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제퍼슨 신드롬 (2) >
한 시즌 동안 보여 준 제퍼슨의 활약은 믿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세 개 메이저 대회 우승.
두 개의 대회에서 득점왕 차지.
한 시즌 60골에 육박하는 득점 기록.
거기에 리그의 모든 트로피를 휩쓸다시피한 시상식까지.
미국의 스포츠 언론은 미식축구 뉴스보다 제퍼슨의 활약상을 메인에 올리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다큐멘터리 '리얼 블루스, 첼시'의 제작진은 머리를 쥐어 잡고 격렬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부족합니다!"
"아니, 시간이 너무 없어요! 한 달 반짜리 일정을 갑자기 2주일로 줄이라니요?"
"말도 안 됩니다! 이게 일정을 줄이라고 해서 뚝딱 하고 나오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본래 다큐멘터리가 정식 방송 되는 시점은 7월 중순이었다.
하여 첼시의 시즌이 끝나고, 연출팀과 편집팀이 달라붙어 후 작업을 하는데 한 달 반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사실 이것만 해도 빠듯한 일정이다.
한데 갑자기 투자자 측에서 이 일정을 줄여 줬으면 하는 의견을 전달했다.
총책임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제작진들의 아우성에도 굴하지 않는 단호한 목소리.
"골드컵 때문이야! 어쩔 수 없어! 지금 골드컵이 시작되고 있는 시점에 런칭해야 엄청난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골드컵은 큰 축구 행사다.
스포츠에 환장하는 미국인들이라면, 적어도 모두 눈과 귀를 열고 집중할 대회.
이 시점에 맞춰 다큐멘터리를 내놓는다면 대박을 칠 수 있다.
더구나 저번에 예고편이 폭발적인 관심을 끌지 않았는가. 투자자와 광고사들은 공개 일정을 한 달이나 앞당기자는 생각이었다.
"불가능합니다! 이건 물리적으로 불가능이에요!"
물리적으로 불가능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의 최전선에 있던 미국인들만큼.
"성과급 500%란다."
투자자들은 누구나 혹할 후한 보너스를 제시했다.
"2주일이면 충분하죠!"
"까짓 것 못할 게 뭐가 있습니까? 집에 안 들어가면 그만이죠."
"할리우드에서 날고 기는 놈들 다 불러 모으겠습니다!"
사실 스포츠 다큐멘터리는 투자금액이 크지는 않다.
대부분 부족한 제작금액으로 인해 오히려 '리얼'에 가깝게 만들어지곤 한다.
그러나 이건 다르다.
기존의 투자자부터, 예고편 공개이후 미국 축구협회와 제퍼슨의 개인 스폰서십들도 투자에 뛰어들었다.
그것뿐인가? 예고편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확인한 광고사들이 일제히 탐을 내고 있다.
광고 단가가 올라가고 있단 얘기다.
덕택에 제작진은 유례없는 풍족한 제작금액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
"저희가 만드는 게 할리우드 대작 영화입니까?"
"뭔 블록버스터도 아니고."
"영상미 보십쇼. 이건 영화제에 가야할 정도입니다."
짧은 시간.
10편에 가까운 분량을 한 번에 업로드해야 하기 때문에, 제작진은 할리우드의 날고 기는 인력들을 대거 동원했다.
덕택에 만들어진 결과물은 단순 다큐멘터리라고 보기엔 너무 압도적인 영상미를 자랑했다.
"투자자들의 의견은 하나다! 첼시라는 클럽의 다큐멘터리지만, 제퍼슨의 활약이 두드러지면 좋겠다는군!"
투자자들의 의견과 현장 제작진의 의견이 상반되는 건 흔한 일이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제작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저희가 싫어도 어쩔 수 없어요."
"다큐멘터리라도 흐름이 있죠.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있어야죠. 근데 그 이야기에 모두 제퍼슨의 활약이 두드러집니다."
