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117화 (117/258)

< 117. 제퍼슨 신드롬 (4) >

골드컵 4강전이 치러지는 경기장은 LA 근교에 있는 패서디나의 로즈 볼 스타디움이었다.

무려 9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로즈 볼 스타디움은 오늘 일찌감치 매진되어 암표가 성행하고 있을 정도였다,

"제프가 엘살바도르를 박살 낼 거야."

"당연한 일이지."

"제프뿐만이 아니야. 산티아고도 잘하잖아?"

"그렇지."

"근데 난 제프가 좋아."

"나도."

"내 와이프도 제프가 나보다 좋다더군."

"흠."

"그건 좀 위험한데."

"그래서 경기장에 안 데리고 왔어."

"좋은 생각이야, Bro."

관중석 곳곳에서는 제퍼슨에 대한 기대감이 여실히 드러났다.

많은 사람이 제퍼슨의 플랜카드를 들었고, 몇몇은 이제 그의 상징이 된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와 입간판을 들어 올리며 연신 노래를 불렀다.

미국에 있어 스포츠는 일종의 축제였다.

오후 5시.

따뜻한 햇볕이 쏟아지는 시점에서.

9만 명이 만들어 낸 환상적인 분위기는, 가족끼리 경기를 보러 온 사람들에게도 특별한 경험이 되었다.

그리고 그 특별한 경험에 있어, 제퍼슨은 또 한 번 멋진 골을 선물해 줬다.

"Yeaaaaaaaaaaa!"

"미쳤어! Oh Shit!"

"Fuck! Fucking Lovely!"

관중들은 환호했고, 경악했다.

제퍼슨과 산티아고가 원투패스로 단숨에 중원을 헤집었다.

그리고 30m 거리에서부터 환상적인 단독 드리블 돌파를 보여 주더니,

결정적인 순간 달려드는 수비를 어깨로 날려 버린 뒤에 골네트를 찢어 버릴 듯이 골을 꽂아 넣었다.

그야말로 호쾌한 광경.

보자마자 속이 뻥 뚫리는 광경에, 그리고 양팔을 휘저으며 격렬하게 세레모니하는 제퍼슨의 모습에 관중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외쳤다.

"제-퍼-슨!"

***

[그거 아시나요?]

[무엇을 말이죠?]

[제퍼슨은 A매치에 출전하는 모든 경기에 골을 넣고 있습니다.]

[오, 세상에!]

[경기에 나오기만 하면 무조건 득점을 하는 것이죠. 이게 말이 되는 기록일까요?]

[물론 그간 미국이 상대한 팀은 세계적인 측면에서 보면 대단한 팀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퍼슨의 득점력을 비판하기엔, 그가 보여 준 게 너무 많죠.]

[미국은 감사해야 합니다. 신이 미국에 엄청난 축구선수를 내려 준 것이죠.]

[하하하! 그건 아닙니다.]

[네?]

[미국에 축구의 신이 직접 내려온 것이라고 봐도 무방한 일 아니겠습니까.]

***

엘살바도르는 북중미의 강자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4강까지 올라왔다는 건 저력이 있다는 걸 의미했다.

심지어 조별리그에서 멕시코를 상대로 3대 3이라는, 제법 치열한 격전을 펼치기도 했다.

그 때문에 쉽지 않은 난적이라는 게 일반적인 예상이었다.

하지만.

평소 내가 느끼는 건데.

전문가의 의견이라는 걸, 맹신할 수 없다는 거다.

"왜 이리 비실비실해?"

단순한 감상이다.

그러자 헉헉대며 뛰어다니던 산티아고가 벌레라도 씹은 듯한 표정을 짓는다.

"네가 너무 단단한 게 아닐까?"

"음!"

사실 이런 경험은 또 낯설다.

공을 밀고 진득하니 돌파하면.

나와 부딪친 수비들이 픽픽 넘어진다.

삐이익!

"아니, 이게 왜 반칙?"

"밀었잖아?"

"쟤들이 그냥 밀려 넘어진 건데요."

"안 돼. 더 했다간 경고야."

허.

진짜 이거 색다른 경험인데.

하필 심판도 파울을 정말 잘 부는 성향이었다.

그렇다고 상대 선수들이 이걸 노린 것 같진 않다.

정말로.

얘들이 약했다.

"아니, 네가 강한 거라니까? 제프."

하긴.

그 말도 맞다.

내가 프리미어리그에서 상대한 반 다이크나 맥과이어와 비교하면 이 수비진이 만족스러울 리가 있나.

프리미어리그의 모든 수비수는 여기 있는 수비들하고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그런 이들과 몸싸움하던 나였으니까, 또 격렬한 플레이가 점점 몸에 익었으니까.

그들이 내 차징에 넘어져서 파울을 주는 걸, 받아들이기가 좀 어렵다.

덕택에 공격의 흐름은 계속 끊겼고, 우리는 주도권을 쥐고 있지만, 아직 1대 0이었다.

