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136화 (136/258)

< 136. 분노조절잘해 (1) >

"······"

정적이 흘렀다.

수만 명이 운집한 경기장이 찰나지만 침묵에 잠겼다.

하나, 침묵은 오래가지 못했다.

"Wuuuuuuuuuuuuuuu!"

갈라타사라이 홈팬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제프! 죽여 버려!"

"그냥 갖다 박아!"

흥분한 원정팬들의 격렬한 응원이 겹쳐 들렸다.

공은 주인도 없이 필드에 굴러다녔다.

"바로 돌려! 패스해!"

갈라타사라이의 지휘관인 8번 셀추크 이난이 빠르게 외쳤다.

침착함을 유지하던 동공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분위기가 바뀌었다!'

극적인 변화였다.

첼시 선수단의 기세가 단번에 바뀌었다.

힘을 잃어 가던 눈동자에선 눈빛이 타올랐다.

짜증이 가득했던 얼굴에 살짝 미소가 감돈다.

지금까지 분위기에 짓눌려 응원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원정팬들의 기세가 살아났다.

셀추크 이난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빠르게 패스해! 어물쩍거리지마!"

이난은 곧바로 흘러 다니는 공을 잡자마자 뒤로 패스를 돌렸다.

미친 듯이 달려오는 제퍼슨의 돌진에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보고서와는 너무 다른 플레이 패턴.

'이 녀석 약점이 활동량이라면서?'

활동량이 부족하고 전방압박이 약하다.

어느 팀에서나, 그리고 전문가나 팬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사항이었다.

하나, 셀추크 이난은 절대 그 말에 동의하지 못했다.

'불붙은 황소도 아니고!'

공을 잡자마자 미친 듯이 압박해 오는 제퍼슨의 존재감은 흡사 전차가 달려오는 것에 필적했다.

수십 톤의 덤프트럭이 맹렬하게 돌진해오는 느낌이었다.

가슴이 서늘해지고 뒷목이 뻣뻣해졌다.

필드 밖에서 봐도 제퍼슨이 달려드는 모습은 맹렬하기 짝이 없다.

하물며 필드 안에서 직접 마주치는 선수들이 느끼는 바는 어떻겠는가.

패스로 유기적으로 풀어나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저 돌파에 부딪혔다간 몸이 축날 게 분명했다. 저도 모르게 급하게 공을 돌리기에 바빴다.

[아흐멧 찰리크! 공을 받고 돌리지 않습니다! 그대로 끌고 올라갈 속셈인가 본데요?]

자칫 볼을 소유하려고 했다간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터.

수비수에서 홀딩형 미드필더까지 뛰는 아흐멧 찰리크가 욕심을 부렸다.

187cm에 89kg의 건장한 체격으로 몸싸움에 자신감이 있던 탓이다.

빠아악!

"Yeaaaaaaaaaa!"

"LEE Will Kill you!"

"제프! 제프! 제프! 제프!"

물론 결과는 끔찍했다.

첼시 원정팬이 환호를 터뜨리고, 찰리크는 제퍼슨의 어깨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지켜보던 갈라타사라이 선수들이 얼어붙었다.

'사람하고 사람이 부딪쳤는데, 왜 저런 소리가 나지?'

필드에 누워 고통스러워하는 찰리크.

그 모습에 선수들은 마른 침을 삼켰다.

'절대 몸싸움하면 안 돼.'

***

갈라타사라이 감독은 전술적 유연함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아흐멧 찰리크가 튕겨 나가는 순간.

그는 지금의 방식을 고수하는 건 미련한 짓이란 걸 제대로 느꼈다.

'저 미친놈을 상대로 맞불을 놨다간 다 죽는다.'

찰리크가 절뚝이면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서늘했다.

터키 리그에서도 터프함으로 유명한 찰리크의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다.

하면 어쩔 수 없다.

피지컬로 지금 첼시를 이길 수는 없다.

교체 투입으로 체력이 완벽한 제퍼슨이다.

그답지 않게 미친 듯이 날뛰며 압박한다.

원래 활동량이 많은 타미와 제퍼슨이 최전방에서부터 중원까지 내려오면서 압박하자, 갈라타사라이는 눈에 띄게 동력을 잃었다.

그럴 바엔 빠르고 짧은 패스로 경기를 풀어나가야 했다.

