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119화 (119/258)

< 119. 제퍼슨 신드롬 (6) >

[2021 골드컵 Final]

미국 6 VS 0 멕시코

<골든볼 플레이어>

<골든 부츠>

제퍼슨 리(USA) 6골

<골든 글러브>

잭 스테판(USA)

<영 플레이어>

산티아고 차베즈(USA)

***

축구선수의 생활은 끝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끝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은 건 당연한 생각이다.

캡틴 마이클 브래들리가 골드컵을 들어 올리며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이미 알고 있던 코치진은 담담하게 받아들였지만, 선수진과 관중은 그러지 못했다.

"브래들리가 은퇴라니!"

"맙소사!"

브래들리는 미국 대표팀의 구세대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무려 15년 동안 국가대표로 활약해 온 역사적인 선수.

몇몇 관중은 빨개진 눈동자를 애써 훔쳤고, 사실을 몰랐던 선수들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하나, 관중은 이어지는 장면에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터뜨렸다.

"아!"

축구팀에서 주장의 역할은 중요하다.

팀을 대표하고, 코치진과 선수진 사이를 중개하며 필드에서는 그 누구보다 격렬하고 열정적이어야 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 브래들리가 주장완장을 제퍼슨 리에게 채워 주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못해 멋진 모습이었다.

현재 팬들의 엄청난 신뢰와 지지를 받는, 신세대를 대표하는 선수니까.

짝짝짝짝짝!

박수 세례가 쏟아진다.

브래들리의 대표팀 은퇴에 대한 존중과 새로운 캡틴에 대한 기대의 박수.

제퍼슨은 팔에 채워지는 주장 완장을 보면서 쓰게 웃었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브래들리가 곧 대표팀 은퇴를 하고, 자신이 주장 물망에 올랐다는 사실을.

버홀터 감독이 은근슬쩍 얘기해 주지 않았던가.

하나, 이렇게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극적인 상황에서 할 줄이야.

"자. 캡틴, 트로피를 들어 올리셔야지?"

브래들리가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었다.

제퍼슨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건 같이 들어야겠어요. 혼자 들기 무겁잖아요? 캡틴."

"하하하하!"

자동차도 들어 버릴 것 같은 제퍼슨의 모습을 떠올리면, 고작 트로피 하나가 무겁다는 건 웃긴 이야기다.

'녀석······.'

브래들리는 가슴이 욱신거리는 느낌이었다.

끝까지 자신을 배려하는 모습.

토론토 시절부터 보아 온 이 녀석은, 나이에 맞지 않게 성숙했다. 악동 같으면서도 속이 깊었다.

그가 이 친구를 차기 주장으로 감독에게 강력하게 말했던 것은, 다 이런 이유였다.

브래들리가 웃었다.

"좋아, 캡틴. 같이 들자고."

제퍼슨이 왼쪽, 브래들리가 오른쪽에서 트로피의 날개를 동시에 들어 올렸다.

"Yeaaaaaaaaaaaaaa!"

"USA! USA! USA! USA!"

관중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감독니임!"

몇몇 선수들은 감독에게 달려가 헹가래를 치기도 했다.

짓궂은 어린 선수 몇은 샴페인을 들고 와선 평소에 무서워하던 코치들에게 마구 뿌렸다.

"제-프!"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산티아고의 잔뜩 들뜬 목소리.

제퍼슨은 본능처럼 앞에 있던 로드릭을 끌어당기면서 그 뒤로 피했다.

쏴아아아아!

"우와악!"

샴페인에 온몸이 젖어 버린 로드릭이 억울한 눈빛으로 제퍼슨을 돌아다봤다.

"제······프, 날 방패막이로 삼은 거야?"

그리고 그 맞은편에서 산티아고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어떻게 알고 피한거야?"

"그렇게 대놓고 들어오는데 피해야지."

"이제 알겠어. 네가 축구를 잘하는 이유를."

"응?"

"뒤에도 눈이 달린 게 분명해. 늘 뒤에서 달려드는 수비수 태클도 쉽게 피하잖아? 이 샴페인을 피한 것처럼."

