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이상한 놈, 잘생긴 놈, 잘하는 놈 (4) >
친선경기는 솔직히 난장판이었다.
전반전에 베스트 일레븐을 실험한 AT 마드리드는 후반전에 거의 모든 선수를 교체했다.
우리 팀도 마찬가지다.
백업에 유스 멤버까지 교체해 가면서 테스트했다.
"달려들어!"
"압박해! 거기서 커버해야지!"
"도대체 어디로 움직이는거야? 패스를 할 수가 없잖아!"
"선수를 보라고! 선수를!"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다.
선수가 워낙 많이 바뀌니 패스는 중간에 끊기기 일쑤였고, 후방 빌드업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패스를 받았다.
투욱!
"와!"
관중의 감탄사가 들려온다.
순수한 감탄이다.
흔히 대지를 가르는 패스라고 표현하곤 한다.
선수가 대거 교체되어 촘촘한 수비는 아니긴 했어도, 단숨에 선수 네다섯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패스는 예술에 가까웠다.
하베르츠의 패스가 그러했다.
음.
이거 조금 감동적이다.
아니,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다.
수비랑 싸우지도 않았는데.
애써 드리블로 제치지도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일대일 찬스다.
세상에. 내가 이런 패스를 받는 날이 오다니.
뻐엉!
가볍게 골대로 밀어 넣는 하프발리 슈팅으로, 추가득점을 올렸다.
친선경기라 세레모니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천천히 센터서클로 돌아가자, 하베르츠가 물었다.
"어떻게 한 거야?"
아니, 그건 내가 묻고 싶은 건데.
"그냥 뛰었지."
"그냥 뛰었는데, 내 패스를 받았다?"
"내가 뛰었는데 그냥 패스가 온 거지."
"무슨 뜻인지 알겠어."
턱을 붙잡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어디서 수긍이 된 건지 모르겠다.
연신 차분한 얼굴로 볼을 차던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음.
얘는 좀 다른 의미로 이상한 것 같기도.
***
런던에서 이 경기를 인터넷으로 지켜보던 첼시 팬들은 축배를 들어 올렸다.
"둘의 호흡이 장난 아닌데? 저 둘이 같이 뛰었던 적이 있나?"
짧은 시간이지만 둘이 보여주는 호흡은 환상적이었다.
물론 후반전의 AT는 전반전보단 교체선수가 많아 확실히 엉망이었지만, 애당초 프리시즌은 선수들을 테스트하는 과정이다.
그 정도는 팬들도 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난생 처음 발을 맞춰 보는 두 선수의 호흡은 지켜보는 입장에선 흥분하여 침을 튀길 수밖에 없었다.
수비 서너 명을 바보로 만드는 환상적인 패스부터.
제퍼슨의 깔끔한 마무리까지.
"상대팀이 교체선수가 많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카이가 들어오고 후반전 분위기가 확 살았어."
"볼 전개도 매끄럽고 말이지."
"무엇보다 중원에서 하베르츠의 패스가 너무 완벽해."
그들의 눈에는 제퍼슨 리-카이 하베르츠의 조합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혹시 서로 텔레파시라도 통하나?"
"둘이 대화 한 번 안 나누는 거 같은데. 무슨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 움직이잖아?"
"무서울 정도로 서로 잘 맞아. 하베르츠는 제퍼슨의 움직임을 예상한 것처럼 움직이고 있고, 제퍼슨도 그의 패스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 내잖아?"
"잘하는 놈들은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다는 건가."
"그렇군!"
런던에서 이뤄지는 평가처럼.
현 시각, 필드에서 공을 차는 두 명의 공격은 더 날카롭고 매서워졌다.
툭!
"미친!"
AT 수비들은 허둥지둥 급하게 움직였다.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저 미친 패스를 뿌리는 미드필더도, 기민한 움직임으로 그걸 받아 내는 공격수도 미쳤다.
필드 위에서의 커뮤니케이션 따위는 없었다.
