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아직도 모르겠어? (2) >
[첼시, 노리치를 6대 0으로 대파하며 좋은 출발을 보이다!]
[제퍼슨 리 2골, 하베르츠 1골 2어시스트, 캉테 1골, 메이슨 마운트 2골 폭발!]
[노리치 감독, '첼시는 미쳤다. 선수들이 단체로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녔다. 필마르크가 도대체 어떤 마법을 부렸길래, 저런 승부욕을 가진단 말인가?']
[필마르크 감독, '궁금하면 우리 팀 수석코치로 오라.']
[카이 하베르츠, '훈련장에 남겨진 두 소년소녀의 이야기가 궁금했을 뿐이다.' 알쏭달쏭한 답변.]
***
엄청난 승리다.
노리치가 아무리 하위권이라고 한들,
홈에서는 선 수비 후 역습 전술로 강팀을 곤혹케 하는 팀 중 하나다.
한데 우리는 그걸 완전히 깨부숴 버렸다.
그냥 힘으로 찍어 누른 것이다.
심지어 클린시트까지 쟁취해 냈다.
애당초 세웠던 목표를 다 달성해 낸 것이다.
어떤 목표냐고?
그야 뭐.
"이젠 말해, 올리버."
하베르츠가 올리버에게 말 거는 건 처음 본다.
심지어 하베르츠는 제법 괜찮은 영어로 물었다.
너도 남자구나.
올리버는 자신에게 향한 시선에 의뭉스럽게 웃더니 하베르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오늘 엄청난 활약을 보여 준 너에게만 얘기해 줄게."
"우우우우우우!"
드레싱 룸에서 순간 야유가 터져 나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올리버는 능청스럽게 웃었다.
"내 입단 동기라서 그래. 너희들은 다음 경기도 이기면 말해 주지."
그 말에 더한 야유가 쏟아져 나온다.
그때 난 봤다.
한쪽에서 웃고 있는 필마르크 감독의 모습을.
허.
이렇게 동기부여를 하다니.
저건 감독이 시킨 거다. 최대한 나중에 말하라고.
어쨌거나.
올리버는 하베르츠와 함께 구석진 곳에 가서 쑥덕대다가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온 하베르츠의 얼굴은,
늘 차분하고 무표정했던 얼굴이 아니라.
아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동기부여 제대로 되네.
"난 별로 궁금하지 않아."
우트가 다가왔다.
"내가 궁금한 건 제프, 네가 어떻게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느냐지. 너의 과거가 궁금한데."
우트의 능글스러운 웃음에 이젠 헛웃음이 나온다.
난 한숨을 내쉬며 어설프게 웃었다.
"다음 경기 이기면 말해 주지."
"좋아! 동기부여 제대로 되는군!"
그가 유쾌하게 외치자.
감독님이 손뼉을 쳤다.
"여긴 감독이 필요 없겠군! 스스로들 동기부여를 제대로 하니까 말이야!"
어째······ 팀이 한 시즌 만에 이상해진 거 같은데.
***
사실 우리가 왜 그렇게 동기부여를 운운했는지는 이유가 있다.
다음 경기가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니까.
[UEFA 슈퍼컵]
바르셀로나 VS 첼시
경기장: 포르투, 이스타디우 두 드라강
챔피언스리그 우승팀과 유로파리그 우승팀이 벌이는 대회.
이것도 이벤트성이 짙은 대회이긴 하나, 커뮤니티 실드와 비교할 수는 없다.
단판 경기임에도, 유로파리그 우승과 같은 상금이 걸려 있기도 했다.
또한, 유럽 챔피언끼리의 대결이기 때문에, 꽤 화제 되는 경기이며 팬들에게도 어엿한 트로피 하나를 얻을 수 있어서 얕볼 수는 없다.
더구나 상대가 바르셀로나 아닌가.
이건 내게도 중요한 경기다.
리그와 유로파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 줬지만,
내가 현재 발롱도르 후보에 꼽히기는 어려운 일이다.
왜냐면.
챔피언스리그를 안 뛰었기 때문이지.
그리고 챔피언스리그에서의 경쟁력을 입증하기에, 가장 좋은 알맞은 상대가 바로 바르셀로나다. 챔피언스리그 우승팀이니까.
"컨디션은 어때?"
"최고죠. 180분 풀타임 뛰어도 상관없어요."
"그거 좋은 일이군. 뭔가 남다른 거 같은데? 혹시 올리버의 뒷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그런 건가?"
감독님은 내 상태를 한눈에 파악했다.
사실, 올리버의 사랑 이야기에 동기부여 받은 건 아니다.
"바르셀로나니까요."
"그렇지. 지구에서 가장 큰 축구 클럽 중 하나니까."
회귀 전.
나는 세계무대에 도전해 보지도 못하고 절망했다.
그런 나에게 있어서 바르셀로나란 클럽은 저 머리 꼭대기에 있던 팀이다.
유로파와 프리미어리그에서 수많은 강팀을 상대했지만,
챔피언스리그를 앞두고 챔스 우승팀인 바르셀로나를 상대하는 건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진짜 세계 무대에 왔다는 실감이 들기도 하고.
