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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의 괴물 러닝백-112화 (112/258)

< 112. 우승 청부사 (5) >

팬들이 어떤 경기에 환호를 보낼까?

간단하다.

눈이 즐거운 화려한 플레이다.

모든 프로선수는 개인기를 연마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외계인' 호나우지뉴의 플레이를 보고 따라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문제는 그런 플레이를 실제로 경기장에서 보여 줄 수 있느냐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Yeaaaaaaaaaaaa!"

"환상적이야! 우와!"

"저게 미식축구를 했던 선수라고? 그런 녀석이 발로 하는 개인기를 도대체 언제 배운 거야?"

이렇게 엄청난 환호가 쏟아지기 마련이다.

물론 일부러 화려한 플레이를 한 건 아니다.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려고 최선의 방안을 찾은 것이니까.

스트라이커는 그래야 한다.

어떤 상황이든, 어떤 수비가 앞을 막든.

어떻게든 뚫어낼 방법을 찾아야한다.

세비야의 두 센터백, 디에고 카를로스와 다니엘 카히수.

카를로스는 브라질 선수로, 발기술이 아주 좋은 선수다. 테크닉이 좋고 빌드업도 가능하다. 파트너 카히수는 포르투갈 선수로 세비야에서 유로파 우승을 두 번이나 차지한 베테랑이다.

이 두 명의 조합은 꽤 까다롭다.

테크닉과 파이터의 적절한 조합이니까.

그러나 약점은 있기 마련이다.

카를로스는 피지컬에 비해 몸싸움이 약하고 카히수는 발이 너무 느리다.

'가장 상대하기 쉬운 유형이잖아?'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세비야는 짧은 패스로 후방에서부터 점유율을 차근차근 늘리는 축구를 좋아한다.

카를로스부터 패스가 시작되어야 한다.

"크윽!"

"제기랄!"

오늘 나는 평소와 다른 플레이를 시도했다.

강력한 전방압박, 미칠 듯이 뛰어다니는 활동량.

나에게는 부족했던 것들이다.

오늘이 결승전이고, 이게 이번 시즌 마지막 경기라는 점.

어차피 다음 경기가 없는데, 체력을 뭣 하러 보전하겠는가.

"이런!"

공을 잡은 카를로스에게 내가 황소처럼 돌진하자, 카를로스는 황급하게 골키퍼에게 백패스를 돌렸다.

"우와아아아아!"

속도를 죽이지 않고 백패스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우우우우우우우우!"

그럴수록 야유가 심해진다.

그런데 이걸 모른다.

상대팀에게 듣는 야유가 간혹 응원처럼 들리는 선수가 있다는 걸.

"어어어?"

"바츨리크! 공 쳐 내! 쳐 내라고!"

"미친! 너무 빠르잖아!"

너무 황급했던 백패스.

속도와 방향 둘 다 이상하다.

그걸 감안해서도 말도 안 되는 내 스피드.

어허? 이거 예상외인데?

어쩌면 달려 나오는 바츨리프보다 먼저 공을 잡을지도.

뻐어엉!

"휴우우우!"

"와, 쟤 진짜 미쳤네. 어떻게 사람이 패스를 따라잡을 뻔할 수가 있냐."

골키퍼 바츨라프가 거의 넘어지다시피 해서 공을 걷어 내는 것에 성공했다.

쩝, 아쉽다.

조금만 더 빨랐으면 슈팅에 성공했을 수도.

하나, 급하게 걷어 낸 공은 우리에게 주도권을 내준 것이나 다름 없다.

우리 수비진 사이로 뚝 떨어지는 공.

황급하게 걷어낸 볼이라 정확성조차 형편없었다.

"GO! Blues-----!"

그리고 정확한 킥을 보여줄 수 있는 아스필리쿠에타가 우리 팀에 있다는 건.

뻐엉!

후방에서부터 시작되는 단 한 번에 공이 최전방으로 날아올 수 있음을 의미했다.

약간의 전진 후에 이어지는 멋진 얼리 크로스.

그새 복귀한 수비수가 양 어깨를 들이 밀치며 달라붙는다.