"제퍼슨이 터뜨린 결승골은 모두 하나같이 드라마틱하죠."
"이 다큐는 제퍼슨을 빼면 절대 흐름이 이어지지 않아요."
"이건 사실 제퍼슨이 주인공인 그의 개인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어요."
제퍼슨의 활약이 너무나 드라마틱했던 것이다.
다큐멘터리라도, 이야기의 흐름이 있고 흐름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이 있기 마련이다.
투자자들은 그런 제퍼슨을 더 부각시켜 달라는 의도였지만, 애당초 쓸데없는 부탁이었다.
이미 그렇게 제작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여튼 제작진은 2주 만에 결과물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확인한 투자자들과 관계자들은 모두 손뼉을 쳤다.
"좋아요! 환상적입니다!"
"한편의 드라마를 본 것 같네요."
"영상미가 아주 좋네요. 영화라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이대로 진행하시죠!"
투자자들의 OK가 떨어진 순간.
피곤에 찌든 제작진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드디어 끝난 것이다.
"아, 바로 시즌2 준비하는 거 맞으시죠?"
"흠. 이왕이면 아예 제퍼슨만을 주인공으로 외전 격으로 하나 더 만들면 좋겠는데요."
"그거 멋진 생각이군요!"
활짝 펴진 게 어두워지는 건 금방이었다.
'What the Fu......!'
***
시즌이 끝났는데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들이 있다.
"휴가 안 필요하세요?"
"지금이 중요한 시점입니다. 휴가는 나중에 가도 되는 일 아닙니까."
"제프, 지금이 아주 중요해요. 당신은 성장기죠."
"191cm에 92kg가 성장기란 게 농담 같지만, 당신은 아직도 크고 있어요!"
내 트레이닝 팀, 율리아겐과 디 파코는 일제히 휴가를 반납했다.
어쩔 수 없다.
사실 나도 휴가가 없으니까.
골드컵은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대회다.
적어도 내가 국가대표로 얻을 수 있는 첫 트로피니까.
또 그 다큐멘터리로 인해, 미국인이 나에게 거는 기대감과 관심이 무척 크다.
골드컵에 참여하는 만큼, 트레이닝 팀이 따라붙은 건 당연한 일이다.
"1년 동안 많은 경기를 뛰었어요. 제프, 당신의 괴물 같은 회복력이 아니었으면 진작 쓰러졌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젠 안 됩니다. 여기서 A매치를 치르고, 프리시즌 경기에 바로 시즌을 시작한다? 그러면 확신하죠. 그 불가사의한 회복력도 한계를 보일 겁니다."
"어쩌면 20대 후반에 선수 생활이 끝날지도 모르죠."
"우리가 옆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두 명의 진지한 얼굴에 난 속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사람들은 정말 잘 골랐다니까.'
프로 의식이 대단한 양반들 아닌가.
그들의 말대로 지금이 내게 중요하다.
나는 뒤늦게 A대표 캠프에 들어왔고, 훈련을 같이 받았다.
전술 훈련은 기본적으로 같이 하되, 체력 훈련은 트레이닝 팀의 지시에 따라 회복에 중점을 뒀다.
"흠. 시즌 끝나고 햄버거하고 도넛 좀 잔뜩 먹고 싶었는데 말이죠."
그 말에 율리아겐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미국은 휴가를 치르기엔 너무 안 좋은 것 같습니다. 도넛을 비롯한 온갖 정크푸드가 득실대니까요."
식단 관리는 고통스럽다.
그만큼 혼자서는 어렵다.
율리아겐과 디 파코처럼 옆에서 관리해 줄 사람이 없으면 더 말이다.
어쨌든 그들의 조력에 난 점차 체력을 회복했다.
다행히 그동안 미국은 골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미국, 쿠바 상대로 3대 0 대승!]
[산티아고 2골! 미국, 니키라과 2대 1 쾌승!]
