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스톡홀름 증후군 (2) >
제퍼슨을 바라보는 한국팬의 마음은 애증이 뒤섞여 있었다.
한국계 선수로 프리미어리그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애정어린 시선이 향했다.
검은 머리 외국인, 한국계 외국인을 다른 외국인과 똑같다고 치부하는 사람도 있지만, 모든 이가 그렇지는 않다.
대표적인 예로는 미식축구의 하인스 워드, 여자프로골프의 미셸 위가 한국에서도 꽤 인기를 얻어 화제가 된 인물이었다.
비단 스포츠계뿐만 아니라 연예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계 유명 배우는 언제나 한국에서 화제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한국계가, 한국에 대한 애정을 보여 주는 장면이 노출된다면 더 그렇다.
<제퍼슨 리 한국어 팬서비스ㄷㄷㄷ;;>
런던으로 첼시 경기를 관람하러 간 한국팬이 찍은 영상들은 각종 축구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가장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ㄴ제프 그냥 토종 한국인 수준인데
ㄴ말투 봐. 금방 야민정음까지 썼음ㅋㅋㅋㅋ
ㄴ리얼 네이티브ㅋㅋㅋㅋ
ㄴ한국에서 26년산 나보다 한국말 잘함ㅋㅋㅋㅋ
제퍼슨이 한국어로 인사하는 장면, 팬서비스해 주는 동영상에는 관심이 폭발했다.
심지어 사인해 줄 때 한국어로 고맙다거나, 사랑한다거나 하는 글씨를 써 주는 일도 있었다.
ㄴ이제부터 우리 형은 제프다
ㄴ호동생들 썩 꺼지쇼ㅋㅋㅋ
ㄴ제프 아직 19살인데?
ㄴ축구 잘하고 돈 잘 벌면 형이지
아무리 핏줄만 한국계이고, 국적은 외국인 선수더라도, 이렇게 미디어에 보이는 모습이 호감이면 제퍼슨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장, 그리고 한국이라는 결코 무시하지 못할 시장에서 제퍼슨이란 이름이 가지는 무게감은 타 선수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현재 EPL에서 유니폼이 가장 많이 팔린 선수가 제퍼슨이니, 오죽하겠는가.
어쨌거나 제퍼슨을 향한 한국팬의 마음은 일단 애정이었다.
그러나 최근 한국이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흔들리는 모습이 보이면서 아쉬움이 뒤따르고 있었다.
어찌어찌 본선 진출권은 따낼 수 있으리라고 여기고는 있지만, 제퍼슨이 만일 '한국 국적'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당연히 있긴 마련이다.
[대한민국, 이란에 1대 1 무승부! 월드컵 본선 진출 아직 안심 못 해.]
ㄴ솔직히 제퍼슨 리 한국 국대였으면 이란이고 일본이고 다 짓밟고 본선 확정 지었을 듯
ㄴ모름 리그에서 개잘해도 국대서 죽 쑤는 선수가 얼마나 많은데
ㄴ메시가 아직도 대표팀 성적으로 개까이는데ㅋㅋㅋㅋ
ㄴ? 제퍼슨 미국 A매치 7경긴가 8경기 연속골임
ㄴ응 다 ㅈㅂ팀 양학임
ㄴ멕시코(ㅈㅂ팀)
ㄴㅋㅋㅋㅋ솔직히 우리가 멕시코랑 붙으면 6대 0, 6대 1로 쳐 바를 수 있냐
ㄴ갓직히 캉진 리에 제퍼슨 리 조합 보고 싶지 않냐
ㄴ그것이 이뤄졌습니다
ㄴ캉진 리 VS 제퍼슨 리 ㄷㄷㄷ
ㄴ제발 한국인이면 발렌시아 응원합시다.
그리고 한국의 축구팬들이 주목하는 경기가 다가왔다.
<2021-22시즌 챔피언스 리그 G조 1차 경기>
발렌시아 VS 첼시
***
[제퍼슨 리를 막을 비책을 구하는 발렌시아.]
[발렌시아 전력 분석관들, 런던에서 대거 목격]
[익명의 모 EPL 수비수, '제퍼슨을 막는 법? 총으로 쏘는 것밖에 없다.' 웃음]
발렌시아 감독은 머리를 박박 긁었다.
