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잘생긴 놈은 매가 약 (2) >
챔피언스리그 조추첨이 끝났다.
EPL에 진출한 4개 팀의 표정이 볼 만했다.
맨시티는 꽤나 좋은 조에 뽑혔다.
맨시티를 제외한 나머지 3팀이 고만고만한 수준이니까. '맨시티 빼고 선착순 1팀!' 이란 게 일반적인 의견이다.
토트넘은 애매모호한 표정이다.
다들 서로 비슷한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클럽들의 모임.
각자 머릿속이 복잡할 거다. 의외로 죽음의 조다. 압도적인 강자가 없으니까.
그에 반해 리버풀은······.
이번 시즌 최악의 조다.
PSG, AT마드리드, 그리고 리버풀이라니
그에 반해 우리 팀은 꽤 만족스럽다.
발렌시아, AS 모나코, 갈라타사라이.
맨시티처럼 우리도 상당히 괜찮은 조편성이다.
오히려 여기서 가장 약팀으로 꼽히는 갈라타사라이가 까다롭다.
터키 원정은 죽음의 원정길로 유명하니까.
발렌시아와 AS 모나코는 냉정하게 말하면 우리 팀보단 한 단계 아래다. 원정거리도 가깝고.
그러나 챔피언스리그는 방심해선 안 된다.
늘 이변이 수도 없이 일어났고, 그 대단했던 퍼거슨의 맨유도 조 3위로 유로파로 직행한 적이 있는 대회가 아닌가.
"강진이가 아직 발렌시아서 뛰지?"
회귀 전, 꽤 친했던 국대 동료선수와 재회도 예정되었다.
이강진.
대한민국이 낳은 불세출의 스타.
그리고 내 포지션 라이벌.
사실 회귀 전에 나이 차이도 몇 살 나지 않았고, 포지션도 겹쳐서 사이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더구나 난 부상과 유리 몸이란 약점 때문에 국대 주전 싸움에서 밀리기도 했고.
하나,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어가면서 그런 섭섭함은 다 사라졌었다.
나도 내 위치를 알게 된 거고, 강진이 녀석은 워낙 잘했으니까.
서로에게 자극이 되는 좋은 경쟁자였다.
"골든 보이 후보 명단 보고 있는 거야?"
"응?"
"이 친구, 이번 골든 보이 최종 20인이잖아."
"그냥 다음 상대라서 한번 찾아봤어."
"흐흐. 어차피 올해 골든 보이는 네가 받을 텐데 뭘."
뭐, 그럴 수도.
현재 골든 보이 후보로 가장 유력하긴 하니까.
더구나 챔피언스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 준다면.
아마 확정적일 것이다.
"난 챔피언스리그가 두 번째야."
샬케에서 뛰었던 우트는 챔피언스리그 경험이 있다.
"그래서 너에게 한마디 해 줄 수 있어."
뭘?
"쫄지 말라고. 아무리 큰 대회고, 별들의 무대라도. 내가 봤을 때 너만큼 잘하는 놈은 없다니까."
우트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흠.
내가 챔스 경기 앞두고 불안해한다고 생각한 건가.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조언을 건네는 우트의 모습이 웃기긴 했다.
하긴. 챔피언스리그 경험이 처음이긴 하지.
그런데.
"긴장은 별로 안 되는데?"
진짜로.
***
챔피언스리그 조추첨이 끝나고 A매치 기간이 2주 동안 시작됐다.
경기가 열리는 자메이카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필마르크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다.
-쉬엄쉬엄해라.
"네?"
-가끔 프로의식 따위는 쓰레기통에 갖다 버려도 된단다.
-그냥 놀아!
-응? 클럽 가서 술도 마시고 여자도 만나고!
-고주망태가 돼서 경기 못 뛰겠다고 하고 그냥 쉬어
-2주간 휴가를 즐기고 오란 말이야.
-제발 풀타임으로 두 경기 이상 뛰지 마!
A매치 시기가 되면 감독님은 늘 이랬다.
A매치에서 뛰다가 부상을 입고 돌아오는 선수를 보는 클럽 감독의 심정은 어떠할까.
끔찍하겠지.
저렇게 노심초사하는 감독님의 마음을 잘 다독여 줘야 한다.
"최대한 빨리 교체돼서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부상으로 아웃은 안 돼!
"걱정 마요. 넣을 건 넣고 교체해 달라고 하면, 버홀터 감독님도 어쩔 수 없을 거예요."
***
[미국, 자메이카 4대 1로 격파! 제퍼슨 리, 전반전 해트트릭 폭발!]
