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파트너 하고 싶은 사람 손! (2) >
프리미어리그 6라운드 상대는 번리였다.
18-19시즌에는 유로파리그에도 진출할 정도로 좋은 성적을 보여 줬으나, 중하위권 팀이 으레 그렇듯 빈약한 스쿼드로 그다음에는 강등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하나, 저력이 있는 팀은 확실했다.
중위권에서 강등권까지 오르락내리락하지만, 프리미어리그에서 몇 년째 버티고 있는 팀이니까.
현재 번리는 1승 4패로 심각한 부진에 빠져 있다. 팬들에게는 어느 때보다 절실한 순간이다.
하필 그 시점에 우리를 만났다는 건 치명적이다.
"간격 유지해!"
번리의 센터백이자 캡틴 벤 미가 미친 듯이 소리쳤다.
그들의 얼굴에 명백한 당혹감이 눈에 보였다.
"스트라이커를 세 명이나 라인업에 넣다니, 미친 거 아냐?"
그럴지도 모른다.
극단적인 공격진형이다.
4-3-3의 전형이지만, 중앙 원톱에 양옆의 스트라이커가 날개로 펼쳐진 포메이션이 아니다.
박스 안에 세 명을 박아 버린 쓰리톱.
스트라이커 성애자의 작품이다.
"간격 유지하면서 압박해!"
"달려들었가단 다 뒈진다!"
스트라이커들이 미친 듯이 중앙으로 쇄도하는 장면은 꽤 볼 만했다.
물론 상대편으로서는 끔찍할 거다.
잉글랜드 차세대 스트라이커 타미 아브라함과 분데스리가에서 잔뼈가 굵은 마크 우트.
그리고 나까지.
"제-프!"
아스필리쿠에타가 센터서클 아래에서 길디긴 얼리크로스를 올렸다.
나는 있는 힘껏 달리면서 뛰어올랐다.
번리의 수비수 두 명이 거칠게 부딪쳐 왔다.
흥, 어림도 없지!
적어도 나보다 키가 10cm 이상 크지 않으면 애당초 공중볼 경합이 되지 않는다.
뛰어오름과 동시에 골대를 봤다.
거리는 멀다.
헤더 슈팅은 가능하나, 무리할 필요는 없다.
아무도 모르게, 아주 귀신같은 움직임으로 빈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타미가 있었으니까.
툭!
"······!"
타미가 파고드는 공간으로 정확히 떨어지는 공.
공은 그대로 타미의 발끝에 닿았다.
그리고.
투욱!
응?
왜 다시 나한테 돌려줘?
필드에 착지하자마자 돌아오는 리턴 패스.
타미에게 간격을 좁히던 골키퍼의 황당한 얼굴이 비치고, 나는 본능적으로 슈팅을 때렸다.
뻐엉!
워낙 기습적인 슈팅이었고, 수비도, 골키퍼도 예측 못 한 타이밍이었다.
하기야.
나도 타미가 나한테 패스를 줄 줄도 몰랐는데, 수비가 어찌 예측하는가.
공은 아무도 건들지 못한 채, 그대로 골문을 갈랐다.
"Yeaaaaaaaaaaa!"
"제-퍼-슨!"
타미가 나를 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주고, 우트는 조금 뚱한 표정을 짓는다.
음.
선의의 경쟁인가.
***
[필마르크 감독의 쓰리톱은 정말 특이하네요.]
중앙 공격수 세 명으로 쓰리톱을 세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상대가 번리가 아니었으면, 이와 같은 전술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깊게 내려앉은 수비진에, 5명으로 이뤄진 극단적인 파이브백.
간단하다.
더 많은 공격수를 넣어서 수비진을 흔들겠다는 것.
카이 하베르츠라는 천재적인 미드필더와 아스필리쿠에타의 얼리크로스가 있어서 가능했다.
일단 무작정 박스 안으로 공을 욱여넣고 보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위협적이다.
롱패스라고 보기엔 너무나 정교하고 날카로웠으니까.
현재 제퍼슨과의 경합에서 이기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제퍼슨 리의 공중볼 경합은 100%입니다!]
해설진이 경악스러운 어조로 소리쳤다.
[공중엔 제퍼슨이네요. 대단합니다!]
누가 보면 단순하다고 욕할 전술.
유기적인 패스워크로 이뤄진 전술을 신봉하는 전문가들에겐, 첼시의 전술은 반역적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나, 어쩌겠는가.
그것만큼 위력적인 것이 없는데.
[마크 우트! 기회를 잡습니다! 제퍼슨 리에게 공을 빼 주네요! 제퍼슨! 그대로 발리슛을 욱여넣습니다! 벌써 팀의 두 번째 골이자 리그 9호 골입니다!]
"Blues! blues! blues!"
팬들로서는 반가운 장면이었다.
제퍼슨의 득점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는 점.
같이 출전한 마크 우트와 타미 아브라함의 호흡이 썩 좋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동일 포지션은 경쟁의식이 심할 수밖에 없다.