퍽 진지한 얼굴로 말하기에, 제퍼슨은 그저 웃어줬다.

***

마이크는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풋볼선수였던 자신이 여기에 와도 되는 걸까.

하이스쿨의 잘나가는 풋볼 선수였던 마이크는 저번에 소피아와 제퍼슨 리의 경기를 직관하고 나서 심중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잘하는 짓일까?'

그 앞에 있는 문은 다름 아닌 하이스쿨 축구팀의 사무실.

풋볼 선수인 그가 여기에 올 이유는 하등 없었다.

그것도 샌님이나, 여자들이나 하는 스포츠라고 비하했던 마초에게는 말이다.

하지만.

"에라 모르겠다!"

그는 절실히 느꼈다.

대학리그까지는 어찌 간다고 해도, NFL은 진출하지 못한다고.

적어도 운동신경 하나만큼은 대단했지만, 문제는 NFL은 그런 괴물 중에서도 괴물들만 모이는 곳이란 사실이다.

그래서 원래는 야구로 전향하려 했다.

어깨와 폭발적인 스피드, 그리고 어쩌다 던져본 투구 능력을 보고는 야구팀 코치가 데려가려고 했으니까.

한데 마음이 바뀌었다.

'제퍼슨 리.'

아직도 머릿속에 잔상이 남는다.

그것을 어찌 잊으랴.

그때의 열기와 제퍼슨의 플레이는 환상적이었다.

그는 4강전까지 직접 경기장을 찾았다.

6만 명의 관중이 뿜어내는 환상적인 분위기.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골문을 폭격하던 제퍼슨의 모습.

그리고 제퍼슨의 플레이에 한 목소리로 노래 부르고, 똑같은 박자로 발을 구르자 경기장이 진동했다. 말 그대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그때.

축구의 새로운 재미를 느꼈다.

풋볼만큼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거칠었고, 역동적이었으며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제퍼슨 리가 부러웠다.

풋불이란 스포츠를 떠나서 다른 스포츠에서 저만한 성공을 일궈낸 것이.

물론 이제 축구를 시작하는 건 늦은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뒤늦은 후발주자라도 마이크의 운동신경은 대단한 축에 속했다. 만일 다른 축구 코치들이 봤다면 최소한 감탄은 흘릴 정도는 된다.

"제퍼슨같이 되는 거야. 걔도 6개월 만에 축구선수로 성공했잖아?"

물론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런 가능성을 품고 있는 풋볼 선수들은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그런 괴물들의 시선이 굳이 풋볼에 매몰되는 게 아니라, 축구로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의 마이크처럼.

***

[골드컵 트로피를 탈환한 19살의 삼총사를 키워 낸 하이스쿨 질리먼 코치의 단독 인터뷰!]

"아이고."

"사진 봐라. 불독 아니랄까봐. 지면으로 봐도 선수 잡아먹을 것처럼 생겼군."

"좋겠수다. 제자들 잘 키워서 인터뷰도 수없이 하고."

"이것들이, 왜 남의 훈련장에 와서 지랄이야, 지랄은?"

질리먼 코치가 화난 얼굴로 소리쳤다. 마치 불독이 성을 내는 것처럼.

하지만 입꼬리가 말아 올라가는 것은 숨기지 못했다.

농구팀의 헤딕 코치나, 야구팀의 레드먼 코치는 웃으며 훈련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늘 조용했던 축구장에 학생들이 바글거렸다.

"신기한 광경이야."

"난 여기가 풋볼팀 훈련장인 줄 알았지."

"풋볼 코치는 어때?"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던데?"

"그럴 만하지. 몸 좋고 날고 기는 놈들이 여기에 있으니까."

"흠흠. 몸 좋다고 잘하는 건 풋볼이지. 축구는 머리도 좋아야 한다고."

질리먼 코치는 팔짱을 끼며 헛기침을 했다.

눈꼴 시릴 정도로 뻐기는 모습이지만, 헤딕과 레드먼은 웃음을 터뜨렸다. 질리먼이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건, 정말 보기 힘든 것이니까.

"하긴. 제퍼슨 같은 놈은 없지?"

"걔가 미친놈이었다니까."