그냥 공을 패스했고, 깊은 공간에서 제퍼슨이 별안간 나타나 잡는다.
"도대체 뭐야?"
AT의 선수들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호흡이 잘 맞는다고 한들,
필드 위에서는 '패스해!' '뛰라고!' 서로 외치면서 위치를 확인하거나.
또는 양팔을 뻗으며 가리키거나 해서 반드시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수비는 그에 맞춰 움직여야 하고.
한데 아무런 전조가 없다.
서로 말도 없고, 제스처도 없건만.
환상적인, 그러나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콤비네이션.
제퍼슨이 돌파를 시도하다가 다시 뒤로 백패스.
그리고 하베르츠가 볼을 잡아 순간적으로 돌파를 시도했다.
"와!"
"헉!"
수비진이 기겁했다.
또 한 번 엄청난 패스를 할 줄 알았건만.
순간적인 스피드로 단숨에 수비를 제친다.
그리고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크게 돌아가는 선수에게 쓰루패스를 쏘아 보냈다.
"나이스!"
후반전에 출전한 마크 우트였다.
경기 양상은 일방적이었다.
하베르츠의 완벽한 중앙 지배력과 제퍼슨의 환상적인 마무리, 거기에 우트의 위협적인 몸놀림까지!
세 명 다 AT의 백업 수비수들이 상대하기엔 끔찍한 수준이었고, 이게 아무리 프리시즌 친선전이라도 멘탈이 나가기 시작한 AT를 상대로 우트는 화려한 스텝오버로 일대일 찬스를 만들었다.
완벽하게 열린 골문.
그리고, 패스.
"아, 좀 직접 해결해!"
참다 참다 못한 제퍼슨이 해트트릭을 터뜨리며 내지른 괴성이 SNS에서 꽤 화제가 된 건 경기가 끝난 후였다.
***
친선경기라도, 미국 방송사의 퀄리티 있는 중계가 경기를 꽤 재밌게 만들었다.
상당히 많은 카메라는 경기 자체를 역동적으로 담아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이게 단순 친선경기인가 알쏭달쏭할 정도로.
[첼시 4대 2, 챔피언스 리그 4강팀을 무너뜨리다!]
[카이 하베르츠와 제퍼슨 리의 환상적인 호흡! AT의 수비진을 부수다.]
그러나 친선경기는 친선일 뿐이다.
첼시가 세 골을 몰아친 후반전은, AT의 수비진이 거의 로테이션 멤버로 바뀌었을 때였다.
물론 첼시도 많은 선수가 교체됐지만, 적어도 제퍼슨 리와 카이 하베르츠, 그리고 마크 우트라는 공격 조합은 AT의 백업이 쉽게 상대할 게 아니었다.
때문에 친선경기일 뿐,
팬들은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AT의 팬들은 전반전 베스트 일레븐이 보여 준 모습에 만족했고,
첼시 팬들은 영입선수의 플레이와 기존 선수와 호흡이 잘 맞아 떨어지는 것에 기뻐했다.
하나, 서로를 상대한 선수들은 달랐다.
적어도 AT의 수비진과 코치진은 생각했다.
"저 친구, 바르셀로나나 레알 마드리드에 갈 일이 없기를 빌어야겠어. 만일 그런다면, 우리는 또 한 번 리그에서 쓴 잔을 마셔야할 거야."
코치진과 선수들 모두 시메오네의 발언에 공감했다.
친선이었지만, 그 무서움은 뼛속까지 각인 되었으니까.
***
우리는 두 번의 친선경기를 치르면서 미국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다음 상대는 도르트문트였다. 저번 시즌 분데스리가 2위팀이고, 챔피언스리그 16강팀이기도 했다.
스파링 상대로는 훌륭하다.
우리는 무난하게 2대 0 승리를 챙겼다.