"긴장하지 말자고. 긴장해야 할 건 오히려 바르셀로나의 수비수들이니까."
필마르크 감독은 내가 긴장이라도 했다고 여겼는지, 어깨를 툭 치며 격려를 해 주고 지나갔다.
뭐, 긴장까지는 아닌데.
남다른 마음이긴 하다.
그때 풀리시치가 다가오며 미간을 좁혔다.
[바르셀로나, 슈퍼컵은 1.5군 멤버가 출전할 것으로 보인다.]
"이건 좀 아니지 않아?"
바르셀로나에게 일격을 먹여 주겠다며, 컨디션을 빠르게 회복해서 훈련장에 복귀한 풀리시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흠. 하긴, 그 팀이 열의를 가질 만한 대회는 아니지."
뭐, 우리 팀이 이번 시즌 리그컵을 아예 신경 쓰지 않겠다고 감독이 선수단에 말했던 것처럼.
굳이 전력을 다 내보냈다가 선수가 부상이라도 당하면 손해니까.
차라리 리그와 국왕컵, 챔스에만 집중하는 것이 낫겠지.
"음? 잠깐만. 기사 내용을 보니 꼭 그렇지는 않네."
그러면서 한 문단을 보여 준다.
[리오넬 메시는 종아리 부상으로 UEFA슈퍼컵과 리그 1라운드까지 결장이 확정되었다.]
흠. 그렇군.
"메시 하나 빠지면 1.5군이나 다름없지."
"하긴."
"물론 나머지도 괴물 같지만, 저 선수는 규격 외잖아."
실제로 빠지는 건 리오넬 메시 한 명뿐이다.
나머지는 아마 주전이 다 출전할 것.
뭐, 아쉽긴 하다.
필드에서 한번 같이 뛰어 보고 싶었지만.
기회는 많다.
챔피언스리그에서 버티다 보면 붙을지도 모르지.
어떤 식으로 상대해야 할까.
"간단하지."
"응?"
"그냥 때려 부숴."
풀리시치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내가 그냥 싸움꾼인 줄 아나.
뭘 때려 부수래······.
······음 그게 효과적일지도.
***
바르셀로나는 매 시즌 트레블을 목표로 하는 팀이다.
최근에는 그 기세가 무섭다.
저번 시즌에는 라리가와 챔피언스리그 더블이라는 업적을 달성했다.
아약스에서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4강 업적을 세웠던 에릭 덴 하그 감독은 발베르데 감독의 후임으로 바르셀로나에 부임하자마자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줬다.
노쇠화된 베테랑들의 출전을 점차 줄여 나가면서 젊은 선수들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냈다.
그래서 비교적 젊은 바르셀로나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팬들은 거친 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구상에서 가장 치열한 더비 중 하나인 엘 클라시코를 매년 두 번이나 치르니까.
웬만한 성질머리로는 팬질하기 쉽지 않다.
하나, 우리 팀의 팬 반응도 심상치 않다.
"바르셀로나를 죽여 버려!"
"드록바의 원수!"
"빼앗긴 챔피언스리그의 복수를 해야지!"
"그 빌어먹을 것들을 죽여 버려야 해!"
첼시의 올드팬들은 모두 08-09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전을 기억하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축구 역사상 최악의 오심 경기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쓴 경기기도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중립적인 처지에서 봐도 믿기지 않을 오심이 몇 개 나왔으니까.
경기가 끝나고 팀의 정신적 지주이자 영웅이었던 드록바가 카메라를 향해 온갖 폭언을 던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 이후에 토레스가 바르셀로나를 챔피언스리그에서 격침하는 엄청난 골을 보여 주며 그때의 복수를 해 주긴 했다만.
아직도 첼시팬들에겐 바르셀로나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바르셀로나라는 거대한 팀, 그리고 슈퍼컵이라는 대회 특성상.
설령 지더라도 '졌잘싸'를 할 수 있었지만,
감독님은 선수단에게 강하게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팬들의 저 성난 심리를 무시할 수 없으니까.
"우승컵을 들고 돌아간다! 영국에서 포르투까지 온 비행기 값이 더 비싼 거 알지? 바르셀로나 애들보다 더 티켓값이 비싸! 그러니까 우리가 우승컵을 들지 못하면 우리 손해라고!"
뭔 이상한 거로 동기부여를······.
하나, 선수들은 살짝 얼어붙었던 표정이 풀리는 모습이었다.
"암, 티켓값을 우리가 더 비싸게 냈지."
"첼시팬들의 항공권까지 생각하면 말이야. 우리가 더 돈을 들였어."
"그럼 트로피는 우리가 가져가야지."
의외로 감독님의 농담 섞인 말은 효과적이다.
선수들은 한두 마디 주고받으면서 긴장을 풀었으니까.
바르셀로나는 사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팀에 가깝다.
수비면 수비, 패스면 패스, 공격이면 공격.
그러나 솔직히, 이번 시즌 바르셀로나를 상대하는 게 어렵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왜냐하면.
에릭 덴 하그 감독.