"몸 좋고, 운동신경 괴물이고, 거기에 축구지능도······ 그런 머리라면 야구나 농구로 갔어도 문제없었을 거야. 키도 190이 넘었다면서? 그럼 농구도 할 만하지."

"아쉽군. 그때 내가 제퍼슨을 채 갔어야 했는데."

헤딕이 진짜 아쉬운 기색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러더니 훈련장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는 신입생을 보고 은밀히 말했다.

"저 친구 키가 큰데, 축구팀에서 불합격되면 우리 농구팀으로 보내 주겠나?"

불과 1년 전만 해도 이런 광경은 상상도 못 할 상황이었다.

신입생 중에서 운동신경 좋은 놈들이 대부분 축구에 몰린 것이다.

지원자가 없어서 질리먼 코치가 직접 돌아다니며 스카웃했을 때를 떠올리면 그야말로 천양차이.

"흠. 축구하기 적합하지 않으면 불합격되겠지. 그러면 농구팀에서 데려가도 상관없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질리먼은 가슴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언제 이래 봤던가!

늘 다른 팀에서 떨어진 학생들을 데리고 와 축구를 시켰었는데.

이젠 가장 먼저 좋은 재목을 지닌 학생들을 선별하고 있다.

'미국에서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축구의 인기였다.

골드컵 우승 이후 축구에 대한 인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물론 풋볼팀에 비견되는 이런 상황은 여기가 유일하긴 했다.

아직도 다른 학교는 풋볼팀에 가장 먼저 괴물들이 몰리고 있었으니까.

여기가 다른 이유는 하나다.

제퍼슨 리가 뛰었던 곳이니까.

심지어, 제퍼슨뿐만 아니라 이번 골드컵에서 활약한 산티아고와 로드릭도 다 여기서 뛰었다.

-축구를 할 거라고?

-그러면 거기로 가야지!

-캡틴 아메리카와 산티아고, 로드릭을 키워낸 질리먼 코치가 있단 말이야!

-거기에 가야 너도 프로선수가 될 수 있어!

자연히 축구팀에 대한 인기, 질리먼 코치에 대한 신뢰가 상승할 수밖에 없다.

"신드롬이군."

미국 축구계에 어느 정도 인맥이 있어서 소식을 들었다.

곳곳에서 축구에 관한 관심과 직접 뛰어드는 운동선수들이 많다고.

인식이 바뀐 것이다.

여자나 하는 스포츠, 히스패닉만의 스포츠. 라는 선입견에서.

꽤 재밌고, 역동적인 스포츠로.

그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거의 신드롬에 가까운 수준이에요. 제퍼슨 리를 따라 풋볼에서 축구로 전향하는 케이스가 심상치가 않게 나오고 있어요. 마치 제퍼슨 신드롬을 보는 것 같네요.'

미국 스포츠계에 일대 신드롬을 일으킨 선수다.

제퍼슨 리.

"내가 키운 최고의 제자지."

그가 흐뭇한 얼굴로 제퍼슨을 바라봤다.

"뭐?"

처음에 머릿속에 저절로 떠올려진 것으로 생각했다.

아니다.

제퍼슨이.

눈앞에, 보였다.

"코치님, 잘 계셨어요?"

"어?"

"오, 맙소사! 제퍼슨이잖아!"

"뭐?"

"제퍼슨 리가 왔다!"

"Shit! 저기 산티아고하고 로드릭도 왔어!"

하이스쿨에서 같이 공을 뛰고, 국가대표가 된 세 명이.

옛 은사를 찾아온 것이다.

***

로드릭은 후배들을 만나서 아주 신이 났다.

신이 났어.

"봐봐. 내가 여기 주장이었다고. 알겠어? Bro?"

"오오오오!"

"내가 주장일 때. 제퍼슨은 애송이였지. 와서 공 좀 차게 해 달라고 했단 말이야."

"와!"

"근데 들어오기 쉽지 않았어. 왜냐면 내가 걔를 수비했는데, 나를 뚫어야만 축구팀에 들어올 수 있었거든."

"역시!"

"그러면 제퍼슨을 막은 게 로드릭이네!"

"맞아. 내가 그를 막았지."

