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필드의 괴물 러닝백-113화 (113/258)

< 113. 돈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

축구에서 중요한 게 뭐가 있을까.

압도적인 실력? 상대의 허를 찌르는 전술? 선수들의 컨디션과 체력?

모두 중요하다.

그런데 실력과 전술, 체력은 어느 정도 객관적인 지표다.

강팀과 약팀이 확연히 갈릴 수 있는 부분이란 거지.

하면 강팀은 늘 약팀을 이겨야 한다.

약팀은 늘 강팀에 져야 한다.

그러나 스포츠는 그렇지 않다.

모든 지표에서 불리한 약팀이 강팀을 잡는 건 드라마틱하지만, 드라마이기 때문에 발생할 확률은 아주 낮다.

이변은 늘 있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이변이 발생하는 원인은 뭘까?

바로 '동기 부여'다.

선수들의 멘탈이지.

가령 이번 경기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우리는 열심히 뛸 이유도 없다.

사람들은 많은 예측을 했다.

"세비야는 홈에서 경기를 펼치지. 리그 홈경기에서 3패만 내준 굉장한 팀이야. 홈 관중 앞에서, 우승컵을 빼앗기는 모습을 보여 주겠어?"

그래서 세비야의 동기 부여가 높아 우승을 차지할 것이란 예측이 많았다.

뭐, 맞는 말이다.

한데 동기부여는 그쪽만 있는 게 아니지.

"우왁!"

뻐억!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볼을 향해, 지루가 맹렬히 달려들었다.

공은 비록 따내지 못했지만 세비야 수비들은 부담스런 얼굴로 지루와 공중볼 경합을 벌여야만 했다.

"갑자기 20대로 돌아갔나? 왜 저래?"

캉테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심지어 오버래핑으로 올라온 아스피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할게."

"네?"

"지루가 첼시 입단 후에 가장 열심히 뛰는 경기인 것 같아."

아스피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지루는 정말 맹렬히,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경기인 것처럼 뛰었다.

"다 네 덕택이야."

"팀 내 건강한 경쟁의식은 퀄리티를 높여 주는 법이죠."

지루는 어떻게든 한 골을 넣어야 한다.

그래야 득점왕이니까.

그 사실이 지루를 저렇게 열심히 뛰게 만드는 동기 부여가 됐다.

"제-프!"

탁!

볼이 다시 한번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지루의 맹렬한 투쟁심 때문에, 우리는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나 역시 좀 내려와서 캉테와 패스를 주고받은 뒤, 오른쪽으로 천천히 빠져나갔고, 윌리안이 안쪽으로 꺾어 들어왔다.

스위칭 플레이는 상대 수비를 공략하는 데 무척 효과적이다.

툭!

오른쪽으로 빠지자 터치라인으로 길게 뿌려 주는 캉테의 패스.

녀석.

패스까지 잘한단 말이야.

슬쩍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핀다.

수비수 하나가 달라붙고, 중앙에 수비들이 몰려 있다. 지루의 맹렬한 움직임에 수비의 어그로가 끌린 것이다.

음, 이대로 돌파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툭!

"흐헉!"

"개자식!"

이젠 스페인어 욕설은 다 알아들을 것 같다.

가볍게 스텝오버로 풀백 하나를 벗기고 들어가자.

지루가 빠른 몸놀림으로 쇄도하는 게 보인다.

음.

괜찮은 위치다.

좋은 크로스라면, 넣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비의 압박이 강하다. 지루가 저 압박을 뚫고 슈팅할 수 있을까.

나 역시 슈팅 각을 만들어 내기엔 다소 애매한 상황.

지루는 포스트 플레이에 능하다. 그걸 이용할 생각으로, 지루에게 낮은 크로스를 올렸다.

뻐엉!

그가 등진 채 받고, 나에게 패스를 내준 뒤에, 곧바로 슈팅으로 연결할 생각이다.

근데.

왜 등을 지지 않지?

"막아-!"

"비켜! 이 개자식들아!"

지루가 프랑스어로 터프하게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공보다 더 앞서서 말이지.

등 져서 패스도 안 해?

공이 그냥 빠지겠는 걸?

한데, 그 순간에 나도 예상치 못한 지루의 플레이가 펼쳐졌다.

투욱!

그대로 오른발 뒤꿈치를 크게 뒤로 들어 올리는 모션.

와, 저기서 그 '킥'을 한다고?

뻐엉!

······스콜피온 킥이 또 나온다고?

필드가 침묵에 잠겼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지루의 스콜피온 킥 작렬.

그리고 팀의 다섯 번째 골.

"내가 득점왕이다! 제프!"

음.

네, 님이 득점왕 하세요.

[유로파리그 MVP 제퍼슨 리(첼시)]

전 MVP로만 만족하겠습니다.

***

[첼시, 세비야를 5대 0으로 꺾고 유로파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리다!]

[첼시, 통산 유로파리그 3회 우승!]

