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114화 (114/258)

< 114. 제퍼슨 신드롬 (1) >

우리 팀의 시즌은 늦게 끝났다.

대부분의 다른 팀들은 리그가 끝나면서 올 시즌이 끝났지만.

우리는 5월 말, 6월 초까지.

FA컵과 유로파리그 결승까지 치른 뒤에야 시즌이 끝났다.

"절대 휴식이 필요합니다."

"MLS에서부터 뛰어왔죠. 3월부터 말이죠. 무려 80경기 가까이 뛰었습니다. 이제 한계입니다!"

"절대 안 돼요! 젊어서 이쯤이야 열정으로 견딜 만하다고 생각되시겠죠. 20대 중후반에 은퇴할 생각이 아니시다면, 그런 생각은 접으셔야 합니다!"

내 트레이닝 팀이 경기를 일으키는 건 이해할 만했다.

너무 길었으니까. MLS 시즌 도중 이적한 마당에 모든 대회를 다 뛰었으니 말이다.

필마르크 감독의 철저한 로테이션과 풀타임 경기를 지양하는 체력 관리 덕택에 무사히 시즌을 마칠 수 있었다.

문제는 A매치 일정이었다.

"골드컵이 있는데요."

"음!"

"······."

2021년에는 골드컵 대회가 열린다.

내가 이 대회에 나갈 건 당연한 일.

이미 소집 명단에 올라있다.

"저희가 대표팀 코칭스태프를 설득할 자료를 만들죠."

"조별예선 3경기마저 뛴다면, 어렵습니다."

"골드컵 후에는 프리시즌이죠. 프리시즌 이후에는 그 엿 같은 프리미어리그 일정이 기다립니다!"

"솔직히, 조별예선 정도야 제프가 없어도 충분히 뚫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다.

미국은 북중미의 강호가 됐고, 멕시코급의 팀이 아닌 이상 상대할 팀이 없다.

트레이닝 팀은 몇 날 며칠 동안 자료를 준비하여, 미국 대표팀 코칭스태프에게 의견을 전달했다.

-8강까지 자네는 휴식일세. 물론 훈련에 참여하지만, 정말 우리 팀이 위기에 빠지지 않는 한 자네는 적어도 8강까진 편안하게 체력을 회복하면 될 거야.

미국 대표팀의 버홀터 감독이 설득 당했다.

사실 미국 국가대표라는 게, 한국과는 다르다.

나라가 부른다?

그러면 당연히 가는 게 일반적이지만.

미국은 꼭 그렇지는 않다.

대표팀의 부름을 거절하는 건, 여러 스포츠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개인의 몸 관리를 보다 중요시하는 선수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혹여 내가 다쳐, 사이가 나빠질 걸 우려한 버홀터 감독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쉬운 소리를 낸 건 아니다.

적어도 지금 미국 대표팀 스쿼드라면, 내가 없어도 4강까지는 충분하다. 멕시코만 아니면, 맞상대할 팀이 없다.

-알겠습니다. 저희가 언론 보도를 그쪽으로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이미지가 중요하니까요.

에이전시는 내 연락을 받고 발 빠르게 움직였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미지 때문에 내가 미국을 대표한다는 인상이 심어져 있었다.

[제퍼슨 리, 부상으로 대표팀 훈련캠프 추후 참여]

[미국 그렉 버홀터 감독, '제퍼슨은 긴 시즌으로 인한 피로가 누적되었다. 하지만 그는 골드컵에 참여할 것.']

[미국 산티아고, '제퍼슨이 회복할 때까지 미국은 전진할 것이다.']

대표팀 캠프에 늦게 참여하거나, 참여해도 적어도 8강까진 휴식을 취하는 상황은 루머가 나올 만한 소지가 있다.

가령 감독이랑 불화라던지, 그런 것 말이다.

그런 루머는 팀을 흔들기 딱 좋다.

나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다.

제크 팀장은 그런 루머가 나올 틈을 원천 차단해 버렸다.

피로 누적과 부상이라고 못 박아서, 8강까지는 뛰기 어렵다는 걸 언론에 호소한 것이다.

이런 조치로 나도 적어도 8강까진 휴식을 치를 수 있다.

비록 몇 경기 차이가 안 난다지만, 휴식기에 출장 경기가 적을수록 몸 관리에 도움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어쨌든, 골드컵이 열리는 미국으로 복귀하기 전.

나는 러시아로 향했다.

***

"전화로만 얘기하다가, 이렇게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군, 제프."

인터넷 기사나 TV로만 접했던 유명인사의 얼굴을 실제로 보는 건 꽤 흥미로운 일이다.

"반가워요, 구단주님."

"Oh, 편하게 로만이라고 불러. 우리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잖아?"

