고, 가십거리만 취급하는 인터넷 뉴스 사이트에서도 이슈가 됐다.
이래서 SNS를 최대한 안 하려고 했던 것이다.
에이전시에선 그래도 가끔 활용하는 게 좋다고 계정을 유지한 것이 문제가 됐다.
사실 유명한 축구선수는 셀럽들과 열애설이 나는 경우가 많다.
명예와 명성, 그리고 천문학적인 연봉까지.
지금까지 수많은 10대 천재와 유망주가 어느 순간 몰락한 예가 많다.
전형적인 루트라고 해야할까.
글래머, 클럽, 금발.
이 3요소에 맞아 떨어지는 여자를 만난 직후 폼이 갑자기 죽거나, 기대했던 만큼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는 축구계에 너무 많다.
올리버가 능글스럽게 웃었다.
"축구를 하는 이유가 다 그런 거 아니겠어?"
"너 어제 훈련 컨디션 안 좋아 보이더라."
"······뭐, 잠깐 피곤했어."
"그 전날에 여자랑 노는 사진이 찍혔던데."
"그거 더선에서 보도한 거지? 암, 그거 페이크 뉴스야."
잘생긴 놈이 나에게 한소리 들을까봐 우물쭈물하는 게, 꼭 비 맞은 골든래트리버를 보는 느낌이다.
난 피식 웃었다.
션 올리버의 생각이 틀린 건 아니다.
누군가에게 축구란 딱 직업적인 가치가 있을 뿐이다. 다만 나는 이 축구에 평생을 목멘 사람이 아닌가.
지금이 중요한 때다.
선수의 피지컬은 보통 19세에서 22세 사이에 완성된다.
딱 거기까지다.
이번 시즌 챔피언스리그와 다음 시즌 월드컵까지.
그때까지만 난 온전히 축구에만 집중할 생각이다.
세상을 좀 즐기는 거?
딱 월드컵 직후까지만.
그때까지는 지금처럼 버텨야 한다. 철저하게.
***
리그 8라운드의 빅매치는 리버풀과 맨시티의 경기였다.
두 팀 다 무패를 달리고 있다.
6승 1무 0패, 승점 19점으로 같다.
골득실차로 리버풀이 앞서고 있을 뿐이다.
첼시와는 승점 2점 차이.
저 두 팀의 경기는 향후 우승 경쟁에 중요한 부분이 될 거라 많은 언론이 프리뷰를 내보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관심을 받는 경기가 있었다.
<첼시 VS 스토크 시티>
스토크 시티는 현재 리그 11위를 랭킹하고 있는 팀.
이 경기가 두 번째로 관심받는 건 의외의 사실이다.
같은 날 맨유와 토트넘의 경기는 충분히 매력적인 매치였으니까.
그런데도 첼시와 스토크의 매치가 주목받는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스토크시티의 팀컬러를 만들어 낸, 일명 '남자의 축구'를 시도했던 토니퓰리스 감독의 복귀.
거기에 맞춘 새로운 선수들로 개편한 스쿼드.
마지막으로.
[찰리 아담, 스토크로 복귀하다. '선수생활은 스토크에서 마무리할 것.']
흔히 '제너럴 찰'로 불리는 찰리 아담의 복귀였다.
일각에서는 나와 찰리 아담의 대결을 기대하는 기사가 흘러나왔다.
"미친놈이군."
늘 차분함을 유지하던 하베르츠가 그렇게 말했다.
"이상한 놈이야. 저게 축구인가?"
이상한 놈, 우트도 동의했다.
"하하, 하."
그리고 올리버의 멋쩍은 웃음까지.
우리가 보고 있는 빔프로젝터 화면은, 이번 시즌 스토크의 경기 영상이었다.
[에릭센! 찰리 아담에게 발목이 밟혔어요! 고통스러워합니다!]
[아, 이거 심각해 보이는데요. 일단 들것에 실려 나갑니다만, 부상이 의심됩니다.]
"에릭센은 4주 부상이랬지."
"허."
코치의 설명에 누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게 축구인지, UFC 경기인지 모르겠군."
거기에 하베르츠의 비아냥까지.
"스토크가 변했군."
저번 시즌 스토크보다 더 과격하고 거칠다.
선수도 상당히 바뀌었고, 그냥 막 지르는 롱볼에 몸을 던지는 특유의 거친 컬러가 더 두드러졌다.
"원래대로 돌아온 거야."
"토니 감독이 복귀하자마자, 팀컬러가 다시 본래대로 바뀐 거지."
"심지어 찰리 아담, 쟤도 왔잖아?"
흠.
내가 보기엔 찰리 아담은 그렇게 위험한 선수가 아니다.
