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118화 (118/258)

< 118. 제퍼슨 신드롬 (5) >

멕시코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축구계의 강자다.

월드컵에 숱하게 진출했으며,

유럽이나 남미 국가도 만나기 꺼리는 팀이 분명하다.

또한, 조직력 축구의 대명사라고 불리는 팀이기도 하다. 수비-중앙-공격의 간격을 촘촘하게 유지하며 짧고 유기적인 패스로 전진하여 상대의 수비를 허무는 방식을 주로 쓴다.

공을 상대에게 넘겨주면 2~3명이 미친 듯이 달려가 압박하는 특유의 투지도 보인다.

상대적으로 피지컬은 미국 선수가 우월하다.

그런데도 늘 미국이 멕시코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던 건,

그런 피지컬적인 약점이 두드러져도 기술적이나, 조직력이나, 그리고 투지에서 차이가 컸던 탓이다.

[제퍼슨 리가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는 멕시코의 조직력을 말 그대로 찢어 버립니다!]

중계진의 발언이 결코 과한 게 아니었다.

시작부터 물 흐르듯이,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던 멕시코의 조직력에 균열을 일으키다 못해 찢어 버리는 플레이.

로드릭의 롱패스를 가슴으로 받아낸 뒤, 멕시코의 주전 센터백 시셀도와 엑토르 모레노를 바보로 만드는 드리블을 펼쳐 골을 넣어 버리는 제퍼슨의 플레이에.

멕시코 원정팬들은 침묵했다.

그리고 미국의 홈팬들은 일제히 기립해 미친 듯이 환호를 쏟아 냈다.

"Wuuuuuuaaaaaaaaaaaa!"

제퍼슨은 뭘 고작 이 정도로 환호하냐는 듯이.

과하게 어깨를 으쓱이는 제스처를 취하며 천천히 산책하듯이 멕시코 진영을 한 바퀴 빙 돌아 센터서클로 복귀했다.

멕시코의 치욕이라고 불리던 그 날이.

다시금 재현되는 순간이었다.

***

내가 할 수 있는 언어는 몇 개 된다.

한국어, 독일어,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한국어와 영어는 원어민 수준이고.

독어도 분데스리가에서 뛴 경험 때문에 제법 소통이 잘 되는 편이다. 물론 읽고 쓰는 건 형편없지만.

프랑스어도 마찬가지다. 내가 뛴 벨기에 팀의 연고지는 제1언어가 프랑스어였으니까.

일본어도 기본적인 소통 정도다. J리그에서 뛸 때 배웠다.

하지만 스페인어는 전혀 몰랐다.

기본적인 인사만 겨우 아는 정도였다.

한데 근래 난 나름 스페인어를 할 줄 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왜냐면.

"개자식!"

"쓰레기 자식!"

저 스페인어가 아주 자연스럽게 들린단 말이지.

뭐, 그럴 수밖에 없다.

축구계에는 스페인어를 쓰는 선수들이 참 많다.

특히 영어 다음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미국에서는, 거의 제2의 언어나 다름없는 위치였으니까.

어찌 됐건.

들린다는 건, 간단히 한두 마디 던질 수 있다는 거다.

"vete a la verga(닥치고 꺼져버려)!"

갑자기 튀어나온 스페인어 비속어에.

나에게 욕설을 던지던 멕시코 선수들의 얼굴이 벙찐다.

옆에 있던 산티아고가 순간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너, 그 말은 어떻게 알아?"

"저기 시셀도가 자주 하던 말이야."

"음.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땐 욕부터 배우는 법이긴 하지."

산티가 다소 얼떨떨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자. 긴장하자고. 얘들 눈빛 보니까 절대 만만하게 무너질 애들이 아니다."

멕시코 축구는 조직력의 정수라고 불린다.

현시점에서, 세계에서 최고라 불리는 슈퍼스타는 없지만, 한 명, 한 명이 충분한 실력을 지녔다.

피지컬에서 밀려도, 두세 명이 머리를 박아 버리는 투지 역시 볼 만했다.

즉, 멘탈리티 측면에서 멕시코는 강팀이다.

나에게 한 골 먹혔다고 무너질 팀이 아니다.

더구나 지금은 결승전이 아닌가.

하지만.

이건 어쩌면 내 우려였을지도 모른다.

우리 미국도, 꽤 강했다.

짧은 패스로 유기적인 플레이를 즐기는 멕시코의 중원은, 우리 미드필더의 강력한 차징에 점차 밀리는 기세였다.

캡틴 브레들리는 노쇠된 신체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활동량으로 중원을 누볐고, 웨스턴 맥케니의 투지 있는 태클과 볼 경합에서 어떻게든 볼을 따내는 끈기에 멕시코의 중원이 흔들렸다.

물론 상대적으로 멕시코가 더 능했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반격에 그들이 원했던 패스플레이가 이뤄지지 않았고,

그것은 곧 우리에게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왼쪽의 풀리시치와, 오른쪽의 타일러 보이드.