[제퍼슨 리, 4골 1어시스트 폭발! 유로파리그 대회 MVP 수상!]

[세비야 감독, '신은 때론 불공평하다. 압도적인 재능에 축복받은 피지컬을 한 선수에게 내려줬다. 불신자가 될 것 같은 기분이다.']

[필마르크 감독 '우리는 완벽했다. 모든 선수가 맹렬하게 뛰었고, 값진 우승을 얻어 냈다.']

[유로파리그 결승전, 경기를 관람하던 레알 마드리드 스카우터 포착. 제퍼슨 리 영입 노리나?]

[같은 시각, 파리 생제르망 수석 스카우터 목격! 그의 노트엔 'LEE'가 적혀 있다!]

[여름 이적시장을 앞둔 지금, 제퍼슨 리. 몸값은 최소 1억 5천만 유로!(약 1,970억 원)]

[첼시 로만 구단주, '절대 판매 불가! 제퍼슨 리는 다음 시즌도 첼시 선수!']

[제퍼슨 리, 이적 루머에 대한 질문에 '다시 말하지만, 난 세계 최고의 클럽에서 뛸 것이다.' 애매모호한 답변.]

[바르셀로나 단장, '세계 최고의 클럽!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우리가 증명하고, 그를 누 캄프에 데리고 오겠다!']

***

런던은 그야말로 파랬다.

풀럼 시내는 온통 파란 물결이었다.

-Blue is the colour, football is the game.

색깔은 파란색, 풋볼은 게임.

We're all together and winning is our aim.

우리는 하나이며 승리가 목표이지.

So cheer us on through the sun and rain.

맑으나 비가 오나 우리와 함께 응원하자.

Cos Chelsea, Chelsea is our name.

우리 이름은 첼시, 첼시니까.

첼시의 대표적인 응원가 블루 이스 더 컬러가 시내를 가득 메웠다.

장관이었다.

하늘에 파란 깃발이 나부끼고, 파란 꽃잎이 마구잡이로 쏟아진다. 파란 풍선이 하늘 높이 채워 햇빛을 가릴 정도다.

유로파리그 우승 이후 벌이는 카퍼레이드.

FA컵, 리그컵, 그리고 유로파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우리는 카퍼레이드 세레모니를 펼쳤다.

"첼시! 첼시! 첼시! 첼시!"

소름 돋는 광경이다.

코너를 돌 때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가 우리를 반긴다.

"굉장해!"

"미쳤어!"

"런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튀어나온 것 같군!"

"심지어 다 첼시 팬이야!"

선수들의 얼굴도 잔뜩 상기됐다.

이런 경험이 몇 번 있는 아스피도 즐거운 얼굴로 그저 감탄만 토해 냈다.

솔직히, 이건 미쳤다.

진짜로.

엄청난 인파가 한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환호하는 광경은.

도시 전체가 마치 파란 물결로 뒤덮인 것 같은 이 광경은 장엄하기 짝이 없었다.

나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이게 바로 블루스지!"

선수들도 모두 흥분했다. 선수뿐만 아니다. 같이 차에 올라탄 코치진도 잔뜩 상기된 얼굴로 괴성을 지르곤 했다.

"제프! 제프! 제프! 제프! 제프!"

그리고 별안간 내 이름을 연호하는 목소리.

쿵쿵, 짝!

"LEE Will, LEE Will Kill you!"

두 번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고.

모두 양팔을 하늘로 향해 부르는 노래.

쿵쿵, 짝!

"LEE Will, LEE Will Rock you!"

솔직히 말해.

첼시 팬들이 모두 좋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주마가 에버튼으로 떠난 것도, 소수지만 홈팬이 그에게 인종차별 발언을 던졌기 때문이다. 나도 거기서 매우 큰 실망을 느꼈다.

그런데 적어도 지금,

그때의 감정이 씻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고마웠다.

수만 명이 응집한 도로에서 내 이름을 연호하며 응원가를 불러 주는 광경이.

"이래서 우리는 축구를 하는 거야, 제프."

아스피가 웃으며 어깨동무를 걸어 왔다.

"자. 트로피, 같이 들어 올리자고."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트로피는 오로지 주장이 들어 올려야 해요."

"뭐?"

"보싱와의 전철을 생각하세요."

"하!"

아스피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밝은 얼굴로 차 위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더니,

있는 힘껏 유로파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스피! 아스피! 아스피! 아스피!"

다시 한번 파란 꽃가루가 하늘에 흩뿌려지고,

파란 깃발이 마구 나부낀다. 여기저기서 파란 풍선이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아스피가 내려와 소리쳤다.

"자, 제프, 너도 올라가서 들어 올려!"

"아니, 이건 캡틴만······."

"우리 모두 캡틴인 법이야. 가라고!"

아스피는 평소 모범생답지 않게 잔뜩 흥분한 얼굴로 등을 떠밀었다.