필마르크 감독은 유난히 기뻐하는 눈치였는데,
내가 아예 출장을 하지 않은, 1.5군에 가까운 선수진으로 만들어 낸 괜찮은 경기력 덕분이었다.
사실 3개의 트로피를 따낸 감독님은 꽤 심한 부담감에 시달리고 있다.
"제퍼슨 의존증이지."
그리고 그걸 나에게 솔직하게 고백했다.
"뭐라 해도 좋아. 어쨌거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카드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니까. 다만 네가 없을 때, 우리는 그걸 극복해야지."
언론과 사이가 나쁜 감독님은 3개 트로피라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갖은 비판을 받았다.
대표적인 게 '제퍼슨 의존증'이다.
팀이 위기에 처했을 때, 특별한 전술 변화를 끌어내기보단 그저 나에게 의지한다는 거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필마르크 감독을 선수빨이라고 부를 정도로 무능하게 표현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감독님도 은근히 신경 쓰고 있었군.
때문에 내가 없을 상황, 또는 내가 컨디션이 나빠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할 때.
이기는 방법을 위해 꽤 많은 걸 연구하고 실험 중이었다.
[스포르팅 CP, 친선경기 유로파 챔피언 첼시 상대로 4:2 승리!]
하지만 다음 경기에서는 패배했다.
뭐,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
친선경기니까.
노출된 문제점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을 떠올리면, 나쁘지 않은 일이다.
"카이에게 헌신을 요구하는 건 어려워 보이는군."
감독님은 단숨에 카이 하베르츠의 성격을 꿰뚫어 봤다.
하나 뭐라하기가 좀 애매하겠지.
압박이 부족한 거 같다면서 감독님은 압박을 지시했다.
그리고 하베르츠는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수행했다.
확실히 재능러였다.
다만 그 이상은 보여 주지 않았다.
철저한 지시사항 이행.
그리고 그 이상의 헌신은 거절.
"친선경기라 그러겠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저게 본래 성격 같은데.
축구선수라고 해서 모두 다 열정적이지는 않다.
그저 프로답게, 딱 할 것만 해내는 선수들도 꽤 많다.
그 외에 개인적인 사생활을 더 중시하는 선수도 많고.
그런 선수들 생각하면 하베르츠는 오히려 대단하다. 축구와 생활을 분리했지만, 그런데도 보여 주는 플레이는 환상적이니까.
굳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우트는 원톱으로는 아니야."
감독님이 미간을 좁혔다.
두 경기 다 우트가 선발 출전했다.
그리고 파트너로 타미, 지루가 번갈아 출전했다.
하나, 나와 출전했을 때의 파괴력은 보여 주지 못했다.
그리고 나온 결론.
"제프, 너랑 자주 출전하는 게 훨씬 좋을 거 같다."
음.
일단 그게 맞는 것 같긴 한데.
나야 파트너가 누가 나와도 상관이 없다만.
친선경기에서 보여 준 우트의 활약이 꽤 괜찮긴 했다.
다만.
나와 감독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우트가 아무도 모르게 히죽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하."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거기엔 하베르츠가 예정된 훈련을 마치고 천천히 짐을 정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머지 선수들은 남아서 개인훈련에 매진하는데,
쿨하게 퇴장하는 우리 하베르츠.
이상한 놈에, 잘하지만 재수 없는 놈에.
이제는 또 누가 오려나.
옘병.
***
런던에 돌아와 체력 훈련에 좀 더 힘을 썼다.
저번 시즌 감독님이 가장 크게 후회했던 것이 프리시즌에서의 몸을 만드는 데 서툴렀다는 것이다.
프리미어리그를 한 시즌 경험한 그는 트레이너와 코치들과 머리를 맞붙여 꽤 힘든 체력 훈련을 계획했다.
나쁘지 않았다.
그 계획을 본 내 트레이너 팀이 칭찬했으니까.
"역시, 프리미어리그에서 첼시가 의료와 체력 트레이닝에선 높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이긴 하군요. 좋은 트레이닝입니다."