그리고 나와 끊임없이 스위칭하며 위협적으로 움직이는 산티아고를 견제하느라 멕시코의 수비와 중앙의 간격이 점차 벌어졌다.

"압박해! 압박하라고! 이 자식들아! 압박해!"

벤치에서 멕시코 감독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온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흠.

아마도 날 보고 저런 거 같은데.

현대축구는 공간의 싸움이라 말한다.

공간을 지배하는 자가 승리한다는 것이다.

'풋볼에서 러닝백의 별명이 뭐더라?'

흔히 말한다.

공간을 지배하는 포지션, 러닝백이라고.

좁은 공간, 넓은 공간. 혼잡한 공간.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공간 그 자체에서 날뛸 수 있는 게 나다.

로드릭의 긴 패스를, 보이드가 빠른 발로 먼저 위치를 선점해 잡는다.

그리고 내가 산티아고와 스위칭해 중앙으로 내려가고.

비교적 활발해진 압박 사이에서 그의 패스가 빠르고 낮게 도달한다.

급히 수비수 모레노와 미드필더 미겔 에레라가 협력하며 나를 에워싼다.

하나, 수비와 중앙의 간격이 넓어졌던 상황.

툭!

"으억!"

상체드리블로 에레라를 속이고, 발은 빠르게 팬텀드리블을 펼쳐 내면서 모레노를 무너뜨렸다.

단숨에 두 명을 뚫어내자 관중의 환호가 쏟아진다.

순간적인 스피드로 치고 나가자, 앞을 막는 건 최종 수비 하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시셀도가 저렇게 욕을 잘하는 친구인 줄 몰랐다.

그래도 좋은 위치 선정이다.

그 상황에서도 동료의 동선을 파악하고 최적의 위치에서 맞이한다.

역시, 우리 첼시 주전 센터백이라니까.

하면 무리하게 뚫을 이유도 없다.

"산티!"

"좋았어!"

"다 뛰어!"

흘깃 왼쪽으로 돌아 들어가는 산티아고에게 스루패스를 연결해 주고.

동시에 미친 듯이 달려갔다.

나뿐만 아니다. 오른쪽의 보이드와 왼쪽의 풀리시치까지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순간적으로 공격진 네 명이 침투하였다.

목이 터지라고 라인을 지휘하던 시셀도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미친!"

왼쪽 수비를 허물어 버린 산티아고가 오른쪽의 보이드에게 낮고 빠른 크로스를.

"제기랄!"

시셀도가 총알같이 튀어나갔다.

골키퍼 역시 마찬가지.

하나 그보다 한발 앞서.

보이드에게 향하던 낮은 크로스를 향해 내가 슬라이딩하듯이 미끄러지며 그대로 중간에 잘라먹었다.

골키퍼와 시셀도가 모두 보이드에게 몸의 중심이 기울어졌던 상황.

순간적인 스프린터로 크로스를 잘라 집어넣는 골에.

그들은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Yeaaaaaaaaaaaaaaaaaaa!"

음.

이럴 때 외치는 스페인어가 뭐 있더라?

아.

이거다.

시셀도가 유로파 우승하고 이렇게 외쳤었지.

"iA huevo!(존나 좋아)"

***

조직력이 아무리 단단하다고 한들 빈틈은 있기 마련이다.

멕시코 감독은 그 빈틈을 여지없이 물어뜯어 버리는 제퍼슨의 두 골을 보고 온몸이 저릿한 기분이었다.

"시발, 시발, 시발!"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감독의 얼굴은 쓰레기처럼 일그러졌고, 속은 시커멓게 썩어들어 가고 있었다.

"미친놈! 미친놈! 개자식!"

제아무리 대단한 조직력이어도, 순간적으로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하나, 그 경우를 모두 골로 연결하는 공격수가 세상에 어디 있나.

상식적으로 말이다.

한데 원래 스포츠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분야다.

감독은 이 순간 그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 자식들아!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걸 보여 줘! 닥치고 뛰고! 물어뜯고! 부딪쳐! 투지를 보여 주라고! 머리가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조직력의 축구 외에도 '투지'의 축구라는 별명이 있는 멕시코다.

공중볼 경합에서 밀려도 일단 머리를 갖다 박아 버리는 스타일부터.

미친 듯이 달려드는 강력한 압박까지.

그러나.

"아아악!"

"아파!"

"이 새끼 사람 아니야! 고릴라야!"

"양키새끼들아! 경기장에 축구선수가 아니라 헐크를 풀어놓냐!"

달려드는 멕시코 수비를 피지컬 하나만으로 날려 버리는 제퍼슨의 모습을 보고, 감독의 입이 쩍 벌어졌다.

투지?

그딴게 무슨 소용인가.

달려들면 날아가는데.