이거야 원.

조금 난처한데.

이제 내가 심판에게 구두경고까지 받은 상황.

분위기가 묘했다.

상대편 수비들은 이걸 이용하려고 하는 모습이었다.

심판의 성향을 이용해 과한 액션으로 나에게 경고를 주려는 속셈.

그러면 나 역시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혹여 경고 누적으로 퇴장이라도 당한다면, 다음 결승전 멕시코전에 나갈 수 없으니까.

아.

좀생이들 같은데, 묘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내가 이학현일 때, 저런 식으로 공격수를 상대했지.'

입가에 쓴웃음이 걸린다.

이것도 축구를 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걸 비난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수비 방식을 뚫는 게 스트라이커의 본분이다.

이학현일 때, 이런 식으로 플레이해도 잘하는 놈들은 어떻게든 뚫어냈으니까.

나라고 못 할 게 뭐 있겠는가.

'안 부딪치면 되지.'

"제—프!"

공격진엔 네 명의 선수가 있다.

4-4-2의 포지션.

왼쪽엔 풀리치, 중앙에는 나와 다소 쳐진 위치의 산티아고, 그리고 우측에는 베식타쉬 JK에서 뛰는 타일러 보이드가 있다.

타일러 보이드는 괜찮은 선수다.

11번을 달고 있는 만큼 발이 빠르다.

"Yeaaaaaaa!"

환호가 쏟아지고.

중앙에서부터 웨스턴 맥케니의 패스로 시작된 전개가 공격진까지 도달한다.

"제프!"

풀리시치가 내 이름을 외치고 왼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간다.

발 빠른 보이드가 당장 라인을 침투할 것처럼 수비의 시선을 끈다.

산티아고는 조용히, 그리고 은밀하게 공간을 찾아 들어간다.

엘살바도르의 수비방식은 썩 괜찮은 편이다. 심판의 성향을 이용해 파울을 얻어 내어 공격의 흐름을 끊어내는 것.

이런 수비를 깨부수기 위해선, 애당초 그들에게 빌미를 주면 안 된다.

파울?

심판이 파울을 불려면 어쨌거나 접촉이 있어야 한다.

하면 접촉 따위 없이, 저 수비진을 돌파하면 되는 것 아닌가.

툿!

세상에 완벽한 수비는 없다. 분명한 틈이 있다. 그 완벽했던 인터밀란의 쓰리백도 그러했다. 하물며 엘살바도르쯤이야.

"제-프!"

맥케니의 패스는 훌륭한 편이다. 샬케에서 최근 주전으로 자리 잡은 것에는 뛰어난 패스 능력 때문이다.

그가 찍어 찬 패스가 오른쪽의 보이드에게 뚝 떨어지고.

대각선으로 치고 들어가는 산티아고에게 패스.

산티아고는 공을 받자마자 그대로 뒤로 힐 패스를.

투욱!

"Wuuuuuuaaaaa!"

"Goal! Goal! Goal!"

골을 원하는 관중의 환호에 맞춰.

발바닥으로 공을 밀어 넣으며 전진했다.

수비수 두 명이 맹렬하게 달려온다.

몸을 부딪쳐 파울을 얻어 낼 속셈.

그러나 그렇게 당해 줄 생각은 없다.

투욱!

"헉!"

미칠 듯한 가속에서 급격한 브레이크 후 백 스텝.

동시에 발바닥으로 공을 드래그하며,

달려든 두 명의 수비를 접촉조차 하지 않고 중심을 무너뜨린다.

"Goooooooo!"

산티아고가 수비수 한 명을 끌고 가고.

풀리시치 역시 매서운 움직임으로 수비진을 파헤친다.

나에게 집중된 수비는 단 한 명.

그는 이를 악물고 몸을 날린다.

차라리 경고를 받더라도 몸을 날려 끊겠단 속셈.

우스운 일이다.

러닝백은 무려 서너 명의 120kg 거구가 달려오는 걸, 오직 스피드와 방향 전환으로 피해 낸다.

그런 나에게 저런 태클이라고?

꽈앙!

가뿐하게 피했다.

오른쪽 대각선으로 80도 정도로 급격하게 틀어 버리면서.

달려든 수비는 바닥에 볼썽사납게 구르고.

나에게는 골키퍼가 훤히 보인다.

그리고 그대로 인사이드 슈팅으로 꺾어 차 버리는 강력한 슈팅.

아주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깔끔한 연결동작.

강하게 차서 호쾌해질 정도로 시원한 슈팅이.

허공에서 궤적이 뚝 떨어지며 골문으로 빨려들었다.

"Yeaaaaaaaaaaaa!"

"제-프!"

"오, 제프!"

"수비들을 다 피했어!"

"Oh, Shit! 제프가 러닝백이었다고 했지? 맙소사. 달려드는 모든 수비를 다 피해 버렸군!"

