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제퍼슨 신드롬 (3) >
자메이카하면 흔히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육상 영웅, 우사인 볼트.
자메이카에선 볼트를 필두로 수많은 육상 스타가 화수분처럼 나온다.
단거리 국가대표로 뽑히는 것이, 세계선수권에 도전하기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 농담처럼 나올 정도다.
하여, 충분히 발이 빠르고 재능이 있음에도 국가대표라는 타이틀을 따지 못하고 낙마하는 예도 있다.
그런 선수 중에, 꽤 많은 선수가 축구로 전향하기도 한다.
일단 스피드 하나만으로 상대를 공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하부리그일수록, 볼 컨트롤 보단 신체적인 조건, 압도적인 속도만으로 먹고 사는 선수가 많다.
"빌어먹을. 더는 안 먹힌다."
자메이카의 오른쪽 윙백, 오니엘 피셔.
어렸을 때 단거리 올림픽을 꿈꿨던 그는 축구로 전향한 케이스였다.
100m를 10.6초로 끊는 압도적인 스피드.
비록 볼 컨트롤은 투박하지만, 스피드 하나만으로 상대를 힘들게 하는데 도가 텄다.
오늘 미국의 수비가 여러 번 애를 먹은 장면이, 바로 그런 피셔의 무지막지한 오버래핑 때문이었다.
-LEE Will, LEE Will Kill you!
피셔는 귓가를 찌르고 진동시키는 박자와 응원에 치를 떨었다.
"미친."
욕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장엄하다.
머리칼이 쭈뼛 서고 몸에 소름이 돋는다.
6만 명의 관중이 동시에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친다.
경기장이 마치 하나의 드럼처럼 울리면서 아주 익숙한 음악을 쏟아 낸다.
마치 여기가 콘서트장인 것처럼.
피셔는 감탄했다.
"도대체."
어떤 선수여야 이런 응원을 받는단 말인가.
부러움과 경외심이 동시에 들면서도, 묘한 생각이 들었다.
이 대단한 선수를 이겨낸다면?
자신은 어떤 관심을 받을 수 있을까?
적어도 속도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그의 부리부리한 시선이 제퍼슨에게 향했다.
'만일 놈이 투입된다면, 적어도 세 명이 압박해. 거칠고, 투지 있는 플레이로 달라붙어. 부상 회복하고 들어오는 놈이라 다소 소극적일 거야. 그 점을 노려.'
감독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최소 셋으로 잡아야 한다고?'
그만큼 위협적인 선수란 얘기다.
그리고 선수의 가치는, 더 높은 가치를 지닌 선수를 상대해서 이기는 장면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피셔는 경기장에 찾아온 스카우터를 떠올리며, 제퍼슨의 일거수일투족을 똑똑히 지켜봤다.
뻐어어엉!
후방에서 공을 차단한 로드릭이 기다렸다는 듯이 왼쪽 라인으로 공을 차올렸다.
수비의 머리를 넘기는 다이렉트한 패스.
"흥! 어림도 없지!"
그 위치는 피셔가 있던 장소였다.
타앗!
자메이카는 오늘 3실점을 내줬지만,
적어도 수비 뒷공간을 내준 실점은 아니었다.
수비 뒷공간은 피셔뿐만 아니라 대체로 발 빠른 수비들이 커버에 성공하고 있었으니까.
주위의 풍경이 휙휙 지나간다. 바람이 날카롭게 뺨을 스친다. 저 멀리 날아가는 공이 점점 커지고 뚜렷해진다.
'잡고, 바로 걷어 낸다!'
다이렉트 패스는 어림도 없는 짓이다.
피셔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떨어진 볼을 향해 발끝을 뻗는 순간.
툿!
"······어?"
피셔는 순간 얼빠진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커다란 덩치가 눈 앞을 가리는 게 아닌가.
공을 가려 버리는 듬직한 체구.
[LEE, 9]
유니폼에 적힌 이름에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도대체 언제?"
분명 중앙에 있던 공격수가.
자신보다 먼저 공에 도달했다고?
아니, 그게 말이 되는가?
하나, 부정할 수 없다. 믿기지 어렵지만 먼저 공을 다가가 받아 낸 건 제퍼슨이었다.
"하, 이 새끼. 정말 빠르네. 덕분에 미친 듯이 뛰었잖아?"
"······."
제퍼슨은 미간을 좁히며 그런 말을 내뱉곤, 곧바로 공을 몰고 중앙으로 치고 갔다.
피셔는 화들짝 놀라 곧바로 뒤를 쫓았다.
자신이 스피드에서 뒤졌다는 충격도 잠시.
'놈은 볼을 몰고 드리블하지! 나보다 빠를 수는 없어!'
실제로 그랬다.
심지어 피셔 정도의 스피드라면, 공을 몰고 달려가는 공격수의 뒤를 쫓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
피셔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제퍼슨과 어깨선을 맞췄다.