"비켜! 이 자식들아!"

먼저 달려드는 상대에겐 자비가 없다.

뻐억!

"컥!"

"엄살 부리지마, 이 자식아."

두 눈을 크게 뜨며 억울한 표정을 짓는 카를로스.

누굴 상대로 할리우드를 하려고 해?

할리우드가 있는 나라에서 온 양반인데 말이야.

뭐, 사실 반칙은 아니어도 적어도 충격을 입은 건 확실했다. 그냥 어깨로 밀쳤는데 종이인형처럼 날아갈 줄이야.

카를로스가 먼저 어깨차징을 걸어 온 게 심판 눈에 띄지 않았다면, 반칙이 선언됐을지도 모를 정도로 날아가 버렸다.

"마킹해!"

정확히 내 머리로 떨어지는 아름다운 얼리 크로스.

아스필리쿠에타의 얼리 크로스는 자로 잰 듯이 정확했다.

뻐엉!

이마에 맞아 그대로 골문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헤더 슈팅.

그야말로 기습적이어서 골키퍼는 손조차 쓰지 못했다.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역시 원정경기는 달라.

골을 넣어도 야유가 더 크잖아?

그런데 고작 야유 정도로 무너질 선수였다면 애당초 여기까지 오지 못했다.

나는 두 번째 골을 넣고, 검지를 인중에 올리며 천천히 뛰었다.

"EPL의 왕이 조용히 하시란다! 이 자식들아!"

"으하하하하하!"

뭐, 내 팬들에게만 사랑받으면 되지.

세비야 팬들의 감정까지 생각하기엔, 너무 바쁘다.

한 골은 더 넣어야 해트트릭이려나.

***

제퍼슨의 두 번째 골이 터지고 강렬한 위기감을 느낀 로페테기였다.

두 골을 따라잡기란 힘들다.

세비야는 애당초 폭발적인 공격력이 장점인 팀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홈에서만큼은 감독인 자신조차 의아할 정도로 좋은 플레이가 나온다.

한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빌드업 자체가 실패하고 있다.'

후방에서부터 이어지는 특유의 빌드업.

완전히 막혔다.

"저 녀석을 누가 게으르다고 한 거야? 어! 게으른 녀석이 저렇게 강아지마냥 빨빨거리면서 뛰어다니냐고!"

상당한 활동량이다.

세계 톱클래스급 정도의 활동량은 아니지만, 스트라이커가 저 정도 움직임을 보인다는 건, 거의 펄스 나인이나 디펜스 포워드에 특화된 선수다.

제퍼슨이 오늘 그런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쟤 유일한 약점이 지구력이라면서! 이게 말이 돼? 뭐? 전반만 뛰고 나갈 것도 아니잖아!"

로페테기는 점차 올라오는 열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이건 예상외였다.

"190에 90kg가 넘는 덤프트럭이 죽일 듯이 달려오는데 카를로스가 패스조차 못해요."

"두 번째 골도 황급하게 백패스하다 나온 실점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수비진부터 시작하는 빌드업은 힘듭니다."

코치진들 역시 예상하지 못한 상황인건 매한가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베테랑이다. 현재 상황을 빠르게 분석해서 로페테기에게 조언을 던졌다.

"하지만 오히려 무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가장 위험한 제퍼슨의 체력을 빼 준다는 데에 의의를 두면 됩니다. 후반전이면 방전될 확률이 높으니까요."

"침착함을 조금 더 요구해야 합니다."

코치진의 조언에 귀 기울여야 하는 건 감독의 덕목 중 하나다.

로페테기는 침음성을 흘리며 필드 위를 바라봤다.

"다른 느낌이야."

"네?"

"선수들의 표정을 봐. 마치 저번에 메시를 상대할 때의 표정 같지 않아?"

그랬다.

제퍼슨이 돌파할 때마다 딱딱하게 굳는 수비진의 얼굴. 어찌할 줄 모르는 당황스러움. 리그에서 메시를 만났을 때 나온 장면과 유사했다.

"그런데 다르단 말이지."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메시는 수비들을 자동문으로 만드는 느낌이야."