"한 34년 정도니, 많이 나진 않네요, 로만. 우리 아버지 나이랑 비슷하시네요."

"미국인 아들이 생겼군. 편하게 아빠라고 불러도 돼."

로만은 엄청난 자산가라는 위치에 맞게 근엄하지 않았다. 오히려 퍽 유쾌하고 친근했다.

하긴.

첼시 선수들은 로만 구단주하고 개인적으로 통화를 자주 할 정도로, 선수진과 친근한 사이를 유지한다고 했다.

나 역시, 그를 만나기도 전에 여러 번 통화를 했을 정도니까.

근데 이게 좀 문제가 된다.

구단주가 선수들하고 친하게 뭐가 문제냐겠지만.

사실 경기를 치르다 보면, 감독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점도 생기기 마련이다.

한데, 그걸 바로 로만에게 직통 전화로 징징댄다는 거지.

이건 첼시의 오래된 문제점이기도 했다.

"이번 시즌, 라커룸에 방문하지 못한 게 정말 한이야. 사업으로 바쁘기도 했고, 축구에 대한 열정이 식기도 했거든."

"아쉬운 일이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내는 아니었다.

아스피의 말을 들어 보면, 로만은 라커룸에 자주 찾아온다고 한다. 경기를 지고 있으면 러시아어로 온갖 욕을 하고 나간 적도 있단다.

필마르크 감독이 이번 시즌 3관왕을 차지할 수 있었던 건, 로만이 영국에 단 한 번도 오지 않았으며 축구에 대한 열정이 식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사실 영국에서 사업 금지 조치를 당하고, 영국에 갈 일이 많이 없었지. 첼시의 성적도 차츰 좋지 않다 보니까. 흥미도 식었고 말이야."

로만과의 식사는 꽤 즐거웠다.

그는 친근하면서도 적당한 거리를 지킬 줄 알았고, 엄청난 자산가인 걸 감안해도 무척이나 세련되고 정중했다. 그와의 대회는 꽤 유쾌했다.

"아자르가 떠났고, 내가 별다른 투자를 하지 않았는데도 트로피를 세 개나 들고 왔지, 제프."

"동료들이 훌륭했을 뿐입니다."

"그 말도 맞아. 하지만 그 선수들이 작년엔 무관이었지. 바뀐 건 딱 두 개야. 필마르크 감독과 바로 제프."

로만은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자, 그래서. 혹시 바르셀로나나 레알 마드리드로 갈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어."

"음. 그 문제에 관해서는 제 에이전시하고 얘기를 나누시는 게 빠를 겁니다."

"하하하하! 역시, 미국인이란. 제프. 난 자네가 여기서 영웅이 되고, 레전드가 되는 걸 보고 싶어. 그러면 내가 자네의 동상을 경기장에 세운다고 해도, 반대할 사람이 없겠지."

"그거 멋진 이야기네요."

"축구가 재미없어졌었지. 하지만 제프, 너의 플레이를 보고 다시 흥미가 생겼어. 드록바와 아넬카가 우리 첼시를 이끌었을 때의 느낌. 램파드가 중거리 슛으로 골을 넣었을 때의 느낌. 그 모든 느낌이 다 느껴졌으니까."

진지한 목소리였다.

흠.

로만의 첼시 인수에 관해 얘기가 많긴 하다.

영국에서 사업을 위한 일종의 이미지 메이킹이 아니냐는 말부터 말이다.

사업적인 면에서는 확실히 그런 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적어도, 첼시라는 구단과 축구에 대한 열정은 뚜렷해 보였다.

하긴 그게 아니라면, 축구팀에 그만한 투자를 하겠나.

"내 번호 알지? 심심할 때 전화해. 어디 가고 싶은데 항공편이 없으면 전화하라고. 내 전용기를 바로 보내 줄 테니까."

뭐.

든든한 뒷배가 생긴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고 말이야.

***

러시아에 온 이유는 로만의 초대가 있기도 했지만, 사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보러온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크레스토프스키 경기장.

바르셀로나와 유벤투스의 결승전이 열리는 장소다.

"제프!"

"제-프!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경기장에 들어가려니, 바르셀로나와 유벤투스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날 알아보고 몰려들었다.

선글라스를 썼는데도 말이지.

"오, 제프. 당신이 세비야전에서 보여 준 4골은 하나같이 멋졌죠."

"다음 시즌, 바르셀로나에서 뛰는 건 어때요?"

"메시, LEE, 수아레스 쓰리톱! MLS라인. 마침 당신의 고향인 미국 축구리그의 약자와 똑같네요!"

"이건 운명 같아요."

MLS라인이라.

참 팬들은 이름을 잘 붙이는 것 같다.

