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121화 (121/258)

< 121. 이상한 놈, 잘생긴 놈, 잘하는 놈 (2) >

"오빠는 저런 공격수처럼 못 해?"

열두 살 터울의 막내 여동생이 그런 말을 던졌을 때,

마크 우트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나서 딸처럼 데리고 다녔던 동생이다.

덕분에 훈련장에도 많이 놀러 왔고, 경기도 자주 보러 갔다.

지금은 축구를 좋아하는 아주 귀여운 동생이었다.

동생은 큰오빠인 자신의 플레이를 사랑했다.

한데 그런 여동생이 저런 말을 할 줄이야.

"저런 공격수라니? 누구? 설마 오빠보고 메시처럼 하라는 거는 아니지?"

"아니야. 저 선수 봐봐."

화면에 나오는 건 유튜브 하이라이트였다.

"에이. 하이라이트잖아. 이거면 너도 세계 최고의 여자 선수로 만들어 줄 수 있어."

"아니거든! 이 선수는 진짜야. 제퍼슨 리!"

막냇동생의 눈동자가 그렇게 반짝이는 건 오랜만에 봤다.

우트는 결국 집중하고 영상에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우트는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런 플레이가 가능하다고?'

아무리 하이라이트 모음이라지만.

아니, 25분짜리 하이라이트가 가능한가?

저런 원더골과 말도 안 되는 플레이에?

'제퍼슨 리. 런던에 미국산 네이마르가 나타났단 얘기는 들어봤지.'

우트는 결국 여동생과 함께 스페인으로 향했다.

유로파리그 결승전을 보기 위해서다.

그리고 거기서 본 제퍼슨의 플레이에 감탄했다.

처음엔 질투였고 시기심이었다. 왜 난 저런 플레이를 할 수가 없나.

그러나 이내 그 감정은 인정과 존중, 그리고 경외에 가깝게 바뀌었다.

"멋지군. 저런 플레이를 하고 싶었지."

세비야의 패스플레이가, 제퍼슨의 거친 움직임에 박살이 나는 광경을 보며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본인이 하고 싶던 플레이가 저것이었으니까.

다만 신체 조건이 따라주지 않을 뿐.

'제퍼슨 리라. 저 친구처럼 되긴 힘들어도, 같이 옆에서 뛰면 재밌겠군.'

관중석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데,

같이 필드에서 뛴다면 그 기분은 어떠할까.

하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감상이었다.

선수들에겐 이런 경우가 많다.

같이 뛰고 싶은 축구선수.

그러나 팀을 옮기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우트는 딱 거기까지 생각을 마쳤다.

제퍼슨 리에 대한 감탄과 경외를 보이면서.

하나, 일주일이 지났을 때.

첼시에서 오퍼가 들어왔단 소식을 듣고,

그는 어쩌면 이것이 운명이라고 느꼈다.

"같이 뛸 수 있겠어."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령 챔피언스리그라는 매력적인 대회도 부가요소지만.

어쨌거나 우트가 첼시 이적을 수락한 결정적 이유는 제퍼슨 리였다.

***

우트는 솔직하게 말했다.

내 플레이를 보고, 배우고 같이 뛰어보고 싶어서 여기로 왔다고.

진솔한 목소리였다.

우트는 매력적인 저음의 소유자였다. 그가 진지하게 말하자, 첫날 보여 준 장면이 그렇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뭐, 나 역시 그런 적이 있으니까.

이학현일 때, 존경하던 선배와 같이 뛰고 싶어서 무작정 그 선배의 팀에 이적했던 적이 있지 않았나. 물론 그땐 한없이 어렸을 때지만.

하여튼 간에.

혹여나 그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오해는 풀렸다.

그렇다고 그의 행동이 좀 정상적이라고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제프!"

완벽한 일대일 찬스.

골키퍼의 수준을 생각하면 우트가 충분히 넣을 수 있다.

한데도 그는 나에게 패스했다.

"아니, 왜?"

"네가 잘 넣잖아?"

음.

완벽한 일대일 찬스에서 나한테 무조건 패스하는 걸 보면.

이 친구가 과연 스트라이커인가 싶다.

"스트라이커가 일대일 찬스에서 양보만 하다니. 쟤 이상해."

풀리시치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똑똑한 캉테는 고개를 저었다.

"저거 다 작전이야."

"작전?"

"제퍼슨하고 계속 골을 같이 만들어내고 있어. 제프야 우리 팀의 핵심이잖아? 감독에게 어필하는 거지. 제프하고 호흡이 잘 맞으니까, 선발로 넣어달라고."

"아!"

오.

그럴듯한 가설이다.

그러자 풀리시치의 얼굴에 어두워졌다.

"내 경쟁 포지션일지도 모르겠군."

스트라이커를 한 명 더 쓴다면, 풀리시치의 포지션을 위협할 수 있다.