수비들이 알아서 스르르 벗겨지는 느낌이다.

그 정도로 메시의 드리블에 수비들은 쉽게 무너진다.

그런 메시의 드리블을 막는 건 의외로 간단하다.

자동문을 여러 겹으로, 그리고 복잡하게 얽혀 놓는다. 설령 자동으로 열린다고 한들, 한 시즌 70골을 넣던 젊은 시절의 메시가 아니라 속도와 파워가 모두 떨어진 상황. 그런 식으로 메시의 드리블을 둔화시키고 죽이는 게, 라 리가의 팀들이 채택한 방법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메시를 전부 다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효과는 있다.

로페테기가 선택한 수비도 그런 방식이다.

저 제퍼슨을 막는 데, 리오넬 메시를 막는 것처럼 준비했다.

한데, 뚫렸다.

자동문처럼 스르르르 열린다?

아니다.

"문을 그냥 부숴 버리는 느낌이야."

마치, 문이란 애당초 그런것이라는 것처럼.

열쇠로 여는 것도 아니고, 자동문처럼 열리는 것도 아니다.

그냥 부숴버리고 있다.

[제퍼슨 리! 풀리시치와 원투패스! 공을 가볍게 트래핑한 뒤 페르난두와 카를로스 사이를 빠져나갑니다!]

[대단합니다! 공을 몰고 들어가 저 강력한 두 명의 수비수 사이를 그저 힘으로 꿰뚫어 버리다니요! 정말 강하네요. 파워가 진짜 말도 안 됩니다!]

저게 가능하단 말인가.

"우우우우우우우!

"쓰레기! 죽여 버려! 개자식!"

발광하는 세비야의 홈팬들.

발재간은 역시 화려하다. 문제는 그런 발재간보다 더 눈에 띄는 건 피지컬이다.

바로 힘과 속도. 페르난두와 카를로스가 아주 대단한 편은 아니지만, 저렇게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질 선수들은 아니지 않은가!

투욱!

"크윽!"

달려드는 스탠딩 태클 따위야.

팔로 가슴을 지그시 밀어 버리면서 아예 수비의 접근을 막아 버리고.

"죽여 버려!"

반칙을 각오하고 마치 미식축구처럼 몸을 날리는 수비수를.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아?"

제퍼슨은 70도 방향으로 급격하게 꺾어 버리는 러닝백 특유의 방향전환으로 피했으며.

"넌 절대 못 넣을걸!"

적당한 위치까지 각도를 좁히며 튀어나오는 바츨라프의 부릅뜬 두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투욱!

"Yeaaaaaaaaaaaaaaaa!"

"Wuaaaaaaaaa!"

화려한 칩슛까지.

[제퍼슨! 전반 33분 만에 해트트릭을 달성합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거기까지 본 순간.

로페테기는 좌절과 분노보단 소름이 먼저 돋았다. 온몸이 뜨거워졌다.

이런 감정은 언제 느꼈던가.

"호나우두?"

메시와 호날두 이전의 유일신이라고 불리던 존재.

순간적으로 떠올려진 그 이름에 로페테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드리블할 길이 없다.

"그러면 몸으로 부수고 들어가지."

공간이 협소하다.

"폭발적인 스피드와 현란한 발재간으로 공간을 지배하고."

수비가 많으면.

"부서질 문이 더 있는 것에 불과하지."

이런 플레이라니.

짧고 화려하게 불탔던 호나우두의 전성기가 저절로 떠오르지 않는가.

로페테기는 젊은 시절, 호나우두의 플레이를 똑똑히 기억했다.

그 광경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한 착각에 몸이 절로 떨렸다.

3대 0으로 지고 있단 사실에 대한 분노가 아니다.

그저 격렬한 환희와 제퍼슨의 환상적인 플레이에 대한, 축구인으로서의 경외감이었다.

"호나두우는 짧았지."

그의 전성기는 짧았다.

"신의 재능을 버티지 못한 나약한 인간의 육체라던가."

그런 말이 있다.

호나우두의 폼이 일찍 무너지면서 나온 말이다.