그 순간, 제퍼슨의 고개가 살짝 돌려지며 눈이 마주쳤다.
"······!"
뭔가 잔뜩 귀찮다는 듯한 시선.
그리고 피셔는 넋을 놓았다.
왜.
점점.
"멀어지는 거야?"
분명 자신도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데.
대체 왜······?
순식간이었다. 태클을 시도할 타이밍도 없었다. 마치 모터라도 단 것처럼, 부스터를 뿜어내는 것처럼 제퍼슨은 점점 멀어졌다. 단숨에 다른 수비마저 돌파해 내고, 그대로 골문을 향해 슈팅을 때렸다.
뻐어엉!
"LEE Will, LEE Will Fuck you!"
그 응원가의 내용이.
치가 떨리도록 정확히 맞아 떨어질 줄은 몰랐다.
"제대로 엿 먹었군."
피셔의 두 동공이 풀렸다.
그의 유일한 무기였던 스피드로 제대로 털렸다는 깊은 상실감이 크게 내려앉았다.
***
[LEE가 들어오자마자 골을 넣고 있습니다!]
[골골골골골! 제퍼슨 리! 오니엘 피셔를 순수한 속도만으로 이겨 낸 뒤에, 화려한 팬텀드리블로 상대 수비를 무너뜨리고 터뜨린 환상적인 피니쉬입니다!]
[지친 자메이카 수비진이 제퍼슨을 상대하지 못하고 있네요.]
[이거야 원. 정말 장난이 아니네요. 스피드와 피지컬이 어마어마합니다. 자메이카 수비수들이 마치 중학생처럼 보일 정도군요.]
[그 정도 클래스의 차이가 느껴집니다. 현시점에서 세계에서 가장 어리면서도 가장 최고의 실력을 보여 주는 공격수답습니다.]
[기다렸던 미국 시민들에게, 제퍼슨 리가 골을 터뜨리면서 귀환을 알립니다!]
중계진들은 흥분된 어조로 소리쳤다.
그들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치 격투장의 사회자처럼 마이크를 들고 소리쳤다.
[그의 본래 별명은 미국의 왕이었죠.]
[드디어 왕이 골드컵을 얻기 위해 귀환했습니다! King is Back! 런던을 정복한 미국의 왕이 골드컵의 트로피를 향해 진격을 외칩니다!]
***
"대박입니다!"
"대박이지. 미국이 4강에 진출했으니까."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폭스 방송사의 스포츠국 총괄PD는 미간을 좁혔다.
그의 후배 중 하나가 호들갑을 떠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어도 미국이라면, 결승전에 오른 뒤에야 저런 호들갑을 떨어야 하지 않겠나.
하나, 이어진 후배의 말에 총괄 피디는 온몸에 소름이 올라왔다.
"시청률 집계가 완료됐습니다! 전미 기준 13%입니다!"
"뭐?"
"13%라고?"
"아니, 그게 진짜야?"
"잠깐만. 서부만 집계한 건 아니지?"
"아뇨, 북미 전체요!"
"Oh, Shit!"
"Fucccck!"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괴성을 질렀다.
총괄 PD도 체면 따위는 던져 놓고 그대로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
"됐다! 빌어먹을! 이 개자식들아! 됐다고! 우리가 해냈어! 으하하하하하!"
흡사 광란의 현장이었다.
스포츠국의 직원들은 13%라는 시청률 집계에 정말 미쳐 날뛰었다.
어떻게 보면 낮은 수치일 수도 있다.
1억 명이 넘는 시청자를 자랑하는 슈퍼볼이 40%에 육박하니까.
그러나.
"NBA 파이널이 9%였지. 월드시리즈가 12%였고 말이야!"
슈퍼볼이 괴물 같은 거지,
나머지 4대 스포츠의 시청률보다 더 높게 집계된 것이다.
그것도 골드컵 결승이 아닌, 단순 8강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분석 결과, 4%를 유지하던 시청률이 후반전 제퍼슨 리가 투입된 직후 15% 이상으로 급격하게 치솟았습니다."
"오, 맙소사!"
"제퍼슨이 골을 넣고, 리플레이가 돌아가는 장면에서는 20%까지 치솟았구요. 경기가 끝날 때까지 18% 선을 유지했습니다."
"······!"
총괄 PD는 말을 잃었다.
무언가 울컥하고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사실 그는 폭스 방송사가 월드컵 중계권을 1조 원에 사게 하는 엄청난 짓을 저지르는 데 한몫한 인물 중 하나였다.
월드컵이야말로 슈퍼볼을 이길 수 있는 상품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미국이 18년 월드컵에 아예 진출조차 못 한 결과를 내면서, 그는 출근할 때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렇게 몇 년이었던가.
그런 그에게 지금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지금 SNS 인기 키워드를 살펴보면, 모두 제퍼슨 리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모든 SNS의 인기 키워드가 #제퍼슨 리 라는 얘기죠. 거기에 지금 구글에 문의결과 경기 직후 제퍼슨에 대한 검색량이 폭증하고 있답니다!"