절뚝이는 찰리크를 대신해 패스 성공률이 좋은 페르난두 헤제스를 투입했다.

갈라타사라이의 의도는 어느 정도 통하는가 싶었다.

"우우우우우우우!"

"추잡한 놈들아! 이게 축구냐!"

전형적인 볼 돌리면서 시간 끌기.

갈라타사라이는 무승부로 굳히겠단 의도가 명백했다.

[갈라타사라이가 이대로 경기를 끝내겠다는 생각이군요. 볼을 돌리면서 시간을 끌고 있습니다!]

그러자 첼시에서도 변화를 줬다.

조르지뉴 대신 저돌적인 드리블이 좋은 메이슨 마운트가 출전했다.

공격적인 변화였다.

마운트는 그렇게 수비에 힘쓰는 선수가 아니니까.

"간격 유지하고! 공간 내주지마! 저 자식 치고 들어온다!"

마운트는 들어오자마자 저돌적으로 드리블을 펼쳤다.

그 드리블을 막기 위해 셀추크 아난이 달려드는 순간.

"으억?"

옆구리에서 강렬한 충격이 느껴지더니, 몸의 중심이 휙 기울여졌다.

숨이 턱 막히는 충격.

마치 옆에서 무언가 박은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그는 넘어지면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나타난 제퍼슨이 그를 스치면서 튕겨 내고, 마운트의 스피드를 따라잡아 박스 안으로 파고들고 있다.

[제퍼슨 리가 냅다 달립니다! 순식간에 선수 두세 명을 따라잡고 안으로 파고듭니다! 수비수들 우왕좌왕하네요! 마운트를 막을 것이냐! 제퍼슨을 견제할 것이냐! 선택해야 합니다!]

'이게 스친 거라고?'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충격은 두 발이 풀릴 정도였다.

하나, 생각은 길지 못했다.

마운트의 드리블을 막기 위해 수비수들이 엉거주춤 발을 갖다 대는 순간.

탓!

마운트의 짧은 패스가 단숨에 그사이를 파고들어 제퍼슨에게 도달했다.

[마운트의 패스! 제퍼슨에게 향합니다! 수비수들이 달려듭니다!]

공을 키핑하기 위해선 달리던 신체가 일순 주춤할 수밖에 없다.

수비수들은 그런 사실을 잘 알았다. 패스가 도달할 타이밍에 맞춰 몸을 날리듯 달려들었다.

[수비수 세명이 순간적으로 압박해갑니다! 오, 세상에! 갈라타사라이의 수비가 빛나는 순간이네요!]

앞에서 두 명.

오른쪽에서 한 명.

순식간에 세 명이 에워싸는 모양새.

그러나 그들은 제퍼슨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공을 키핑하기 위해서 주춤거릴 이유가 없었다.

유연하기 짝이 없는 제퍼슨은 근육의 탄성을 이용해 공을 키핑하고, 곧바로 다음 동작을 이어갔다.

"미친!"

"무슨 짓이야!"

공을 키핑한 후, 다시 드리블하는 그 과정.

필연적으로 딜레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사람의 신체란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가 없으니까.

동시에 여러 근육이 다른 목적으로 작동할 리가 있는가.

그게 상식이다.

한데 수비수들은 모든 상식이 무너지는 광경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극도로 짧은 딜레이.

그들의 눈에는 마치 공을 키핑하고 벌어지는 모든 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툭!

왼팔로 수비수 하나의 가슴을 밀어내고,

오른쪽 어깨로 다른 수비수와 부딪치며 생긴 빈 곳으로 볼을 툭 밀어낸 뒤. 오른쪽에서 달려드는 수비수를 가볍게 터닝하며 피해 냈다.

"······!"

"Yeaaaaaaaaaaaaaa!"

[소름이 끼치는 플레이입니다! 맙소사! 제퍼슨 리가 환상적인 플레이를 보여 줍니다! 너무나 치명적이고 아름답네요! 단숨에 수비 세 명을 벗겨 냅니다!]

수비 셋을 벗겨 낸 제퍼슨은 무리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튀어나오는 골키퍼를 보고, 오른쪽을 쇄도한 메이슨 마운트에게 패스를 찔러줬다.

뻐어엉!