필마르크 감독의 성향은 이제 팀원들이 다 알고 있으니까.

실제로 우트는 빠른 발과 발재간으로 인사이드 포워드에서 중앙 공격수까지 소화할 수 있는 선수다.

어쨌거나.

벌써 친선경기에서 우트가 두 번의 기회를 선물해 줬다.

하면, 나 역시 보답은 해야지.

툭!

"제프!"

우트가 이번에도 수비수를 제치고 나에게 패스를 찔러줬다.

충분히 슈팅을 때릴 각이 있었는데도.

발바닥으로 공을 긁으며 끌어당겨,

달려드는 수비의 중심을 무너뜨리고.

길을 막는 골키퍼를 향해 슈팅 페이크를 한차례 준 뒤, 툭!

"오!"

제법 힘이 실린 슈팅이다.

그러나 공의 방향은 골문이 아니라.

어정쩡하게 서 있던 우트를 향해서였다.

마치 핀볼처럼.

우트의 왼 허벅다리를 맞고 골문으로 빨려 들어가는 골.

"축하해, 우트. 프리시즌 첫 득점이군."

내 말에 우트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에서, 순간 환하게 펴졌다.

그리고 골대 안을 굴러다니는 공을 잡고 소중한 보물이라도 본 것처럼.

쓰다듬으면서 웃었다.

"하하하! 우리 호흡 아주 좋은데? 제프? 전생에 부부사이였을지도!"

살짝 소름 돋는 광경이다.

공을 쓰다듬으면서 '히히히' 웃는 모습은 말이지.

난 조금 굳어진 얼굴로 캉테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네 예상은 틀렸어, 캉테."

"으응?"

"쟤, 똑똑한 놈이 아니라, 그냥 이상한 놈 맞아."

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캉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공을 품에 안고 히죽히죽, 웃는 모습을 보면.

똑똑한 놈이란 소리는 안 나오겠지.

"어째, 팀에 이상한 놈이 들어온 것 같은데."

심히 걱정스럽다. 이번 시즌.

***

프리시즌을 미국으로 결정한 이유는 몇가지 있었다.

꽤 많은 유럽 명문팀이 이쪽으로 전지훈련을 오기 때문에, 그들과 친선경기를 치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AT 마드리드, 도르트문트, 스포르팅과 친선경기가 예정되어 있다.

이 와중에 AT 마드리드는 MLS 올스타와 친선경기를 벌였다.

축구에 대한 열기와 인기가 높아졌다는 것을 증명하듯, 만원 관중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 경기에서, 현 시점 MLS 득점랭킹 1위이자, 최고 슈퍼스타인 산티아고가 AT 마드리드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터뜨렸다.

[AT 마드리드 5 : 4 MLS 올스타]

과연 난놈이다.

물론 MLS 올스타는 시즌 도중이라 경기감각이 절정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도 AT마드리드 특유의 수비를 뚫어낸 산티아고의 해트트릭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 결과.

[산티아고 차베즈, AT마드리드 이적 확정! 이적료 6,000만 유로(한화 790억 원)]

"음."

결국 회귀 전, 본래 역사대로 산티아고는 알레띠로 향했다.

바뀌지 않았다.

아니지, 산티아고가 본래 역사보다 3년 빠르게 AT마드리드에 간 것이니까, 바뀌긴 바뀌었군.

산티아고를 원해서 내게 말 좀 잘해달라고 부탁까지 했던 필마르크 감독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빌어먹을! 이게 다 제프, 네 에이전시 때문이야!"

"좀 골치 아팠죠?"

"우리 프런트가 아주 학을 떼더라. 응? 어쩌면 그렇게 말장난을 잘하는지, 어휴."

"어쩔 수 없죠. 우리가 더 크게 불렀어야 했는데."

"아무리 구단주가 이적자금을 많이 준다 해도, 지금 당장 급한 포지션은 네가 있는 이상 스트라이커는 아니지. 미드필더가 필요하니까."

제크 팀장하고 협상하던 우리 프런트가 아주 혀를 내둘렀단다.

지루한 줄다리기 싸움 도중에.

해트트릭을 터뜨린 걸 보고 AT마드리드의 코칭스태프가 일제히 산티아고에게 반해 버렸다.

때문에 AT 마드리드에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고, 그는 결국 AT로 떠났다.

-감독님이 직접 찾아왔었어.

"시메오네 감독이?"

-응. 거기에 부르고스 수석코치도 같이. 다들······ 좋은 분 같아.

뭔가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건 착각인가.

-음, 뭔가 다 좋은 비전을 얘기해 주고. 사람도 좋아 보이고. 뭐 그래서.

"산티."

-응?

"혹시 시메오네 감독하고, 너희 부르고스 코치가 무서워서 덜컥 수락한 거라면, 다음 친선경기 때 양말을 무릎 밑으로 내려서 출전해."