[36분 만에 터진 해트트릭. 제퍼슨 리, '피곤해서 빨리 골 넣고 쉬고 싶은 생각이었다.']
[미국의 버홀터 감독, '제퍼슨은 조기 퇴근할 자격이 있다.']
[전반전 45분만 뛰었지만, 제퍼슨의 영향력은 자메이카를 압도했다.]
[자메이카, 제퍼슨 리의 해트트릭에 무기력한 패배.]
***
A매치를 끝내고 돌아온 훈련장은······.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 빌어먹을 자식! 개자식!"
감독님은 당장이라도 총을 꺼내 들 것 같은 마피아처럼 화를 쏟아 내고 있었다.
슬쩍, 먼저 훈련장에 와서 내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던 우트에게 물었다.
"일단 질문이 두 개 있어. 하나는 감독님이 왜 화를 내고 있냐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네가 왜 내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냐는 것."
"앞엣것부터 대답할게. 캉테가 대표팀에서 다쳤는데, 억지로 뛰게 해서 부상이 심각해졌다는 것이 감독이 화를 내는 이유야."
"끔찍한 일이군.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네 트레이닝 복을 입으면, 너처럼 될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거든."
"그것도 끔찍한 답변이야. 우트."
"흐흐흐. 기다려. 나도 벌크업을 열심히 해서, 이 사이즈가 몸에 딱 맞게 만들 테니까."
"쯧."
우트와 대화를 길게 하면 좋을 게 없다.
뭔가 이상하게 말려 들어가는 기분이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게 좋다.
그런 그렇고, 캉테가 다쳤다고?
"멍청한 거야. 캉테는."
"아씨, 깜짝이야."
하베르츠는 역시 훈련 시작 시각에 정확히 맞춰 들어왔다.
이것도 재주다.
어떻게 초침이 딱 12시에 닿으면 훈련장에 들어오지?
"다쳤으면 다음 경기 뛰는 걸 거부해야지. 감독이 시켰다고 뛰어? 나 같으면 당장 언론에 떠들어 댈 거야. 선수 보호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니까. 캉테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이건 동감이다.
"그깟 공놀이가 뭐라고."
음. 이건 비공감.
하여튼 하베르츠의 말이 어느 정도 맞긴 하다. 다쳤으면 감독한테 못 뛰겠다고 해야지. 뭐, 내가 아는 캉테라면 참고 뛰었을 수도.
"그래서 얼마큼 다쳤대?"
"3주 정도는 아웃이래."
"큰일 났군."
"큰일 났지. 감독 표정 보라고. 지금 프랑스 축구협회에 전화해서 싸우고 있는 중이야."
"흠."
"He-----llo."
대표팀에 뽑히지 않은 션 올리버는 선수 중 가장 늦게 훈련장에 도착했다.
완전 지각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미안한 기색도 없이 헬렐레하니 웃고 있었다.
음,
잠깐만. 술 냄새가 나는 거 같은데?
"술 마신거야?"
"어젯밤에 좀 취했지. 아직 안 깬 것뿐이야. 설마 내가 아침부터 마셨겠어?"
"윽. 냄새."
"워워. 휴가였잖아? 어제까지 휴가였으니까, 한창 즐기고 와야지!"
올리버는 여전히 헤실헤실 웃었다.
생각해 보니.
우리 첼시 선수들은 참 성실한 친구들이 많았던 것 같다.
훈련에 빠지는 선수도 거의 없었고.
올리버 같은 스타일의 선수가 신선하긴 했다.
잠깐만.
캉테의 백업이······ 이 자식인데?
***
필마르크 감독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가 직접 전화해서 몸조심하라고 한 선수는 딱 두 명이다.
제퍼슨 리와 은골로 캉테.
두 명 다 없어서는 안 될 선수다.
핵심 중의 핵심.
다행히 제퍼슨은 완벽한 몸 상태로 돌아왔다. 다치지도 않았고, 체력 소모도 별로 없었다. 전반전 45분 만에 교체하려고 해트트릭을 터뜨리다니.
과연 난 놈은 난 놈이다.
문제는 캉테다.
"빌어먹을 프랑스 감독."
그 자식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선수가 약간 부상의 염려가 있으면 당연히 쉬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물론 이해는 한다.
경기가 잉글랜드전이었으니까. 캉테를 빼긴 싫어서겠지.
하지만 덕택에 캉테는 부상으로 3주간 아웃됐다.
당장 리그와 챔피언스리그 경기가 연이어 있는데, 최소 4경기는 빠지게 된 것이다.