이번 발렌시아의 목표는 최소 16강이다.
최대 8강 이상까지 내심 바라고 있었다.
자신감을 충분히 가질만했다. 발렌시아는 점차 완성된 팀이 되고 있었다.
최근엔 유로파 4강에 진출했다. 스페인 국왕컵을 바르셀로나와 레알마드리드를 꺾고 우승했으며, 라리가 4위권 경쟁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이 팀이 더 한 발짝 나아가려면 챔피언스리그에서의 성적이 필수다.
"갈라타사라이 원정은 지옥이야. AS 모나코도 쉽게 볼 수 있는 팀이 아니고. 첼시는······."
발렌시아 감독은 말끝을 흐렸다.
하나같이 쉽지 않은 팀이다.
특히 첫 경기, 첼시가 가장 문제였다.
"제퍼슨 리. 어디서 이런 괴물이 나타난 거지?"
명문 구단에는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비대한 전력 분석팀이 있다.
감독은 라리가에서 잔뼈가 굵은 전력 분석팀의 보고서를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제퍼슨 리를 막기 위해선 모든 전술과 공격을 포기해야 한다.
한마디로, 본래 갖고 있던 모든 색체와 전술을 버린 뒤 제퍼슨만 막으라는 얘기였다.
"도대체 우리 팀을 뭘로 보고!"
자존심 상하는 얘기였다.
하나 감독은 보고서를 내팽기칠 정도로 무지한 위인이 아니었다.
직접 런던으로 가서 제퍼슨의 경기를 지켜봤다.
그 결과 전력 분석팀의 보고서가 가장 좋은 방법이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완벽한 피지컬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현 축구선수 중에 최고 수준이다.
공중 경합 상황에서 이겨 내는 방법이 없다. 수비수들은 제퍼슨과 부딪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쓰러진다. 차라리 쓰러지는 정도라면 낫다. 그가 본 몇몇 선수들은 '날아갔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기술적인 면모는 더 두드러졌다.
스텝오버와 팬텀드리블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은 차치하고, 그 괴상한 고스트 스텝과 제퍼슨 턴, 그리고 백스텝 스킬은 보고 기함했다.
"저게 축구선수야? 저런 움직임이 말이 되냐고!"
이해할 수 없었다.
프리미어리그의 내로라하는 수비수들이 나가떨어지는 모습은 정말 미스테리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고 있는, 친분이 있는 수비수들에게 물어봤다.
"제퍼슨을 어떻게 막아야 하지?"
그들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제퍼슨이요? 맙소사. 그 녀석을 막으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전 그 자식의 입을 뭉개버릴거예요."
"고민중 이에요.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면 최소 두 번은 그 자식을 막아야 하니까. 다른 리그로 갈까 생각중입니다."
"반칙으로라도 왜 안 막냐고요? 슬라이딩 태클을 하다가 제 발이 부러질 것 같더군요. 그 자식은 몸이 강철로 되어 있습니다."
자칫 과장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과한 표현.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심지어 제퍼슨이란 이름만 얘기해도 몸을 부르르 떠는 선수도 있었다.
"도대체······."
감독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라리가의 모든 팀에겐 하나의 전술이 있었다.
'오로지 메시를 막는 방법.'
라리가 팀들은 어쩌면 가장 힘든 시기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리오넬 메시라는 선수를 매 시즌 상대해야 하니까.
그러다 보니 수많은 분석이 나오고, 어느 정도 오로지 메시만을 막는 전술 방식이 만들어졌다. 물론 100% 막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무승부를 거둘 확률, 또는 승리를 할 확률을 높여 줬다.
감독은 제퍼슨 리를 상대하는데, 적어도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렇다고 공격을 포기해선 안 되지. 우리는 홈경기니까. 강진이와 스트라이커만 앞에 세운다."
이강진.
대한민국 부동의 플레이메이커이자, 현재 발렌시아의 핵심 자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그에 대한 신뢰도가 엄청 높았다.
번뜩이는 순간적인 패스 센스는 기가 막혔으니까.
