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스톡홀름 증후군 (3) >
원정 경기 직관은 축구 팬들에게도 꽤 힘든 선택이다.
아무리 유럽이 사방팔방 뚫려있다고 한들, 수백 Km를 날아가 응원을 펼친다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다.
한데도 첼시 팬들은 그 결정을 망설이지 않았다.
"LEE Will, LEE Will Kill You!"
제퍼슨이 널 죽여 버릴 거야!
"LEE Will, LEE Will Fuck You!"
제퍼슨이 널 엿 먹이겠지!
짜릿함을 넘어서 희열이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상대 홈팬이 수만 명 운집된 경기장을, 마치 스탬포드 브리지로 만드는감각이란.
워낙 충격적인 골이었다.
오버페이스인 발렌시아의 활동량과 저돌적인 투지를 그저 부숴 버리는 제퍼슨의 선제득점.
[사실 그건 하베르츠의 패스미스였습니다. 너무나 강했고, 전혀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으니까요.]
해설자는 리플레이 영상을 보면서 하나씩 짚었다.
[발렌시아의 압박은 분명 통했습니다. 그 대단한 하베르츠의 패스미스를 끌어냈으니까요. 이건 명백한 패스미스입니다. 패스 성공률을 감소시키는 패스란 말입니다.]
해설자의 목소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캐스터가 옆에서 맞장구쳤다.
[한데 하베르츠의 패스성공률은 더 올라갔죠. 심지어 골을 만들어 낸 킬패스가 되었죠. 오로지 제퍼슨의 힘만으로 패스미스를 킬러 패스로 바꿔 놨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유령처럼 나타나 마치 우사인 볼트처럼 달려 나갔어요. 그리고 공을 잡았죠. 놀라운 건 방향 전환입니다. 코너라인에서 박스로 몸을 꺾는데, 속도가 줄지 않아요. 그대로 치고 나갔죠.]
[수비수들이 '제퍼슨이 공을 잡았다'라고 인식한 순간, 이미 제퍼슨은 박스에서 슈팅을 때린 것이죠!]
발렌시아 관중은 하나같이 충격을 먹은 표정이었다.
카메라는 연신 관중들의 반응을 담았다.
단거리 육상선수 같은 스피드, 러닝백 특유의 급격한 방향 전환, 거기에 화려한 발재간과 무각에서도 집어넣어 버리는 환상적인 득점까지.
중계를 지켜보던 타 프리미어리그 팬들은 그런 표정들을 보고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발렌시아 0 VS 1 첼시>
ㄴ마치 작년의 우리를 보는 거 같은데.
ㄴ3대 1로 이기고 있는 맨시티 상대로, 극적인 추격골과 동점골까지 넣어 버리는 제퍼슨을 보고 저런 표정을 지었었지.
ㄴ라리가 놈들, 드디어 제퍼슨 맛을 보는군.
ㄴ뭔가 통쾌한데.
ㄴ우리만 제퍼슨에게 당하다가, 저 녀석들도 당하니까 통쾌해.
발렌시아 관중은 처음 보는 광경이다.
모두 입을 벌리거나, 아니면 머리칼을 붙잡고 고개를 젓고 있었다.
하나, 저런 제퍼슨의 득점을 몇 번이나 봐 온 프리미어리그 팬들은 오히려 심드렁했다. 심지어 발렌시아의 반응을 보고 웃음까지 지었다.
"차라리 100m를 뛰라고 하지. 어? 그냥 육상선수로 나가지, 왜 축구를 하는 거야?"
발렌시아 감독으로선 억울할 일이었다.
완벽한 압박이었다. 준비했던 것이 분명 통했다. 하베르츠는 흔들렸다. 패스미스였다. 그저 밖으로 걷어 내는 것이나 다름없던 긴 패스.
그걸 그냥 받아 낸다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쯤 되자 발렌시아 감독은 경기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든 전반전은 무실점으로 지켰어야만 했다. 그리고 후반전 상대의 체력이 떨어지고, 홈경기의 특성상 분위기는 반드시 한 번 올 거라는 걸 알았다. 그때를 노려 한 방 터뜨리기만 했으면 됐는데.
다 소용없게 됐다.
'압박은 그대로. 설령 다음 경기를 포기하더라도.'
굳은 결심이다. 다음 리그 경기를 포기하더라도 이번 경기에 많은 걸 걸었다.
최소한 1점이라도 기록해야 한다.
더구나 세 번 밖에 없는 홈경기니까.
"제퍼슨을 막아!"
첫 실점의 원인은 제퍼슨을 너무 놔줬다는 것이다.
애당초 제퍼슨에게 공이 가지 않기를 유도했으나, 제퍼슨은 공간을 지배하는 선수였다.
그에게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다른 선수와 확연히 달랐다.
중앙 미드필더에게 집중되던 압박이 제퍼슨에게도 향했다.
하나, 그것은 실수였다.
[하베르츠! 가볍게 볼을 트래핑하며 전진합니다! 이 선수, 드리블도 굉장한 선수죠!]