괴물 같은 트레이닝 팀이 공인한 일정이니, 순순히 따라야지.
아, 맞다.
트레이닝 팀은 좀 규모를 확장시켰다.
스포츠 마사지사 두 명이 더 고용됐다.
거기에 분석 자료를 준비해 주는, 전력 분석팀도 창설했다. 아직은 세 명 정도로 이뤄진 조촐한 팀이지만, 벌써 꽤 도움이 되고 있었다.
시즌 시작 전, 상대팀에서 주의해야 할 선수에 대한 보고서와 분석 자료를 보니 꽤 흡족했다.
"역시 돈이 좋아."
암.
그렇고말고.
돈 많은 선수가, 축구도 더 잘하는 법이지.
"근데 돈이 많다고 꼭 잘 되는 건 아닌 거 같아."
캉테가 운전하면서 걱정스런 기색으로 말했다.
그의 미니쿠퍼를 타고 훈련장에 출근하는데.
꽤 색다르다.
선수들 대부분이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걸 생각하면, 캉테의 미니쿠퍼 사랑은 귀엽기 짝이 없다.
조수석에 타면 내 몸이 꾸깃꾸깃 접히는 기분이 들긴 하지만.
"네가 너무 커서 그래."
"네가 너무 작아서일 수도 있어. 어쨌든, 무슨 말이야?"
"우리 팀, 영입이 계속 실패하고 있잖아."
"음!"
카이 하베르츠의 영입 이후,
첼시는 이적시장에서 고배를 마시고 있었다.
최근엔 제 2의 피를로라고 떠들썩한 산드로 토날리를 맨시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들린다, 들려. 우리 캉테 과부하 걸리는 소리가."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
"너 철강왕이잖아."
"그래도 시즌 60경기 넘게 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하긴.
고작 나흘 후면 이적시장이 끝난다.
애당초 목표했던 매물들이 다른 팀으로 이적해 버리면서, 첼시는 꽤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그래도 영입은 있을 거다.
아직 이적자금도 꽤 남았으니까.
적어도 로테이션 자원 정도는 한 명 오겠지.
우우우우웅!
"응?"
그때.
과도한 배기음이 들렸다. 창밖을 보니 주차장에 화려하기 짝이 없는 커다란 슈퍼카가 주차되고 있었다.
"허."
돈 많은 축구선수들 중에 슈퍼카를 모으는 취미를 가진 사람은 꽤 있다.
그러나 그런 선수들도, 적어도 훈련장에 그 슈퍼카를 타고오진 않는다. 우리 감독도 선수단의 규율을 중시하는 편이라 그런 면에선 깐깐하기도 하고.
"선수 아닌가 본데?"
"응?"
"배우 아니야? 모델? 뭐 우리 팀 홍보대사라도 새로 하는 사람인가?"
어정쩡하게 우리는 슈퍼카 옆에 미니쿠퍼를 주차하고 내렸다.
그리고 슈퍼카에서 내린 사람과 맞닥뜨렸다.
금발의 반곱슬머리에, 귀걸이.
거기에 손목과 목에 있는 타투에.
짙은 선글라스까지.
흠, 선수 같진 않다.
잘생겼다.
모델이나 배우처럼 보일 정도다.
"Hello."
가볍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부터 심상치 않다.
햇빛을 살짝 가리면서, 우아한 제스처를 취한다.
"근처에 혹시 파파라치 있어? 왜 저렇게 폼을 잡아?"
캉테가 이렇게 소근거릴 정도니 할 말 다했다.
잠깐만.
어, 혹시. 걔인가?
"션 올리버?"
"Oh, 역시 날 알아보는군! 혹시 제 팬이에요?"
아니.
몰라볼 리가 없잖아.
수많은 염문설을 뿌리며 축구계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던, 희대의 바람둥이를 말이다.
< 123. 이상한 놈, 잘생긴 놈, 잘하는 놈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