어찌어찌 제퍼슨을 막다가, 딱 한 번 이강진에게 기회가 온다면.
어쩌면 가능한 경기일지도 모른다.
"한번 막아 보자고."
감독의 얼굴에 굳은 결의가 어렸다.
***
챔피언스리그 첫 경기다.
발렌시아의 에스타디오 데 메스티야에는 첼시의 원정팬이 꽤 많이 왔다.
"The Blues!"
원정섹터에서 목이 갈라질 정도로 소리치는 열정적인 팬이다.
"올리버. 저번 경기처럼만 해."
올리버는 굳은 얼굴로 터널에 서 있다가, 내 말에 애써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다.
"문제없지. 그거 봤어? 내가 피흘리면서 포효하는 사진이 대문짝 하니 실려서 가판대에서 불티나게 팔려 나가더라고."
"응. 멋지게 나왔더라."
"흠. 다음 잡지 모델 컨셉은 야성미 넘치는 남자로 할까 봐."
"좋아. 그러면 나랑 웨이트 트레이닝 같이 하는 게 어때?"
그러자 올리버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는다.
"혹시 아직도 나한테 불만 있어?"
조심스러운 물음에 난 그저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이다.
적어도 축구에 대한 열정은 어느 정도 살아난 것 같다.
어차피 그의 포지션은 캉테의 백업.
이 정도만 해도 만족스럽다.
션 올리버의 역할은 중요하다. 우리팀을 논할 때 캉테를 빼고 얘기할 수 없다. 그가 캉테의 공백을 얼마나 메꿀 수 있냐가 시즌 초반의 향방을 가른다.
오늘 발렌시아의 포메이션은 4-4-1-1이다.
내려앉은 수비와 미드필더 라인. 그리고 툭 튀어나온 원톱과 그 밑의 플레이메이커 이강진.
"흠. 잘해 주려나."
뭔가 묘한 배덕감이다.
우리 팀이 이기기 위해선 강진이가 못해야 하는데,
한때 국대 동료였던 만큼, 잘해 주길 바라는 묘한 마음까지.
"뭐 강진이가 잘하고 승리는 우리가 하면 되지."
암.
이기면 장땡이지.
***
[발렌시아와 첼시의 챔피언스리그 G조 첫 경기가 시작됩니다!]
[첼시는 여전히 가장 잘하는 포메이션을 들고 왔습니다. 4-2-3-1의 포메이션이네요. 제퍼슨 리라는 이름이 유난히 위험해 보입니다.]
[제퍼슨 리의 챔피언스리그 첫 출전입니다만, 그의 얼굴에 긴장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네요.]
[반면 발렌시아는 그간의 전술을 버리고 새로운 전술을 들고 왔습니다. 4-4-1-1-의 비교적 수비적인 전술입니다.]
[첼시의 강력한 공격력을 막기 위해, 일단 역습을 고려하겠다는 것이죠.]
경기는 시작하자마자 치열했다.
발렌시아가 어떤 방법을 들고 왔는지는 경기 시작 5분 만에 알 수 있었다.
삐빅!
[시작부터 치열하네요! 양팀 선수들, 중앙에서 서로 적극적으로 볼을 향해 싸우고 있습니다!]
시작부터 양 팀은 미친 듯이 부딪쳤다.
[발렌시아의 하드워커들이 초반부터 투지 있게 플레이합니다!]
보통 라리가 팀들은 거친 플레이를 선호하지 않는다.
빠른 패스워크로 유기적인 플레이를 시도한다.
그러나 오늘의 발렌시아는 달랐다.
발렌시아의 두 중앙 미드필더는 적극적으로 수비에 임했다. 태클과 거친 바디체킹, 끊임없이 울리는 휘슬에도 불구하고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오히려 당황한 건 첼시였다.
"오버페이스 아니야?"
차분한 하베르츠마저 그런 소리를 내뱉을 정도로.
과한 활동량과 저돌성.
만일 캉테가 있었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주도권을 쥘 수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올리버가 그 수준은 아니지 않은가.
[발렌시아가 작정하고 나왔군요. 원톱을 제외하고 모두 센터서클 밑으로 내려가 미친 듯이 태클하고 있습니다!]
