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131화 (131/258)

< 131. 스톡홀름 증후군 (1) >

쏟아지는 환호성.

"좋았어! 잘했어!"

"올리버! 올리버! 올리버!"

이런 감정은 언제였던가.

귀가 먹먹할 정도로 함성이 울리고 관중이 자신의 이름을 연호한다.

올리버는 부르르 떨었다.

짜릿한 희열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건, 좋다고 따라다니는 여성팬이 대다수였다. 경기장에서 이런 격렬한 환호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색다르다. 피가 들끓는 뜨거운 기분이 전신을 관통한다.

'어렸을 때, 공 잘 차면 아버지가 저렇게 소리치면서 잘했다고 얘기해주셨지.'

제퍼슨의 컷백 크로스.

수비가 걷어내려는 움직임이 한발 빨랐다. 처음엔 포기하려 했었다. 도저히 먼저 발을 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하지만 그때 제퍼슨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5년 후에 자신은 과연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그래서 몸을 날렸다.

본능적으로 말이다.

발을 갖다대려면 늦을 거 같아서, 그냥 다이빙 하듯이 머리를 갖다 댔다.

'축구를 싫어했던 건 아니지.'

좋아했었다.

어릴 때부터 재능 있다고 치켜세워 주는 주위 사람들.

인정받는다는 기분, 남들의 관심을 독차지한다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축구는 너무 힘든 운동이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훈련. 치열한 경쟁.

지쳐갈 수밖에 없었다. 힘들어서 겉돌기 일쑤였고, 잘생긴 외모 덕택에 다른 분야에서 인기가 더 많아졌다. 현역 프리미어리그 선수라는 프리미엄까지 붙어서, 시작한 패션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어느덧 축구는 그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해졌다.

훈련은 그저 일상의 지루한 반복.

경기는 뛰어도, 뛰지 않아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렇게 무기력해진 상황에서 제퍼슨의 통렬한 충고는 뼈아팠다.

그래서 뛰었다.

컷백 크로스를 향해 몸을 던졌다.

몸이 시키는 대로.

그 옛날 유스 시절 물불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뛰었을 때처럼.

시선이 제퍼슨에게 향했다.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리는 피가 시야를 가리지만,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그를 바라보면서 작게 미소 짓는 제퍼슨의 얼굴을.

그 미소를 보자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뿌듯한 감정이 밀려왔다.

'아, 카메라.'

많은 카메라가 자신을 향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올리버는 마치 우수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본성은 어디 안 가는 법이었다.

***

"또 폼 잡네."

피 흘린다고, 주심이 나가서 치료받으라는 말도 무시한 채. 카메라 앞에서 온갖 폼을 잡는 올리버다.

뭐, 저게 올리버 답지.

첫 골이 터지자 첼시 팬들은 박장대소하면서 토트넘 원정팬을 조롱하기 바빴다.

첼시팬은 토트넘을 극도로 싫어한다.

정확히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여러 런던 팀 중에, 유난히 토트넘을 싫어하는 건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케인! 바지에 똥이라도 쌌냐! 뛰는 꼬라지가 꼭 우리 치매 걸린 할머니를 보는 것 같네!"

음, 이건 한 5점짜리.

"수탉 놈들아! 보행기 타고 다니는 우리 어머니가 너희보단 더 잘 뛰겠다!"

오, 이건 7점.

갖가지 욕설이 쏟아진다.

홈경기의 이점이기도 하고.

아무리 멘탈이 탄탄한 선수여도, 5만 명이 끊임없이 야유하고 욕설을 쏟아 내면 흔들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기습적인 실점으로 정신이 흔들리는 틈을 타, 우리는 달렸다.

"제프!"

풀리시치는 드리블도 꽤 괜찮게 하는 편이다.

특히 풀백이 약한 토트넘 상대로는 잘 통했다.

하나, 베르통언의 라인 컨트롤과 잘 구성된 수비블록은 박스 안으로의 돌파를 불가능하게 했다.

"이쪽!"

우트가 외친다.

오른쪽에서 페널티 박스 중앙, 바깥쪽으로 향하는 움직임.

그러면 나는 슬그머니 오른쪽으로 빠진다.

순간적인 스위칭.

풀리시치의 패스가 우트에게 향하는가 싶더니, 순간적으로 빠져나가는 나에게 흘러들어온다.

수비들이 일순 우왕좌왕했다.

"Shit!"

참고로.

우트는 팀에서 나하고만 친하다.

나한테만 엉겨 붙거든. 다른 선수들한테는 딱딱하게 군다. 그 때문에, 우트가 패스를 달라고 해도 풀리시치의 패스는 내게 왔다.

그것이 수비진에게 혼란을 줬다.

우트의 빠져나가는 움직임은 좋았고, 자신에게 달라고 크게 소리쳤으니까.