"Gooooaaaal!"

[제퍼슨의 패스를 받아 메인스 마운트가 마무리 짓습니다! 마운트의 오른발 슈팅이 골문을 갈랐네요. 갈라타사라이 홈팬들 머리를 부여 잡고 괴로워합니다! 그럴 수밖에요! 수비수가 세 명이나 있었는데. 아무도 골이 들어갈 상황이라고 예측 못 했을 겁니다! 제퍼슨이 만들어 낸 골이나 다름없습니다!]

***

빠아악!

"반칙이잖아!"

"심판!"

홈 관중이 알 수 없는 터키어로 욕설을 내뱉는다.

갈라타사라이 선수들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달려와 소리쳤다.

"죽고 싶어?"

"이거 반칙이야! 너 일부러 밀었잖아?"

아니, 솔직히 어이가 없네.

"지들이 와서 갖다 박아 놓곤."

내 말에 이들의 얼굴을 새빨개졌다.

난 유들유들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날아갈 걸 알면서 달려들어? 하늘을 날고 싶으면 비행기를 타. 머저리들아."

내 말에 선수들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날뛴다.

내가 좀 거칠게 뛰긴 했다. 하지만 전반전에 우트를 상대로 팔꿈치 썼던 게 누군데?

선수들이 타오를 기세를 보이자 주심이 다가와 말렸다.

"그만해. 싸우고 싶으면 다 퇴장당해서 밖에서 싸우는 게 어때?"

더 하면 카드를 주겠다는 의도.

뭐. 그렇다고 내가 꿇릴 건 없다.

엄연히 반칙이 아닌 선에서 유지하고 있다.

"터키에서는 가만히 있는 트럭에 사람이 와서 부딪치면 트럭 과실 비율이 높습니까?"

내 말에 주심은 피식 웃었다.

"참고하지."

사실 나에게 경고를 할 여력이 안 된다.

전반전에 우리 선수들을 상대로 팔꿈치를 쓰던 놈들한테도 구두 경고만 주던 양반인데.

지금 나한테 카드를 꺼내면 그건 편파판정이지. 암.

투욱!

"크읍!"

길을 막는 수비수를 팔로 밀어내며, 동시에 어깨로 강하게 밀쳐 냈다.

중심을 잃은 상대는 한차례 휘청거리다 쓰러졌다.

"Blues! Blues!"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그 기세에 상대 선수들이 질린 눈빛으로 감히 접근조차 못 했다.

됐다.

이 녀석들. 이제 겁에 질렸다.

"오도이!"

후반 86분.

갈라타사라이는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며 라인을 올린 상태.

여기서 저들의 의지를 꺾는다.

거의 포효하듯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치며,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는 오도이에게 길게 찔렀다.

"으아아아아!"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뛰던 오도이가 온 힘을 쥐어짜 스프린터를 터뜨리며 달렸다.

그 앞에 먼저 움직여 있던 카이 하베르츠가 갈라타사라이의 풀백을 견제했다.

오도이가 짧게 하베르츠에게 패스.

"우우우우우우!"

하베르츠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풀백을 속여 넘기며, 가랑이 사이로 공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흘려 나가는 볼을 향해 쇄도한 오도이가 다시 볼을 잡았고, 망설임 없이 크로스를 올렸다.

"죽어!"

상대 8번 셀추크 이난과 센터백 두 명이 달려온다.

이런.

좀 어렵겠는걸.

세 명이 동시에 달려든다면 헤더에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서로 비슷한 체력 상태라는 조건하에서 말이지.

"다 꺼져버려!"

난 플레이한 지 20분밖에 안 지난 상태였고, 이들은 80분을 넘게 뛰었다.

힘이 빠지고 진이 다한 상태.

아직 쌩쌩한 내 체력과 힘을 이겨 내기는 어렵다.

왼쪽 수비수를 엉덩이로 툭 밀어내고.

오른쪽의 수비수를 팔로 지그시 누른 뒤.

옆에서 뛰어오른 아난을 어깨로 그냥 밀쳐 버렸다.

"어억!"

엄살은!

동시에 뛰어오른 세 명이 모두 나가떨어지자.

공중엔 나밖에 없었다.

뻐어엉!

이거, 됐다.

이마에 정확히 꽂히는 느낌.