10분 동안 슈팅 하나가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서로 뺏고 빼앗는 끊임없는 싸움.
양 팀의 파울이 순식간에 두 자릿수를 돌파할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카이 하베르츠가 공을 잡았다.
동시에.
[맙소사! 발렌시아의 미드필더 세 명이 동시에 압박하네요! 이강진 선수까지 후방으로 내려와 거칠게 밀어붙입니다!]
하베르츠가 공을 잡자마자 선수들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순간적인 공간을 지워 버리는 압박 플레이.
[하베르츠, 순간적으로 당황합니다!]
[완벽한 봉쇄에요. 발렌시아의 압박이 통하고 있습니다!]
차분한 하베르츠마저 몸이 굳어질 정도로 깔끔한 압박이었다.
"좋아!"
발렌시아 감독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캉테가 없는 첼시를 막기 위해선 하베르츠의 봉쇄가 필수적이다.
제퍼슨 리에게 가장 위협적인 패스를 뿌려줄 선수를 애당초 봉쇄해 버리면 되는 일 아닌가.
순간적으로 좁혀 오는 압박에, 하베르츠는 입술을 깨물었다.
패스를 보내 줘야 할 길이 보인다.
하나 급작스럽게 들어오는 압박에 패스가 흔들렸다.
뻐엉!
'길다!'
너무 힘이 들어갔다.
심지어 방향마저 흔들렸다.
원치 않았던 궤적으로 날아가는 롱 패스.
하베르츠는 손을 들어 올려 저 멀리 제퍼슨에게 사과하는 제스처를 취하려 했다.
그러나 그때 변수가 발생했다.
"Yeaaaaaaaaaaaaaa!"
"Oh Fucking god!"
누구도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스퍼트를 터뜨리며 공을 향해 냅다 달리기 시작하는 제퍼슨.
[제퍼슨이 달립니다! 오, 맙소사! 엄청난 스피드입니다! 제퍼슨이 볼을 향해 전력 질주하는데, 그 누구도 저지하지를 못 합니다!]
센터서클 바로 위에서부터, 우측 코너라인까지 전력 질주하는 제퍼슨 리의 속도는 시각적인 쾌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저걸 잡는다고?"
"이건 사기야!"
발렌시아 관중들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탄식을 터뜨릴 때.
아슬아슬하게 코너라인에서 공을 잡아챈 제퍼슨은 우아한 스킬로 볼의 방향만 툭 바꿔 놓았다.
"Wuuuuaaaaa!"
"Blues! Blues!"
그리고 코너라인에서 페널티 박스 쪽으로 스피드를 살려 미친 듯이 달려나갔다.
"Wuaaaaaaaaaaaaaaaaaaa!"
그걸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시속 445km로 달리는 부가티의 풀 악셀이 이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제퍼슨의 폭발적인 스피드는 달려드는 수비를 바보로 만들었다.
아니, 그건 미친 짓이다.
덤프트럭이나 다름없는 하드웨어다.
그러나 스피드는 부가티다.
그걸 수비하기 위해 달려든다고?
빠악!
"커헙!"
교통사고다.
덤프트럭에 달려든 발렌시아의 센터백은 문자 그대로 날아가듯이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스피드를 단 조금도 죽이지 않은 채.
반박자 빠른 슈팅이, 단단했던 발렌시아의 빗장을 열어젖혔다. 아니, 찢어 버렸다.
뻐엉!
"Yeaaaaaaaaaaaaaa!"
[맙소사! 골입니다! 골! 각도가 없는 무각 지대였습니다. 하지만 제퍼슨의 감아차기 슛에 그대로 골문이 열립니다!]
골대 오른쪽에서 때려 버린 무각 슈팅은, 완벽하게 휘어지면서 골문을 갈라 버렸다.
그 엄청난 득점에 발렌시아 골키퍼는 아연실색했다. 발렌시아 홈관중도 차마 뭐라 말하지 못하고 그저 머리를 부여잡았다.
반면, 첼시의 원정팬들은 늘 그렇듯이 웃으며 외쳤다.
"LEE Will, LEE Will Kill You!"
< 132. 스톡홀름 증후군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