이적루머 하나만으로 말이지. 그저 웃어주면서 넘겼다.

몰려드는 팬들에게 친절하게 사인을 해 주자.

금세 기자들의 눈에도 띄게 마련이다.

"제퍼슨 리. 바르셀로나와 유벤투스의 결승전, 어디의 우승을 예상하십니까?"

나에게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다.

내 기억에 유난히 인상적으로 남긴 경기였으니까.

다른 챔스 결승은 기억 안 나도, 이번 경기만큼은 확실하게 기억난다.

메시의 바르셀로나, 호날두의 유벤투스.

여러 과도한 관심을 끌어 낸 이 경기는.

바르셀로나가 이긴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바르셀로나가 우승할 겁니다."

내 발언에 기자들의 일부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또는 흥미진진한 얼굴이었다.

"바르셀로나의 우승을 예상하시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아니면, 현재 바르셀로나와의 이적 링크가 뜨는데······ 혹시 미래에 이적할 팀에 대한 애정입니까?"

기자들은 먹이를 찾은 하이에나들처럼 달려들었다.

"바르셀로나는 메시가 있잖아요."

나는 최대한 별거 아닌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편하게 말했다.

"유벤투스에는 호날두가 있는데요?"

그 말에.

난 최대한 웃는 표정을 지어줬다.

누가 보면, 비웃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

[제퍼슨 리, '바르셀로나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확신한다.']

[바르셀로나에 대한 애정을 보인 제퍼슨 리, 다음 행선지는 바르셀로나?]

[호날두 대신 메시를 꼽은 제퍼슨 리.]

[호날두는 메시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 발언, 제퍼슨 리의 예상은 과연?]

***

미리 말하지만, 난 메시를 존중하고 존경하지만, 그의 '팬'은 아니다. 그렇다고 바르셀로나의 팬인 꾸레도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첼시가 아니라 바르셀로나로 갔겠지.

다만 그 반대편에 있는 선수를 좋아하지 않을 뿐이다.

뭐, 한때는 좋아했다.

스타성 있고, 실력 좋고, 멋지고 말이지.

내가 보여 준 플레이에는, 호날두에게 영향을 받은 면모도 분명 있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난 그를 축구 외적인 면에서 좋아하지 못한다.

그때 그 사건 있지 않나.

내가 중학생이었을 거다.

한참 축구에 빠져 축구를 시작하던 시기.

어린 시절 K리그 선수의 팬서비스에 감동해서, 우상들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던 시기.

지방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 상암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경기 90분 내내 그의 이름을 부르는 어린이 팬들의 바람을 무시한 채 벤치에 앉아 있는 그를 보고, 온갖 정이 다 떨어졌다.

뭐, 그런 이유다.

실력?

인정한다.

메시와 더불어 10년간 발롱도르를 양분한 선수가 아닌가.

내가 싫어하는 건 그의 외적인 부분일 뿐이니까.

어찌 됐든.

경기는 내 기억과 똑같이 흘러갔다.

"Yeeeeeeeeaaaaaa-!"

메시의 왼발 슈팅이 유벤투스의 골문을 흔들었고,

호날두의 프리킥이 하늘로 치솟았으며.

메시의 쐐기골이 터지는 순간, 호날두는 제 동료들에게 뭐라 심각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포트투갈어를 몰라서 그렇지, 아마 심한 욕이 아니었을까.

메시의 해트트릭과 훗날 새로운 시대를 풍미할 축구 선수 중 한 명인 안수 파티의 벼락같은 기습 골로 4대 0, 바르셀로나가 대승을 거두며 우승컵을 들었다.

바르셀로나가 세레모니를 펼치는 가운데.

필드 가운데 분한 표정을 짓는 호날두를 봤다.

최전성기에서 내려오고 있는 그의 신체가, 조금은 아쉽다.

그가 점점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런 의미가 아니다.

'좀 더 멀쩡할 때, 맞대결을 하고 싶은데 말이야.'

그래야 그때의 배신감이 조금 해소될 것 같단 말이지.

어쩌면 다음 챔피언스리그에서 만날 지도 모른다.

유벤투스가 4강인가, 8강인가까지 올라갔으니까.

경기가 끝나고.

수많은 기사들이 연신 올라왔다.

그중에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바르셀로나 단장, '빅이어를 들어 올리면서 우리는 세계 최고의 클럽임을 다시 증명했다. 제퍼슨 리가 뛰기에 알맞은 클럽이 아닌가? 그가 경기 전 보여 준 바르셀로나에 대한 애정과 메시에 대한 존중을, 우리는 기대하고 있다.']

흠.

여기도 김칫국 거하게 드시네.

< 114. 제퍼슨 신드롬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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