압박이 분산되면서 생긴 약간의 여유.
하베르츠는 망설임 없이 드리블을 시도했다.
[하베르츠의 패스가 마운트에게 향합니다! 마운트, 저돌적으로 전진하면서 선수 하나를 제치고!]
미드필더가 압박을 벗겨 내며 순간적으로 전진했다. 타이트한 수비를 펼치던 발렌시아가 눈에 띄게 동요했다.
수비들의 시선이 빠르게 필드를 훑었고, 제퍼슨에게 향하는 순간.
[마운트의 툭 찍어 차 주는 패스! 제퍼슨 가슴으로 가볍게 트래핑하고, 떨어지는 공을 그대로 때립니다!]
뻐엉!
압박을 할 것이었으면,
분산하는 게 아니라 온전히 모든 힘을 집중해야 했다.
제퍼슨의 슈팅이 골문을 두 번째로 가르는 순간. 발렌시아 감독은 전력 분석관의 보고서가 뒤늦게 떠올랐다.
'모든 전술과 공격을 포기해야 제퍼슨을 막을 수 있다.'
몸에 짜르르 전율이 흘렀다.
"Gooooooaaaaaaal!"
"Blues! Blues! Blues!"
"제-프!"
균형의 추가 순식간에 기울어졌다.
***
발렌시아에게 기회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축구는 90분의 스포츠다.
분명히 후반전엔 발렌시아에게 몇 번의 기회가 갔다.
다만 발렌시아는 그 기회를 놓쳤을 뿐이다.
"올리버가 후반전엔 잘하는데?"
올리버의 변화는 꽤 놀라웠다.
전반전에는 압박에 고전했으나, 후반전엔 남다른 모습을 보여 줬다.
아마 상대팀이 오버페이스로 지친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지.
하나, 우리는 달랐다.
찾아오는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우트 대신 출전한 오도이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라인을 타고 달렸다.
하베르츠와 마운트의 숏패스 전개가 이뤄지다가, 단숨에 사이드로 길게 뿌려지는 패스.
"Yeaaaaaaaa!"
속 시원시원한 롱패스 한 방에 우측 사이드가 초토화되었다.
오도이는 직선적이지만, 드리블 실력은 알아줄 만했다.
발렌시아의 지친 수비수를 말 그대로 헤집었다.
나 역시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오도이가 뛰는 것에 맞춰 중앙으로 주저 없이 뛰었다.
오른쪽에서 날카로운 크로스가 올라온다.
발렌시아 수비수들은 비교적 피지컬이 약하다. 프리미어리그의 떡대들을 상대하다가 이들을 상대하면 상대적으로 쉽다.
퍼억!
"으읍!"
센터백 한 명과 공중에서 경합했다.
물론 나가떨어지는 건 저쪽이고.
툭!
뛰어오르는 순간 이미 머릿속에서 계산이 끝났다.
직접 헤더가 아니라 왼쪽 인사이드에서 기민하게 들어오는 풀리시치의 발등을 향해 볼을 떨어뜨려 줬다.
뻐엉!
"풀! 리! 시! 치!"
"너희들은 챔피언스 수준이 아니야! 유로파로 꺼져 버려!"
첼시 팬들의 환호와 웃음.
그리고.
"이럴 거면 팀에 수비수가 왜 필요해?"
"제기랄! 수비수들에게 지급하는 주급으로 차라리 로봇을 사서 세워 놓는 게 낫겠군!"
"우리 할머니한테 주급의 절반만 줘도, 이것보단 잘 막겠다! 이 자식들아!"
발렌시아 팬들의 거친 분노까지.
슬쩍, 저 멀리.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강진이가 보인다.
미안하긴 하지만.
이게 축구 아니겠나.
***
'미치겠군.'
이강진은 맹세컨대 이번 경기만큼 어려운 경기는 처음이라고 느꼈다.
챔피언스리그라는 부담감?
아니다.
챔피언스리그는 재작년부터 출전했었다.
어린 나이에 국가대표 에이스가 되었단 숙명도 이겨 냈던 그다.
한데 오늘 경기는 정말 풀리지 않았다.
물론 기본 전술 자체가 선수비 후역습이지만,
기회가 아예 오지 않는 것도 아니다.
90분 동안 한 팀이 계속 주도권을 쥐지는 못한다. 분위기는 분명 바뀐다. 한데 이강진은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으라차차찻!"
"······!"
다시 볼을 잡자마자 들어오는 거센 태클.
잘 생긴 금발이 괴상한 소리를 냈다.
곱상한 외모와는 달린 거친 태클에 이강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체.'
쉽지 않다.
그는 스코어를 올려다봤다.
3대 0.
수비진에서 어떻게든 잘 막아 준다면 모를까.
수비가 계속해서 실점을 내주자 의욕이 점점 줄어들었다.
"괴물."
불현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패스를 받지 않아도, 몸으로 밀고 들어가 수비진을 깨부수는 모습에 다다닥 소름이 돋았다.
제퍼슨 리.