"미국이 외계인을 고문하더니 유전자 조작 기술까지 배워 왔나 보군! 아니지. 아니야. 저건 사이보그겠지. 사람이 저럴 수가 있어?"

과한 표현이 아니었다.

유난히 빛났다.

22명이 뛰는 필드에서 제퍼슨의 존재감이 무섭게 부각되었다.

4강전과 달리 관대한 성격의 심판 탓이다.

제퍼슨은 자신의 장점을 아낌없이 보여줬다.

그나마 시셀도가 그런 제퍼슨을 견제했지만, 수비는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에 반해 미국은 제퍼슨뿐만 아니라 산티아고와 풀리시치라는 위협적인 공격카드가 있다.

시셀도가 첼시의 주전 센터백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한들, 중과부적이었다.

"산티!"

"제프! 뛰어!"

산티아고가 시셀도와 경합을 벌이는 사이.

제퍼슨이 흘러나온 공을 그대로 때려 버리는 슈팅으로.

뻐어엉!

조직력의 정수, 투지의 플레이라고 불리던 멕시코 축구가.

해트트릭으로 무너지는 건,

그 축구를 지휘하는 감독에겐 인생 최대의 치욕이었다.

"아니, 시발!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

결승전은 선수들에게 로망과도 같다.

관중에게도 마찬가지다.

대회 최고의 두 팀이 맞붙는 경기니까.

그만큼 흥미진진하고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까지.

하나, 경기는 그런 예상과 기대와는 달리 너무 허무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제퍼슨 리의 드리블은 세계적인 수준입니다! 월드클래스가 이런 거군요! 에레라, 끊어내지 못합니다. 제퍼슨. 달려드는 산티아고에게 패스! 산티아고, 가볍게 속이고 골문 구석을 향한 정확한 슈팅! 오초아 골키퍼, 벌써 4번째 실점을 내줍니다!]

직전 대회 골드컵 우승팀이자, 이번 대회 결승전까지 단 한 번의 패배도 없던 멕시코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미 해트트릭한 제퍼슨은 거의 프리롤에 가깝게 움직입니다. 밑에서 동료 공격수에게 패스를 뿌려 주네요.]

[제퍼슨을 집중 견제하던 멕시코의 압박이 길을 잃습니다! 제퍼슨이 어디서 튀어나올 줄 모르거든요!]

[조직력의 정수라고 불리던 멕시코 축구가 이리저리 휘둘리는 모습입니다.]

멕시코는 선수 교체를 통해 반전을 시도했다.

그 역시도 쉽지 않았다.

제퍼슨이 쏘아낸 슈팅이 골키퍼의 세이브로 튕겨 나오자, 타일러 보이드가 우당탕탕 골대 안으로 집어넣으면서 추가골을 만들어냈다.

5대 0이란 스코어가 됐을 때.

멕시코 팬들은 울면서 경기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미국팬들은 노래를 불렀다.

경기가 열리는 뉴욕에 인접한 이스트러퍼드의 매트라이프 스타디움은 마치 콘서트장에 온 것 같은 환상적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God bless America(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

"my home sweet home(나의 집, 아늑하고 포근한 고향)"

"Goooooooaaaaal!"

"오 제기랄! 노래 부르느라 골 넣는 걸 못 봤어!"

"괜찮다고 bro, 또 넣을 거니까 상관없지!"

"God bless Jefferson Lee(신이여 제퍼슨을 축복하소서)!"

미국의 제2의 국가나 다름없는 'God bless America'가 개사되어 흘러나오는 가운데.

미국은 연신 멕시코를 두들겼다.

다섯 번째 골이 들어가고, 투지 있는 플레이를 보여 주던 멕시코 선수들의 동공에 빛이 사라질 무렵.

뻐어어엉!

코너킥 상황에서 바깥으로 나간 볼을,

중앙 수비수 로드릭이 올라와 있는 힘껏 때렸다.

평소 같았으면 하지 않았을 과감한 플레이.

하나 이기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강력한 중거리슛이 25m의 거리를 뚫고 골문을 갈라 버렸다.

"우와아아아아아악!"

"로드릭!"

"내가, 내가 넣었다고!"

[제임스 로드릭이 A매치 데뷔골을 결승전에서 넣는군요!]

[이거 재미있네요! 오늘 해트트릭한 제퍼슨 리,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한 산티아고 차베즈, 팀의 6번째 득점을 넣은 제임스 로드릭까지. 이 세 명이 모두 한 고등학교에서 같이 공을 찼던 사이니까요!]

[대단합니다. 고등학교의 친구들이 미국의 대표가 되어 골드컵을 들고 오네요!]

[영화로 나와도 재밌겠는데요?]

[할리우드 영화사들이 보고 있으면 군침을 흘릴 소재군요!]

[오늘 미국은 축제입니다! 반면 멕시코는, 유례없는 치욕을 느끼고 있습니다!]

< 118. 제퍼슨 신드롬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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