스트라이커는 득점 욕심이 가능 큰 포지션이다.
한데도 우트와 타미는 확실한 기회에서도 연신 제퍼슨에게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
팀의 어린 선수이자 동일 포지션의 세 명의 호흡이 정말 잘 맞아떨어진다는 사실.
팬들로서는 기쁘기 짝이 없었다.
"이 자식들이. 내가 어시스트를 못하게 하려고 작정했나."
제퍼슨으로서는 조금 황당한 일이었지만.
***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너 터미네이터는 아니지? T800 말이야."
"무슨 소리야? 이 녀석은 그딴 고철이 아니라고. 그 액체 로봇 정도는 되어야지."
왜 그런 얘기를 하느냐고 물어보니까 답은 이랬다.
"그렇게 뛰는데 부상이 없잖아?"
"네가 괴물인 거야? 아니면 그 소문의 트레이닝 팀이 미친 거야?"
"둘 다야."
솔직히 말했다.
사실, 회귀 전 이학현의 신체를 떠올리면 지금의 육체는 불가사의하다.
부상을 안 당할 리가 있나.
원래 모든 선수는 90분 격렬하게 뛰고 나면, 자잘한 부상을 하나씩 안게 된다.
가벼운 근육 통증부터 시작해서,
거친 몸싸움에 타박상을 입는 경우도 많고.
어디 하나 욱신거리는 건 정말 당연하다.
괜히 중간에 교체되면 벤치에서 얼음찜질하는 게 아니다.
한데 이 신체는 회복력이 어마어마했다.
율리아겐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괴이할 정도죠. 근육에 쌓인 피로가 해소되고 찢어진 근육이 아무는 속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과학적인 데이터 분석으로 트레이닝을 시도하는 율리아겐도, 내 신체의 회복력만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120kg가 넘는 거구들하고 싸우면서도 10년은 넘게 그 바닥에 버틴 육체니까.'
미식축구 선수들의 신체는 상식적으로 믿기 힘든 종류가 너무 많다.
120kg이 넘는 라인맨의 서전트 점프가 116cm를 기록하는 것을 보고 경악한 적이 있다.
옛날에 미식축구 만화를 보고 이게 말이 되나 싶었다. 그냥 만화 특유의 과장된 액션이라 생각했다.
근데 그것이 실제로 가능했다.
심지어 내가 뛰었던 고등학교 풋볼팀에서도 그런 만화 같은 플레이를 선보이는 미친 괴물들이 있었다.
그런 괴물 중에서도 주목받던 게 제퍼슨의 신체가 아니었나.
거기에 트레이닝 팀의 조력이 붙었다.
레반도프스키를 회춘시킨 율리아겐.
즐라탄과 호날두의 개인트레이너였던 디 파코.
거기에 최근에 영입한 스포츠 마사지사까지.
그들에게 지급하는 비용만큼, 난 만족스럽게 트레이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예 부상이 없을 수는 없는 법이다.
"제프, 닥터한테 무릎이 조금 아프다고 들었는데, 거짓말이지?"
감독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번리전이 끝나고, 나도 처음으로 무릎에서 통증을 느낀 것이다.
"약간요."
"맙소사! 맙소사!"
누가 북유럽의 남자가 거칠다고 했나.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소녀 감성이 느껴지거늘.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다.
약간의 통증.
이 정도는 경기 직후 느끼는 통증이다.
하지만 이학현 때부터 몸 관리에 신경 쓰고, 누구보다 근육에 대해 공부했던 기억이 있는 만큼.
이런 작은 통증이 다음에 크게 번질 수도 있음을 잘 안다.
그래서 솔직하게 얘기했다.
감독은 한참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굳은 얼굴로 어디론가 전활 걸었다.
한참 얘기하고 오더니 말했다.
"헬기가 곧 올 거야."
"네?"
"구단주한테 네 얘기를 했더니, 당장 헬기를 준비시켰다는군. 병원에 가자!"
아니, 그 정도는 아닌데.
***
다행히 큰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번리 전에서 내가 펼쳤던 플레이들.
무작정 박스로 욱여넣어서 따내는 플레이는 자제하기를 권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 체중은 현재 93kg이다. 안 그래도 드리블 패턴이나 그런 것들이 무릎에 과부하를 줄 수 있는데, 점프를 워낙 많이 하다 보니 통증이 느껴진 것이다.
트레이닝 팀에서도 한소릴 들었다.
흠.
하긴, 내가 좀 무리한 것 같긴 하다.
지금이라도 조심히 플레이해야지.
세 골 넣을 걸, 두 골 정도 넣는 거로.
[제퍼슨 없는 첼시, 리그컵 3라운드, 리즈에게 2대 1 일격을 당하다!]
내가 휴식으로 한 경기 쉬자,
우리는 꽤 놀라운 패배를 당했다.
물론 라인업 자체가 1.5군이 아니라 2군에 가깝긴 했다.