음음.

이거 맨 위에 올라오니 정말 잘 보인다.

넓은 도로 양옆을 가득 메우는 파란 물결.

저 모두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릴 준비를 하고, 기대감 어린 시선으로 날 쳐다본다.

좋아. 하나, 둘 셋!

번쩍!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제-프! 제-프! 제-프! 제-프!"

이후로, 나뿐만 아니라 우리 선수 전부가 올라가 트로피를 들었다. 심지어 코치진까지. 그때마다 팬들은 일제히 뜨거운 함성을 질러줬다.

그래.

이래서 축구를 하는 거지.

***

"우승 축하드립니다, 제프."

"고마워요."

"축하드릴 게 너무 많군요. 상을 워낙 독차지하셔서 말이죠. 일단 모두 축하드립니다!"

오랜만에 만난 제크 팀장은 여전히 세련된 모습이었다.

"오늘 만남을 주선한 건, 아시다시피 계약 문제 때문입니다."

이적 또는 재계약의 갈림길에 섰다.

그리고 내 결정은 하나다.

"적어도 이번시즌 이적은 없습니다. 다음 시즌까지, 챔피언스리그까진 첼시 소속이 제 결정입니다."

카퍼레이드 이후 팬들의 환호에 애틋함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건 로봇이 아닐까.

뭐 그걸 떠나서.

이제 호흡이 정말 잘 맞는 첼시의 동료들과 챔피언스리그를 향한 여정을 같이하고픈 마음이 강했다.

한데 그러면 문제가 있다.

"지금 재계약을 진행하면, 좀 아쉬울 수 있습니다."

3년 계약을 맺었으니, 이제 계약기간은 2년 남았다.

여기서 재계약을 하면 적어도 2년은 더 연장될 텐데.

그건 이적시장에서의 내 몸값이 다소 저하되는 걸 의미한다. 타팀들 입장에서는 내가 첼시에게 충성을 바치는 모양새처럼 그려지니까.

실제로 재계약을 해서 계약기간이 4년으로 늘어나면 당장 이적하기에도 뭐 할 정도로 긴 시간이 아닌가.

그렇다고 재계약 없이 가려니,

현재 받는 주급이······

"활약에 비해 너무 저조한 주급입니다. 죄송합니다. 적어도 그때 두 배는 더 받아 냈어야 했는데."

"아니요. 이 정도도 많이 받는 거였죠."

지금 내가 받는 주급 9만 유로(1억 1,800만)는 첼시 입단할 때 엄청 높단 얘기가 나왔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뭐 내가 주급에 일희일비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사실 돈 나가는 데가 꽤 많다.

얼마 전 율리아겐하고 디 파코의 급여를 올려 준 것도 있고.

다음 시즌을 대비해서 트레이닝 팀을 대폭 개편하고, 더 크게 만들 생각이었으니까.

뿐만 아니라 개인 분석팀도 꾸릴까 생각 중이었다.

구단에서 준비해 주는 분석 자료도 훌륭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보다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싶은 부분도 크다.

이건 이학현일 때의 버릇이다.

그땐 늘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고 연구하며 따라하려고 애썼으니까.

어찌 됐든, 현재 내 가치에 비해 주급이 낮다.

이건 확실하다.

"하지만, 사실 주급이 당장 다음 달부터 오릅니다."

"네? 재계약을 안했는데요?"

"하하하. 저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몇 가지 조항을 더 넣었었죠."

뭐야, 추가 조항?

[프리미어리그 득점왕 수상 시 주급 10% 상승]

"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제크 팀장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그 뒤로 좌르륵 펼쳐지는 수많은 추가 조항들.

그러니까 내가 시상식에서 받은 8개의 개인 트로피가 있지 않나?

그 모든 것들이 주급 인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심지어 FA컵, 리그컵, 유로파리그 대회 우승도 주급과 보너스 인상이 있었다.

전부 다 계산하면.

"거의 두 배인데요?"

"정확히는 이전 주급의 2.6배입니다."

"헉!"

맙소사.

재계약을 하지 않는데도, 주급이 두 배로 뛰어?

23만 유로.

한화로 주급 3억원이다.

허.

이거 사기꾼 아니야? 계약을 어떻게 했길래 이게 돼?

"저도 이렇게 모든 수상을 싹쓸이할 줄은 몰랐습니다. 첼시도 설마 이렇게 될 거라고 기대하지 않고 이 조항들에 동의했겠죠. 이건 다 바로 제프, 당신 덕입니다."

미국인답지 않게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제크 팀장.

난 마치 이 세상 최고의 사기꾼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제크 팀장이 민망하게 웃었다.

"음, 많이 흡족하신가 보네요?"

"네? 하, 하하하! 뭐, 돈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그런데 입꼬리가 너무 많이 올라가시는 거 같은데요."

돈이 뭐가 중요하겠나.

음.

사실 좀 중요하지.

< 113. 돈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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