얼씨구.

로드릭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저 자식.

결승전에서 데뷔 골을 넣더니 아주 기가 살았다.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곁을 스쳐가는 산티아고가 보였다. 방금 전까지 공격수를 원하는 학생들에게 짧은 노하우를 전수하고 오는 모습이었다.

"로드릭이 제퍼슨을 꽤 막았지."

"오? 진짜요?"

"그럼. 여기 미네소타 최고의 수비수였다고"

"역시!"

산티아고의 호응에 로드릭이 불안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그의 표정은 이내 일그러졌다.

"한 40번 붙어서 한 번 막았나? 대단하지."

"······."

"야, 야야. 40번 해서 한 번 막은 거 존나 대단한 거야! 너희가 제퍼슨을 몰라서 그래!"

로드릭이 황급하게 소리쳤지만,

반짝이던 눈동자들은 이내 그에게서 떠나갔다.

재밌는 광경이다.

하여튼 로드릭과 산티아고는 훈련장 곳곳을 쏘다니면서 자신들의 무용담을 마구 쏟아 냈다.

역시 10대다웠다.

"제프, 너는?"

"전 여기가 더 편하네요. 어린 애들 상대하는 건 영."

"흠. 애늙은이 같은 면모는 여전하군."

"잘 지내셨죠? 질리먼 코치님."

"그래. 작은 대회에서 우승도 하고. 좋은 선수들도 많아졌고. 고맙다, 제프."

질리먼은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도 쑥스러운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많이 변했다.

한없이 불독같던 양반이 말이지.

난 그저 웃어 보였다.

"바쁠 텐데 여기에 와도 되는 건가?"

"괜찮아요. 요 며칠 휴가기도 하고, 가족하고도 시간을 보내려고요."

"좋은 생각이야. 가족하고 보내는 시간 중요하지, 암."

"코치님께 배운 게 많이 도움이 됐습니다."

"응?"

"그 축구요. 단순하지만 딱 한방에 박살 내 버리는, 킥 앤 러쉬요."

내 말에 질리먼 코치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킥 앤 러쉬.

그가 스스로 한없이 구닥다리라고 여겼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그 클래식한 축구.

"혹시 제 경기 보셨어요? 아스필리쿠에타가 얼리크로스를 올려 주고, 제가 헤더로 한 방 꽝!"

"봤지!"

"재밌어요. 한 번에 길게 차서 머리로 넣어 버리는, 단순하다고 욕하지만. 이게 아직도 통해요. 제가 증명했잖아요?"

그 말에 질리먼 코치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해 온 방식이 틀리지 않는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축구에는 구닥다리는 없다.

부족한 전술일지언정, 그 자체는 아름다운 법이다.

"충분히 통하더라고요. 감독님한테 배운 그 축구가 유럽에서 말이죠."

내 말에 질리먼 코치는 그저 웃었다.

그 웃음에는 꽤 많은 감정이 느껴졌다.

감격적이라거나, 뭐 그런 거.

자신이 해 온 축구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고맙네."

질리먼 코치하고는 꽤 긴 대화를 하기 어려웠다.

워낙 말수가 적으신 분이신지라.

그래도 제법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가 문득 질리먼 코치가 생각났다는 듯이 어디선가 웬 축구공을 하나 갖고 왔다.

그는 감회가 새로운 눈빛으로 축구공을 쓰다듬었다.

"제프, 이게 네가 우리 팀에서 처음으로 뛴 경기에서, 처음으로 골을 넣었던 그 공이야."

"오!"

세상에. 그걸 보관하고 있어?

이 양반도.

참 보는 거하고 다르게 감성적이시네.

질리먼 코치는 그 공을 나에게 건네줬다.

보잘것없는 평범한 공이지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내 데뷔 골을 넣은 공이니까.

고마운 마음으로 그 공을 받았다.

"고마워요."

"고맙긴. 거기에 '아밀리아에게'라고 사인해 주면 돼."

"네?"

"흠흠. 내 손녀딸이 아주 팬이라서 말이지."

"······."

아, 이게 선물이 아니었구나.

< 119. 제퍼슨 신드롬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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