"리그컵도 중요한 대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큰 목표를 보고 있습니다. 챔피언스리그, 프리미어리그, FA컵 트레블에 도전해야만 합니다. 때로는 우리는 패배를 감수해야 합니다."
감독은 패배에 대해서는 반성하겠다고 하면서도, 베스트 일레븐 전체를 바꾼 로테이션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몇몇 언론에서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하던 감독을 연신 공격했다.
그러나 팬들은 오히려 감독의 선택을 지지했다.
팬들도 미련하지 않았다.
이미 저번 시즌에 들었던 리그컵이고,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 시기임을 잘 알았으니까.
차라리 애매하게 8강, 4강까지 올라가서 로테이션 돌리다가 떨어질 바에는, 대회 시작부터 깔끔히 물러나는 게 낫다는 게 그들의 중론이었다.
덕택에 나뿐만 아니라 그간 고생했던 주전 선수들이 모두 휴식을 취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긴 리그를 치르기 위한 원동력을 회복하게 됐다.
***
챔피언스리그 2차전, 갈라타사라이 원정.
유럽 챔피언스리그에서 러시아 원정과 더불어 지옥의 원정경기라고 불리는 경기다.
갈라타사라이 팬들이 과격한 면이 좀 있으니까.
근데 사실, 내가 보기엔 몇몇 훌리건이 가득한 팀 빼고는 다 거기서 거기다.
축구를 보는 팬 중에 과격하지 않은 팬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죽음의 원정이라고 불리는 건, 그 어마어마한 원정 거리 때문이지.
"무릎 괜찮겠어?"
"네. 문제없어요. 보고서 봤잖아요?"
"흠. 그래, 하지만 벤치에서 시작할 거야."
"알겠습니다."
나도 굳이 무리하지 않았다.
"제프, 걱정하지 마. 네 무릎을 위해서라도 네가 출전할 일은 없게 할게. 내가 박살을 내주지."
우트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 눈빛은.
"Wuuuuuuuuuuuuuuuuu"
차원이 다른 이스탄불의 엄청난 야유에 순식간에 거무죽죽해졌다.
오, 세상에.
아까 했던 말 취소다.
여기 동네 훌리건이 더 쎈 거 같다.
***
홈구장 분위기만으로 주눅이 든다는 기분이 이런 게 아닐까.
관중석 곳곳에서 홍염이 터진다. 붉은 기운과 매캐하기 짝이 없는 화약 냄새까지 퍼진다.
"여긴 지옥이야!"
갈라타사라이 수비수의 팔꿈치에 명치를 맞고 데굴데굴 구르던 우트가 그렇게 소리쳤다.
거친 팬들의 반응 때문인지, 갈라타사라이는 거칠었다.
지독하게 거칠었다.
프리미어리그가 거칠다고?
지금 벤치에서도 살 떨리는 팔꿈치 가격과 바디체킹, 양발 태클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
물론 우리의 수비진도 거친 면에서는 꿀리지 않았다. 뤼디거는 몸으로 갈라타사라이의 공격수를 찍어 눌렀고, 시셀도는 온몸이 박살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몸을 날리며 수비에 성공했다.
덕택에 후반 60분까지 스코어는 0대 0.
상대적으로 피지컬이 타미보단 약한 우트가 다리를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타미는 기묘한 움직임으로 몸싸움을 잘 피했지만, 우트는 피하기보단 돌파를 하는 성향이라서.
감독이 흘깃 날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고민하는 것이다.
날 넣어서 승리를 쟁취해 낼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무승부로 만족할 것인지.
터키 원정에서 승점 1점이면 만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직전 경기에서 베스트 일레븐을 다 쉬게 하고 리그컵을 포기했는데,
여기서 1점이라면 우호적인 팬들도 여러 얘기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날 집어넣자니.
저 거친 축구에서 혹여 내가 부상이라도 할 염려를 하는 것이다.
"감독님."
"응?"
"저 내보내 주세요."
"······몸은 괜찮겠냐?"
"그 질문은 제가 아닌 상대팀에게 해야 할 겁니다."
내 말에 감독은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제프, 들어가서 박살 내 버려. 아. 물론 선수를 박살 내라는 건 아니야. 알지?"
물론이지.
내가 들어가자 지금까지 잠잠하던 첼시의 원정팬이 소리를 질러 댔다.
"제----프!"
"왕이 들어오신다!"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무려 4면에서 울리는 야유는 끔찍했다.
그리고 내가 공을 잡자마자, 지금까지 우트를 거의 반 죽여 놓던 수비수 하나가 눈을 번뜩이며 달려온다.
흠.
굳이 반칙으로 쳐 낼 필요 없다.
무게중심을 낮추고, 어깨와 상반신에 힘을 가득 줬다.
빠악!
그리고 그대로 달려오다가 크게 튕겨 나가는 수비수.
"으어억!"
음.
뭐지.
신종 자살법인가?
< 135. 파트너 하고 싶은 사람 손!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