-······.

시메오네 감독은 얼핏 보면 마피아처럼 보일 정도로 카리스마가 넘친다.

뿐인가.

수석코치인 헤르만 부르고스도 한 덩치하고, 인상도 심상치 않은 양반이다.

둘이 방에 같이 찾아왔다고?

으으.

생각만 해도 두려운 걸.

산티아고는 AT마드리드의 프리시즌 캠프에 곧바로 참여했다.

물론 토론토에서의 고별경기는 치른 뒤에.

어쩌면 다음 친선경기에서 산티를 상대할지도 모르겠다.

***

프리시즌에 모든 선수의 몸 상태가 최고는 아니다.

한 시즌이 끝나고, 그 압박감과 살인적인 스케줄에서 벗어나면 선수들은 휴가를 만끽하고 일탈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다 보니, 프리시즌 소집 때 몸 상태가 정상인 선수가 얼마 없다.

"지루는 못 알아볼 뻔했어."

특히 지루는 뚱뚱해져서 돌아왔다.

이번 A매치 대표팀 엔트리에 뽑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컷 휴가를 즐긴 거지.

그 외에도 많은 선수가 밸런스 문제로 고생하고 있었다.

풀리시치는 골드컵 일정까지 치르느라 오히려 체력과 컨디션이 엄청 떨어진 상태였다.

"근데. 넌 왜 그래?"

"열심히 관리한 덕택이지."

"네 개인 트레이너들이 대단하다는 소문은 들었어. 근데 시즌 한창 치를 때 밸런스를 유지하는 건 정상적이지 않아."

"캉테. 언제 내 플레이가 정상적이었던 건 본 적이 있어?"

"······하긴."

사실 나도 컨디션이 최고는 아니다.

그래도 적어도 한 70%까지는 올라온 느낌이다.

내 트레이너들이 휴가도 반납하고 달라붙은 덕택이니까.

아예 휴가를 안 보낸 건 아니다.

한 3일씩 다녀오긴 했는데, 1년 시즌 치르고 3일을 휴가라고 보기엔 너무 턱없는 수준이지.

"그러고 보니 새 선수들은 안 오나?"

캉테가 미간을 좁혔다.

현재 드링크워터와 로스 바클리가 팀을 떠났다.

마테오 코바치치도 미국에 오지 않았다. 듣기로는 이적이 진행 중이라고.

세 명 다 미드필더다.

캉테 입장에서는 애당초 주전 경쟁에 걱정할 일은 없었지만,

오히려 지금은 주전 경쟁할 선수가 없지 않나.

이적시장은 생각보다 길지 않은 편이다.

이러다가 좋은 미드필더를 영입하는데 실패한다면, 캉테로서는 과부하가 걸릴 거다.

"패스를 잘하는 미드필더가 왔으면 좋겠어."

"나는?"

"너도 잘 하는 편이지만, 패스만 하기에는 너무 바쁘게 움직이잖아."

"조르지뉴도 잘하잖아."

"데 브라이너 수준은 아니지."

"아!"

근처에 조르지뉴가 없어서 조용히 속닥거렸다.

스트라이커의 욕심이다.

이제는 알겠다.

내가 이학현으로 뛸 때, 부상이라도 당하면 팀의 모든 스트라이커가 그렇게 심각하게 걱정했었는지.

스트라이커에게 패스를 제대로 찔러주는 미드필더의 존재는 소중하다.

그걸 저번 데 브라이너의 플레이를 보고 느꼈다.

도저히 패스할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킬 패스를 만들어 내는 창조성.

그건 내가 이학현으로 가진 재능으로도 따라가기 어려운, 정말 월드 클래스 자체였다.

그런 미드필더가 오길 바라는 건 스트라이커로서 너무 당연한 욕망이었다.

"듣기로는 대단한 애가 온다는데?"

"대단한 애?"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감독님 말하는 거 들어보니까, 레알 마드리드하고 바이에른 뮌헨하고 경쟁 붙었다더라고."

"그래?"

레알과 뮌헨하고 이적경쟁이 붙을 선수라면.

확실히 실력만큼은 대단하다는 친구인데.

언론에 기사 한 줄 안 나올 정도로 극도로 보안을 유지하고 있는 것까지 생각하면.

살짝 기대가 된다.

내 회귀 전 기억에 따르면, 이 시점에 첼시로 이적하는 월드클래스급의 매물은 없었다. 그 재능을 지닌 매물도 없었고.

하면 역사가 바뀌었다는 건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필마르크 감독이 전화를 받고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됐다!"

그리고 뜨는 이적시장 한 줄의 헤드라인.

그걸 보고, 웬만해선 놀라지 않는 나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얘가 지금 첼시에 온다고?"

< 121. 이상한 놈, 잘생긴 놈, 잘하는 놈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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