헤더로 만들어 냈다고 믿기 어려운 대포알 같은 헤더가 골문을 갈라 버렸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미쳐 날뛰는 원정 팬 사이로 뛰어 들어갔다.

갈라타사라이 선수들이 항의하며 뭐라 지껄이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억울하면 골을 넣던가.

***

[첼시, 갈라타사라이 상대로 2대 0 승리!]

[최고의 크랙, 제퍼슨 리. 교체 후 1골 1어시스트 대활약!]

[갈라타사라이를 순한 양으로 만들어버린 제퍼슨 리, 그라운드 위의 전차.]

[갈라타사라이 감독, 제퍼슨의 플레이를 비난하다. '그가 후반전에 보여 준 치졸하며 동업자 정신을 저버린 거친 몸싸움은 우리 선수들을 고통스럽게 했다.']

[첼시 감독, '전반전 갈라타사라이는 적어도 한 명 이상은 퇴장당했어야 옳다. 전반전에는 분노조절 장애처럼 날뛰지 않았나? 후반전에 분노조절 장애를 치료해 준 제퍼슨에게 고마워해라.' 갈라타사라이를 조롱하다.]

[제퍼슨 리, '갈라타사라이가 왜 투견이라고 불리는지 모르겠다. 그냥 교육 못 받은 성격 안 좋은 개였을 뿐이다.']

***

"워딩 한번 기가 막히는군."

올리버는 스마트폰을 보고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거침없이 저지른 인터뷰에 실소가 나올 정도다.

"미국인다워."

저 멀리, 제퍼슨이 쉬지 않고 근력 운동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적어도 두 배에 가까운 중량을 가볍게 끌어올리는 모습에 올리버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야 괴물이야."

근육이 크면 다소 유연함이 부족하거나 느리다는 편견이 있다. 실제로 그런 선수도 많다.

한데 제퍼슨은 그런 편견을 완벽하게 짓밟는 유형이었다. 발 빠르고 민첩한 선수들도 제퍼슨에게 비교조차 안 될 거다.

하여튼 올리버는 제퍼슨을 따라 근육 운동에 힘썼다.

"뭐, 근육 짱짱한 야성미 넘치는 모델도 괜찮은 거 같아."

결코, 억지로 끌려온 게 아니라고 애써 생각하면서 운동을 하는 가운데.

지이잉.

전화가 왔다.

"음?"

첼시에 오기 이전 팀, 레딩에서 같이 뛰었던 선수.

"웬일이야? 친구."

-올리버, 잘 지내고 있지? 저번 경기 봤는데 터프하던걸?

"흠. 영국에서 가장 터프한 친구한테 들으니까 이거 쑥스러운데."

-하하하하! 뭐, 나야 이젠 늙어서 그것도 옛말이지. 진짜 터프한 놈은 거기에 있더만. 제퍼슨이라고.

"그렇긴 해. 젊을 적 너라도 얘 상대하기 쉽지 않았을걸?"

-그럴 것 같긴 해. 내가 전에 뛰었던 스토크가, 옛날 같지가 않아. 이제 다시 팀에 돌아왔는데. 얘들이 모두 제퍼슨에게 겁을 먹은 것 같더라고.

"나도 듣기론, 너희 팀이 제프에게 크게 데였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 팀을 위해서 다다음 경기에서 그 녀석을 좀 혼쭐내 주려고 생각 중이야.

그 말에 올리버는 피식 웃었다.

혼쭐을 내준다고?

누가 누굴?

저 제퍼슨을?

물론 다른 이들이 이런 말을 했으면 그저 비웃음만 샀겠지만.

전화 건너편 상대는 이런 말을 할 만한 선수긴 했다.

"경기 기대되는데? 찰리. 스토크에 복귀한 기분이 어때?"

-좋아. 아주 좋아. 여기선 내 축구를 할 수 있거든.

내 축구란 말에 올리버는 웃음을 터뜨렸다.

레딩에서는 다소 죽였던 성질머리.

스토크에 복귀한 그의 축구라.

같은 편일땐 든든하지만, 상대로 만나면 가장 꼴도 보기 싫은 유형이었다.

올리버는 헛웃음을 지으며 소리쳤다.

"하긴. 그래야 찰리 아담이지!"

< 136. 분노조절잘해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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