"······!"
"한마디로 지금 북미 전역이 제퍼슨을 외치고 있는 겁니다!"
거기까지 들은 순간.
총괄PD는 월드컵 중계권을 따고자 과감하게 돌진했던 그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줬다.
일개 연출팀 막내에서 거대한 방송국의 스포츠국을 총괄하는 위치까지 오르게 된.
그의 과감한 결단력이 드러났다.
"당장 MLS 협회에 전화 돌려! 제퍼슨에 대한 모든 경기 영상 좀 달라고!"
"네?"
"지금까지 제퍼슨이 치른 A매치 경기 다 종합해서 하이라이트 뽑아내고! 프리미어리그에서 보여 준 제퍼슨 활약상도 다 뽑아내!"
"알겠습니다!"
"멈추지 마! 당장 뛰어! 유로파리그 중계권은 어디 방송사에 있었지? 당장 가서 접대하던 로비를 하던, 유로파리그까지 다 가지고 와. 제퍼슨이 뛴 모든 경기를 다 모아!"
그야말로 폭풍 같은 기세로 쏟아져 나오는 지시.
스포츠국 직원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퍼슨 특집이다! 다음 4강전까지 제퍼슨 특집으로 프로그램 하나 만들어!"
"미친!"
"No!"
"그건 불가능입니다!"
"다음 경기가 4일 남았는데. 3일 만에 만들라구요?"
"아니, 경기 이틀 전에 특집방송 내보낸다."
"헉!"
"하루?"
"하루 만에 만들라고요?"
"아니, 이건 아닙니다!"
총괄PD가 소리쳤다.
"좆까! 골든러쉬로 서부를 개척했던 선조들의 정신을 본받으라고! 방송 일정은 내가 국장님에게 따올 테니까."
"그럴 필요 없네."
총괄 PD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난장판이 된 스포츠국에 국장이 찾아온 것이다.
국장은 주위를 한 번 쓱 둘러보더니 말했다.
"골드컵 결승까지 시청률이 20%가 넘는다면, 휴가와 성과급이 주어질 거세. 적어도 반년 치는 나올 거야. 위에서 나온 얘기지."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뭐 해! 당장 움직여!"
"이 자식들아! 영상부터 확보하고 전문가들 집합시켜서, 하이라이트만 뽑아내!"
"그 뭐시냐. 웹플릭스 다큐 찍은 애들은 할리우드에서 편집자들 데리고 왔다면서?"
"까짓것 우리도 하자고! 다큐도 그러는데, 우리가 못할 게 뭐 있어?"
"집에 들어갈 생각하지 마!"
돈과 휴가라는 달콤한 과실의 무시무시한 위력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 중에도, 정상적인 생각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몇 있었다.
당장 집에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고 싶은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하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스포츠국의 모든 사람이 미쳐 날뛰는 상황에선 요원한 일이다.
결국, 그들의 마음은 애꿎게도 제퍼슨에게 향했다.
"제퍼슨······. 이 개애자식. 왜 축구를 잘하고 지랄이야, 지랄은."
***
"누가 내 욕하나? 귀가 간지럽네."
"왜? 귀가 간지러운 거하고 욕하는 거하고 무슨 상관이야?"
"한국에서는 그런 말이 있거든. 귀가 간지러우면 누가 내 욕하고 있는 거라고."
내 말에 산티아고가 공을 리프팅하면서 피식 웃었다.
"자메이카 애들이겠지."
"누가 널 욕해?"
"아주 미국의 영웅인데."
"골은 내가 두 골 넣었는데. 교체로 한 골 넣은 제프가 더 영웅이 되었어."
산티아고의 농담에 훈련장에 웃음이 터졌다.
뭐.
어쩔 수 없나.
"공만 잘 찬다고 인기를 얻는 게 아니란다, 산티."
실제로 그랬다.
대표적인 예로는 맨시티의 스털링이 있다.
스털링, 이 녀석 미친놈이다.
이번시즌 21골 16도움이던가.
한데 그의 활약에 비교해 무언가 관심이 저조한 느낌이다. 세계에서 월드 클래스라고 치켜세워 주는 다른 선수들과 비교해 꿀리지 않는 스탯과 플레이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차이는 바로 스타성에서 온다.
각종 매체로 스포츠 선수의 활약상이 전해지는 지금에서는.
오로지 실력 하나만으로 영웅이 되려면, 적어도 메시처럼 아예 찍어 눌러야 하지 않겠나.
그런 면에 있어서 내 에이전시의 도움과 다큐멘터리를 통해 폭증한 인기 덕택에.
스타성은 아마 현 미국 선수 중 내가 최고가 아닐까.
"그래서 말인데."
산티아고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도, 네 에이전시 소개 좀 해 주면 안 될까?"
흠.
제크 팀장의 입이 찢어지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군.
< 116. 제퍼슨 신드롬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