노쇠화가 뚜렷해서 스토크에서도 벤치 멤버였다. 교체로만 활약하는 정도다.
다만 영향력이 장난 아니었다.
그가 투입되면 스토크 선수들은 더 미쳐 날뛴다.
찰리 아담은 패스미스도 잦지만, 가끔 터지는 롱볼 패스가 위력적이었다. 가장 위력적인 건 아주 스무스하게 넘어가는 침착한 발목 밟기였다.
갑자기 에릭센이 쓰러지길래 왜 저러나 했더니, 리플레이 화면이 클로즈업되니까 보였다. 아주 자연스럽게 발목을 밟고 지나가는 찰리 아담의 모습이.
이번 경기 분석은 우리가 스토크에게 질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모두 자신감이 넘쳤다.
지금까지 승리만 챙겨 왔으니까.
우리와 코칭스태프가 걱정하는 건 하나다.
"부상자가 나와선 안 돼."
리그, 챔피언스리그, FA컵까지.
트레블을 노리는 우리로서는 부상은 치명적이다.
승리는 당연히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부상을 조심하자는 얘기다.
"제프, 내가 널 보호해 줄게. 걱정하지 마."
"우트.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응."
우트는 기본기가 좋은 선수지, 피지컬이 좋은 선수가 아니다.
만일 투톱으로 나간다면, 아마 내가 우트를 보호해야겠지.
"아, 그리고 제프."
여러 설명을 이어가던 감독이 나를 불렀다.
"네?"
"다치면 안 된다."
"물론이죠. 다치는 건 저쪽이 걱정해야 할 겁니다."
"하하하!"
"시비 걸면 다 두들겨 패야죠."
"아. 퇴장은 안 된다."
"딱 옐로카드 한 장까지만 팰게요."
"좋아!"
스토크 때문에 우리가 부상을 조심해야 한다고?
아니다.
아마 스토크가 부상을 조심해야 할 거다.
지금 스토크의 축구는, 회귀 전부터 내가 가장 끔찍하게 싫어했던 축구니까.
***
스토크 원정은 강팀에게도 가장 껄끄러운 원정이다.
스토크는 홈에서 토트넘과 비겼고 아스날을 두들겨 팼으며 레스터의 주전 선수 둘을 실려 나가게 했다.
"다치지만 않았으면 좋겠어."
스토크로 향한 첼시 원정팬들의 마음은 같았다.
이번 시즌 프리미어리그는 초반부터 여러 화제가 있는데,
토니 퓰리스 감독 복귀 이후 과거의 축구 컬러를 되찾은 스토크도 그중 하나였다.
스토크는 원정에선 쥐약이었으나, 홈에서만큼은 홈 깡패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거친 스토크 팬들은 열렬하게 외치고 있었고, 원정 온 첼시 팬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치열한 분위기였다.
"The Blues!"
경기가 시작되고 스토크는 냅다 중앙으로 공을 때렸다.
뻐어어엉!
"음. 우리 축구 같은데?"
"우리랑은 다르지. 우리는 하베르츠나 조르지뉴가 정확하게 킥을 차잖아. 쟤들은 그냥 냅다 중앙에 지른 거야."
"그래도 롱볼 대 롱볼인데."
묘한 기시감을 느낀 첼시팬들은 그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스토크의 롱볼은 순식간에 막혔다.
첼시의 수비는 침착하게 공을 걷어 냈고, 그 떨어진 공을 중간에 올리버가 잡아서 볼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빠악!
"저 미친!"
"저런 개자식이!"
"죽여 버려!"
그리고 올리버가 볼을 잡자마자 몸을 날려 전개를 끊어 버리는 스토크의 미드필더.
"찰리 아담, 이 개자식아!"
찰리 아담은 어깨를 으쓱이며 뭐가 문제냐는 듯이 웃었다.
그 모습에 첼시 원정팬은 격한 소리를 내뱉었다.
고통스러워하는 올리버를 보니, 도저히 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심판은 휘슬을 불긴 했으나 카드를 꺼내진 않았다.
오늘 경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제기랄."
"제발 아무도 안 다치면 좋겠어."
"그러려면 저 찰리 아담이 죽어 버려야 해!"
원정석에서 속삭이는 그 바람을 들었을까.
중앙에서 공을 잡고 다시 길게 전개하려던 찰리 아담의 옆구리를.
트럭이 달려와 그대로 갖다 박아 버렸다.
뻐억!
"끄억!"
[제퍼슨 리! 그대로 달려와 찰리 아담을 날려 버립니다!]
제퍼슨이 웃음기 띤 얼굴로 쓰러진 찰리아담을 바라봤다.
"너희들 방식으로 한번 해보자고."
섬뜩한 웃음이었다.
< 137. 분노조절잘해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