"저 녀석 부상일지가 어떻게 되지?"

로페테기는 불현듯 코치에게 물었다.

지금 경기에는 전혀 중요하지 않는 내용.

하나, 코치는 별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급하게 자료를 뒤적였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로페테기의 눈동자를 봤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의 우상을 만난 것 같은 그 눈빛.

"어······, 몇 번 자잘한 부상이 있었지만 대부분 알려진 내용에 의하면 가벼운 피로누적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기껏해야 1주짜리고요. 길어 봤자 2주를 넘어 간 부상이 없어요."

"하!"

그 보고를 듣고, 로페테기는 그저 허탈한 웃음을 흘렀다.

하프타임 때 선수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나에 대한 고민은 저 멀리 날아갔다.

"신의 재능이 신의 육체에 지녔다면, 저 녀석이 정말 그렇다면······."

아이러니하게도 로페테기는 안도감을 느꼈다.

"저 녀석이 프리미어리거인 게 다행이군."

만일 제퍼슨이 라 리가에 있었다면,

세비야는 메시와 제퍼슨이라는 두 명의 괴물들을 상대했어야 하지 않았겠나.

로페테기는 진심으로 그가 EPL에 있는 걸 신께 고마워했다.

그리고 결승전 후반전을 앞두고, 강렬한 위기감에 시달렸다.

그에 대한 경외는 잠시.

어쨌든 경기에 이겨서 우승해야 하지 않나.

이대로라면 질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에 시달릴 때.

의외로 이기고 있는 첼시에서도 위기감에 시달리는 선수가 있었다.

***

지루는 초조했다.

그리고 위기감을 느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전반전에 무려 세 골을 넣었다. 이 분위기를 후반전까지 이어간다면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다.

묘한 열기가 드레싱 룸부터 후반전 경기를 치르기 위해 나가는 터널까지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나, 지루는 초조한 기색을 애써 숨겼다.

"제프."

"네?"

"안 피곤해?"

"아직 쌩쌩하죠."

"체력 관리해야지, 제프. 그러다 부상이라도 입으면?"

"다음 경기도 없는데요. 뭘. 모든 체력을 불살라야죠. 감독님도 웬만해선 빼 주지 않겠다고 했어요."

"음!"

지루가 느끼는 위기감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유로파 득점왕이 확실했다.

2등 제퍼슨과 무려 4골 차이였으니까.

불과 60분 전만해도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고작 한 골차이다.

하나, 그 초조함을 애써 숨겼다. 동료 앞에서 어찌 그런 모습을 보여 주겠나.

하지만 지루는 속으로 제발 제퍼슨이 이쯤에서 멈춰 줬으면 했다.

그러나······.

세비야 수비들은 제퍼슨에게 겁을 먹었다.

[제퍼슨은 오늘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언터처블, 그 자체입니다!]

과한 발언이 아니었다.

정말 오늘 제퍼슨은 모든 면에서 퍼펙트했다. 건드릴 수도 없었다. 약점으로 지적됐던 전방압박과 활동량은 결코 비난할 수 없었다.

후반 66분 강력한 슈팅이 골문을 다시 한 번 출렁이면서 세비야를 말 그대로 끝장내 버렸다.

[제퍼슨 리! 4번째 골을 넣으며, 세비야의 우승에 대한 열망에 찬물을 씌워 버립니다!]

[대단합니다! 제퍼슨은 오늘 4골을 터뜨리며 혼자서 세비야를 무너뜨립니다! 대단히 인상 깊다 못해 존경스러울 정도네요!]

[여기가 어디 홈구장이죠? 오로지 첼시와 제퍼슨만을 외치는 팬들의 목소리만 울리네요!]

세비야 선수들은 허망한 표정으로 잔디를 차거나 허공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지루도, 마찬가지였다.

"내 득점왕······."

지루는 웃으며 세레모니를 펼치는 제퍼슨에게 끝내 하소연했다.

"대체 언제까지 골을 넣을 거야?"

제퍼슨이 짙게 웃었다.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어."

< 112. 우승 청부사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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