[완벽한 조직력, 세대교체에 성공을 거둔 미국, 제퍼슨 리가 돌아온다면 더 무서워질 것!]
[미국 팬들, '제퍼슨 리가 복귀하는 순간 골드컵 우승은 확정이다!']
[미국 버홀터 감독, '제퍼슨 리. 빠르면 8강전, 늦어도 4강전에 뛸 수 있을 것.']
"생각보다 미국 스쿼드가 좋아."
유럽에서 점차 두각을 드러내는 유망주 위주로 뽑힌 이번 대표팀은, 1년 후 월드컵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 준다.
16강에서 무너지지만, 많은 전문가가 찬사를 보낼 경기력이었다.
이제는 거기에 미래의 슈퍼스타가 확실한 산티아고의 이른 발견과, 또 나도 있지 않은가.
이번 골드컵을 기점으로, 팀이 제대로 만들어진다면.
1년 후 있을 월드컵에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뭐, 골드컵부터 따내고 생각하자고."
골드컵은 월드컵을 가기 위한 식전 행사에 가깝다.
그렇지만 저번 대회에서 멕시코에게 뺏긴 트로피를 또 한 번 내줄 생각은 아니다.
반드시 가지고 와야 하지 않겠나.
***
LA에 소재한 한 하이스쿨의 풋볼선수인 마이크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치어리더 팀의 소피아가 그를 집으로 초대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웹플릭스 보고 갈래?"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이크는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저 멘트는 흔한 멘트다. 남녀가 서로를 유혹할 때 쓰는 일종의 신호였다.
"정장은 아니야. 음, 이건 너무 촌스럽고 말이지. 향수? 향수는 뭘 뿌려야 할까."
잔뜩 긴장한 채.
소피아의 현관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안녕, 마이크!"
"어, 안녕! 소피아."
소피아가 반가운 얼굴로 그를 반겼다.
한데 문이 열리고 나서, 마이크는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분위기가 그가 예상했던 것하고는 달랐던 것이다.
달콤한 팝콘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오늘 정말 재밌는 거 공개된단 말이야. 너도 스포츠 좋아하니까, 같이 보고 싶었어."
소피아가 잔뜩 기대어린 얼굴로 말했다.
그 모습에 마이크는 다소 얼떨떨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재미있는 할리우드 영화를 보러가는 듯한 설렘이 느껴지는 게 아닌가.
'뭐야? 정말로 TV 같이 보자고 부른 거야?'
설마 그럴 일이 있겠는가.
싶었지만, 소피아는 팝콘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어서 와! 이거 재밌을 거야!"
마이크는 얼떨떨한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TV에서는 '리얼 블루스, 첼시'라는 제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이크의 미간이 좁혀졌다.
"뭐야? 축구?"
"응."
"축구 좋아해?"
"풋볼도 좋아하긴 하는데, 요즘은 축구도 재밌더라고."
마이크는 애써 속내를 감췄다.
'샌님들이나 하는 스포츠를······.'
풋볼을 즐기는 그에겐 그것이 일반적인 선입견이었다.
하나, 화면에 나오는 한 인물에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 제퍼슨 리?"
"알아? 엄청 유명한 선수야. 지금 최고 축구 선수고."
마이크가 알아보자, 소피아는 기쁜 낯을 지었다.
하나 마이크는 그가 축구선수란 사실에 놀랐다.
"쟤 걔잖아. 서부 고교리그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MVP 괴물 러닝백!"
1학년 때 그를 상대해 봤다.
자신의 팀의 디펜스맨들을 스피드로 무너뜨리고, 몸으로 밀어붙여 버렸던.
진짜 괴물이었다.
특히 이쪽에서 보기 힘든 아시아계 선수라 더 기억에 짙게 남았다.
"잘 아네! 제프가 지금 미국 국가대표로 멕시코를 박살 냈고, 유럽에서도 엄청나게 활약을 보여 주고 있어."
마이크는 저도 모르게 점점 화면에 집중했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면서 몰입했다.