저런 스트라이커가 있다면, 자신과 같은 플레이 메이커는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혼자서도 팀 하나를 파훼하는 괴물 같은 선수를.
그러다 문득 제퍼슨 리와 눈이 마주쳤다.
묘했다.
제퍼슨의 눈빛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친근감이 담겨 있었다.
"안녕. 오랜만이야."
"······?"
그가 한국계 선수인 건 꽤 유명했다.
국가대표 선수 사이에서도 제퍼슨이란 선수는 엄청 화제였다.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직접 부딪쳐 본 쏘니가 극찬을 쏟아 낸 선수였으니까.
한데 오랜만이라니.
이강진이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제퍼슨 리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공간에 얽매이지 마."
"뭐라고?"
"공간을 향한 패스만 노리면, 거기에 매몰되게 되어 있어. 어떻게든 완벽한 스루패스만 찔러 넣을 생각에 간단한 패스는 잊어버리거든."
이강진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제퍼슨 리를 바라봤다.
대체 왜 자신에게 저런 말을 한단 말인가?
그 시선에 제퍼슨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뭐, 옛정이 있어서 부린 오지랖이야."
제퍼슨은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좀 이상한데."
상대팀 선수에게 경기 중에 조언이라니?
또 언제 본 적 있다고 옛정을 운운하는 것인가.
이상하게 생각하던 이강진은 잠시 멈칫했다.
'공간에 매몰되지 말라고?'
그저 이상한 녀석의 오지랖이라고 여기기에는, 다가오는 느낌이 남달랐다.
이강진은 곰곰이 그 말을 머릿속에서 되새겼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에게 공이 도달했고, 늘 그렇듯이 공간을 향해 스루패스를 찔러주려던 순간, 멈칫했다.
'내가 보는 공간은, 이미 상대 선수도 보고 있어.'
이거였다.
계속해서 막히는 이유.
역습 한 방으로 첼시에게 일격을 먹이기 위해서, 이강진은 계속해서 공간을 노렸다.
하나, 자신이 보는 공간을 상대 선수도 볼 수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그래서 계속 막힌 것이다.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이강진은 스루패스가 아니라, 원톱 스트라이커와 짧고 빠른 원투패스를 주고받았다.
순간적으로 바뀐 플레이.
그를 귀찮게 마킹하던 올리버가 일순 당황해 길을 잃는다.
이강진은 주저 없이 돌파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리턴패스.
'열렸다!'
스루패스를 차단하기 위해 다소 거리가 벌어졌던 수비라인.
이강진은 뭐에 홀린 것처럼 본능적으로 슈팅을 때렸다.
뻐엉!
[오! 발렌시아의 추격골이 터집니다! 이강진 선수! 원투패스를 주고받다가 망설임 없이 중거리 슛을 터뜨립니다!]
'이거다!'
이강진은 발끝에서 머리까지 전해지는 전율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상태를 단번에 파악하고 조언을 던진 제퍼슨 리를 바라봤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리고 이강진은 이내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이 골을 터뜨렸는데, 상대팀이 득점을 했는데, 마치 장하다는 듯이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는 제퍼슨을 보고.
'이상한 놈이야.'
***
"도대체 왜 웃어? 내가 쟤를 놓친 게 웃긴 거야?"
올리버의 억울한 표정에 난 애써 웃음을 감췄다
내 예상보다, 회귀 전 이강진의 수준과 비교해 지금이 훨씬 떨어져 있었다.
아마 내가 없어서겠지.
내가 있었다면 치열한 국대 주전 경쟁 때문에 더 성장했을 것이다.
회귀 전보다 아직 성장이 덜 이뤄진 상태.
그래서 나도 모르게 오지랖을 좀 부렸다.
한데 그게 내 동료들에게 이상하게 비쳐졌나 보다.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도 걸린 거야?"
"아니, 전혀."
"상대팀이 골을 넣었는데 실실 웃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야."
이런.
이러다가 오해를 받겠다.
하면, 오해를 풀어야지.
***
[오도이의 날카로운 크로스! 제퍼슨 리, 뛰어 오릅니다. 아니, 아니요! 날았습니다! 맙소사! 날았어요!]
2년 전, 제퍼슨의 서전트 점프 기록은 96cm였다.
그러나 지금은 103cm.
한마디로 그는 남보다 머리 하나만큼은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었다.
[Oh, Lovely Finish! 제퍼슨! 머리로 꽂아 넣어 버립니다! 엄청난 헤더입니다. 미사일 같은 헤더입니다! 아름다운 득점이에요! 아름다운 헤더골이에요!]
제퍼슨이 올리버를 보며 웃었다.
"해트트릭할 생각에 웃었던 것뿐이야."
[제퍼슨 리! 챔피언스리그 데뷔전을, 해트트릭으로 장식합니다. 유럽이, 아니 전 세계가 이제 이 선수를 주목해야겠네요! 제퍼슨 리가 챔피언스리그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널리 알립니다!]
< 133. 스톡홀름 증후군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