"이게 풋볼이다! 이 자식들아!"

뭐, 부딪칠 때마다 넘어지는 수비를 상대하는 건.

이런 방법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냥 피해서 넣으면 되지, 뭐.

***

[미국, 엘살바도르를 3:1로 꺾고 골드컵 결승 진출!]

[제퍼슨 리, 골드컵에 화려하게 복귀! 2골 폭발하며 결승으로 이끌다!]

[미국 팬들, '제퍼슨 리는 우리 미국을 우승으로 이끌 것!']

[미국 그렉 버홀터 감독, '나는 감독으로서 행운아다. 그가 미국인이고, 나는 미국 국가대표팀의 감독이니까.' 제퍼슨에게 찬사를 보내다!]

[A매치 출전 경기마다 득점 폭발, 제퍼슨 리의 득점력에 미국이 열광하다!]

[골드컵 결승전 상대, 멕시코에 대한 질문에 제퍼슨 리, '저번에 벌어졌던 멕시코전은 절대 멕시코의 치욕이 아니었다. 아마 결승전에서 진짜 치욕이 뭔지 알게 될 것이다.']

***

멕시코의 축구팬들은 격렬함을 넘어 훌리건에 가깝다.

유럽 훌리건들이 대단하다지만, 멕시코의 축구팬들이 보이는 모습도 더하면 더하지, 결코 얌전한 편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저번 미국과의 A매치는 치욕적이었다.

[미국 6 : 1 멕시코]

제퍼슨 리가 3골 2어시스트를 기록했던 그 경기.

위대한 아메리카를 부르짖었던 그 날.

경기가 열렸던 멕시코시티는 침묵에 잠겼다.

몇몇 팬들은 멕시코 치욕의 날이라 선언하고, 검은 깃발을 집 창문에 걸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말했다.

'멕시코 치욕의 날', '멕시코시티의 참사'

그리고 그런 충격을 심어 줬던 제퍼슨 리가 내놓은 인터뷰에 다시 한번 멕시코는 들끓었다.

"미친놈!"

"그때 그 경기가 치욕이 아니라고?"

"진짜 치욕을 느끼게 해 주겠다고?"

"개자식!"

"Oh! 개자식!"

"개자식! 개자식! 개자식! 개자식!"

제퍼슨을 향했던 멕시코 팬들의 험담은 이내 자국 대표팀에게 향했다.

"또 진다면 멕시코에 돌아올 생각하지 말라고 해!"

엄청난 기대감과 부담감이 멕시코 대표팀에게 향했다.

"엿 같군."

제퍼슨이 엘살바도르를 무너뜨리는 경기를 TV로 지켜보면서.

멕시코 선수들은 모두 침음을 삼켰다.

아예 한 번도 상대해 보지 않았으면 몰랐을까.

현 멕시코 대표팀은 멕시코시티의 참사 때 있던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모두 절실히 느꼈다.

제퍼슨 리의 무지막지한 실력을.

그 압도적인 실력에 자신들이 얼마나 보잘것없었는지 느끼지 않았던가.

특히 그런 감정은, 멕시코 수비의 핵이라고 볼 수 있는 시셀도가 더 했다.

"그래도 우리는 막아야 해."

시셀도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솔직히 말해, 제퍼슨. 무지막지한 놈이야. 팀에서 자체 훈련할 때, 저 녀석을 상대하는 게 내 축구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어."

시셀도가 침착하게 얘기했다.

여기서 제퍼슨을 가장 잘 아는 선수는 시셀도가 유일했다.

하여 모든 선수는 시셀도의 말을 경청했다.

"엄청 무섭지. 매 경기 골을 넣고 말이야. 하지만 그도 무득점 경기를 펼친 적이 있단 걸 기억해. 우리라면, 그를 막을 수 있고, 우리 공격진이라면 미국의 허접한 수비 따위는 박살 낼 수 있어. 안 그래? 형제들?"

"맞아!"

"왜 벌써 기가 죽은 거야?"

"우리는 북중미의 제왕이라고!"

"복수해야지!"

"리벤지 매치야!"

시셀도의 말에 선수들은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들의 눈이 부리부리하게 빛났다.

어떻게든 승리하겠다는 강한 열망이 선수들 사이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결승전이다.

***

[제퍼슨 리! 멕시코의 수비벽을 단숨에 꿰뚫어 버립니다! 경기 시작하자마자 터진 엄청난 골! 팀 동료인 시셀도가 잔디를 쥐어뜯습니다!]

같은 클럽의 동료지만.

국가대항전에서는 그저 나쁜 놈일 뿐이다.

시셀도는 허망한 감정을 느끼며 제퍼슨을 바라봤다.

"······개자식."

작은 목소리였건만.

그걸 들었나 보다.

제퍼슨이 웃었다.

"팀 동료에게 듣는 욕도 새로운데. 나쁘진 않네."

"······."

< 117. 제퍼슨 신드롬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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