자연히 수비의 시선이 거기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속이려고 한건 아닌데, 수비들이 다 속은 것이다.

뒤늦게 다비손 산체스가 몸을 날리지만.

뻐어엉!

골대 오른쪽, 각도가 극히 좁은 상황.

골키퍼가 좁혀 올 때, 난 망설임 없이 슈팅을 때렸다. 골키퍼의 머리 위로 빠르게 지나가는 강력한 슈팅이 골네트를 찢을 듯이 꽂혔다.

"Bravo!"

"The Bluesssssssss!"

"제퍼슨이 수탉 놈들을 켄터키 후라이드로 만들어 버렸군!"

"챔피언스리그? 썩 꺼져! 너희들이 갈 무대가 아니니까!"

"새로운 BIG4는 무슨! 너희들한테 어울리는 건 유로파야!"

***

"좋아! 그대로 박살을 내 버리라고!"

필마르크 감독은 좋은 경기력에 반색하며 외쳤고.

토트넘 감독은 분노를 표출했다.

"정신을 차리란 말이다! 너희들 때문에 원정 온 팬들이 고개를 들지 못해! 제발 집중해!"

토트넘 선수단 사이엔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새로 바뀐 감독은 아직 팀을 장악하지 못했다.

또한, 몇몇 선수가 현 주급에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들의 짠돌이 구단주는 재계약 논의를 하면서 어떻게든 금액을 낮추려 노력했다.

때문에 하프타임 때 감독이 아무리 소리쳐도, 그들의 눈에 빛이 반짝이지는 않았다.

"풀리시치가 내게 패스를 안했어."

"네가 나한테 하는 것의 절반만큼 다른 선수들에게 다가간다면, 패스를 해 줄 거야."

"흠. 하지만 나는 제프가 좋은 걸."

"그거 좀 오해의 소지가 깊은데, 우트, 제발 그러지마."

제퍼슨이 손사래를 쳤다.

첼시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화기애애했다.

2대 0으로 앞서가고 있는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리고 캉테의 백업으로 출전한 올리버의 데뷔 골이 나왔으니, 분위기는 더없이 좋았다.

반면 토트넘은 엉망이었다.

'빌어먹을. 이딴 주급만 주면서 집중하라고?'

'이렇게 뛰고 싶진 않아.'

'감독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감독 교체, 이적시장에서의 실패, 2년 전 챔피언스리그 준우승팀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부족한 주급체계까지.

토트넘 선수단의 불만은 누적되어왔고 그것이 점점 표출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토트넘은 현재 리그에서 2승 1패의 준수한 성적이다.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그것이 필드에서 태업까지 이어질 정도로 프로의식이 형편없는 팀은 아니다.

다만 문제는 제퍼슨이 또 공을 잡았다는 것이다.

"막아! 거기 압박해! 공간 내주지 마!"

1년 전부터 토트넘은 제퍼슨만 만나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제퍼슨 첼시 입단 이후, 토트넘은 첼시와의 맞대결에서 전부 패배했다.

제퍼슨은 맞대결에서 모두 골을 터뜨렸고, 그가 넣은 득점은 늘 결승골이 되었다.

"제-퍼-슨!"

지긋지긋한 저 외침.

"LEE Will, LEE Will Kill you!"

온몸을 빳빳하게 만들어 버리는 응원가.

베르통언을 비롯한 수비진은 아주 죽을 맛이었다.

"제기랄!"

제퍼슨이 공만 잡으면, 프리미어리그에서 내로라하는 그 수비진이 바보가 되어 버리는 기분이다.

흐물흐물하게 움직이다가, 예측 못 하는 범위로 방향 전환해서 수비들을 모조리 바닥에 나동그라지게 만들 땐, 짜증 나다 못해 치욕적이었다.

'차라리 첼시에서 이적 제안이 왔으면 망설임 없이 떠났을 거야.'

그랬다면 제퍼슨을 상대할 일이 없었을 테니까.

특히 골키퍼 요리스는 치가 떨렸다.

'제퍼슨의 유효슈팅에 가장 많은 골을 내준 골키퍼 <위고 요리스>'라는 기사를 봤다.

그만큼 요리스는 제퍼슨의 슈팅에 쥐약이었다.

"옆에! 옆에 드리블 칠 공간 주지 마!"

요리스의 외침과 함께 수비들이 황급하게 자리를 잡지만,

이미 제퍼슨이 공을 잡은 순간 몸이 빳빳하게 굳은 그들의 반응 속도는 늦었다.

[제퍼슨 리! 앞을 가로 막는 수비수를 바디체킹으로 그냥 밀어 넘어뜨립니다!]

해설의 목소리가 고조되었다.

달려들던 수비수를 그냥 몸으로 밀어 넘어뜨리는 광경은 축구에서 의외로 보기 힘들었다.