대책을 세워야 한다.
캉테의 백업은, 현재로선 션 올리버다.
필마르크는 시선을 돌렸다.
훈련장에서 열심히 훈련하는······.
"꺄아아아! 올리버어!"
아니.
열심히 팬 서비스를 하는 올리버가 보였다.
특별히 비공개훈련이 아닌, 일반적인 훈련 같은 경우엔 팬들에게 공개가 된다.
펜스까지 찾아와 응원하는 걸 막을 이유도 없다.
하나, 필마르크는 최근 훈련을 비공개로 돌려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주, 아주 할리우드 스타 나왔네."
그는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올리버를 바라봤다.
그가 원했던 영입이 아니다.
프런트에서 영입한 선수.
잦은 스캔들로 각종 언론에 노출되는 빈도가 엄청 높은 선수다.
마케팅 측면에서도 화제가 되는 인물.
실력도 사실 나쁘지 않다.
필마르크는 그의 과거 영상을 샅샅이 찾아봤다.
실제로 아스날 유스 시절 보여 줬던 번뜩이는 모습은 감탄이 나올 정도다.
지금도 간혹 보인다.
상대의 공격 전개를 미리 읽고 움직이려는 모습이.
문제는 그 움직임이 너무 느리다는 것이고, 태클이나 차단이 안 될 것 같다 싶으면 지레 포기하는 모습이 너무 자주 보인다는 것이다.
좋은 재능을 타고 났지만,
그저 썩혀 버린 아쉬운 재능.
하나, 포기할 수는 없는 선수다.
어쨌거나 팀의 일원이고, 잘만 쓰면 충분히 제 몫을 할 선수다.
다만, 그 과정이 험난할 뿐이다.
'마음 같아선 두들겨 패고 싶지만.'
술 냄새 풀풀 풍기며 들어올 줄이야.
주급 정지로 경고를 했건만,
올리버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들지도 않는다.
하기야. 자기 사업으로 버는 돈이 축구로 버는 것보다 많을 테니까.
퍼거슨이 베컴에게 축구화를 던진 것처럼 화를 내고 싶기도 했지만, 올리버가 선수단 사이에서도 제법 괜찮은 친구란 점이 문제였다.
훈련에 열정적으로 임하지 않는 건 둘째 쳐도,
워낙 유들유들한 성격이라 그를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싫어하는 선수는 없을 정도다.
"차라리 내가 건드는 것보단, 주장이 훈계하는 게 낫겠지."
그게 낫다.
그렇게 생각한 필마르크가 아스필리쿠에타를 한쪽으로 부르려던 때.
퍼억!
"끄억!"
제퍼슨과 부딪쳐 볼썽사납게 나동그라지는 올리버의 모습이 시야에 담겼다.
"야. 거기선 그렇게 움직여선 안 되지. 막으려면 제대로 막아!"
그리고 훈련에만 들어가면,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무서워지는 제퍼슨의 험악한 표정이 보였다.
"흠."
필마르크는 아스피를 부르려던 걸 멈췄다.
아스피는 좋은 주장이지만, 강하게 선수들을 이끄는 스타일은 아니다.
뒤에서 조용히 헌신하는 스타일이다.
그에 반해 제퍼슨은 비록 주장은 아니지만, 팀 내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더구나 국가대표에선 미국의 캡틴이기도 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소리치고, 선수들을 이끈다.
질 것 같은 경기라도, 비길 것 같은 경기라도.
제퍼슨이 투입되면 바뀐다.
물론 그건 제퍼슨이 혼자서 어떻게든 골을 넣는 선수긴 했지만,
그 전에 선수들의 분위기가 확연하게 뒤바뀐다.
그런 분위기에 필마르크가 언제 한번 풀리시치를 불러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러자
'저 자식 말대로만 하면 될 것 같아요'라고 말했었다.
제퍼슨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새로 영입한 마크 우트는 거의 제퍼슨이 어미 오리인 것처럼 쫓아다니는 새끼오리 같았고,
늘 무관심하고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는 하베르츠도 제퍼슨과 호흡을 맞출 땐 눈빛이 반짝였다.
하면 이제 션 올리버만 남았다.
필마르크는 잠시 생각하다가 제퍼슨을 불렀다.
"제프!"
"네?"
필마르크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너, 싸움 좀 할 줄 알지?"
그러자 제퍼슨이 슬쩍 주위를 둘러보다 올리버를 보고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가서 맞아본 적은 없죠."
"너, 나랑 일 하나만 같이하자."
< 129. 잘생긴 놈은 매가 약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