대단한 능력을 보여 줬지만,
선수단과 갈등이 심해지고 있을 것이다.
노쇠화된 베테랑을 점점 라인업에서 지운 이후로, 밖에서 보는 것하고 달리 선수들과 불화가 깊어지고 있으니까.
특히 저번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 주역 선수들을 대거 라인업에서 빼면서, 그 불화는 절정에 달한다. 아마 이번 시즌 중간이 지나기도 전에 감독은 바뀔 거다.
그리고 그 불안한 시작점은 이번 경기부터일지도 모르지.
"포르투라. 여기에 오니 옛날 생각이 나는군."
선수들이 긴장을 한차례씩 푸는데.
올리버가 별안간 또 이야기를 꺼낸다.
그의 화법은 묘하다.
혼자 중얼거리는 거 같은데, 어느새 사람들의 귀를 빼앗는다.
하긴, 저런 화법이 있어야 그 수많은 염문설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겠지.
"여기서 셀레나를 만났었지. 저 해변가에서 말이야."
"셀레나? 여배우 셀레나를 말하는 거야?"
"오 맙소사!"
"늦은 밤이었어. 해변가에서 맥주 한잔 걸치고 있는데, 수영복을 입은 아름다운 미녀가 눈에 띄더군. 그래서 용기를 내서 다가갔지. 혹시 맥주 한잔같이 하겠냐고."
또 시작한다.
선수들이 어느새 모여들어 집중했다.
심지어 하베르츠는 헤드셋까지 벗어던졌다.
저 녀석 참······.
그때였다.
필드로 나가야 한다는 신호가 들어왔다.
감독님이 손을 휘저으며 얘기를 잘랐다.
"나머진 이기고 와서나 들어. 이왕이면 이기고 기쁜 맘으로 듣는 게 낫겠지? 얼른 가서 골이나 넣고 오라고!"
"그래. 경기 이기고 나서 말해주지. 어떻게 됐는지 말이야."
난 봤다.
그렇게 말하면서, 션 올리버에게 살짝 윙크하는 감독님을.
흠.
이게 션 올리버 활용법인가.
***
[경기 시작됩니다!]
중계진의 외침과 동시에 휘슬이 울렸다.
4-2-3-1의 가장 익숙한 포지션을 준비한 첼시는, 원톱에 제퍼슨 리, 양쪽 날개에 풀리시치와 오도이, 중앙에 캉테와 조르지뉴, 그리고 카이 하베르츠를 세웠다.
수비진은 에메르송, 뤼디거, 시셀도, 아스필리쿠에타였다.
그에 반해 바르셀로나는 4-3-3의 포지션을 들고 왔다.
하나같이 이름값과 실력이 대단한 선수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그래서 바르셀로나의 자신감은 대단했다.
"메시가 없어도 이기지!"
"유로파 챔피언이 챔피언스리그 챔피언을 이길 수가 없잖아!"
"영국 놈들, 질질 짜면서 돌아가겠군!"
프리미어리그에선 제퍼슨에 대한 두려움이 뼛속까지 심어졌다.
그러나 여타 다른 팀은 아니다.
그들은 직접 겪어 보지 못했다.
그저 기사와 뉴스, 그리고 하이라이트 영상으로만 접해 봤을 뿐이다.
특히 라리가 팬들은 프리미어리그 팀을 약간 얕보는 경향이 있었다.
때문에 제퍼슨의 순도 높은 활약을 크게 눈여겨보진 않았다.
왜냐.
"메시는 10년째 시즌 50골씩 넣어 주는데 말이야."
이미 제퍼슨보다 더한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고 있는 선수를 몇 년째 보고 있으니까.
[중원에서부터 치열하게 싸움이 전개됩니다! 캉테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라키티치의 압박을 벗어나고, 하베르츠에게 패스! 하베르츠! 간단한 볼 터치로 공의 방향을 바꿉니다!]
하나, 바르셀로나 관중은 이내 벌어지는 장면에 조금씩 조용해졌다.
바르셀로나의 힘은 중원에서부터 시작되는 점유율 싸움이다.
티키타카를 이룩해 낸 감독은 이제 떠났어도,
새로운 감독이 외부에서 수혈됐어도,
유소년 축구에서부터 심어져 온 그 축구가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한데 그 점유율 싸움이.
예상외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모든 곳에서 나타나는 캉테와 독일 국가대표팀의 차세대 핵심으로 불리는 카이 하베르츠의 조합.
거기에 간간이 터지는 조르지뉴의 로빙패스까지.
무엇보다 그 패스의 끝에는 가장 위협적인 공격수가 존재했다.
[카이 하베르츠의 스루패스가 단번에 통과합니다! 오! 제퍼슨 리! 제퍼슨 리가 수비수와 경합을 벌입니······? 어! 이게 뭔가요!]
그리고 바르셀로나 관중이 목격한 장면은.
"꾸어어억!"
공을 향해 같이 달려가던 바르셀로나의 센터백, 장클레르 토디보가 괴상한 비명을 질러 대며 날아가는 장면이었다.
< 126. 아직도 모르겠어?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