[Ohhhhhhh! Lovely Finish! 환상적인 골입니다! 제퍼슨 리! 엄청난 득점입니다!]
[제퍼슨 리는 환상적인 선수입니다. 언터처블, 그 자체죠! 그를 막을 선수는 없습니다!]
[첼시! 유로파 우승을 차지합니다!]
중계진의 격정적인 멘트, 화려하고도 역동적인 경기 장면, 격렬하게 환호하는 관중들의 모습까지.
스포츠맨으로서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 장면들이 연이어 쏟아졌다.
특히 편집과 영상미가 엄청났다. 마치 한편의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긴장감까지 느껴졌다.
"우와."
저도 모르게 입에서 감탄을 터뜨렸다.
축구 규칙도 모르지만, 영상에서 보여 주는 스포츠 특유의 격렬함과 흥분, 짜릿함은 여지없이 전해졌다.
"이게 다큐멘터리라고?"
다큐멘터리는 거짓이 아니다.
하면 이 흥분과 떨림은 모두 실재가 아니겠는가.
"제퍼슨, 존나 멋지잖아?"
마이크는 마른침을 삼켰다.
격렬하게 환호하는 관중들이 흐릿해지고,
필드에서 손을 들어올리는 제퍼슨에게 초점이 맞혀지면서 선명해진다.
LEE
순간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그는 처음으로 축구란 스포츠에 관심이 생겼다.
특히 러닝백 출신의 제퍼슨이 보여 주는, 유럽에서 찬사받는 그의 플레이에 깊은 감명을 느꼈다.
'축구라······.'
NFL은 괴물들이 있는 리그다.
마이크는 과연 자신이 거기까지 진출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최근엔 야구로 전향할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한데 지금, 그는 새롭게 축구에 흥미가 동하는 걸 느꼈다.
"경기 보러 갈래?"
"어?"
"LA에서 골드컵 8강전 하거든. 제퍼슨이 이 경기에 복귀한다는 얘기가 있어서."
소피아의 수줍은 데이트 신청에,
마이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물론이지."
***
"8강전에서 20분 정도 뛸 수 있겠나?"
나는 조별리그에서 단 1분도 뛰지 않았다.
전술 훈련을 병행하면서 체력과 컨디션을 회복하는데 중점을 뒀으니까.
이제 경기 감각을 살릴 필요가 있다.
나도 4강부터는 뛰어야 하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아! 제프! 미국의 영웅이 드디어 나오는군!"
8강전은 자메이카와의 승부였다.
사실 나의 투입은 어쩌면 일종의 팬서비스일지도 모른다.
웹플릭스에 공개된 다큐멘터리 덕택에 현재 북미에서의 내 인기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고 있으니까.
이미 3대 0이란 스코어로 앞서가는 상황.
[IN No.9 제퍼슨 리]
전광판에 번호가 들어 올려지는 순간.
시끄러웠던 LA의 경기장이 일순 정적에 잠겼다.
소름 끼치는 일이다.
선수들의 외침만 들릴 정도로, 경기장 전체가 침묵에 잠기는 건.
그리고 어느 순간, 침묵이 깨졌다.
쿵쿵, 짝!
쿵쿵, 짝!
순간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소름이 쫙 올라왔다.
두 번의 발 구르기와, 한 번의 손뼉.
익숙한 박자감과 묘하게 감정을 뒤흔들어버리는 리듬이.
아마도 다큐멘터리에서 나온 내 응원가를 본 미국 관중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해 온 것이리라.
쿵쿵, 짝!
"LEE Will, LEE Will Kill you!"
흠.
"가서 다 죽여 버리라고! 제프!"
마초들의 거친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뭐,
미국에서의 스포츠는 이런 거지.
거칠고, 폭력적이고, 저돌적인.
그럼, 보여 줘야 하지 않겠나.
진짜 스포츠를.
< 115. 제퍼슨 신드롬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