완벽한 힘의 차이였다. 한번 불이 붙은 제퍼슨의 드리블 돌파는 멈추지 않았다. 순간적인 팬텀 드리블이 터져 나오며 수비수 하나가 중심을 잃고 나동그라졌다.

공간이 열렸다.

제퍼슨은 반박자 빠르게 슈팅을 시도했다.

"흥! 웃기는 소리!"

요리스가 소리치면서 몸을 날렸다.

이미 예측한 코스다.

반박자 빠른 슈팅? 하면 반박자 빠르게 움직이면 될 일 아닌가.

하지만 예상한 코스로 슈팅은 날아오지 않았다. 제퍼슨이 때리는 척, 페이크를 넣은 후 공을 툭 찍어 차올린 것이다.

툭!

[제퍼슨의 찍어 차올리는 패스! 중앙으로 파고든 마크 우트의 발끝에 닿습니다! 요리스 골키퍼! 역동작에 걸렸습니다!]

"Fuck!"

전혀 예상치 못한 패스.

요리스가 황급히 몸을 돌리지만, 역동작에 걸린 움직임.

그러나 그는 몸에서 비명을 내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끝까지 움직였다.

더는 실점을 내줘서는 안 된다는 간절한 심정이었다.

하나.

[우트! 강력한 슈팅! 아! 접었습니다! 맙소사, 왼쪽의 풀리시치에게 내주는 패스! 풀리시치! 비었어요! 골입니다! 고오오올!]

다시 한번 슈팅 페이크.

우트마저 페이크를 내주면서 요리스를 제대로 물 먹이고, 옆에서 달려오는 풀리시치에게 내줬다.

비어진 골문을 향해 툭 굴러 들어가는 완벽한 득점.

"개 같은!"

연 이은 슈팅 페이크에 무너진 요리스는 그저 허망하게 잔디를 뜯었다.

득점은 풀리시치가 기록했다.

그러나 요리스는 알았다.

애당초 제퍼슨이 아니었다면, 이런 실점은 나오지 않았으리라.

그의 원망스런 시선이 제퍼슨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받는 제퍼슨은······.

히죽.

"이 맛에 축구하지. 암."

괴상하게 웃을 뿐이었다.

***

<2021-22시즌 프리미어리그 테이블>

1위 첼시 4승 0무 0패, 승점 12점

2위 맨체스터 시티 3승 1무 0패, 승점 10점

3위 리버풀 3승 1무 0패, 승점 10점

4위 아스날 2승 2무 0패, 승점 8점

5위 레스터 시티 2승 2무 0패, 승점 8점

6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2승 1무 1패 승점 7점

7위 아스톤 빌라 1승 3무 0패, 승점 6점

8위 토트넘 핫퍼스 2승 0무 2패, 승점 6점

경기는 첼시의 3대 0 승리로 끝났다.

이로써 첼시는 런던 팀을 상대로 거의 전승에 가까운 기록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로 제퍼슨 입단 이후로 말이다.

런던의 왕이라고 불렀던 킹 앙리 이후, 그 자리를 제퍼슨이 차지하는 건 이제 토트넘도, 아스날도, 그리고 웨스트햄도 뭐라 이견을 낼 수 없을 정도였다.

[첼시 3 VS 0 토트넘.]

[제퍼슨 리의 1골 1어시스트, 1기점. 그야말로 완벽한 플레이.]

4라운드가 끝나면서, 제퍼슨은 4경기 연속 득점이란 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거침없는 기세였다.

매 경기 골을 넣었고, 넣은 골마저도 전부 다 필드골이다.

이게 가장 놀라운 점이다.

"첼시의 프리키커는 윌리안이고, 페널티킥 키커는 조르지뉴야. 그런데 제퍼슨은 득점 1위지."

2020-21시즌 득점 43골.

필드골 41골, 프리킥 골 2골.

2020-22시즌 리그 4라운드, 8골.

전부 필드골.

저번 시즌 해리케인이 30골을 넘기며 득점왕 경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에게 PK와 프리킥을 몰아줬기 때문이다.

실제 필드골만 따지면 22골 정도였다.

반면 제퍼슨은 두 골을 빼고 모두 필드골이었다.

"21세기, 마지막 '정통 스트라이커'다!"

몇몇 호사가들은 그렇게 떠들 정도였다.

하나, 그걸 아직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21세기 현존 최고의 스트라이커라는 칭호는 아직 과분하다는 것이다.

그 칭호에 어울리기 위해선, 챔피언스리그와 월드컵이라는 가장 국제적인 메이저 대회에서의 활약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제퍼슨은 그 지긋지긋한 회의론자들에게 일격을 먹이기 위해.

발렌시아 행 비행기에 올랐다.

< 131. 스톡홀름 증후군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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